10강 : 개인적 정체성(1부): 공간, 시간 및 영혼 이론에 걸친 정체성 - 죽음 : 케이건 교수 예일대학
10강의 주안점은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해답입니다. 개인이 미래에도 여전히 동일한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현재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에 대한 첫번째 해답으로 주어지는 것은 "영혼 이론"입니다. 이는 곧 같은 사람은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에 따르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다루어 지고, 이와는 별개로 영혼의 존재 자체에 대한 논의가 이어집니다.
셜리 케이건 교수= 지난 시간을 끝으로 저는 여기 어디에도 영혼은 없다는 가정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논쟁에 관해 물리학자의 관점으로부터 토의할 것 입니다.
기본적으로 멋진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어떤 특별한 능력을 할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가 앞서 말했던, P-작용을 할 수 있는 육체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육체는 어떤 방식으로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영혼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저의 이유들을 주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영혼을 믿는 다양한 논의들은 앞서 했던 실험들에 비춰보면 그리 호소력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나머지 전체적인 것에 두어야 할 좋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저는 따로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저는 어떻게 우리가 영혼을 믿는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보고 고려하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했듯이, 대부분, 저는 영혼이 없는 것을 가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 중 대부분은 여전히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어떤 큰 조건 또는 가정이 드는 형태를 따라 많은 논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영혼이 없다면, 여기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제가 크게 물리학자의 관점으로부터 말할지라도, 만일 당신이 물리학적 사실에 대해서 증명할 수 없을 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사람이 단지 기본적으로 육체일 뿐이라는 것에서 죽음에 대해 탐구할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학기가 시작할 때 제가 말한 것을 회상합니다. 그 질문에 관해서 생각합니다. 내가 나의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그것에 우리는 두 가지 명백한 사실을 얻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기본적인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부분은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걱정한 질문의 이유이죠, 내가 단지 육체일 뿐인가? 몇 주 동안 걱정한 질문의 이유이죠, 내가 단지 육체일 뿐인가? 나는 육체이고 또한 불멸의 영혼이기도 할까? 또는 아마도, 직접적으로 단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 질문을 본다면, 우리는 지금 두 번째 기초적인 질문으로 갑니다.
계속 존재한다는 일이 있을까요? 지금, 물론, 우리는 대부분 특히 그것을 질문할 것입니다. 만약 육체의 죽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사람이 육체의 죽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할까요? 당신은 아니라고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물리학자라면 말이죠, 그러나 사실, 그것은 아니라는 대답조차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질문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 – 내 육체의 죽음에 살아남기 위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가 아닌가?
우리는 첫째로 가장 일반적인 질문에 대해 명백해져야 합니다. 나에게 생의 기간 동안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더 친숙하고 평범한 예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오늘, 목요일 날 저는 당신에게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여기 있는 누구든지 의심의 여지없이 말이죠, 다음주에도 다음주 목요일에도 당신에게 강의를 합니다. 살아남는 것의 질문은 매우 단순한 예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금 당신 앞에 서서 강의를 하고 있는 사람이 다음 주 화요일에 당신 앞에서 강의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 그리고 그 사람이 주말에도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분명 주말에도 살아남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주말에 살아남는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야기해야 합니다, 보세요, 우리는 이미 질문의 답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수요일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은, 아마 누군가 거기 있는다는 것이고, 어떤 사람이 화요일 날 살아남아서 당신에게 강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중요한 부분입니다- 화요일 날 당신에게 강의하는 그 사람이 오늘 당신에게 강의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목요일에 말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 제가 비행기 사고로 죽게 된다면 화요일에 게스트 강사가 당신을 위해서 오겠죠, 당신에게 살아서 강의를 할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물론 그건 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하게 얻고자 하는 질문은, 목요일 날 당신 앞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여기 이 사람은 화요일 날 있을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하는 겁니다. 우리는 더 넓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을 더 크게 확장해서 말이죠.
2050년에 지금보다 40살을 더 먹게 된 누군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제가 될 수도 있겠죠?
내가 2050년까지 생존할 수 있을까? 질문한다면, 그 사람은 당신 앞에서 지금 서서 강의를 하는 사람과 2050년에 살아남은 그 사람과 과연 똑같은 사람일까요? 미래에 있을 누군가가 오늘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들 중 누군가는 아마도 제가 질문한 것에 대해 오해할 겁니다. 당신들 중 누군가는 말하고 싶겠죠,
“보세요, 당신에게 지금 강의하고 있는 사람은 최소한의 머리카락이 있고, 수염이 났어요. 2050년에 그 사람이 생존해서 대머리가 되고 꼬부라졌다고, 그리고 수염도 없다고 가정해봐요. 얼마나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요? 한때는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한때는 없는 것을요. 한 때는 수염을 가졌지만, 한때는 수염을 가지지 않는 것을요. 한 때는 곧게 서 있지만, 한 때는 구부정한 것을요. 그건 같은 사람일 수가 없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해야 할 오해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을 들여서 예를 통해 알아가 보도록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혼란스럽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방법으로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사례의 것에 살을 붙여서 생각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저는 시간을 걸쳐서 정체성에 대한 것을 말할 것입니다, 또는 실제 최초로, 공간에 걸친 정체성에 대해서도 할 겁니다. – 어떤 친숙하고, 보편적이고, 물리적 물체들로 말입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저와 당신이 걷는 도중에 기차를 보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첫 번째로 기차를 그려보도록 하죠. 저는 그리 썩 좋은 예술가는 아니지만 좋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차입니다. 우리는 걷기 시작합니다. 저는 기관실을 가리킵니다. 더 기관실같이 그려보기로 하죠. 약간 더 기관실 같아졌습니다. 이것이 별로 기관차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See Figure 10.1] 저는 기관실을 가리키고 말합니다.
“기차를 봐요.” 그리고 우리는 걸어갑니다, 우리는 걷고, 걷습니다. 우리는 기차의 끝부분 쪽으로 오게 되고 저는 기관차를 가리키면서 말합니다. “와! 저 기차가 얼마나 긴 지 봐요! 제가 한 오 분 전에 가리켰던 기차와 똑같아요. 우리는 이 기차를 따라서 이 시간 동안 걸었어요.”
이제, 당신이 말하는 것을 상상해봅시다. – 당신은 이것처럼 바보같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봅시다- 당신은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 분 전에 가리켰던 그 기차와 같은 기차가 아니에요. 결국, 지금 당장 당신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기차의 기관차부분이고 아까는 기관실 부분이에요. 기관실은 기관차부분과 같지 않아요. 어떻게 당신이 그것이 둘 다 똑같다고 말할 수 있나요? 누가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요? 기관차부분에서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데, 기관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리고 다른 것도, 또 다른 것도 있어요. 그 둘 사이에는 다른 점들이 많이 있어요. 당신은 어떻게 그런 멍청한 실수를 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물론, 저는 당신에게 이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고, 당신이 실제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 중에 하나라고 하고 싶습니다. 저는 물론 동의합니다, 기관차 실은 기관실이랑은 같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서 그리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최초로 우리가 걷기 시작하면서, 저는 기관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기관실을 가리키는 것에 의해서 저는 기차를 가리키게 됩니다.
저는 말합니다. “기차를 보세요.” 그리고 제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기관실이 아닙니다, 전체이고, 긴, 물체의 전체적인 확장된 공간인, 기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관차 실은 그저 부분일 뿐이죠. 그리고 제가 우리의 걸음이 멈춘 뒤에 기관실을 가리키며 말한다면, “저 기차를 봐”라고요, 기관실을 가리키면서 말이죠, 저는 기차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기차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길고, 확장되고- 전체적인 공간의 물체인 기차 말이죠. 그리고 그 때 저는 “내가 지금 가리키고 있는 기차는 내가 오분 전에 가리켰던 바로 그 기차와 같다.”라고 말하겠죠. 저는 어떤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기관실과 기관차 실이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도 제가 말하는 것은, 제가 지금 가리키고 있는 전체적인 확장된-모든 공간을 가진 기차는 오 분전에 제가 가리킨 전체적인 확장된- 모든 공간의 기차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장하는 것이고 거짓과는 먼, 진실이죠.
이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하기 쉽죠, 만약 당신이 별로 조심스럽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실수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 겁니다, 만일 우리가 개인적 정체성에 관한 생각을 시작하는 데에 있어서 말이죠. 그러나 기차에 대한 생각을 좀 더 해 봅시다. 가정해보면, 우리는 걷고 있었습니다. 기차의 일부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커다란 화물창고가 있어서 시야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See Figure 10.2]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걷다가, 기관실을 봅니다. 저는 말합니다. “하, 저기 기차가 있어” 그리고 잠시 동안 우리는 걸어갑니다. 우리는 화물 창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리고 후에 우리는 화물 창고를 지나갑니다. 아주 긴, 우리를 가리고 있는 화물 창고 말이죠, 저는 기관실을 본 뒤에 말합니다. “이봐 저것 봐, 저기 기차가 있어” 그리고 저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저 기차가 우리가 아까 봤던 것과 똑 같은 기차가 맞을까?”
이제 다시, 그것은 질문을 잘못 이해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결론에 이릅니다. 그 질문은 아직 요청되지 않았어요, 우리가 지금 가리키는 기관실은 우리가 이 전에 가리켰던 그 기관차실과 같은 것입니까? 아니요, 물론 아닙니다. 그 기관실은 같은 기관차 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더 나아가서, 제가 전에 기관실을 가리켰던 때를 기억하시는 겁니까?”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저는 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전체적인 확장된 모든 기차의 공간을 가리킵니다. 지금부터, 기관차 실을 가리키며, 단지 기관차실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기차를 아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전체적인 확장된 기차의 모든 공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기관차실과 기관실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다 저는 기관실과 기관차 실을 의미하는 것을 구별해내어 기차에 관해서 묻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같은 기차입니까? 그리고 그 답은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어서요”입니다.
우리가 X-레이의 시야를 가졌다고 가정하고 빌딩 안을 볼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답은 아마도 “ 그럼 봅시다, 만일 우리가 이 [그림] 처럼 볼 수 있다면, 그럼 물론, 우리는 어떤 하나의 기차를 가질 수 있죠.” [See Figure 10.3] 제가 우리의 발걸음의 끝에서 가리키는 그 기차의 확장된 모든 공간은 우리가 걷기 시작하면서 가리켰던 기차의 확장된 모든 공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식으로 결론지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만일 제가 X- 레이 시야를 가지고 있다면 그럴 것 입니다, 그건 이 [그림] 처럼 보는 것이겠죠. [See Figure 10.4] 그럼 답은 아마도, “아, 거기엔 한 개의 기차가 아니라 두 개의 기차가 있어.”라는 겁니다. 제가 기관차 실을 가리킬 때 그 확장된 전체적인 공간의 기차는 결국 제가 기관실을 가리킬 때의 전체적으로 확장된 공간의 기차가 아니라는 겁니다.
저는 엑스 레이 시야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형이상학적인 가정법이 맞는다는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좋아요, 기차를 통해 쉽게 봤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차로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가 알았습니다.
이제 보다 전체적이지는 않지만 보다 전체적인 것에 대해서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차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는 1990년대에 차를 사서 사용했습니다. 저의 차를 그리는 그림 실력은 기차를 그리는 저의 능력보다 더 엉망입니다. 여기 1990년대의 제 차가 있습니다. 이것은 새것입니다. 그것은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몇 년간 몰았고 그것은 약간의 흠집이 났고 또 다른 것도 생기고 다른 것도 생겼죠. 1996년도와 2000년도의 것 또한 별로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빛나는 것은 사라져버렸죠. 그것은 흠집들을 가지고 있죠. 2000년의 차 말입니다. 2006년에 더 많은 흠집이 났고, 2006년에 그것은 완전히 멈춰버렸죠. [See Figure 10.5]
좋아요, 이제 우리는 2006년의 차와 1990년에 제가 가지고 있던 차가 같은 차라는 주장을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물론 다시, 당신은 제가 말한 것을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2006년에 차에 많은 스크래치가 났다는 것과 한 쪽 면의 접촉사고 같은 것을 통해서 별로 보기 좋지 않아 졌고, 페인트 칠해진 부분이 긁혀지고 녹슬었습니다. 반면에, 1990년대에 그 차는, 새것이고 부드럽고 반짝입니다. 당신은 2006년의 차의 상태는 분명 1990년대의 차의 상태와는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기관차실과 기관실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나 같은 차에 대해서 말할 때는, 저는 차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의미하는 것은 전체적인 시간에 대한 하나의 물건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 제가 있습니다. 1990년대의 제 차의 자랑스런 소유자인 제가 말하길 “이것은 차입니다. 이것은 몇 분보다 오랫동안 존재할 차 입니다. 그것은 몇 년 동안, 그리고 몇 년과 몇 년을 더 존재할 차 입니다.” 비록 그 때에 저는 16년 정도나 더 오래갈 줄을 몰랐죠. 제가 제 차에 관해서 언급할 때에 – 우리가 차의 상태나 차의 부분에 대해서 이름 붙이는 것과는 반대로—제가 1990년대의 차에 대해서 언급할 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체적으로 확장되어 통하는 시간에 대한 물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2006년에, 제가 불쌍한 고물 차에 대해서 가리켜서 이야기 할 때에는, “저는 16년 된 차가 있습니다.” 또한, 전 그런 차 상태를 16년 동안 가진 적은 없습니다. 그 차의 상태나 또는 차의 부분을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오직 길게, 몇 달, 몇 년 정도가 걸릴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16년 동안 지속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차에 대해서 말할 때는, 저는 단지 차의 어떤 현재 상태나 현재의 부분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이고 확장되어 통하는 시간에 관한 물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할 때, “제가 16년 동안 가진 바로 그 차” 제가 뜻하는 바는, “그 물체를 시간을 통해서 확장한 것으로 제가 현재의 부분에 대해 지적한 것에 의한 것을 고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확장되어 통하는 시간의 그 물체입니다. 제가 16년 전에 부분에 대해 가리켰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부분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차는 같은 차입니다. 바로 그 차입니다.”
그럼 이제, 어떤 좀 더 어려운 문제에 대해 상상해봅시다. 2006년의 끝에서, 제 엔진은 망가졌습니다. 저는 차를 딜러에게 팔았습니다, 고물상입니다. 2010년에 제가 고물들 사이에서 저에게 친숙한 차를 보았다고 가정해봅시다. [See Figure 10.6] 제가 말하길 “와우! 그건 내 차야. ” 그럴까요 아니면 제 차가 아닐까요? 이것은 어떤 부분에서 공장이 시야를 가린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1990년부터 2006년까지는 매우 쉽습니다. 그 차를 제 차고에서 매일 보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물어봅니다. “같은 차인가 아닌가?” 다시, 이 시간에 의해서, 저는 당신이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해 상상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몇 번 더 그럴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저는 묻지 않습니다. “차의 상태는, 2010년의 차 상태이고, 이와 같은 차의 상태는 2006년의 상태와 같은가? “아마도 아닐 것 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저는 더 묻습니다, 2010년의 차 상태를 가리키면, 저는 확장된 시간을 통해서 전체적인 부분의 차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묻습니다. “확장되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시간적 범위에서 그것이 내가 예전에 전체적인 시간을 포괄해서 소유했었다고 말한 그 것과 같은 것인가?” 저는 궁금합니다. 그리고 답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의 안개는 제 시야를 가리고 있습니다. 저는 답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성을 알고 있습니다. 한가지 가능성은 정말로 그것이 같을 수 있다는 것과, -저는 2008년의 것과 같은 것을 다시 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같은 차 입니다. 만일 우리가 차의 다양한 단계를 알고 있으며 바로 그 차라는 것을 안다면, 거기에는 한가지 가능성이 존재할 것입니다. [See Figure 10.7]
그러나 거기에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제가 고물상에게 차를 판 뒤에, 그는 그것은 부수어 버렸을 수도 있고, 금속의 덩어리로 바꾸어버리고 그것이 제 차의 마지막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10년에 고물상에서 본 차는 다른 소유의 역사가 있는 다른 차이죠. [See Figure 10.8]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은, 한가지가 있습니다- 음, 여기 어떤 관용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시공간 worm [worm hole]”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 또는 저기에 두 개가 있나요? 제가 2010년에 차를 봤을 때 말합니다.
“저기 차가 있어, 나는 그 차와 같다면 놀라울꺼야” 저는 그 일을 이렇게 확장시켜서 물어봤습니다. – 음, 분명히 공간을 통해서, 차는 어떤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 그리고 시간 속에서 나아가기 때문에. worm 와 약간 같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그들을 시공간 worm 들이라고 합니다.
시 공간 worm 는 이 차를 제 차와 같은 시공간 worm 로 만들어 줄까요? 한 개의 시공간 웜홀 [worm hole] 가 있을까요 두 개가 될까요? 그리고 답은 분명 “모른다, 더 많은 사실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질문은 그겁니다.
이제 형이상학으로, 이제 제가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말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기차에 대해서 말했어야 했듯이, 기차는 다양한 차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기관차실, 기관실, 그리고 연결되어있는 차들로 말이겠죠? 그리고 기차는 – 우리가 보통 기차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적어도 제가 보통 기차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기차는 약간 샌드위치 같습니다. 그렇죠?
형이상학적으로 기초적인 것들은 기관차실, 기관실, 연결된 기차가 있습니다. 만일 그것들이 똑바로 서로 붙어있어서 기차가 만들어진다면 기차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풀은 어떤 종류일까요? 음, 그건 조그마한 자물쇠들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제가 차의 상태나 차의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맞거나 맞는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당신은 말해야 합니다, 단지 정확하게 기차나 차의 상태는 형이상학적 기초적인 것들과 차, 어떤 확장되어 통하는 시간, 같은 것은 차의 상태로써 샌드위치처럼 서로 붙어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차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연관성에 대한 것을 걱정 해야 합니다. 다른 형이상학적인 관점들은, 이전의 실제의 것은 차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차의 상태에 대해서 말 할 때는 어떤 편의나, 차 같은 것, 어떤 기초적인 것이 분할 된 것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David Kaplan 에 대해 생각하고 그 비유를 인용해볼 생각입니다. UCLA에서 학위를 받은 철학자입니다. 그것은 비록 당신이 그것을 당신이 슬라이스 할 수 있는 볼로나나 살라미 소세지처럼 생각해야 하지만, 만일 어떤 특정한 목적들을 위해 당신이 얇게 썰 듯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한다면 그 기초적인 것은 살라미 소세지 같은 것입니다. 좋아요.
차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기초적인 것들은 차의 단계들이며 그것들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 같이 차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는 우리가 근본적인 것들은 차의 연장된 시간이고 그것이 차의 단계들을 이루기 위해서 나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제가 생각하기로는 우리는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체적인 시 공간의 worm들에 대해서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그리고 얇게 썰거나 단계를 나누는 한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또한 알아차려야 합니다- 저는 또한 시간을 너머 존재하는 물질에 대해 다른 형이상학적 관점들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공간너머 확장해서 생각하는 것에서 유추하여 시간을 너머 확장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저는 공간적인 예를 들어 설명했다는 데에서, 기차 말 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차의 예에 대해서 말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그것을 생각한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그것에 대해 옳게 생각하는 방법과 그 철학자들의 생각은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물체가 시간을 너머 확장될 때, 진짜 전체적인 물질은 매 순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흥미롭지만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저는 우리의 목적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거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 공간 벌레들의 용어를 이해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할 것입니다, 물체는 공간을 넘어서 확장될 뿐만 아니라 시간 또한 너머 확장 됩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worm로부터 다양한 조각들과 단계들을 구분하는 것과 worm를 만들어내는 것 또는 worm를 조각 낼 수 없습니다.
제가 강조해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렇다면 첫 번째 포인트는, 물론, “전체적인 시공간 worm의 단계에 대해서 혼동하지 말아라”라는 겁니다. 단계는 전체적인 시 공간 worm 없이 또 다른 worm이 있어서도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암시하고 있는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말 그대로 순간에는 적용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무엇이 적절한 연결고리(glue)인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단계들을 만드는 것, 서로 같은 것의 단계들 일까요? 기차의 경우에서 보면, 제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분명 명백합니다. 차의 경우는 무엇인가요? 무엇이 1990년대의 차의 단계와 바로 그 같은 차, 전체적인 시 공간의 worm인 차, 바로 그 2006년의 차와 같이 만들까요? 무엇이 이 단계들을 서로 연결 짓는 형이상학적인 연결고리일까요? 그리고 답은, 그렇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고, 간단하게- 말해서 “그건 바로 그 같은 차가 맞다, 만약 그것이 바로 그 선들이나 플라스틱이나 금속 덩어리가 맞다면 말이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차가 있습니다. 그저 금속, 플라스틱, 고무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덩어리는 2000그리고 2006년까지 계속됩니다. 그 glue는, 시간을 넘어서 그 차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열쇠는, 그 덩어리 같은 물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제, 같은 분자와 분자를 가진 것간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보세요, 제 핸들을 보세요. 매 시간마다 저는 이 핸들을 운전할 때마다 잡습니다, 저는 수천개의 분자들을 매일 벗겨냅니다. 당신은 약간의 분자들은 잃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건 핸들이고요. 매 순간 순간마다, 저는 제 차의 타이어를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그 금속 덩어리의 물체가 맞습니다.
이제, 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생겨났습니다. 당신이 그 같은 물체의 덩어리를 여전히 가질 수 있는 한 얼마나 많은 부분의 구성요소들이 변합니까? 만일 이 클래스에서 우리가 시간을 너머선 정체성의 보편적인 문제에 대해 걱정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바로 직면해야만 하는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충분하게 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정말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길 원합니다, 시간을 너머선 천부적인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것 말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추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물체의 덩어리 바로 그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에 기치를 두기를 원합니다.
만일 어떤 분자의 구성요소가 그 방법으로 변한다면, 그리고 심지어 어떤 부분이 커진다면, 당신이 헤드라이트를 바꾸거나 해도 그 덩어리의 물체는 같은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그것은 차의 경우에 관한 것입니다. 1900-2006년의 같은 물체 덩어리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2010년의 고물상의 마당에서 그 차를 보고 묻습니다. “이 차가 내 차인가 아닌가?” 그 답은 –만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에 한에서- 그 물체의 덩어리가 같은 것인가 아닌가? 안에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열쇠입니다, 그 형이상학적인 연결고리(glue)는, 같은 물체의 덩어리입니다.
좋아요, 이제 우리가 정말로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봅시다,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것 말입니다. 2007년에 여기에 누군가, 셜리 케이건이라는 사람이 당신에게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2050년에 누군가가 우리에게 묻는다고 상상해봅시다. “셜리 케이건인가요?” 우리는 그를 “X씨라고 부를 것 입니다.” [See Figure 10.9]
우리는 묻습니다.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 이제 다시, 당신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묻습니다, “X씨의 사람의 단계는 2007년의 셜리 케이건의 단계와 같은가?” 명백하게 아닙니다. 2007년의 셜리 케이건은 여전히 턱수염도 있고, 머리카락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똑바로 서서 있습니다. 그러나 X씨는 대머리에다가 수염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그가 구부정하다고 가정하고 그렸습니다. 제가 저럴 수 있을까요? 조그마한 지팡이가 있습니다. 저는 묻지 않습니다. “ X씨의 인간의 단계가 2007년의 셜리 케이건의 단계와 같은가?” 컴퓨터나 그런 것과 같은 소리군요. 2007의 셜리 케이건을 봐! 나는 묻지 않습니다. 저는 묻고, 저는 말합니다. “ 봐요, 지금 제 상태를 볼 때, 현재의 사람의 부분과 확장된 전체적인 시간으로 생각하자면, 그 사람은 셜리 케이건이 되었어, 또는 셜리 케이건이야, 확장된 전체적인 시간에 속한 바로 그 사람, 당신이 마음속에 그려지는 2050년에 있을 법한 X씨입니까?”,
그 단계는 명백하게 다릅니다. 그러나 그 단계를 바라보는 것에 의해서, 우리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시 공간 worm를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묻겠죠,
“그것은 바로 그 시공간 웜이야? 우리가 전에 봤던 그 시공간 worm또는 그 전에 끄집어 냈던 다른 시 공간 worm가 아닐까?” 그리고 답합니다, 이미 그것은 “아마 그건 명백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단계에 따른 올바른 형이상학적인 방법 안에 함께 있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럼, 두 사람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 또는 바로 그 확장된 시간의 인간의 부분은 무엇입니까?
한 명의 확장된 시간 속에 인간에 기저를 이루는 무엇이 형이상학적인 연결고리라는 겁니까? 만일 우리가 형이상학적인 질문,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열쇠, 에 대한 답을 명백하게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한 명의 사람의 있는 건가 아니면 둘이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조각들을 함께 붙이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일까요?
다른 질문으로,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것에 답을 얻어야 한다는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저의 죽음에 살아남아야 하나요? 그럼 봅시다, 우리가 시작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제가 주말에 살아남아야 합니까? 주말에 살아남기 위해서, 누군가 살아남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그 어떤 사람은 화요일에 그 사람은 마치 당신이 보고 있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 말 입니다. 또는 단계에 대한 용어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단계를 가집니다, 그 단계는 그 단계에 있어서 바로 그 확장된 시간에 대한 시 공간의 worm에 대해서 또 다른 부분을 가집니다. 그것들은 서로 올바른 방법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연결할 수 있는 가를 아는 것에 대해서 구별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것을 예측할 수는 있습니다, 그럼, 여기 누군가가 화요일 날 그런 방법을 통해서 연결을 한다면, 그 올바른 방법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판명될 것입니다. 그 단계들은 올바른 방법으로 연결 되겠죠. 제가 이렇게 질문한다고 가정해봅시다.”제가 저의 죽음에 살아남을 수 있나요?” 물론, 저는 낙관적이 되겠지요. 저는 추측하기론 2040년, 2040… 저는 90살이 채 못 될 것입니다. 그건 별로 낙관적이진 않군요. 그건 낙관적입니다, 그러나 매우 낙관적이진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2040년의 셜리 케이건은. 우리는 확장된 시 공간과 시 공간의 벌레, 사람을 압니다. 그리고 가정합니다. 슬프게도 2041년 제 육체는 죽습니다.
그리고 저는 묻습니다.“제가 저의 죽음에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건 제 육체는 죽는다는 건가요?”
그럼, 우리는 알고 싶죠, 2041년 이후에, 2045년이라고 말해보죠, 누군가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은 X라고 부릅시다. 2045년에 사람이 있다는 경우를 들어봅시다. 2041년에 제 육체의 죽음 이후에 말입니다, 그것이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바로 같은 시 공간 worm 부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경우가 가능한가요? 그게 가능할까요 아닐까요? [See Figure 10.10]
우리는 우리가 시간을 너머서 정체성을 가지는 것에 대해 명확하게 할 때까지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열쇠는 무엇일까요? 형이상학적인 연결점은 무엇일까요?
일단 우리가 명확한 형이상학적 연결고리를 찾는다면, 우리는 “그게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의 시작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요,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의 가능성이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개인적 정체성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어떤 오해 때문에, 정말 확장된 시간을 통해서 하나인 사람이 “두”사람이 되는 걸까요?
우리가 영혼을 믿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여기서 자연조건하나를 들어봅시다.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열쇠는 바로 같은 영혼을 가졌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원론자라고 추측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보세요, 우리 몸을 보세요, 그러나 이 육체에 관한 친숙한 방법은 특별한 영혼과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셜리 케이건의 영혼입니다. 당신 앞에서 강의하고 있는 사람이 다음주 화요일 여기 다시와서 강의하는 바로 그 셜리 케이건이라는 사람이란 것이, 무엇을 진실로 만들어 주나요. 무엇이 그것이 바로 그 같은 영혼이라는 것을 진실로 만들어주나요?
화요일 날 여기 다시 오는 영혼이 셜리 케이건이라는 한 말입니다. 만일 다른 영혼이 온다면 그건 셜리 케이건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영혼을 믿는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추측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개인적 정체성의 열쇠는- -영혼이론가가 말할 수 있다고 해서 뿐 만이 아니라, 영혼의 이론에 있어서도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개인적 정체성의 열쇠는 바로 같은 영혼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같은 영혼은, 같은 사람이고. 다른 영혼은 다른 사람입니다.
신 또는 악마 또는 당신이 가진 것을 상상해봅시다, 무엇이라도 반대되는 이유들을 위해서, 육체와 영혼의 보통의 연결고리들을 다시 선들로 재 연결시킵니다, 그와 같이, 화요일에 이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와서 조종한다고 봅시다. 반대의 이유들을 들어서, 아마도 철학자적 관점의 어떤 종류를 만든다면, 그 사람은 화요일 날 당신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철학에 대해서 강의하겠죠.
우리가 이야기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영혼의 관점에서 지금 보는 건데, 영혼에 관점에 따르자면, 화요일 날 강의하는 저는 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 안됩니까? 왜냐면 우리는 단지 같은 영혼이 아니고 우리는 단지 규정되어진 것이며 그것은 같은 영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다른 영혼입니다.
개인적 정체성의 열쇠는, 영혼의 이론에 따르는 개인적 정체성은, 개인적 정체성의 열쇠는 같은 영혼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주말에도 살아남을 것인가?” 제가 물어본 것은, “내 영혼이 여전히 화요일 날 존재할 것인가?” 내 영혼이 여전히 존재하고 기능할 때, 그것은 여전히 저 입니다.
저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사실 –절차의 앞부분을 보면,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왜 영혼의 관점에서 종종 보아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육체가 죽어도 영혼이 계속 존재하는 한 저 또한 계속 존재합니다.
개인적 정체성의 열쇠는, 영혼의 관점에서 본다면, 같은 영혼을 가진 것 입니다. 제 영혼이 계속 존재하는 한 그것은 여전히 저 입니다. 제 육체가 살아있던 아니던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영혼에서는, 영혼을 믿는 입장에서, 영혼과 개인적 정체성의 이론을 합한 것에서, 제 죽음에서도 살아난다는 입장에서 이 이유는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마도 육체가 죽더라도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모를 겁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건 가능성으로 남아있습니다.
플라톤의 경우, 우리도 알듯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계속 존재한다는 믿음에 대한 좋은 근거가 되어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낼 수 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육체의 죽음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것은 볼 수 있습니다. 제 육체의 죽음에 살아남는다는 관점은 그렇게 가능성 있게 보이진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원론을 믿더라도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물리학자라면. 만일 사람은 단지 p-기능을 하는 육체이고, 그의 육체가 죽은 뒤에 어떻게 그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건가? 음, 우리는 나중에 그것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하기로하죠.
영혼에 대한 관점으로 돌아와 봅시다. 같은 영혼을 지닌 한 저는 저입니다. 다른 영혼을 지녔다면 제가 아닙니다. 이제 여기서 따라오는 가능성에 대해서 고려해봅시다. 주말 동안, 새벽 세시에, 토요일 밤에, 일요일 아침에, 제가 자고 있을 때, 신이 제 영혼을 다른 영혼과 바꾸었고, 그것을 육체에 집어넣고, 그 영혼이 들어와서, 영혼이 바뀌고, 제 모든 기억들이, 제 모든 믿음들이, 제 모든 열망들이, 제 모든 관심들이 바뀌었다고, 가정해봅시다. 누군가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봐, 오늘은 멋진 날이야. 살아있어서 환상적이지. 나는 셜리 케이건이고 일하러 갈꺼야.”무엇이라던 말입니다. “나는 셜리 케이건이다.”; 그러나 그는 아닙니다.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셜리 케이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영혼 이론에 의하면, 나는 내 영혼을 가졌기 때문에 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는 제 영혼이 없습니다. 제 영혼은 파괴되었습니다.
가정해봅시다. 새벽 세시에. 일요일 아침. 새로운 영혼이 창조됩니다. 그것은 제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맞아요. 그것은 오랜 역사를 지닌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확장된 의미의 시간적, 공간적 인간에 대한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관점에서 본다면, 제가 되는 것은 같은 영혼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우리는 단지 규정된 것이죠, 같은 영혼이 아니니까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봅시다. 만약 신이 제 영혼을 토요일 밤에 바꿨다고 봅시다. 저는 죽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물론, 그는 저라고 생각하겠죠. 그는 그 자신이 생각하기로 “나는 지난 주에 철학 강의를 하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겠죠. 그러나 그는 틀렸어요. 그건 똑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같은 영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틀렸어요, 그리고 이걸 알아차려보세요, 거기에는 그가 구분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어요. 그는 그의 믿음을 확인할 수 밖에 없어요. 그는 그의 열망을 확인할 수 밖에 없어요. 그의 기억들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관점에서 봤을 때, 개인적 정체성의 열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 정체성의 열쇠로써, 영혼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로 같은 영혼을 가진 것 입니다. 당신은 확인할 길이 없어요. 당신은 영혼이 같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도 볼 수도 없어요. 그래서 만약 이것이 그에게 일어났을 때, 그는 셜리 케이건이 아닐 수도 있어요, 지난 주에 강의를 하던 그 사람 말 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질문은 당신은 당신 스스로 질문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당신이 이것이 지난 밤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당신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합니다, 나는 어제 이 교실에서 강의들 들었던 -조, 린다, 샐리, 같은- 바로 그 사람이다.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아는 것이 가능합니까?
만일 신이 당신의 영혼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었다면, 옛 것을 파괴하고 말이죠, 오래된 기억들, 신념들, 욕망들, 목표들, 등등을 새로운 것으로 다시 주고 말입니다. 어제, 지난주에 이 수업을 들은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은 10년, 20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은 몇 시간 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지난 밤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매일 밤, 매 순간, 매 초, 매 시간, 매 분마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신이 오래된 영혼을 가져가서, 그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영혼을 집어넣고- 아마도 영혼들은 오직 몇 분에서 몇 초 밖에 지속 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그리 오래 지속할 수 없겠죠. 육체는 아마도 20년, 50년, 80년, 100년 정도를 지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한 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거나 만일 그것이 매 분 대체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말할 수 조차 없을 것 입니다.
지금 이 걱정들은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인 John Locke에 의해서 생겨났습니다, 이 알약은 너무 삼키기에는 큽니다. 물기에는 너무 큰 총알이고요. 우리는 이 제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저에게 하루에서 다음날로, 한 시간에서 다음으로, 일 분에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그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관점에서 전혀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건 논리적으로 이 관점에 대해서 반대되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모든 것일 수 있을까? 거기엔 내가 매 시간 후, 매 분 후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구분 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을까?”에 대해서 말입니다.
Locke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이 관점을 심각하게 볼 수 없어요 만약 당신이 그런 뜻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알아차려보세요, 이것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이 논의를 증명한다면, 이 논의에 대한 것은 비록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개인의 정체성의 열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자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은 그렇다면 대안책은 무엇인가? 에 대한 것 입니다.
정체성의 열쇠, 형이상학적인 연결고리에 주안점을 둘 수 있는 것 더 나은 제안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것은 다음 시간에 하기로 합시다.
'인문철학 > 셸리 케이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8/9강 : 플라톤(3부): 영혼의 불멸에 대한 논의 (0) | 2019.09.18 |
---|---|
6/7강 :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4부), 플라톤 (0) | 2019.09.18 |
5강 :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3부): 자유 의지와 가사 상태 체험 (0) | 2019.09.18 |
4강 : 플라톤의 파이돈 개론,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2부) (0) | 2019.09.18 |
3강 :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1부) (0) | 2019.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