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쇼펜하우어

0. 나의 반생

rainbow3 2019. 9. 21. 17:41


나의 半生


-베를린 대학에 제출한 쇼펜하우어의 이력서(1819년)-

 

나의 반생(半生)에 대한 보고를 하려고 하니 다른 보고를 쓸 때 보다 훨씬 할말이 많은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내가 종사하고 있는 직업, 즉 내가 탐구하고 있는 학문연구는 다른 직업처럼 우연히 하게 된 것이 아니고 남들이 신중히 고려하여 나에게 맡긴 것도 아니며, 내가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은 평탄하고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 뿐더러 곳곳에 장애물이 놓여 있는 험한 길이며, 처음에는 나도 어떻게 발길을 디뎌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내가 이 세상에서 햇빛을 보게 된 것은 1788년 2월 22일이었다. 부친은 하인리히 프로리스 쇼펜하우어이다. 모친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며 일련의 저작(著作)으로 유명하지만, 처녀시절에는 요한나 헨리에테 트로지나라고 불렸다. 탄생 당시의 사정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던들, 나는 이미 영국인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친은 해산달이 임박해서 비로소 영국을 떠나 고국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존경해 마지않는 나의 부친은 부유한 상인으로 폴란드 왕국의 궁정 고문관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은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부친은 엄격하고 성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한편 품행이 방정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남에 대한 신의를 반드시 지키면서도 장사에 대해서는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내가 부친의 신세를 얼마나 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부친이 나에게 원하는 직업이 그의 안목으로는 적합한 것이었을지라도 내 정신에는 결코 적합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부친의 덕택으로 나는 젊었을 때부터 실용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유와 여가를 비롯해서 나의 천직인 학자로서의 교양을 얻는 데 필요한 모든 것, 나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모든 수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청장년기에 접어든 후에도 부친의 덕택으로 쉽사리 여러 가지 이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나의 성격이나 기질로 보아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즉, 나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그 덕택에 오랜 시일에 걸쳐서 나는 돈벌이와는 관계가 없는 학문 연구나 매우 어려운 탐구와 명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번거로움이나 방해를 전혀 받지않고 연구하고 숙고(熟考)한 것을 집필할 수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그분의 덕택이다.

 

제왕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이와 같은 여유를 주지 못할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살아 있는 한 이 엄청난 부친의 공적과 은혜를 마음속에 아로새겨 아름다운 추억으로 삼고자 한다.

 

1793년, 선정(善政)을 베푸는 가장 고귀한 어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러시아 왕이 단치히 시(市)를 그 지배하에 두었을 때, 자유보다도 고향의 거리에 관심이 많던 내 부친은 낡은 공화국의 멸망을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프러시아군이 단치히를 점령하기 몇 시간 전에, 부친은 처자를 데리고 시를 도망쳐 하룻밤을 교외의 별장에서 밝힌 다음에 이튿날 함부르크를 향하여 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그와 그의 가족을 단치히 시의 운명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산을 잃어버려야만 했다. 상업에 종사하는 자가 거처를 옮기는 것은 매우 불리한 일이며, 또한 그 시대의 관례에서 볼 때 아주 불손한 발언을 한 것을 곁들여, 그는 재산의 10분의 1을 국고에 납입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으로써 단치히 시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어렸을 때부터(그 당시에 내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고향을 잃고, 그 후로 새로운 고향은 전혀 얻지 못하게 되었다. 부친은 함부르크에 거처를 옮기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장사를 하였으나, 끝내 시민자격을 얻으려고 하지 않아 외국인에 관한 법률에 의해 보호시민으로서 살아갔던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그나마 당시에는 자식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는데 -여동생은 나보다 나이가 10세나 아래였다- 부친은 나를 훌륭한 상인으로 키우는 한편, 세상물정에도 밝고 고귀한 인품을 지닌 인간으로 만들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부친은 이를 위해 내가 프랑스어에 능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797년, 부친이 영국과 프랑스로 관광여행을 떠날 때 당시 이미 나이가 10세나 되어 개인교수로부터 일반과목을 배운 나를 데리고 갔다. 파리를 구경하고 나서 우리는 르아브르에 갔는데, 부친은 나를 완전히 프랑스인처럼 만들려고 그 시에 사는 친구의 집에 나를 남겨 놓았던 것이다.

 

부친의 친구는 선량하고 온순한 분으로, 나를 마치 친자식처럼 대접했으며 같은 또래의 아들과 함께 나를 정성껏 가르치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통근하는 가정교사로부터 소년에게 적합한 지식과 교양을 얻게 되었다. 나는 그 때문에 프랑스어 이외에 여러 가지 학과를 배우고 라틴어도 초보의 가르침을 받았다. 덕분에 그 후 나는 라틴어를 들어도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 센 강가의 바다를 낀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나는 유년시절의 제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이곳에 2년 남짓 머물러 12세가 끝나갈 무렵에 나는 혼자서 뱃길로 함부르크에 돌아왔다. 선량한 부친은 내가 마치 프랑스인처럼 프랑스어를 지껄이는 것을 듣고 무척 싱글벙글하였다.

 

그러나 내가 모국어를 깡그리 잊어버렸기 때문에 나에게 사리(事理)를 깨닫게 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함부르크에서 나는 명문 자제들의 교육에 대한 저작(著作)도 있는 룽게 철학박사가 교장으로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훌륭한 교장을 비롯해서 이 학교에서 봉직하고 있는 교원들의 가르침으로 나는 상인(商人)으로서 유익하고 교양인으로서도 필요한 모든 과목을 철저히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라틴어 수업은 한 주일에 한 시간뿐인데다가 그나마 형식적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약 4년 동안 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에서 학업을 마칠 무렵부터 나는 학자로서 일생을 보내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부친에게 언제나 나의 장래에 대하여 무리한 주문을 하지 말며, 더구나 장사꾼으로 만들 생각은 하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부친은 내가 학자가 되는 데 대해 매우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라고 아주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꺾이려고 들지 않았다. 한편, 나는 나대로 부친이 아무리 거절해도 주춤하지도, 마다하지도 않고 일년 내내 부친을 향해 소원을 호소해 왔을 뿐더러, 룽게 박사 또한 내가 상인에게 필요한 학력과는 다른 보다 높은 소질을 갖고 있다고 보장해 주었으므로, 그토록 확고부동하던 부친의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해 썩 내키지는 않지만 내 의견을 존중하여 김나지움(中高等學校)에 취학시켜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부친의 애정으로 말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내가 안정된 생활을 보내기를 원했으며, 그의 머리 속에는 학자와 가난이라는 두 개념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이 두렵고 험한 길을 가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최대의 관심을 표시했던 것이다. 그는 장차 나를 함부르크의 카노닉스(宗敎參事會의 一員)로 만들려고 결심하고, 이 지위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카노닉스에 취직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며 이것은 무시 못할 거액임을 알자 그만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럭저럭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 내가 장래에 택해야 할 생활코스를 어떻게 변경하느냐 하는 문제도 한동안 보류하게 되었다. 부친으로서는 이렇게 분명히 금을 긋지 않는다면 나도 자연히 자기의 지망을 변경하리라고 기대하였던 것이다. 모든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존경심을 갖고 있던 부친은 억지로 우겨서 자기의 의견을 관철할 의향은 없었다. 그러나 책략(策略)을 써서 내 심정을 시험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부친은 내가 세계를 두루 구경하고 싶어하고, 그리운 옛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서도 한 번 더 르아브르를 찾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이듬해 일찌감치 어머니를 동반하고 유럽의 대부분을 지난번보다 훨씬 오랫동안 관광여행을 하겠다고 말하고, 만약 귀국 후에 내가 상인이 되겠다고 약속만 하면 이 근사한 여행에 함께 데리고 갈 뿐더러 르아브르를 다시 방문할 기회를 주어도 좋지만, 이와 반대로 끝내 학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라틴어를 배우기 위해 함부르크에 남아도 좋으니 어느 쪽을 택하든지 나의 자유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혹은 젊은이의 심정으로는 뿌리치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생각한 끝에 부친이 원하는 대로 상인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1803년 봄 16세가 된 나는 양친과 함께 함부르크를 떠났다. 우리는 먼저 네덜란드를 구경하고, 그 후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다. 2개월 반 동안 런던에 머문 후에 양친은 잉글랜드에서 스코틀랜드를 향하여 떠나고, 나는 런던 근교에 살고 있는 성직자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는데, 사실상 나는 이 고장에 머물러 있는 3개월 동안에 거의 그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양친이 런던에 돌아오자 나도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우리는 런던에 한 달 반 동안 머문 후에 다시 네덜란드에 가서 겨울의 대부분을 보내기 위해 벨기에를 거쳐 파리로 갔다.

 

우리는 파리에서 다시 르아브르를 방문하였다. 이어서 우리는 보르도,몽펠리에,님,마르세이유,툴롱 그리고 이에르 제도(諸島)를 찾아갔다. 그리고 리용을 거쳐 스위스로 향하였다. 스위스 전국을 샅샅이 여행하고 나서 빈으로 가다가 다시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단치히에 도착하였다. 이 그리운 옛 고향을 찾아간 연후에, 그러니까 거의 2년이나 지난 1805년 정초에 우리는 함부르크에 돌아왔던 것이다.

 

이 2년에 걸친 긴 여행에서 원래는 젊은이로서 고전(古典)에 관한 여러 가지 학문과 고전어(古典語) 공부에 보내야 할 가장 소중한 세월을 허비하였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에 와서는 그때의 오랜 여행이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이득과 같을 정도로, 아니 이것보다 더 뜻깊은 것을 얻게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이 여러 가지 인상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고 모든 사물을 받아들여 이를 인식하기를 원하는 호기심이 매우 왕성한 청년시절에 나의 정신은 흔히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본인이 아직 있는 그대로의 올바른 지식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공허한 말이나 사물에 대한 헛된 보고에 충만된 일도 없고, 또 이러한 학습에 의해 오성(悟性)이 본래 지닌 바 예리함을 잃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사물을 자기의 눈으로 확인하고 올바른 지식을 얻어 사물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사물의 모습이나 변화에 관하여 주장하는 여러 가지 의견을 받아들이기 전에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내가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런 방법으로 교양을 얻는 길을 택하였기 때문에 내가 젊었을 때부터 사물에 대하여 단지 그 이름만을 아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를 관찰하며 탐구하여 사물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며 이를 인식하는 것이 말만 듣고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후년에 말만으로 이것을 사물 자체인 줄 아는 위험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견지에서도 이 여행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할 계제가 못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의 입장은 매우 거북하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함부르크에 돌아오면 나는 약속한 대로 즉시 상업에 대해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위해 나는 함부르크의 유명한 상인이며 시(市)의 참사회원(參事會員)이기도 한 사람에게 가서 견습생 노릇을 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사실 나보다 못한 상인은 구경할 수 없었다. 나의 성격은 이런 일에 철저히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언제나 다른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자기의 의무를 등한히 하고 날마다 집에 돌아가 책을 읽거나 적어도 생각에 잠기거나, 또는 공상에 사로잡힐 수 있는 시간을 얻기에만 전념하였다. 상점에는 언제나 책을 감춰두고 남의 눈을 피하여 독서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유명한 천문학자로 두개골(頭蓋骨)에 관한 학문의 창시자이기도 한 가르가 함부르크에 왔을 때에는 그 강연을 듣기 위해 날마다 주인을 속여가며 상점을 빠져나오곤 하였다. 이와 같이 악덕에 물든 것도 탈이지만, 나는 큰 실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태도도 자연히 공손하지 못하고, 따라서 남들에게도 불쾌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이렇게 된 곡절의 하나는 언제나 기분전환을 할 수 있던 저 오랜 여행과는 딴판으로 일 년 내내 싫증만 나는 일을 하거나 굴종을 참아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릇된 인생 항로를 걷고 있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통감하였을 뿐더러 나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시정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절망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불행한 시기에 세상에 보기드문 무서운 타격을 받게 되었다. 사랑하는 선량한 부친에게 갑자기 닥친 이 비통한 사건으로 인하여 나의 어두운 심정은 더욱 흐려지고, 거의 우울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기에 이르렀다. 나는 어머니가 뭐라고 성화를 한 것도 아닌데 너무나 깊은 슬픔에 잠겼기 때문에 정신력을 모조리 소모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부친의 의사(意思)를 던져 버린다는 것은 양심에 꺼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전어를 다시 공부하기엔 이미 나이가 지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 상업견습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일찌기 시빌라(희랍 신화에 나오는 예언의 여신-譯註)가 타르키니우스(地名)의 사람들을 다룬 것처럼 운명이 나를 다루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거의 2년동안 상가(商家)에서 보냈지만 결국 밥만 헛되이 축내고 만 셈이었다. 이 생활도 끝장이 날 무렵에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고뇌에 사로잡혀 바이마르에 살고 있던 모친에게 편지를 보내어, 인생의 목적을 상실하고 헛된 일에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젊음도 활기도 잃게 되었으며, 나이도 나이이므로 일단 선택한 인생 코스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고 고뇌에 찬 심정을 그대로 전하였다.

 

그러자 참으로 뛰어난 재주의 소유자이며 당시에 모친과도 친교가 두텁던 유명한 페르노프가 나의 편지의 진의(眞意)를 알고 나와는 전혀 안면이 없었지만 나에게 편지를 써 보내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내가 지금까지 헛되이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세월도 결코 낭비한 것이 아니며, 자기 자신도 그렇지만 상당히 나이를 먹고 나서 공부하여 학자의 생활에 들어간 다른 유명한 학자의 예를 들면서 나더러 모든 것을 버리고 우선 고전어부터 공부하라고 충고하였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너무나 감격하여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이때 비로소 한번 해보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상점의 주인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고 곧 바이마르로 향하였다. 때는 1807년, 내 나이 막 18세가 되려던 때였다.

 

페르노프의 충고에 따라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타에 가서 그 시의 유명한 학교로 번영하고 있던 김나지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라틴어의 지식이 전혀 없었으므로 나는 모국어로 강의하는 수업에만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명성을 떨친 데링은 날마다 두 시간씩 나에게 개별적으로 라틴어를 가르쳐 주었다. 당시의 나의 라틴어 지식은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어휘의 변화부터 외워야만 하였다. 그러나 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따라오므로, 데링은 장래의 전망이 매우 밝으며 절대로 자신있다고 예언하게 되었다. 이 말을 듣고 나도 실의에서 벗어나 다시 새로운 희망을 품고 긴장된 마음으로 처음 목표를 향해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또다시 불운이 닥쳐왔다. 나는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인도할 농담을 삼가야 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단츠라는 김나지움의 교사가 나도 독일어로 가르치는 수업에 출석하고 있는 ‘선발 클래스’에 대하여 신문지상에 오만한 내용의 논설을 실었다. 공공기관을 통하여 발표된 이 기사를 나는 식탁에서 잡담을 할 때 익살까지 섞어가며 반박하였다.

 

이와 같은 나의 대담한 행동은 슐츠에게 즉시 밀고(密告)되어, 그 결과 데링은 나에 대한 개인교수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나를 가르치기가 무척 즐거웠으나 일단 약속한 일은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나서 이 김나지움에 그냥 남아 있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라틴어의 개인교수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원치 않았다. 1학기가 끝나자 나는 고타를 떠나 바이마르에 가서, 이곳에서 지금 브레스라우 대학교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파소우로부터 처음에는 라틴어, 이어서 희랍어의 개인수업을 받았다.

 

이윽고 파소우는 희랍어만 가르치게 되었으므로, 나는 라틴어 회화에는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박식한 바이마르 김나지움의 교장 렌츠에게서 라틴어 회화를 배우게 되었다. 나를 위해 무척 애써 주신 이 두 분에게 무어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알 수 없다.

 

역시 나는 그때까지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뒤늦겐마 노력에 노력을 더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마치 미친 사람처럼 공부에 열중하였다.

 

나는 생활을 즐겁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비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돈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기 위해 무척 욕심을 부렸다. 마치 자기 육체에 날마다 영양을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날마다 밤마다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 읽기와 쓰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나는 모친과 함께 지내지 않고 파소우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언제나 선생과 마주 대할 수 있었다. 내가 제일 힘써 공부한 것은 고전어였지만 그 밖의 책을 통하여 전부터 익혀온 수학과 역사 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바이마르에서 만 2년 동안을 소비하였는데, 나중에 선생은 나에게 대학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 2년 반 동안에 전에 허송한 세월에 해당하는 공부까지 다 하였다고 자부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반가운 증거를 나는 곧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에 제공된 여러 기회(機會)를 통하여 고전어의 지식에 있어서는 다른 학생들과 어깨를 견주게 되었을 뿐더러 거의 모든 학생, 아니 언어학자까지도 나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독학자인 내가, 일정한 과정으로 한걸음 한걸음 공부해 나가는 김나지움 출신 학생 이상으로 많은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언제나 희랍,로마의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으며, 그 때문에 하루에 두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학습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이득을 얻게 되었다. 우선 나는 차츰 고전에 익숙하게 되어 고대사회가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이해하는 안목이 점점 익어갔다. 특히 내가 금년의 후반에 이탈리아에 갈 기회를 얻어, 고대의 존귀한 그리고 당당한 기념물을 목격하고 사소한 것에도 그 시대의 유물로서 고대의 독특한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새삼스럽게 그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전 작가, 특히 희랍 철학자의 저서를 계속해서 읽어 나감으로써 나의 독일어 문장과 문체가 근본적으로 개선되고 아름다워졌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언제나 고전 작가들과 친밀히 지내 온 덕택에 단시일에 배우기는 하였으나 나의 고전 지식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또한 고전은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았으므로, 그 후에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학문을 연구하는데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최근에 라틴어 회화나 작문실력에 해독이 된다는 이탈리아어를 계속해서 사용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에도 나는 조금도 해를 입지 않았다. 이것을 실제로 입증하기 위해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이 이력서를 라틴어로 기록하면서 남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이것을 베를린에 발송하기 전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음을 분명히 서약하는 바이다.

 

물론 나도 문장을 잘못 쓰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지닌 약점과 불완전함에 그 원인을 돌려야 할 성질의 것으로, 결코 나의 천학비재(淺學非才)의 소치는 아니다. 내가 설사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19세가 되어 비로소 Mensa(라틴어로 책상을 뜻함-譯註)라는 단어의 활동을 공부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용서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서술한 것은 허영심을 그대로 드러낸 큰소리로 터무니없는 말일 것이다.

 

1809년 말에 성년(成年)에 도달하자 나는 모친으로부터 유산을, 즉 부친이 남긴 유산 중에서 이미 소비한 부분을 제외한 3분의 1을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 나는 생계를 충분히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 후에 나는 괴팅겐 대학에 들어가 처음에는 의과(醫科)에 등록하였다. 그러나 내가 자기의 본성을 알고 극히 표면적이기는 하였으나 철학에 접하게 된 후에 비로소 계획을 바꿔 의학을 포기하고 나서 철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의학 공부에 소비한 시간은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철학에도 유익한, 아니 반드시 필요한 강의만 골라 들었던 것이다.

 

괴팅겐 대학에서 보낸 2년 동안에 나는 그때까지의 습성대로 학문의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학생들과의 교제로 학업을 중단하거나 등한히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는 당시 상당히 나이를 먹어 경험이 풍부했으며, 게다가 남들과는 동떨어진 성격을 타고 났으므로 언제나 그들과 떨어져 고독하게 보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의에는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면서 독서에도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특히 플라톤과 칸트의 저작을 탐독하게 되었다.

 

이 2년 동안에 나는 G.E. 슐체의 논리학,형이상학(形而上學)과 심리학 강의를 듣고, 티보로부터 수학, 헤르에게는 고대사,근대사 및 십자군의 역사와 민족학, 류더에게는 독일제국사, 브루멘바하에게는 자연사,광물학,생물학,비교해부학, 헨펠에게서 인체해부, 슈트로마이어에게서 화학, 토비아스 마이어에게서 물리학과 천체물리학, 그리고 슈라더에게서 식물학을 각각 배우기로 하였다. 내가 이들 훌륭한 사람들로부터 배운 학문은 매우 수확이 많았으므로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1811년 가을에 나는 베를린으로 가서 베를린 대학생의 일원(一員)이 되었다. 나는 이 대학에 우글거리는 유명한 교수들에게서 내 정신과 정조(情操)를 갈고 닦기 위해 힘껏 노력하였다. 나는 이곳에서 볼프의 희랍,로마 시인들 및 희랍고대사, 희랍문학사 강의를 들었다. 전자기(電磁氣)에 대한 에르만의 공개강연을 듣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새학기를 통하여 리히텐슈타인의 동물학을 청강한 이외에 크라프로트에게서 다시 화학을 배우고, 또한 피셔에게서 물리학, 보데에게서 천문학, 바이스에게서 지질학, 호르켈에게서 생리학, 그리고 로젠타르에게서는 인간의 뇌해부(腦解剖)의 강의를 각각 들었다. 뛰어난 교수들로부터 받은 훌륭한 지식에 대해 나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

 

나중에는 피히테의 철학 강의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 열심히 듣기로 하였다. 언젠가 나는 피히테가 청강생 일동을 위해 개최한 토론회에 출석하여 장시간 그와 논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에 대해 기억이 새로울 것이리라.

 

1813년 후반에 들어와서 전화(戰火)로 말미암아 나는 2년동안 베를린에 머물러 있었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당시에 나는 유명한 베를린 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에게 각별한 호의를 갖고 있던 유능한 리히텐슈타인으로부터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조건이나 필요사항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은 후에 나는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의 네가지 근거(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n Zureichen den Grunde)>에 관한 집필을 시작하였다. 이것을 독일어로 쓴 것은 상찬(賞讚)이 대단한 철학과의 규칙에 따른 것이다.

 

류첸의 전투(러시아 원정 이후의 나폴레옹과 프러시아의 전쟁)의 결과가 판명되지 않고 베를린 시도 위협을 받고 있는 처지라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기 시작하였다. 그 대부분은 프랑크푸르트 혹은 브레스라우로 향하였지만, 차라리 적을 향해 나가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한 나는 드레스덴으로 향하여 도중에 여러 가지 사건과 위험에 직면하면서 하루가 지난 후에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이곳에 머물러 있을 생각을 하였으나 이 거리에도 위험이 닥칠 것을 예감한 나는 다시 바이마르로 향하였다. 나는 이곳 모친의 집에 일단 머물러 있었으나, 가정 환경이 언짢아 달리 묵을 장소를 찾은 끝에 결국 루돌슈타트에 눌러 앉기로 하였다.

 

나는 이곳 여관에 머물면서 그 해의 나머지를 보내었지만 뭐니뭐니해도 루돌슈타트는 고향을 잃은 자에게는 가장 적합한 피난처였다. 게다가 나는 그 무렵에 다시 정신적으로 깊은 고뇌에 사로잡혀 낙심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자기가 지니고 있는 재능과는 전혀 다른 재능을 필요로 하고 있는 듯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루돌슈타트에 묵고 있는 동안에 나는 이 고장의 독특한 매력에 이끌리게 되었다. 나는 군사적인 것은 질색이었다. 그 때문에 전쟁이 한창 불을 뿜는 어느 해 여름에도 사방 나무들이 울창한 산에 에워싸인 골짜기 속에서 병사의 모습은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고, 군고(軍鼓)의 소리도 전혀 듣지 못하고 지낼 수 있었던 나는 행복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고독하고 무엇에 의해서도 한눈을 팔거나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해서 이 세상의 움직임과는 동떨어진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며 규명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고 싶을 때에는 언제나 바이마르의 도서관에 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완성,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서도 베를린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베를린에 이르는 길은 휴전중에도, 그 후 전투가 재개된 후에도 폐쇄된 채였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따는 것은 그 당시의 나로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가까운 예나 대학의 존경할만한 철학자에게 그 논문의 <서론>을 써서 보내고 철학박사의 학위를 주십사 하고 의뢰하였는데, 그 철학과에서는 내 소망을 마침내 받아들였다.

 

겨울에 내가 몸담고 있던 한적한 전원에도 군대가 침입해서 온통 주위가 쑥밭이 되었으므로 나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와 이곳에서 겨울을 지냈다. 그런데 그 무렵에 내 고뇌를 위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 생애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 세기(世紀)의 참된 영광이요 영예이며 독일 국민의 자랑이고, 그 이름이 모든 시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된 대(大) 괴테가 나에게 우정을 표시하여 친히 교제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그를 먼발치로 바라보기만 하고 그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일이 없었으나, 내 논문을 읽고 나서 그는 나더러 자기의 색채론(色彩論) 연구를 해줄 의사가 없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 그는 여기에 필요한 도구를 빌려주고 설명을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문제, 즉 ‘색채론’에 대해서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 적도 있고 반대한 적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 겨울에 때때로 주고받은 우리 두 사람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

 

처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지 몇 주일이 지나 그는 색채현상(色彩現象)을 재현하는 데 필요한 기계와 기구를 나에게 보내왔다. 그 후에 그는 손수 시도한 실험을 내 앞에서 보여주었다. 괴테는 내가 선입관에 매혹당하지 않고 그의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그 세부에 이르기까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색채론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할 동의(同意)와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해 겨울에 나는 가끔 그의 집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색채론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에 그치지 않고 모든 철학상의 문제에도 미쳐 몇 시간씩 계속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친밀한 교제에서 나는 엄청난 학문적인 이득을 얻게 되었다.

 

1814년 초에, 전란이 끝나 세상이 평온해지자 나는 학문을 계속해서 연구하기 위해, 특히 머릿속에서 이미 완성된 철학체계의 기초를 다지려고 드레스덴으로 향하였다. 이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시설이 완벽한 도서관이었다. 그리고 유명한 화랑(畵廊)이나 실물과 모조품이 뒤섞여 있는 고대 조각 전시장, 그리고 과학연구를 위해 완비된 기계기구도 나의 연구를 크게 도와 주었다.

 

이 매혹적인 도시에서 나는 아무 걱정 없이 4년 반 동안 살면서 여러 가지 과학연구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주력한 것은 일찌기 생존했던 모든 철학자, 즉 타인의 견해를 해석하고 그것을 재탕하여 제공해 준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을 짜낸 사람들의 서적을 읽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어 1815년, 새로운 색채론을 완성하였다. 괴테도 단지 물리적인 색채의 발생과정을 발견했을 뿐 일반적인 색채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일반적인 색채론은 물리적인 것도 화학적인 것도 아니고 오직 생리학적인 것이었다.

 

나는 나의 색채론에 대하여 서술한 초고(草稿)를 괴테에게 보내었다. 그 후 1년 동안이나 그와 이 문제에 관하여 서신교환을 계속하였다. 그 위인은 이유를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끝까지 내 견해에 찬동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학설은 뉴튼의 그것과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일 뿐만 아니라 더욱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괴테의 학설과도 일치되지 않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람의 베이컨도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은 건조한 빛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의지와 정열에 의해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색채에 관한 논문은 1816년 내가 괴테의 최초의 동의자(同意者)임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공표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 논문 속에서 전개한 이론만이 정당하고 이 견해만이 옳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나는 나의 주장이 가까운 장래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불만스럽게 생각지 않았다. 악의에 가득찬 침묵이나 완고한 부인(否認)도 결단코 진리를 왜곡하고 억압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자위하였다. 여기서 내 문제에 대하여 리비우스의 입을 빌어보면, 진리란 때로는 완강한 저항을 받게 되지만 진리를 절멸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1818년, 나는 드디어 5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탐구한 철학체계를 완성하였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이와 같이 11년 동안이나 학문연구를 계속한 나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나는 빈을 거쳐 이탈리아에 가서 베네치아,볼로냐,피렌체를 구경한 다음 로마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근 4개월 동안 머물면서 고대의 기념물과 근대의 예술작품을 감상하였다. 이어서 나폴리, 폼페이, 헤르크라눔, 프테오리, 바야, 크마 등지를 구경하고 감탄하였다. 법왕청(法王廳)에도 들어가 보았다. 2500년에 걸쳐 조금도 상처를 받지 않고 서 있는 고대의 장엄한 포세이돈의 도시의 사원(寺阮)들을 눈으로 바라보며, 아마도 플라톤도 와서 보았으리라고 생각되는 이 고장에 나도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경건한 마음으로 하여 전신이 짜릿하였다.

 

그 후 나는 다시 한 달 가량 피렌체에 머물고 베네치아를 또 방문하여 파도바,비첸차,베로나,밀라노 등을 구경하고 나서 성(聖) 고트하르트 산을 넘어 스위스로 향하였다. 이리하여 11개월의 여행을 마치고 금년 8월에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오직 배우고 싶은 욕구에만 사로잡혀 있던 나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겨 앞으로는 남을 가르치고 싶은 욕구를 지니게 되었다. 나의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금 여기 베를린 대학의 영광스러운 철학과에 자리를 신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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