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쇼펜하우어

13. 죽음에 대하여

rainbow3 2019. 9. 21. 17:52

13. 죽음에 대하여

 

1) 어느 隱者의 죽음

 

인간의 성격 속에 깃들여 있는 놀랍고도 감동적인 기이한 현상의 보기 드문 사례(事例)를 확실히 보존해 두기 위해서도, 여기에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 보여준 최근의 뉴스를 전해두고자 한다.

 

이 현상은 적어도 외관상으로 보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것을 막상 설명하려고 하자니 상당히 어렵다. 이 최근의 뉴스는 1813년 7월 29일 <뉘른베르크 코레스폰덴트>지에 실렸던 것으로,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베를린으로부터의 보도에 의하면, 투르넨 부근의 밀림 속에서 한 오두막집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이미 약 1개월 전부터 부패하기 시작한, 옷을 입은 채로인 어떤 남자로 보이는 시체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그 시체가 남성이라는 것을 얼른 분간할 수 없었다. 이 밖에 고급 셔츠 두 벌이 옆에 놓여 있었다. 가장 중요한 증거품은 흰 종이를 접어 넣은 성경으로, 그 종이에는 죽은 자의 친필로 된 글이 씌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 사나이가 집을 나온 날짜가 기록되어 있으며(그러나 현주소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단식하며 기도하기 위해 성신의 지시로 황야(荒野)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과 여행중에 이미 7일동안 단식을 하고 그 후에 다시 식사를 취했으며, 오두막집에 거주한 후에 다시 단식을 시작하여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해 왔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장본인은 날마다 줄을 하나씩 그었는데, 그것이 다섯개였으며 그 후에는 아마도 그가 숨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떤 목사 앞으로 죽은 자가 이 목사에게 들은 설교에 대하여 의견을 진술한 편지가 있었지만, 수신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2) 자살에 대하여

 

우리의 관찰방식의 한계 속에서는 충분하다고 할 만큼 누누히 말해온 삶에의 의지의 부정, 즉 이것만이 현상 속에 모습을 나타내는 의지의 자유에 의한 행위이며, 아스무스(크라우디우스가 앞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말한 문장의 집필자로 되어 있음-譯註)가 초경험적(超經驗的)인 변화라고 부른 것과 뭐니뭐니해도 의지의 개개의 현상을 현실에 폐기(廢棄)하는 것, 즉 자살만큼 다른 것은 없다. 자살은 의지의 부정과는 전혀 거리가 멀며 반대로 강력한 의지 긍정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부정의 본질은 괴로움이 아니라 삶의 즐거움을 혐오(嫌惡)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자살하는 자는 삶을 원하고 있으며, 단지 그 사람이 놓인 삶의 조건에 불만을 가질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단지 삶만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는 삶을 원하며 삶에 훼방을 받지 않으려 하고 삶을 긍정하려 한다. 그런데 사정이 엉켜서 원하는 것을 손에 얻을 수 없게 되면 커다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개별적인 현상(자살하려고 하는 자) 속에서 삶에의 의지는 완전히 속수무책(束手無策)이며, 그 노력의 결실(結實)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삶에의 의지는 그 본질에 의해 진로(進路)를 결정한다. 삶에의 의지 자체는 만물의 발생과 소멸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그러면서도 만물의 삶의 핵심이므로, 개개의 현상은 삶에의 의지에게는 아무래도 무방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는 확신이, 다시 말해서 현상은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확신이 자살의 경우에도 행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에의 의지는 자살이라는 행위(시바 신) 속에도, 자기보존의 만족(비슈누 신)이나 생식에의 쾌락(브라마 신)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이것이 곧 인도교의 삼위일체의 내적인 의미이다. 즉, 삼신(三神)은 때에 따라 어느 때에는 한 머리를, 또 어느 때에는 다른 머리를 치켜들지만 결국 개인은 모두가 삼신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개개 사물의 이념에 대한 관계는 자살과 의지의 부정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다. 자살하는 자는 단지 개인을 부정할 뿐이지 종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의 의지에게 삶은 언제나 확실한 것이며, 삶에 있어서는 고뇌가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살, 즉 개개의 현상을 자기 멋대로 파괴하여도 물자체(物自體)는 조금도 파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게 된다. 이것은 마치 한순간 무지개를 이루고 있는 물방울이 계속해서 교체되어도 무지개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자살은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헛된 행위이다.

 

3) 석가‧에크하르트*‧聖 프란시스

 

일반적으로 외부의 사정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현실을 도외시하고 사물(事物)을 근본적으로 파악했을 경우, 석가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같은 것을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석가는 그 사상을 그대로 분명히 말할 수 있었지만, 에크하르트는 자기의 사상을 기독교의 신화(神話)에 싸서 여기에 맞춰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에크하르트의 경우에는 이러한 표현방법이 극단의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화가 신 플라톤학파 사람들에게 희랍신화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회화문자처럼 되어 버렸다. 그는 기독교 신화를 완전히 상징적인 의미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 프란시스가 명문 출신이면서도 거지생활을 고집했던 경위가 더욱 극적이기는 하지만, 불타 석가모니가 왕자이면서 거지 생활을 하게 된 경위와 흡사하며, 이처럼 성 프란시스의 생활이나 교단의 그것이 일종의 고행자의 길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성 프란시스의 인도정신에의 친근성이 동물에 대한 사랑이나 그들과의 거듭되는 접촉에 나타나 그들을 언제나 형제 자매로 불렀다는 것은 여기서 언급해 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노래가 태양과 달‧별‧바람‧물‧불 그리고 대지를 찬양하는 것도 그의 타고난 인도적인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 에크하르트(Eckhart Jokhanes : 1260?~1327, 통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라고 불림) : 독일의 신비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신 플라톤파 및 에리우스게나의 영향을 받은 범신론적 경향 때문에 사후 교회로부터 이단시되었다. 신과 사람과의 혈연상 동질을 주장함. 교회의 봉건적 권력에 의한 정신적 노예화에 반대한 점에서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있음. 타울러가 그의 후계자이다. 저서 《설교집(Preeligten und Franktate)》(1857).

 

4)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는 본질적인 점에서 보면, 전아시아가 당시에 이미 분명히 알고 있던 것을 가르쳤을 뿐이지만 유럽에서 이 가르침은 새롭고 위대한 계시(啓示)였으며, 따라서 이에 의하여 유럽 여러 민족의 정신의 방향이 완전히 변형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그들에게 생존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분명히 하고 그들에게 사소하고 가난하고 덧없는 지상의 생활을 초월할 것, 이 지상의 생활을 자기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실은 이것은 괴로움‧죄‧시련‧싸움 그리고 정화(淨化)의 장소로 간주하는 것, 또는 인간은 도덕적 업적, 엄격한 체념(諦念), 자기 자신의 부정을 통하여 이 지상의 영위(營爲)에서 알려져 있지 않은 보다 훌륭한 존재에로 고양(高揚)될 수 있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아담의 원죄에 의해 만인의 저주를 받게 되고, 죄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승되었지만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만인의 죄가 용서받아 세계는 구제되고 죄는 소멸되고 정의가 보상되었다고 가르침으로써 알레고리(寓話)*의 형식을 띠면서 의지의 긍정과 부정에 관한 위대한 진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신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시간 속에서 각각 피차에 독립된 존재로 보지않고, 인간의 (플라톤적) 이념을 파악해야 한다. 이 이념이 인간의 계열에 대한 관계는, 영원 자체가 현재의 시간 속에서 토막난 영원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이념을 분명히 이해하면, 아담의 원죄는 유한한 동물적인 죄많은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 본성에 의해 인간이 여러 가지 죄와 고뇌 및 죽음의 손에 맡겨진 유한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과 죽음은 영원하고 초자연적인 측면, 인간의 자유와 구제를 나타내고 있다. 모든 사람은 이러한 존재로서 잠재적으로는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또한 의지가 그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향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예수일 수도 있고 아담일 수도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도 즉시 단죄(斷罪)되어 죽음에 인도되거나 또는 구제를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알레고리(Allegory) : 우화 또는 풍유. 이면에 있어서는 그 진의를 감추고 풍유를 통해서만 그 진의를 짐작하게 함. 예컨대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

 

5) 단두대에서의 설교

 

1837년 4월 15일, 계모(繼母)를 죽인 버트레르라는 사나이는 그로체스터에서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지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국인들이여! 내가 할 말은 몇 마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네들 누구나가 이 몇 마디 말을, 지금 여기서 상연하고 있는 비참한 연극을 구경하는 동안뿐만 아니라 집에 돌아가 자제들이나 친구들에게도 전해주기 위해 마음에 깊이 간직해 두기를 바란다. 처형(處刑)할 도구의 준비가 이미 다 갖추어진 지금, 죽어가는 인간으로서 이것을 바라고자 한다. 나의 몇 마디 말은, 이 죽어가는 세계와 당신네들의 허망한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세속(世俗)의 일에 너무 구애되지 말고 신을 더욱 생각하라는 것이다. 내 말대로 하라. 회개하라. 마음을 고쳐라. 왜냐하면 깊은 진정한 회개가 없이는 하늘나라의 신에게 돌아갈 수 없고, 내가 지금 그곳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저 행복의 동산, 평화의 나라에 도달한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1837년 4월 18일 <타임즈>지에서)

 

이 설법(說法) 이상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1837년 5월 1일, 런던에서 처형된 유명한 살인범 그린에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영국신문 <더 포스트>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린에커를 처형하는 날 아침에, 한 신사가 그를 향하여 신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로 속죄를 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린에커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로 속죄를 하느냐 하는 것이 정당한지의 여부는 인간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일이다. 나로서는, 지고(至高)의 존재로 말하면 회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의 가치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기독교 정도의 지복(至福)에의 요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체포된 후로 신학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해 왔으며, 처형대는 천국에 이르는 패스포트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라고.”

 

여기서 표명된 기성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그린에커의 발언에 커다란 무게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발언은 광신적(狂言的)인 미망(迷妄)이 아니라, 독특한 직접적인 인식에 기초해 있음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리냐니의 메신저>가 1837년 8월 15일 <라임리크 크로니클>에 다시 수록한 다음과 같은 발췌(拔萃)를 소개한다.

 

“지난 월요일에, 메리아 쿠니는 앤더슨 부인을 학살한 죄로 처형되었다. 이 가엾은 여인은 자기가 범한 죄가 너무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고개 숙여 신의 은총을 기원하면서 자기의 목에 걸린 밧줄에 키스를 하였다.”

 

끝으로 또 하나 1845년 4월 29일의 <타임즈>는, 데라류를 살해한 죄과로 사형선고를 받은 호커가 처형되기 바로 전에 쓴 많은 편지를 실었다. 그 편지 중의 하나에서 호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일 인간이 본래의 깨끗한 마음이 흐려진 후로 신의 은총에 의해 재생되는 일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그 본래의 마음이 매우 고귀하게 보이더라도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는 영원을 생각할 수 없다고 믿는다.”

 

6) 再生과 恩寵

 

성격이란 부분적으로 변화하는 일이 절대로 없으며, 자연법칙처럼 시종일관 개인이 전체로서, 그 현상인 의지를 개인 속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 전체, 즉 성격 자체는 앞에서도 말한 인식의 변화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성격의 소멸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스무스가 전반적인 초경험적 변화(《크라우디우스의 이야기》를 참조)라고 부르고 경탄한 것으로 이것이 곧 교회 내에서 적절하게도 재생 혹은 중생(새사람 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는 의지가 자기의 본질 자체를 인식하고 동기(動機)의 작용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이 동기는 그 대상이 한낱 현상에 불과한 다른 종류의 인식방법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여 나타난 자유의 가능성은 동물에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고 인간만이 갖고 있는 최대의 특권이다.

 

그것은 현재의 인상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삶의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이성에 의한 숙고(熟考)가 자유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는 자유의 가능성이 없을 뿐더러, 사물을 생각하여 선택의 결정을 내리는 가능성도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정을 내리려면 이에 앞서 여러 가지 동기의 투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돌이 땅 위에 떨어지는 것 같은 필연성에 의해서만 굶주린 늑대의 이빨은 고깃덩어리를 물어뜯는 것이다. 필연성은 자연의 영역에 속하고, 자유는 은총(恩寵)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해 온 의지의 기각(棄却)이 인식에서 출발한 이상, 이러한 인식이나 통찰은 자의(恣意)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욕망의 부정이나 자유에의 참가는 이것을 의도(意圖)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대한 가장 내면적인 인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마치 밖으로부터 날아든 것처럼 뜻밖에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교회에서는 이것을 은총의 작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은총으로 인간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기각(棄却)되므로, 그 사람은 마치 옛사람 대신에 새사람으로 나타난 것처럼 전에는 무척 바라던 것을 때로는 원치 않게 되기 때문에, 교회는 이와 같은 은총의 성과를 중생(거듭남)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교회가 말하는 자연인(自然人)인은 구원을 요구할 경우에는 부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 原罪에 대하여

 

근거율(根據律)에 따라서 인간의 이념을 하나로 묶어 관찰함으로써 기독교의 가르침은 아담 속의 삶에의 의지의 긍정을 상징화하였다.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계승된 여러 가지 죄,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식의 유대를 통하여 나타나는 우리와 아담과의 이념상의 일체화는 우리를 모든 고뇌와 영원한 죽음에 관여하게 했다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의 가르침은 은총에 의해 의지의 부정을, 인간이 된 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구제(救濟)를 상징화하였다. 인간이 된 신은 모든 죄에서, 즉 모든 삶의 의지로부터 벗어난 자유이다. 그리고 우리들처럼 가장 결정적인 의지의 긍정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구체화(具體化)된 의지이며, 의지의 현상인 육체를 갖는 일도 없이 순수한 처녀에게서 태어나 일시적인 육체를 가질 뿐이다.

 

이 나중 가르침은 초기 기독교의 교부(敎父)들이 주장했던 것인데,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특히 아펠레스는 이것을 역설하였는데, 그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하여는 테르투리아누스가 반대 이론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까지도 로마서 8장 3절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었다’는 대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육신의 정욕에 의해 태어나지 않은 육신은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육신이 죽어야 하는 육신인 이상 죄를 짓는 육신과 유사한 점이 깃들여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을 《불완전한 작품》이라는 책 1장 47절에서, 원죄는 죄인 동시에 벌이라는 표현으로 주장하였다. 즉, ‘원죄는 이미 신생아(新生兒)에게도 있지만, 그 아이가 성장했을 때 비로소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 기원은 죄를 범한 자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죄를 범한 자는 아담이지만, 아담 속에 우리 모두가 존재하고 있다. 아담은 불행하였는데,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가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죄(의지의 긍정) 및 구제(의지의 부정)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의 중심이 된 위대한 진리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밖의 가르침은 거의 모두가 단지 나의 의복이나 커버 혹은 첨가물(添加物)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일반적으로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상징 혹은 인격화로서 파악해야 하며, 복음서에 기록된 신비스러운 이야기나 이 이야기의 밑받침이 된 틀림없이 사실이라고 추측되는 사실(史實)에 입각하여 그를 개인으로서 간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 속의 이야기나 그 토대가 되는 사실은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으로 경솔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나 사실은 언제나 민중에게 일반적인 기독교의 의미를 이해시키기 위한 한낱 전달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기독교가 그 참된 의미를 저버리고, 평범한 낙천주의로 타락해 버린 데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8) 마르틴 루터

 

루터는 실천적인 입장에서 보면, 즉 그가 제거하려고 했던 당시 교회의 악폐(惡弊)와의 관계에서 보면 정당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론적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정당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가르침이 숭고할수록 그 가르침은 매우 저속하고 비열한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인간에 의해 알게 모르게 악용될 우려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카톨릭에서는, 신교 이상으로 심한 악습이 때때로 성행하였다. 예컨대 수도사의 생활이 그렇다. 분명히 서로 규칙을 엄수하고 격려하면서 함께 의지의 부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수도사들의 생활은 숭고한 것이지만, 거의 언제나 그 참된 정신에서 이탈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한심스러운 악폐는 공정한 정신을 가진 루터를 크게 격분케 하였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루터는 기독교 자체에서 되도록 많은 것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우선 기독교를 성서의 가르침에만 제한시켰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금욕적 원칙까지 공박할 정도로 그 선의(善意)의 열성이 지나쳤던 것이다. 금욕적 원칙이 제거된 후에는 필연적(必然的)적으로 그대신에 낙천적인 원칙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천주의는 종교에서는 물론 철학에서도 모든 진리의 진로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오류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카톨릭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악용된 기독교라면, 프로테스탄트는 변질된 기독교라고 하겠다. 그리고 기독교가 앞으로도 인류 가운데 존속하려면 모든 고귀하고 숭고한 것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9) 老化와 죽음

 

죽음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단지 의식에 관여될 뿐이다. 그럼 의식의 소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누구나 잠드는 것을 통해서 이를 평가할 수 있다. 게다가 진정한 실심상태(失心狀態)를 경험한 자라면 그 모습을 더욱 분명히 평가할 수 있다.

 

실심의 경우로의 이행은 꿈으로 점차 중개되는 일 없이 의식을 상실한 상태에 들어간다. 이 경우에 느끼는 감각은 결코 유쾌한 것이 못 된다. 잠이 죽음의 형제인 것처럼 실심상태는 죽음의 쌍둥이다.

 

폭력 때문에 죽을 경우에도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아주 큰 중상을 입어도 곧 느끼지 않고 잠시 뒤에, 때로는 한참 후에 중상을 당했다는 외면적인 증세가 나타나서야 비로소 아픔을 느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중상을 입어도 금새 죽어버릴 정도로 심할 경우에는 자기가 부상당한 것을 알기 전에 의식을 잃어버린다. 부상을 당하고 얼마 후에 죽는 경우에는 다른 일반 질환과 마찬가지이다. 물에 빠지거나 석탄불에 휩싸일 경우, 목을 매어 의식을 잃은 자가 별로 괴로운 줄 몰랐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자연현상에 따르는 노화에 의한 죽음, 즉 자연사(自然死)는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는 방법으로 생존에서 소멸되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정열이나 욕망이 그 대상에 대한 감수성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정감(情感)도 어느덧 자극을 받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표상력(表象力)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약해지며, 표상이 파악하는 형상(形象)은 점차로 희미해질 뿐더러 여러 가지 인상을 더이상 받아들이지 않으며, 설사 인상을 받아도 곧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시일(時日)의 회전은 점점 빨라지며, 사건이 일어나도 그것을 중요하게 느끼지 않고 퇴색한 것으로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늙은이는 주위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거나 한구석에 몸을 감추고 있을 뿐, 단지 과거의 그 사람의 그림자 또는 유령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이 그 이상 파괴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느 날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마지막 잠에, 그리고 그이 꿈은......

 

이것은 이미 저 햄릿이 유명한 독백을 하면서 자문(自問)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야 모두 그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10) 삶과 죽음

 

의지는 세계의 물자체(物自體)요, 내면적인 본성으로 생명이나 눈에 보이는 세계, 즉 현상은 의지의 거울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세계가 의지를 떠날 수 없는 것은 그림자가 원체를 떠날 수 없는 것과 같으며, 의지가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고 세계가 있다. 이와 같이 살려는 의지가 있으면 반드시 생명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의지가 있는 한 설사 죽음이 닥쳐와도 우리의 생존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론 개체는 태어나서는 멸망해 간다. 그러나 개체는 현상이며 근거의 원리에 지배되고 개체의 원리에서 파악한 인식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선물을 받는 것처럼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간다.

 

그러나 생명을 철학적으로 파악하고 그 관념에 의거하여 관찰하면 모든 현상의 물자체인 의지나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인식의 주관은 조금도 생사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다. 생사는 의지의 현상에 수반되는 것, 다시 말해서 생명에 따르는 것으로 생명은 개체로 나타나는 것이 본성이며, 개체는 생겼다가 소멸되는 시간이라는 형식 속에 유전(流轉)하는 모습으로 물자체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 물자체는 시간에 구애되지 않지만 자기의 본성을 객체화하기 위해서는 지금 말할 방법을 취하게 마련이다.

 

삶과 죽음은 다 함께 생명에 수반되는 것으로, 이를테면 서로 균등한 생명현상 전체의 양극을 이루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심원한 인도의 신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파괴와 죽음을 나타낸 신 시(詩)와, 최고의 신으로 그 목에 죽은 자의 뼈를 줄에 매어 달고 한편 생식을 나타내는 링가라는 신은 표지를 달아 생사가 중화된 동지임을 표시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심정은 희랍인이나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시체를 넣는 관에 제례(祭禮)나 무도(舞蹈)‧혼례‧사냥‧씨름‧폭음(暴飮) 등 강한 생명의 요구를 아로새겨 그 속에는 음욕(淫慾)을 표시하는 조각, 심지어 사테레와 암양이 교미하는 모습도 새겨넣었던 것이다. 그 목적은 자명하다. 한 인간이 죽은 데 대해 자연의 생명에 불사(不死)가 있음을 나타내고, 추상적인 이지(理知)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전체가 살려는 의지의 현상이며 또 그 만족을 추구하는 장소임을 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현상의 형식은 시간과 공간 및 인과(因果)이며, 이에 의하여 개체의 현상이 나타나고 거기에 개체는 태어나서는 소멸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개체는 의지의 한 현상이며 그 한 보기, 한 표본에 불과하지만 의지 자체는 생멸(生滅)에 구애되지 않고, 자연 전체는 그 속의 한 개체가 죽어도 조금도 지장을 느끼지 않는다. 자연이 걱정하는 것은 개체가 아니라 종족(種族) 전체이며 종족의 보존은 그 가장 진지한 요구이다. 새싹이 넉넉하게 무수히 돋아나거나 생식이나 생산행위가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은 모두가 자연이 이 목적을 위해 낭비라고 부를 정도로 진력(盡力)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개체는 자연에 대하여 아무 가치도 없으며, 무한한 시간과 무수한 장소에 나타나는 허다한 개체가 자연에 대하여 개별적인 가치가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자연은 언제나 개체가 멸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개체는 실로 아무것도 아닌 우연한 일에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멸망하기도 하며, 또 개체가 그 종족보존에 대한 역할을 마친 다음에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또한 자연은 그 결정을 실천하도록 한다.

 

인간은 자연이란 살려는 의지가 객관화된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고 또 이 진리를 간파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나 근친의 죽음에 대해서도 위로를 하고 자연의 생명은 불멸이며 자기는 자연이기를 단념해야 한다. 시가와 링가를 갖고 있고 고대인의 관에 죽음을 슬퍼하는 자에게 보이기 위해 불타는 생명의 그림을 새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연은 걱정하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생사는 생명에 으례 수반되는 것으로, 생명이라는 의지의 현상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사는 다른 형태로도 나타나는 생명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다 높은 형태로 표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명이란 어디까지나 물질이 그 형태를 굳게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교체되는 것을 가리키며 여기 개체는 생멸(生滅)을 거듭하여 종족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끊임없이 번식하고 있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출산이며 부단히 배설(排泄)하고 있는 것은 여러 죽음이다. 끊임없는 출산은 식물에서 그 예를 간단히 찾아볼 수 있다. 즉, 잎사귀나 가지를 만들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 충동(衝動)이 그 섬유질 속에 있으며, 이것을 언제나 반복하여 식물이 되고 식물계는 서로 양육을 계속해 가고 있는 동류의 식물의 집단을 형성해 항상 생산하고 번식하는 것만이 능사(能事)이다.

 

이 충동을 충분히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변형(變形)의 단계를 거쳐 점차 높은 단계로 나아가 드디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즉시 자기의 생존을 사방으로 확대시켜, 자기 자신을 반복시키는 목적을 손쉽게 달성한다. 즉, 과일은 식물의 생존과 노력의집결체이다. 식물이 과일을 맺기까지 노력하는 것은, 마치 글을 써서 그것을 인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동물의 경우도 사정은 동일하다. 생식작용에 따르는 육욕은 생명감을 한층 높인 쾌감이다.

 

한편, 배설은 끊임없이 물질을 흡수해서 내뱉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크게 강화되면 곧 죽음이 오고, 생산의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물질을 내뱉어도 그것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그저 형체만 보존하는 것으로 만족을 느낀다면 죽음이 닥쳐와도 일어나는 배설현상과 마찬가지로 간주해야 한다. 죽음도 날마다 시시각각 배설로 하나하나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전체에 걸쳐, 또 더욱 강력하게 이루는 것이 다를 뿐이다. 배설을 놀라워하지 않는다면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개체로서의 존재를 연장시키려는 것은 전도(顚倒)된 일이며, 한 개체가 죽으면 다른 개체가 대신 들어서는 것은 신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이 언제나 신진대사를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로, 그것은 하나하나의 배설을 알뜰히 간수하는 것과 같다.

 

또한 개체의 신체가 있고 개인의 의식은 거기 달려 있지만, 그것도 날마다 잠들기 때문에 한 번 정도는 완전히 중단되어 있다. 삶과 죽음은 그 현재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으며, 잠은 장차 눈을 뜬다는 점에서 죽음과 다를 뿐인데 이것도 동사(凍死)하는 것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그대로 죽어버리기도 한다. 죽음이란 개성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개체 이외의 것은 다시 눈뜨거나 또는 언제나 눈떠 있다.

 

특히 분명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의지가 나타나는 방식, 즉 생명이나 실재의 방식은 실로 오직 현재뿐이며, 미래나 과거는 단지 개념(槪念) 속에 있을 뿐 인식이 근본원리에 따르는 한 이렇게 존재할 뿐이다. 과거에 살았던 인간도 없고, 장차 살 인간도 없으며, 살아 있다는 것은 다만 현재뿐이다. 그러므로 현재만은 생명에서 제거할 수 없는 분명한 소유물이다. 현재는 언제나 그 내용을 갖추고 보존한다. 의지가 있다면 생명이 있고, 그 생명에는 현재만이 분명하다. 지나간 수많은 날을 회고하고 또 그 가운데 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무엇이 있는가,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에 자기의 과거는 매우 가까운 어제의 일조차 상상 속에 있는 공허한 꿈이며, 과거의 사람들의 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거기 무엇이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이 남아 있는가? 오로지 의지뿐이며 생명은 그 의지를 반영(反映)하고, 의지를 떠난 인식은 이 거울 속에서 분명히 의지를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인정치 않고, 또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사람들의 운명에 대하여 위의 문제에 덧붙여 물어야 한다.

 

수천만의 인간들이 과거로 돌아가고 그 중에는 영웅과 현자(賢者)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과거의 긴 밤에 묻혀 무로 돌아갔지만, 이 물음을 던지는 나만이 이와같이 사라져 가는 귀중한 존재의 실제내용을 소유할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된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그리고 이 미소(微小)한 나만이 현재 여기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혹은 다른 말로 짤막하게 말해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더욱 기이하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현재는 어찌하여 현재 여기 있는가? 어찌하여 이 현재는 이미 지나가 버리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묻고 나면 자기의 존재와 자기의 시간은 서로 독립되어, 존재를 시간 속에 던져넣는 것처럼 될 것이다. 이렇게 묻는 자는 한편으로는 객관의 현재와 또 한편으로는 주관의 현재, 이와 같이 두 현재가 있으며 이 양자가 용케 하나로 결합되는 데 놀라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은 객관과 주관이 서로 접하는 점(點)이 바로 현재이다. 그리고 객관은 의지가 표상(表象)이 된 것이다. 주관은 객관에 대하여 필연적인 상대이다. 또한 실제의 객관은 다만 현재에 있을 뿐, 과거나 미래의 내용은 오직 개념이나 공상뿐이므로 현재는 의지가 나타나는 본래의 방식으로 그것을 떠날 수 없다. 언제나 있고 분명한 것은 단지 현재일 뿐이다.

 

경험상으로 보면 현재는 가장 소모되기 쉬우나, 형이상적 견지에서 보면 현재는 스콜라 철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상주(常住)의 지금」이다. 그 내용의 원천과 그 담임자(擔任者)는 물자체, 즉 살려는 의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다.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되고, 혹은 자기에게 있었던 것 또는 닥쳐올 것이 되는 것은 현상이며, 이는 생멸(生滅)을 나타내는 방식에 의해 생기게 된다. 의지가 있으면 생명이 있고, 생명에 있어서는 현재만이 확실하다. 그리하여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어쨌든 현재의 주인이다. 그리고 이 현재는 영원히 언제나 그림자처럼 나를 따른다. 그러므로 현재가 어디서 왔는지 또 어찌하여 현재가 바로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간을 무한히 돌고 도는 수레에 비유하면 아래로 내려가는 반원은 과거요, 위로 올라오는 반원은 미래이며, 그 정상의 접선에 닿는 한 점은 나눌 수도 없고 크기도 없는데 그것이 곧 현재로, 접선이 수레와 함께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현재는 시간이라는 형식에 따르는 객관과 그 형식에 따르지 않는 주관이 접촉되는 점이다. 이 경우에 주관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고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시간을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에 비유한다면, 현재는 그 속에서 강물과 함께 흐르지 않고 언제나 강물을 갈라놓고 있는 바위와 흡사하다.

 

이지는 물자체(物自體)이며, 인식의 주관은 결국 어느 의미에서는 의지 자체이거나 또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의지에게는 자기 자신의 표현인 생명이 확실한 것처럼 현재만이 현실의 생명의 유일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생명 이전에 있던 과거나 죽은 후의 미래와 같은 것은 탐구할 성질의 것이 못 되며, 의지가 스스로 나타나는 방식도 현재뿐이므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의지를 떠날 수 없고 의지도 현재를 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생명을 있는 그대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분명히 안심하고 생명을 무궁한 것으로 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재를 잃어버리고 현재가 없는 시간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환상이라는 견지에서 동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지만, 이것을 공간에 옮겨보면 현재 자기가 서 있는 지구의 지점만이 정점이고 다른 것은 모두 발 아래 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각자 자기 개체의 생명을 현재에 결부시켜 자기의 생명이 없으면 모든 현재는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과거나 현재는 미래가 없이도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지구상의 이 지점이 자기에게 정상인 것처럼 어떠한 생명도 현재를 양식(樣式)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죽으면 현재가 없어진다고 두려워하는 것은 둥근 지구 위에 서서 다행히 현재 여기 있으나 한 발짝 벗어나면 미끄러져 떨어진다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의지가 객관이 되려면 현재라는 방식이 필요하며 현재 자체는 연장(延長)이 없는 일점(一點)으로, 그 전후에 걸친 무한한 시간을 양분하여 마치 미풍이 불지 않는 저녁이 부단(不斷)한 정오나 되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다. 또한 언뜻 보아 태양은 밤의 품속에 가라앉지만, 태양 자체는 언제나 뜨거운 열을 띠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죽으면 그것으로 자기 자신이 멸망이라도 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은, 저녁 때에 태양이 한탄하면서 ‘슬프다! 이제부터 영원히 밤으로 접어드는가!’하고 탄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반대로 생명의 무거운 짐에 눌리면서도 여전히 삶을 원하여, 그 고뇌를 혐오하며 자기 자신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다고 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세계는 낮에서 밤이 되고, 개체는 죽어가지만 불타는 태양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살려는 의지에게는 생명이란 분명한 사실이며, 생명의 양식은 무한한 현재이다. 그러므로 자살은 헛된 일이요, 따라서 어리석은 행위요, 앞으로 더욱 관찰해 감에 따라 자살은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의 가르침은 변하고 인간의 이지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자연은 미혹되지 않고 그 행동은 확실하여 숨기는 일이 없다. 무엇이든지 자연 속에 있고 어디나 자연이 있다. 어떤 동물에게도 자연의 핵심이 있으며, 모두가 가야 할 길을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걸어갈 것이다. 그들은 사멸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살다가, 자기 자신이 자연임을 의식하고 또 자연과 같이 불멸(不滅)임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을 것을 추상개념(抽象槪念)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때때로 어떤 기회에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만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연의 목소리는 강하고, 사려(思慮)는 이에 대하여 미력하다. 동물은 생각하지 않지만 동물이나 인간을 막론하고 그 의식의 밑바닥으로부터 언제나 자기 자신이 자연, 즉 세계 자체라고 믿고 여기에 안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죽음은 반드시 오며 또 언제나 오고 있지만, 인간은 이 때문에 아무 불안도 느끼지 않으며 언제까지고 죽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만일 죽음이 반드시 닥쳐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예컨대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과 다를 것이 없는데도 결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면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모르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듯싶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추상적인 이치로는 인정하고 있지만, 다른 일반 이론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옆으로 제쳐놓고 그것을 분명히 또 생생하게 인식하지 못하며 행실에는 전혀 적용시키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思考)에 이러한 특성이 있는 것에 대해, 단지 외관상 피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그대로 만족해 왔다는 심리적인 설명으로는 불충분하며, 그 근거는 더욱 깊은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지의 하나하나의 현상은 시간적으로 시작되어 시간적으로 끝나지만, 물자체인 의지에는 처음과 끝이 없으며, 모든 객관의 상대인 주관은 스스로 인식할 뿐 결코 타자(他者)에 의해 인식되는 일이 없고 이것도 처음과 같이 없으며, 또한 살려는 의지가 있는 곳에 반드시 생명이 있다. 이것은 충분히 밝혀진 바이지만, 이것과 지금 말한 사후의 생존에 대한 신앙은 별개의 것이다. 물자체로서의 의지나 또는 언제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인 순수한 인식의 주관에게도 다 함께 존속(存續)이나 멸망이 없는 존망(存亡)은 모두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의지와 주관은 의지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즉, 순수한 인식에 나타나 있는 의지현상)이 자아를 내세워 자기가 무한한 시간 속에 살아남으려는 소망은 이러한 차원의 불멸(不滅)에는 만족하지 않고, 따라서 그것으로 위로를 얻지 못한다. 자기가 죽은 후에도 자기 이외의 외계(外界)는 여전히 존속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외계의 존속도 방금 말한 우리의 견해를 객관적 또는 시간적으로 본 것이므로 그것은 자아의 만족은 되지 못한다.

 

각자는 현상으로서는 생멸(生滅)하지만, 물자체에는 시간이 있고 따라서 끝이 있다. 그런데 인간이 세계에 어떤 다른 형체가 되는 것은 현상에 있어서 일어나는 일이며, 또한 자기의 의식에서는 다른 형체가 되어 있지만, 물자체로서는 일체에 나타나 있는 의지와 동일체이며, 의지로서는 죽음이란 자기의 의식의 미망(迷妄)이다.

 

영생(永生), 즉 죽지 않는다는 것은 물자체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현상 쪽에서 보면 외계의 존속과 같은 것이 된다. 그리하여 지금 분명한 인식으로서 확인해 온 사멸(死滅)과 불멸의 한계선을 사람들은 다만 느낌으로서 마음속으로 의식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더라도 그에게 이성(理性)이 있는 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걱정하지 않고 누구나 이 의식을 마음 속에 지닌 채 용기를 갖고 마치 죽음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해 나간다.

 

그러나 한편 죽음이 누구에게 실제로 나타나거나 마음속으로라도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여기서 벗어나려고 애쓰기도 한다.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는 것은 그 고통 때문이 아니다. 고통은 죽기 전의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반대로 죽음의 순간은 실로 찰나(刹那)의 일인데 이것을 한때나마 벗어나기 위해 두려운 고통을 참기도 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고통은 전혀 다른 해악(害惡)이며, 죽음에 대하여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개체로서의 생존을 그치는 데 있다.

 

개체는 살려는 의지가 하나하나 객관화된 것으로서 죽음이 그것을 파기(破棄)하려고 하기 때문에 개체는 전력을 다하여 죽음에 저항한다. 그러나 감성만으로는 아무래도 이러한 저항은 힘을 쓰지 못하므로, 거기에 이성이 개입하여 감성만의 거리낌을 극복하고 그보다 높은 입장에 서서 개체보다 전체에 관심을 갖도록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인식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확정한 인식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만으로 이미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사고력으로 직접적인 느낌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의 정도에 따라서 그 공포는 제거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말해온 진리를 충분히 납득하였다고 치자. 그는 내가 주장하는 진리의 인식을 무기로 손에 쥐고 더욱 강한 자가 되어, 시간의 날개를 타고 오는 죽음을 싸늘한 눈초리로 노려보고 죽음이란 약자만을 위협하는 허망한 그림자요 무기력한 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자기의 본성은 의지로, 객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세계와 본성을 아울러 지닌 것을 알고 있는 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본성은 세계와 하나이므로 그 생명은 분명히 영구하며, 본래 의지는 다만 현재로서만 나타나고 그 현재는 가장 확실하다.

 

그 밖에 과거나 미래는 미혹이 조성하는 그림자, 마야(고대 인도에서 환영과 허위에 충만된 물질계를 뜻하는 말-譯註)에 떠도는 환상에 불과하므로 자기의 생명이 없는 과거가 있었는가, 미래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태양이 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듯이 죽음은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죽음은 철학에 진정한 영감을 주는 하늘의 선물로,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가리켜 「죽는 연습」이라고 말한 것도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마도 죽음이 없다면 철학을 생각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동물은 죽음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불가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자연에는 어떠한 침해를 당하더라도 구제의 방도와 적어도 그 보상의 길이 있으므로 죽음을 인정할 경우에도 이와 관련해서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거기서 위안을 얻고, 동물로서는 필요성도 느끼지 않고 또 엄두도 내지 못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여러 가지 종교나 철학은 주로 이 목적을 위한 것으로, 죽음은 도저히 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치료제가 된다. 인간은 우선 이성의 힘으로 이것을 생각해 내지만 그 목적을 이루는 정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어떤 종교 또는 철학은 다른 것 보다 훨씬 더 인간으로 하여금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모두가 살려는 의지이며 선천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또다른 얼굴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동물에게도 자기 자신을 보호할 배려(配慮)를 하는 본능과 자기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본능도 다 함께 천성으로 타고난 것이다. 동물이 위난을 당했을 때 자기나 자기의 태아(胎兒)를 보호하려고 무척 애쓰는 것은 단지 아픔을 모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천성에 의거한 행동이다. 동물이 도망쳐 숨거나 놀라 숨으려고 하는 것은 동물의 살려는 의지이면서 동시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조금이라도 이것을 연장시켜 보려는 것이다.

 

인간의 천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가장 큰 위해(危害), 어디서나 일어나는 이 위해 중에서 제일 고약한 것은 죽음이며 가장 큰 걱정은 죽는 걱정이다. 남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처럼 동정을 일으키고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없으며, 사형집행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생명에 대한 집착(執着)은 무한하지만 이것은 인식이나 숙려(熟慮)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숙려의 편에서 보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살아 있는 것은 생명의 객관적인 가치기준으로 보아 아무것도 아니다. 때때로 살아 있는 것과 소멸되는 것의 어느 편이 나은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소멸 쪽이 오히려 이득이 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일 무덤의 죽은 자를 일으켜 세상에서 다시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그들은 고개를 옆으로 흔들 것이다.

 

플라톤의 <변명(辯明)>편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견해도 이에 귀착되며 쾌활하고 명랑한 볼테르도 ‘인간은 삶에 애착을 느끼지만, 죽어가는 시점에서 인간은 결코 세상에 좋은 일이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고약한 유희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생명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 아무리 오래 목숨을 연장하더라도 그 몇 해 동안이란 죽은 후의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무나 마찬가지이다. 잘 생각해 보면, 이 한때의 생애를 위해 여러모로 걱정하면서 나와 타인의 생명이 위난을 당하여 떨고 있다거나, 혹은 죽음의 공포를 표시한 비극을 지어내는 것 등은 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집착은 강하지만 이치에 닿지 않고 맹목적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살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며, 생명에 아무리 고통이 많고 불안이 크더라도 그것을 최고의 보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의지는 본래 맹목적이므로 이런 집착을 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인식은 생명에 대한 집착의 원천이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편에 서며 하등 생명에 가치가 없음을 폭로하여 죽음의 공포와 싸운다. 그리하여 인식이 승리해서 인간이 용기를 갖고 침착하게 죽음을 맞아들이면 그것을 위대하고 고귀하다고 하여 존중하고, 우리 자신의 본성의 핵심이 되어 있는 맹목적인 의지에 대하여 인식의 승리를 구가(驅歌)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가 이 싸움에서 인식을 굴복시켜 끝까지 생명에 집착하고 닥쳐오는 죽음으로 인하여 허덕이던 끝에 실망 속에 죽어갔을 경우에 세상은 그를 비속하게 여기지만, 그는 우리 자신이나 자연 자체의 본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무한히 삶에 애착을 느껴 조금이라도 더 목숨을 연장하려고 애쓰는 것이 어찌하여 비천한 일로 경멸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생명이 자비로운 신의 선물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어찌하여 어떤 종교의 신자에게나 이것이 품격에 어긋나는 일인가? 또 어찌하여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 위대하고 고상하게 보이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첫째 살려는 의지는 인간의 가장 내적인 본성이다. 둘째, 이 의지는 맹목적이다. 셋째, 인식은 본래 의지와 관련이 없다. 넷째, 인식은 의지와 싸워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만일 죽음이 그토록 두려운 것은 소멸, 즉 비유(非有)라는 사념(思念)에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지 않던 때를 생각해 보고도 전율을 느낄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사후의 소멸도 생전의 무(無)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렇다면 그 편이 더욱 한탄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아직 없던 때도 헤아릴 수 없이 무궁한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전혀 괴로워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가 있지 않게 되어 이 그림자와 같은 생존의 한순간의 휴식 후에 제 2의 무궁한 시간 계속되는 것은 괴로워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존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을 맛보고 난 연후에 매우 탐스러운 것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결코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정신은 세계로 포괄(包括)하며, 또한 매우 훌륭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육신과 함께 무덤 속에 묻혀 버린다고 생각하니 못 견딜 노릇이라고 말하면서, 이 정신이 그러한 기능을 갖추고 나타나기 전에 이미 무한한 시간이 흘러갔으며, 그동안에는 세계가 정신이 없이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러나 인식이 의지에 매수되지 않는 한 이 문제처럼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즉,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무한한 시간이 경과되었는데, 그동안에 나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이 물음에 형이상학적으로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다.

 

“나는 언제나 나이며, 그 무한한 시간을 통하여 나라고 말한 것이 바로 나였다.”

 

그러나 이 대답은 당면한 경험적인 입장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앞으로 내가 없게 될 사후의 무한한 시간에 대해서도, 여태까지 없던 전세(前世)의 무한한 시간과 마찬가지로 간주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전세의 무한한 시간 속에 자기가 없었다고 하면 사후의 무한한 시간 속에 자기가 없다 하여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으며, 이 양자(兩者) 중간에 그것을 둘로 구획하고 있는 것은 꿈결 같은 일생이다. 사후의 생존이 입증된다면 생전에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하며, 인도인이나 불교도들이 일관해서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생전의 존재도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사후의 시간을 슬퍼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 있지 않던 때를 슬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치에 닿지 않으며, 자기의 생존이 지금 충족시키고 있는 시간과 그것이 충족되어 있지 않은 시간은 미래와 과거의 구별이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시간에 대하여 이러한 관찰을 떠나 그 자체를 보더라도 비유(非有)를 하나의 해악이라고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해악이니 이득이니 하는 것도 다 생존해 있어야, 즉 의식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의식은 수면이나 졸도에 의해서도 생명과 함께 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 없으면 해악도 없다는 것은 정한 이치이며, 또 그것은 안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해악이 발생하는 것은 다만 한순간의 일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을 관찰하여 ‘죽음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이를 해명하여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은 죽음이 없고, 죽으면 우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상실할 수 없는 것을 상실하더라도 이것은 해악이랄 수 없으며, 앞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전에 없었던 것처럼 조금도 놀랄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인식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을 두려워할 근거가 없으며 의식은 인식 속에 있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죽음은 아무런 해악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인식이 아니라 어떠한 생물도 지니고 있는 맹목적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말한 바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의지의 본성이며, 의지란 다름아닌 살려는 의지로 그 본성은 오직 생명과 생존을 원하는 강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인식은 본래 의지가 동물의 객체화된 결과로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인식의 매개로 의지는 이 현상과 자기를 동일시하여 자기는 이 현상에 국한되어 있다고 보고, 죽음은 이 현상이 끝장나는 것이라고 해서 이를 기피하고 온힘을 다해 배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는 욕구하고 인식하는 양면(兩面)이 있으며, 이를 잘 구별해 보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근원도 스스로 알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하여 상세히 말하고자 한다.

 

죽음이란 주관적으로는 뇌수(腦髓)의 활동이 중단되어 의식이 소멸되는 한순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에 뒤이어 이 중단이 다른 국부에 퍼지는 것은 죽은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으로 말하면 의식에만 관계되는 일이다. 의식의 소멸이 무엇을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누구나 잠이라는 형태를 통해 어느 정도 이것을 알 수 있으며, 또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는 사람은 처음에 시력이 사라지고 그 후에 곧 깊은 무의식 상태에 빠져들어감으로써 죽음을 아는 데 더욱 유용하다. 그동안의 감각은 불쾌한 것이 아니며 수면이 죽음의 형제라면 혼수상태는 그 쌍둥이 형제이다.

 

비명(非命)의 죽음도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중상을 입었을 경우에는 대체로 이를 느끼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느끼며, 또 경우에 따라서는 밖에 나타난 상처를 보고 비로소 알기도 한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곧 죽게 될 경우에는 이것을 발견하기 전에 의식을 잃거나, 다른 질환으로 죽게 될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물에 빠지거나 탄산가스로 질식하였거나 목을 매어 죽으려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고통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연사(自然死)‧노사(老死)‧안락사(安樂死) 등의 경우는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동안에 점점 사라져 버리듯이 생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노년에 이르면 정열이나 정욕이 점점 감퇴되어 그 대상을 느끼지 못하게 되며, 감동이 고정되고 표상되는 힘이 점차 약해져 그 형상이 희미해지고 인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시간은 재빨리 흘러가서 사건은 힘을 잃고 무슨 일이든지 그림자조차 희미해진다. 노쇠한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서성거리거나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일찍이 거쳐온 생활의 그림자나 유령으로서 생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이 그들에게서 더 파괴할 것이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은 형편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드디어 잠들게 마련이며, 그 꿈은...... 이것은 햄릿이 저 유명한 독백으로 묻고 있는 꿈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생명의 경로에는 형이상(形而上)의 기틀은 있으나, 이것을 유지해 나가려면 여러 가지 저항 때문이라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유기체가 밤마다 잠드는 것과 같은 상태이며, 그때에는 뇌수의 작용이 중지되고 또한 호르몬의 분비나 호흡‧맥박‧열의 발생이 감퇴된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생명의 움직임이 완전히 정지되는 것은 이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힘으로 보면 하나의 기이한 휴식으로, 죽은 사람의 얼굴에서 흔히 달콤한 안정의 표정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죽는 찰나는 괴로운 악몽에서 깨었을 때와 비슷할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인간은 대체로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해악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죽음이 어떤 선하고 바람직한 일, 좋은 천국(죽음)인 경우도 많은 모양이다. 인간의 생존이나 그 노력에는 극복할 수 없는 장해가 있어 언제나 충돌하며 불치의 병이나 위안을 얻을 길 없는 고뇌에 빠지는데, 이것들은 그 최후의 도피처, 대개 자연이 마련하는 피난처를 얻어 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간다. 본래 생물은 이 자연의 품에서 다른 사물과 함께 나와 한동안 나타나서 자기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생존에 유리한 상태를 바라며, 이에 얽매여있으므로 그 본래 나온 길은 언제나 열려 있어 아무때나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체에는 감각‧힘의 작용‧혈액순환‧생식작용 등이 중단되어 있다. 그러므로 추리해 보건대 지금까지는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던 것이 나에게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지금은 이에 움직이지 않고 그 작용은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 있다-한 걸음 나아가 이것이 의식으로서, 즉 지능으로서만 알려진 것(영혼)이 틀림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뿐더러 분명히 그릇된 추론(推論)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유기체의 원인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산물과 성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신체와 함께 부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에 따라, 혹은 건강과 질병에 의해, 또는 수면이나 혼수상태 및 각성 등으로 말미암아 여러모로 변화하여 언제나 유기적인 생명의 결과로서 나타나, 그 원인이 아니라 생멸(生滅)을 거듭하며 그 조건이 갖추어지면 나타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식이 착란을 일으켜 미치게 되어도 그 밖의 힘이 이와 동시에 쇠퇴하지 않고 생명에 위험을 주지도 않으며, 근육의 힘은 오히려 더 억세게 되고 다른 원인이 첨가되지 않는 한 생명이 단축되기는 커녕 더욱 연장된다.

 

그런데 유기적인 생명이 그쳤다고 해서 그것을 움직이고 있던 힘도 없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령 물레가 정지되어 있다고 해서 물레를 돌리던 소녀가 죽었다고 할 수는 없다. 진자(振子)가 그 중점으로 돌아와 조용해지고 하나의 살아 있는 개체처럼 보이던 것이 멈춰섰다고 해서 중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력은 무수한 현상 속에 지금과 다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또한 전기를 발하는 물체를 보더라도 전기가 끊겼다고 해서 전기 자체가 없어졌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연의 힘에도 구원성(久遠性)과 편재성(遍在性)이 있어 그 생멸의 현상은 그치더라도 이것들은 소멸되지 않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그치는 것을 가리켜 곧 생명을 부여한 힘이 소멸된 것, 즉 죽음이라해도 이것으로 인간의 전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3000년 전에 오디세이의 활을 잡아당긴 강한 팔은 지금 존재하지 않지만 지각이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힘 자체가 소멸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상세히 생각해 볼 때 오늘 활을 당기는 힘은 오늘 처음으로 이 팔에 생겼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중지된 생명을 지금까지 움직이고 있던 힘은 지금 발생하기 시작한 생명 속에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은 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보더라도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불멸임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사후의 생존의 증명으로서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는 없으며, 또 이것으로 기대하는 위안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불멸만 두고 보더라도 어떤 의미가 있으며 생명의 가장 내면적인 힘은 죽음에 구애되지 않는 무엇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생사를 거는 것 이상의 도박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극단의 긴장과 관심과 두려움을 갖고 대하며 우리의 안중에는 이 한 가지 일이 곧 일체 중의 일체가 된다. 이와 반대로 자연은 결코 기만하는 일이 없으며 정직하고 공명하여 이에 대해서도 인간과 전혀 다른 입장에 있는 <바가바드기타(薄伽梵歌)>의 키리시나처럼 개체의 생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동물이나 인간도 생명은 대수롭지 않은 극히 우연한 일에 좌우되어 있으며, 자연은 이것을 도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예컨대 길가에서 우연히 눈에 띈 곤충의 경우를 보라. 당신들의 발길이 가는 대로 무심코 한 발짝 내어디딘 것이 곤충의 생사를 결정하지 않는가. 숲 속에 있는 달팽이를 보라. 도망치거나 방어하거나 기만하거나 숨어버리려고 하여도 아무런 도구가 없으며 누구에게나 잡혀 죽도록 되어 있다. 또 물고기를 보라. 펴놓은 그물 속에서도 태평스럽게 놀고 있다. 개구리는 어떤가. 도망치면 목숨을 건질텐데도 귀찮은 듯이 잠자코 있다. 새의 경우를 보라. 솔개가 머리 위를 날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 양의 경우는 어떤가. 늑대가 숲속에서 잔뜩 노리고 있다. 이들은 아무 준비도 없이 언제 자기의 생존이 절단될지 모르는 위험 속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이 자연은 절묘하게 조화되어 유기체를 강자의 탐욕에 내맡길 뿐만 아니라 극히 맹목적인 우연(偶然)이나 어리석은 자의 자의(恣意)나 아이들의 폭행에 일임하고 조금도 돌보지 않으며, 이와 같은 개체의 멸망은 자연으로서는 예사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일, 따라서 무의미한 일이듯이 이 경우에 결과(죽음)는 원인과 함께 아랑곳없다고 공언(公言)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의 어머니가 이와 같이 그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조금도 보호하지 않은 채 엄청나게 두려운 위험에 내맡긴다는 것은 결국 그들이 소멸된 연후에는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와 숨게 된다는 이치를 깨달은 것을 의미한다. 그 소멸은 단지 하나의 장난에 불과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인간에 대해서도 동물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그 선언은 인간에게도 적용되어 개체의 생사는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도 또한 자연이므로 어느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생사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보는 것도 옳다. 우리 자신도 깊이 생각해 보면 자연의 이치에 따라 자연이 생사를 대하듯이 태연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 개체의 생명에 대하여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태연스러운 것으로 미루어보아 자연의 이러한 현상의 파괴는 그 진실한 본성에 조금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생사는 극히 보잘것없는 우연한 일에 지배될 뿐만 아니라 대체로 유기체의 생존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동물‧식물 할것없이 온르 생겼다가도 내일은 소멸되며, 생사는 신속히 변전되지만 그 이하의 무기물은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장수하며 물질은 무한한 수명을 누리고 있는데 이것은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단지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편견없이 객관적으로 사물의 이런 질서를 이해하게 되면 머리에 자연히 떠오르는 생각은 이 질서가 단지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이와 같은 끊임없는 생멸은 역시 사물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대적이고 외면적인 일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사물도 그 본성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며 끝내 비밀이고, 내적인 본성은 생명을 떠나 초연하게 연속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그것이 어찌하여 그렇게 되느냐에 대해서는 지각하거나 달리 해명할 수 없으며, 다만 일종의 요지경 속으로 그렇게 되어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편,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저급한 무기물은 아무 장해도 받지 않고 영속하는데, 가장 완전한 중생인 생물은 매우 복잡하고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유기적인 조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 근원에서 태어나서는 잠시 동안 살다가 무로 돌아가며, 다시 새로 태어났다가 무에서 생존으로 들어오는 동류(同類)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아 불합리하기 짝이 없으며 사물의 참된 질서일 리가 없으니 필경 이것을 뒤덮고 있는 표피, 즉 우리의 지력(知力)의 성능으로 하여 제한을 받고 있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자연이 하는 일로 이들 개체의 생존과 멸망도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이것을 필연적인 일이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사물의 성정(性情)과 세계의 질서에 대한 진실한 최종적인 선고가 아니라 실은 사투리가 섞인, 즉 상대적인 진실로서 소위 양념을 쳐서 맛보고 이해하여야 할 성질의 것으로, 사실은 우리의 지력의 제약 아래 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 주장해온 직각(直覺)의 이념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제약을 가하며 그가 평범한 족속이 아닌 이상 단지 개체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동물처럼 하나하나의 사물을 개별적으로 인식하는 능력밖에 갖지 못한 인간이 아니라면 누구나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진심으로 죽음을 자기의 파멸이라고 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비좁은 마음과 작은 머리를 가진 사람뿐이며, 뛰어난 사람은 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플라톤이 그 철학 전체를 관념설의 인식, 즉 개개의 사물 속에 편재한 것을 바라보는 인식으로 쌓아올린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베다》의 <우파니샤드>를 제창한 사람들은 실로 숭고한 사람, 거의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지금 내가 여기서 말한 바와 같은 자연의 이해에서 직접 나타난 이념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매우 활기찬 것이 있었을 것이며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마음을 울리는 데가 있고 그들의 정신이 그처럼 빛났던 것은 필경 이 현자들이 인류의 초기에 나타나 그 원천에 한결 가까이 접근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또 사물의 본성을 더욱 분명히, 그리고 심오하게 파악했고 그 활기가 이미 시들어 버린 인류(단지 인간에 그치는)가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을 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통찰은 인도의 활기찬 자연과 정면으로 대하여 우리 북방에서는 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 같다.

 

한편, 칸트의 큰 정신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전혀 다른 길을 통하여도 사색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같은 경지에 귀착되어 신속하게 변전되는 이 현상의 세계는 우리의 지력에 나타나는 것으로, 그 지력은 사물의 진실한 궁극의 본성이 아니라 다만 그 현상을 헤아릴 뿐이라는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나는 여기 첨가하여 지력은 본래 의지에 동기를 주는 역할을 하며, 의지는 그 세세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 유용할 뿐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다시 아무런 편견도 갖지 않고 자연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가령 개나 새‧개구리 또는 곤충의 어느 한 놈을 죽였다고 하자. 이 경우에 이 생물이 이렇듯 경탄스러운 현상을 지금 이 순간까지 살려 그 세력과 생명의 즐거움을 충분히 나타내 보여주던 그 근원의 힘이 나의 장난이나 경솔한 동작으로 말미암아 허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즉, 그 여러 종류의 동물들은 수천만으로, 이 순간에도 태어나 같은 모양으로 살아가노라고 애쓰고 있지만 이들이 모두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는 완전히 무였다면 그 허무 속에서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이와 같이 해서 한 마리는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지만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며, 다른 놈이 태어나지만 어디서 왔는지 알 도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생물체는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같은 성격을 소유하여 다만 그 물질이 다를 뿐이지만 그들의 생존 사이에도 끊임없이 배설을 되풀이하면서 모습을 새롭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사라져 버린 것과 그대신 태어난 것이 같은 본성을 지니고 다만 약간 변화되어 그 생존방식이 새로울 뿐이라면 종족 중에 죽음이 있는 것은 개체에 수면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퍽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누구나 어렸을 때에 그 두뇌에 그릇된 견해를 주입해서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그 길에서 떠나지 않는 한 이와 같은 견해를 끝까지 지니게 마련이다.

 

반대로 동물은 무에서 태어나며, 따라서 그 죽음은 멸망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무에서 태어났지만 그 후에는 개성을 지니고 의식도 갖게 되어 무한히 영존한다. 그러나 개나 원숭이는 죽어서 소멸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식이 있는 자라면 반대해야 할 일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학설을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보는 것은 그 진리의 시금석이 된다고 할 때 이러한 주장, 즉 데카르트로부터 칸트 이전의 절충가들 사이에 거론되어 왔으며 또한 오늘날에도 유럽의 식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 근본 견해를 시금석으로 삼기를 바란다.

 

자연의 표상으로서 어디까지나 정당한 것은 원(圓)이며 이것은 순환의 도형이지만, 자연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크게는 천체의 운행으로부터 작게는 유기체의 생사에도 적용된다. 시간과 그 내용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생성되는 생존, 즉 자연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이 방식에 의해서이다.

 

가을에 곤충의 소우주(小宇宙)를 관찰해 보라. 어떤 놈은 오랜 동면을 위해 잠자리를 만들고, 또 어떤 놈은 고치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번데기로서 겨울을 보내다가 봄이 되면 되살아날 준비를 한다. 그런가 하면 대다수의 생물들은 죽음의 팔에 안겨 휴식하며, 조심스레 그 알을 적당한 장소에 두었다가 언젠가 새로 탄생되도록 한다.

 

여기에 자연의 불멸이라는 큰 현상이 나타나서 수면과 죽음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것도 생존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곤충이 고치를 만들고 굴을 파며 둥지를 지어 그 알을 간수했다가 봄에 그 안에서 나올 애벌레를 위해 먹이를 장만하고 자기 자신은 죽어가는, 즉 그동안의 배려는 인간이 저녁에 입을 옷이나 이튿날 아침에 먹을 조반을 준비해 두고 안심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과 그 본성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없으며, 가을에 죽어간 곤충과 봄에 기어나오는 벌레가 동일함은 잠자리에 드는 인간이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인류의 입장으로 돌아가 멀리 미래를 내다보자. 미래에 대대손손 수백, 수천만의 개인이 태어나 여러 가지 풍습이나 복장을 하고 등장할 것을 생각하면 의문스럽지 않은가? 이들은 대체 어디서 왔는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새로 돌아올 세대들은 지금 숨어 있지만 이 세상을 영원히 거느리고 있는 이 허무의 품속은 어디 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하여 눈웃음을 머금고 답변해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답변은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실재(實在)가 언제나 있으며, 또 언제나 있어야 할 장소, 즉 이 현재와 그 내용의 밖이 아니라 바로 그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그대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은 마치 가을 하늘에 흩어지게 된 메마른 나뭇잎이 자기 신세를 슬퍼하는 것과 같으며, 봄이 되어 나무가 새 옆으로 단장할 것을 생각하여 스스로 위안하지 못하고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 다른 잎이다’하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리석은 잎이여, 너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그리고 또 다른 잎들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그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허무의 심연은 대체 어디 있는가? 바로 너희들 자신의 본성을 보라. 그처럼 생존을 갈망하고 있는 당사자가 곧 네가 아니냐? 나무에는 생생한 힘이 남모르게 깃들여 있어 아무리 잎들이 해마다 신진대사를 하여도 그 생멸에 구애되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다. 이것이 곧 너 자신이 아닌가? 그러므로,

 

‘해마다 잎사귀가 달라지는 것처럼 인간도 대대로 달라진다.’

 

지금 여기 내 주위에서 윙윙거리고 있는 파리가 저녁 때는 잠들었다가 내일 다시 윙윙거리거나, 또는 그 놈이 저녁 때 죽어서 봄이 되어 알에서 나온 다른 파리가 윙윙거리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 가지 근원에서 비롯되는 다른 것이라고 보는 인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며, 현상의 인식이기는 하지만 물자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한때 삶을 누리다가 곧 죽어간다. 초목과 곤충은 여름이 다 지나면 죽고, 동물과 인간은 몇 해 뒤에 죽는다. 죽음은 피로도 느끼지 않고 거두어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만물은 언제나 생존하고, 모든 것이 불멸인 것처럼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언제나 나뭇잎은 파릇파릇하며 꽃이 피고, 벌레는 윙윙거리며, 동물과 인간은 쇠퇴함이 없이 한결같고, 천 번 백 번 따먹은 벚나무 열매는 여름이 되면 언제나 있다.

 

개체가 죽지 않는 것처럼 여러 민족은 생존을 계속하고, 때에 따라 그 이름을 바꾸지만 그 행하고 애쓰고 고민하는 일들이 언제나 한결같으며, 다만 역사가 그것을 어느 정도 달리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란 백색의 안경과 같아서 한 번 돌리고 나서 그 안배(案配)를 바꿀 뿐 실상 눈앞에 있는 것은 언제나 한결같다. 이와 같이 탄생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은 사물의 진정한 본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며, 본성은 이에 구애되지 않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생존하려고 하는 것은 실은 모두가 시종일관하여 한결같이 생존한다.

 

11) 위대한 교훈

 

죽음이란 삶에의 의지가, 더욱 비근한 것으로는 이 삶에의 의지에게 본질적인 이기주의가 자연의 흐름 속에서 받아들이는 위대한 교훈이다.

 

죽음은 우리의 생존에 대한 벌(罰)로서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은 생식이 정욕과 함께 결합시킨 매듭을 고통과 더불어 풀어 버리는 것으로, 우리의 본질의 근본적인 오류를 밖으로부터 침입하여 파괴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며, 따라서 우리는 존재하기를 그친다.

 

이기주의는 인간이 타인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살아간다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단지 한 사람에게만 한정시키는 데서 비롯된다. 죽음은 이런 사람에게 좋은 교훈을 던져준다.

 

죽음은 이 사람을 소멸시키지만 이 삶의 의지, 즉 인간의 본질은 죽은 후에도 다른 개인 속에서 생존을 계속한다. 그러나 단지 현상에 지나지 않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속하며, 외부세계의 한낱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이 사람의 지성은 다만 표상 속에서만, 즉 사물의 이러한 객관적인 존재 속에만, 종래의 외계의 존재 속에서만 살아나간다. 이제야 이 사람의 자아는 지금까지 이 사람이 비아(非我)로서 간주한 그 속에만 종속된다. 내면과 외면의 구별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기되는 것은 내가 도덕의 근원에 관한 현상논문 속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선량한 사람은 자기와 타인 사이에 최소의 구별을 두어 타인을 완전한 피아(彼我)로 보지 않는 반면에, 악한 자는 자기와 타인의 구별이 큰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한 이런 구별의 정도에 따라서 죽음을 어느 정도 인간의 부정으로서 볼 것이냐 하는 정도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자타의 구별은 공간적인, 단지 현상 내부의 일이며 물자체(物自體)에 의거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결코 현실의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기의 개성의 상실 같은 것은 단지 현상의 소멸, 따라서 단지 가상의 손실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경험적 의식에서는 그 구별이 매우 현실성이 풍부하지만 형이상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나는 소멸된다. 그러나 세계는 존속한다’는 문장도 ‘세계는 소멸한다. 그러나 나는 존속한다’는 문장과 근본적으로는 틀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리 염두에 두더라도 자아가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는 죽음은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죽음을 이용할 수 있는 자야말로 행복한 자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의지에 자유가 없다. 인간의 불변의 성격 때문에 여러 가지 동기나 연쇄(連鎖)로 그 사람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의 기억 속에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하여 만족할 수 없던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누구나 생존을 계속해 나가는 한 그 사람의 성격의 불변성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행동할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존재의 싹에서 새로운 다른 존재가 발생케 하려면 현재의 자기 모습을 소멸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죽음이 그 결합된 사슬을 절단하는 것이다. 의지는 다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데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존재하는 데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매듭은 절단되고 모든 의문은 해소된다.’ 이 말은 베단타학파(學派)의 모든 사람들이 때떄로 되풀이한 매우 유명한 《베다(Veda)》의 격언이다. 죽음은 존재의 가장 내면적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일종의 혼란을 일으키는 개성의 일면성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순간이다.

 

진정한 본원적인 자유는 전에 제시한 의미에서 「현상(現狀)에의 복귀」로 보이는 순간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거의 모든 사자(死者)의 얼굴에 나타나는 평화와 안정도 여기에 유래되어 있는 듯이 생각된다. 대체로 선인(善人)의 죽음은 모두가 평온하다.

 

기꺼이 죽는 것은 삶에의 의지를 기각하고 부정하는 체념자의 특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만이 단지 겉보기뿐이 아니라 실제로 죽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자기라는 인간이 지속되기를 원치 않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이러한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생존을 기꺼이 버린다. 이런 사람에게 생존의 대신이 되는 것은 우리의 눈으로 보면 무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존도 그 대신이 되는 것과 관련시켜보면 역시 무(無)이기 때문이다. 불교신앙은 이것을 열반, 즉 소멸이라고 부르고 있다.

 

12) 臨終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자연의 품속으로 복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자연에는 속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이 양자택일을 나타내는 상(像)도 없고 개념이나 말도 없다. 개념이나 말 같은 것은 모두가 의지의 객체화에서 취한 것이며, 따라서 의지의 객체화에 속해 있다.

 

한편, 개인의 죽음은 자연이 삶에의 의지에서 언제나 되풀이하여 던지는 물음이다.

 

“너는 이것으로 족하냐?”

 

“너는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으냐?”

 

이러한 물음을 수시로 되풀이할 수 있을 만큼 개인의 삶은 짧은 것이다. 이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바라문의 의식‧기도‧경고 등을 생각해 내었다. 이 사실이 <우파니샤드>의 여러 곳의 여러 곳에 적혀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인간의 죽음에 경고‧참회‧성체배례(聖體拜禮)‧최후의 도유(途油) 등에 의해 이것을 적절히 이용할 것을 배려하고 있다. 기독교의 기도도 죽음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죽음으로부터의 수호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들이 벌써 삶에의 의지의 부정인 기독교의 입장에 서 있지 않고 이교적(異敎的)인 삶에의 의지, 긍정의 입장에 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이미 현재도 무임을 인식하고 자기 개인의 일(현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의해 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이 가장 적다. 이런 사람에게는 인식이 의지를 불살라 버리고 먹어 버렸기 때문에 개인의 생존에의 의지나 욕구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분명히 개성은 개체화의 원리를 형식으로 하는 현상을 반영하여 현상에 따르는 지성에 속해 있지만, 성격이 개인의 것인한 개성은 또한 의지에도 속해 있다. 그런데 개성은 의지를 부정하는 데서 기각된다.

 

그러므로 개성은 긍정의 의지에 속해 있는 것이지 결코 부정의 의지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 순수한 도덕적 행위에 속하는 신성함도 최후의 기반은 ‘모든 생명체의 내면적인 본질은 수량적 동일성에 있다’는 직접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데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동일성은 본래 의지 부정의 상태(열반)에만 존재하며, 긍정은 다양성 속에 있어서의 의지의 현상을 형식으로 하고 있다. 삶에의 의지의 긍정, 현상의 세계, 모든 존재의 다양성‧개성‧이기주의‧증오 그리고 악의(惡意) 등은 모두 한 뿌리에서 발생한다.

 

한편, 이와 마찬가지로 물자체(物自體)의 세계, 모든 존재의 동일성‧정의‧인간애‧ 및 삶에의 의지의 부정도 같은 뿌리에서 발생한다. 내가 지금까지 누누히 말해온 것처럼 이미 도덕상의 덕(德)부터가 모든 존재의 동일성의 통찰에서 비롯되지만 이것도 현상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물자체(物自體) 속에, 즉 모든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므로 유덕(有德)한 행동은 반드시 여기에 되돌아오는 것이 삶에의 의지의 부정인 일점을 잠시 통과하는 것이다.

 

13) 無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의 본질 자체는 의지이며 세계의 모든 현상은 다만 의지의 객체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또한 그 모습을 아래로는 어두운 자연력의 충동으로부터, 위로는 인간의 의식된 행동에 이르기까지 추구해 왔다.

 

그러나 의지의 기각과 함께 모든 현상도 기각되며, 객체화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충동도 기각되고, 다양성을 단계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형식도 의지 및 그 모든 현상과 함께 기각되어 끝으로 모든 현상의 일반적인 형식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시간‧공간의 최종 기본형식인 주관과 객관도 기각된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무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여 무 속으로 사라지는 데 저항하는 것은 자연이며 삶에의 의지이다. 삶에의 의지가 우리의 세계인 것처럼 우리 자신은 삶에의 의지이다. 우리가 유난히 무를 혐오하는 것은 우리가 유난히 삶을 원하고 삶에의 의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삶에의 의지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의 빈곤이나 집념에서 눈을 돌려 의지가 완전한 자기 인식에 도달한 자들-이들은 자기를 만물 속에 재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부인하며 자기를 살리고 있는 육체, 즉 잔존(殘存)하는 자기의 마지막 흔적까지 소멸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을 바라보고 우리가 간파하는 것은 끊임없는 충동이나 욕망에서 공포로 옮아가고 기쁨에서 고뇌로 옮아가며, 또한 허욕에 사로잡힌 자들의 생활이 꿈으로 돌아가고,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사멸하는 일이 없는 희망 대신에 완전하고 확실한 복음(福音), 즉 위대한 화평이요, 바다와도 같은 마음의 평온이며, 깊은 침착성이요,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명랑성이며, 바라문이나 코레디오가 그린 초상화도 단지 그 반영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복음이다.

 

다만 인식만은 남아 있으나 의지는 소멸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깊은, 그리고 쓰디쓴 동경에 충만하여 이 상태를 바라본다. 이 상태를 재앙으로 가득 차 구제할 길 없는 우리 자신의 상태와 견주어 보면 그 커다란 차이가 밝은 빛 속에 환히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한편으로는 구제할 길 없는 괴로움과 끝없는 재앙을 의지의 현상인 세계의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다른 편으로는 의지가 기각될 때 세계가 용해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공허한 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앞에서 말한 견해만이 우리를 계속적으로 위로해 주는 유일한 것이 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경험 속에서는 직접 만날 기회가 없지만 성인(聖人)의 생활이나 생애는 역사로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내면적인 진실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예술이 그 모습을 우리 눈앞에 그려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자의 생활이나 생애를 관찰함으로써 모든 덕행이나 존엄성의 배후에 최종목표로 삼아, 마치 아이들이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혐오하는 저 무에 대하여 어슴푸레한 인상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상을 얻기 위해 인도인들처럼 신화에 의지하거나, 드라마 속에 빠지거나, 불교도의 열반과 같은 내용의 공허한 말을 되풀이하는 먼 길을 취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이것을 자유롭게 고백한다. 완전한 의지의 기각 후에 남는 것은 여전히 의지에 충만된 자에게는 무이다. 그러나 한편, 이와는 반대로 의지에서 이탈하고 의지를 부정한 자에게는 모든 항성(恒星)과 은하(銀河)를 포함한 극히 현실적인 세계가 무이다.

 

 

 

연보

 

1788년  2월 22일, 독일 단치히 시에서 출생.  3월 3일, 신교의 성 마리아 대사원에서 세례받음.
1793년  자유시 단치히가 프러시아에 병합되자 온가족이 함부르크로 이사.
1797년  부친과 함께 프랑스 여행중 르아브르에 사는 부친의 친구 그레고아르 드 브레시마르의 집에서 불어를 배움.
1799년  르아브르에 2년 동안 머문 후 함부르크의 부모에게 돌아옴.  함부르크에서 철학박사 룽게가 교장으로 있는 사립학교에서 4년간 수학.
1803년  학자가 되기 위해 김나지움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유럽 여행을 마친 후 상인이 되라는 부친의 권유로 2년간의 장기 여행을 떠남.  네덜란드를 거쳐 영어공부를 위해 런던 교외의 윔블던에 있는 신부(神父) 랭카스터의 집에서 3개월 동안 유숙, 6개월간 런던 체류.
1804년  늦겨울을 파리에서 보내고 봄이 되자 프랑스 남부지방을 여행.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을 거쳐 베를린으로 향함.  이어 단치히로 가서 성 마리아 대사원에서 견신례(堅信禮)를 받음.
1805년  함부르크로 돌아옴.  상인이 되기 위해 호상(豪商) 이에보슈의 가게에서 견습생활을 함.  부친 사망.  모친 바이마르로 이주.
1807년  고타의 김나지움에 입학.  교장 데링으로부터 매일 2시간씩 라틴어 개인지도를 받음.
1808년  바이마르 김나지움으로 전학.  브레스라우 대학교수이던 파소우로부터 희랍어를, 김나지움의 교장 렌츠에게서는 라틴어 개인지도를 받음.
1809년  바이마르 김나지움 졸업.  괴팅겐 의과대학에 입학.
1810년  의과에서 철학과로 옮김.  G.E. 슐체로부터 철학을 배우고, 플라톤과 칸트를 철저히 수학.
1811년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
1813년  베를린 대학에서 4학기를 끝내기 전 전쟁의 불안 때문에 드레스덴으로 갔다가 바이마르의 모친에게로 돌아갔으나 의부(義父)와의 불화로 떠남.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대하여(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를 완성, 예나(Jena) 대학에 제출하여 철학박사학위를 받음.  괴테가 이 논문을 읽고 자기의 <색채론>연구에 동참하도록 권고함.
1814년  드레스덴으로 이주.  도서관과 미술관 등을 다니면서 학문과 예술을 연구.
1816년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Über das Sehen und die Farben)>>를 괴테에게 보냄.
1818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탈고.  이탈리아로 여행.
1819년  4월,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로 가서 부유하고 지체있는 여인과 열애.  바이마르로 돌아와 괴테 방문.  베를린 대학 철학과에 이력서를 제출.
1820년  3월, 베오크 교수 입회하에 <원인의 네 가지 다른 종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교직에 취임할 시험강의를 함.  베를린 대학에 강사로 취임하여 <철학 총론-세계의 본질과 인간 정신에 대하여>를 매주 강의.
1821년  <<하나의 가지>>라는 자서전적인 산문 집필.
1822년  <<편지 보따리>> 집필.
1825년  여자 재봉사가 쇼펜하우어의 하숙방 객실에 마구 드나들고 잔소리가 심해 그녀를 문 밖으로 떠민 이유로 소송당했다가 패소(敗訴).  그녀에게 평생 일정액의 부양료를 지불하게 됨.
1828년  <<비망록>> 집필.  <진리를 위해 생애를 바친다>는 표제 붙임.
1825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750부 중 600부 판매됨.
1829년  논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 발표.  칸트의 저서 영역(英譯)을 계획함.
1830년  <<사색>> 집필.  라틴어로 된 <<생리학적 색채론>> 발표.  <<센트포르스의 예언자>> 번역.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프랑크프루트로 이주.  <<콜레라書>> 집필.
1832년  모친과 서신왕래 재개.  바르타살 그라시안의 <<처세술신탁교육>> 번역.
1836년  <<자연에 있어서의 의지에 대하여>> 출판.
1837년  <<습유(拾遺)>> 집필.  프랑크프루트에 창설된 괴테 기념비 준비위원회에 <괴테 기념비에 관한 의견서> 제출.
1838년  노르웨이 왕립학술원에서 모집한 현상논문 <의지와 사유>를 발송.  모친 별세.
1839년  <의지와 자유>라는 현상논문 입선.  덴마크 왕립 아카데미에서 모집한 현상논문 <도덕의 근거>를 코펜하겐에 발송.
1840년  덴마크 아카데미는 쇼펜하우어의 논문을 낙선시킴.  영국화가 더 찰스 이스트레이에게 논문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를 발송.
1841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 문제>> 발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속편 집필.
1843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 2권(속편) 원고료 받지 않고 750부 간행.
1844년  고료 없이 제 1권 재판 500부 간행.
1845년  추밀원 법률고문관 F. 도루그트가 <<진리에 선 쇼펜하우어>> 간행.  <소품(小品) 및 보유집(補遺集)>> 집필.
1846년  철학박사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우어를 방문, 그 후 친교 맺음.
1847년  학위논문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대하여>를 대폭 수정하여 재판 간행.
1849년  여동생 아데레 사망.
1850년  <<소품 및 보유집>>을 원고료 없이 간행해 줄 것을 세 출판사에 교섭했으나 모두 거절당한 끝에 프라우엔슈타트의 주선으로 A.W. 하인 서점에서 출판을 인수.
1852년  <<노령(老齡)>> 집필.  함부르크의 <<계절>>지에서 <<소품 및 보유집>>에 대한 열광적인 찬사를 게재한 책자를 보내옴.
1853년  존 옥센포드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논한 <독일철학에 있어서의 우상 파괴>를 <<웨스터 민스터 리뷰>>지에 발표.
1854년  <<자연에 있어서의 의지>>와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 간행.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우어 철학에 관한 서간집>> 공표.
1855년  프랑스 화가 줄 룬테슈츠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함.  다비드 에이샤가 <독학(獨學)의 박사 쇼펜하우어에게 보내는 공개장> 발표.
1856년  룬테슈츠가 그린 초상화가 화려한 석판으로 나와 매출됨.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의 해설 및 비판>이라는 현상논문을 모집함.
1857년  카를 G. 벨(법률고문관)이 그 현상논문에 2등으로 당선.  이 논문을 <<쇼펜하우어 철학의 개요 및 비판적 해설>>이라는 표제로 출판.
1858년  2월 22일 70회 생일축하회 개최.  룬테슈츠가 쇼펜하우어의 두 번째 유화 초상화를 완성.
1859년  화가 안기르베르트 게이베르에게 유화 초상화를 그리게 함.  여류조각가 엘리자베스 네이에게 대리석 흉상을 조각하게 하여 모델이 되어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판 간행.
1860년  프랑스 <<독일 평론>>지에 마이어의 <쇼펜하우어에 의해 고쳐씌어진 사랑의 형이상학> 게재.  9월 21일 폐수종(肺水腫)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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