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후기
이 책은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그 밖에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 및 그의 인식론, 도덕론, 예술론 그리고 종교론 등을 추려 하나로 묶은 것이다.
쇼펜하우어 일생의 전반기에 대해서는 이 책의 첫머리에 있는 그 자신이 쓴 <나의 半生>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로 그의 후반기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그가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면서 한동안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주로 사색과 집필에 몰두하여 철학사상 큰 업적을 이룩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역시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단조롭고 외로웠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일생을 고독하게 보낸 것은 철학에의 집념보다도 여성에 대한 남다른 혐오에서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자는 그 모양새를 보기만 해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큰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에 대한 이와 같은 혐오감은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젊어서 여자를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는가?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는 연애를 했을 뿐더러 한때는 결혼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오빠가 알려온 아가씨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무척 괴로워요. 제발 그녀를 속이지 말아주세요. 오빠는 지금까지 모든 일에 옳았지만 가엾은 그녀에게도 같은 대접을 해주세요.”
이것은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正篇)를 완성하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1819년 베네치아에서 테레제라는 아가씨와 사귈 때 여동생 아데레가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이어서 쇼펜하우어가 베를린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는 극장 합창단원으로 있는 카롤리네 메돈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게 유산의 일부를 물려줄 정도로 쇼펜하우어와는 가까운 처지였으나 결혼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에게 결혼할 의향까지 일으킨 프로라 바이스와의 사랑은 상당히 뜨거웠던 것 같다. 1827년, 그때 화상(畵商)의 딸인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러나 결국 쇼펜하우어는 그녀와의 결혼도 단념하고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
그 일이야 어쨌든 쇼펜하우어가 자기의 철학체계에 자신을 갖고 베를린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당시에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던 헤겔과 대결하기 위해 일부러 같은 시간에 강좌를 맡았으나 청강생이 몇 사람 되지 않아 실의에 빠진 끝에 1831년에 콜레라가 내습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겁이 나서 베를린을 탈출하여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서 주저(主著)를 간행한 후, 20년의 침묵을 지킨 뒤에 <<자연에 있어서의 의지에 대하여>>를 간행했다(1856). 이어서 1859년, 노르웨이 아카데미에 응모한 현상논문 <의지의 자유>로 금메달을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덴마크 아카데미에 제출한 현상논문 <도덕의 근거>는 그 속에서 ‘양심이 도덕의 근원’이라는 논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탈락되었다.
그동안에 그의 주저(主著)를 간행했던 브로크하우스 출판사는 잘 팔리지 않는 이 책을 거의 다 휴지로 처분해 버렸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다시 이 인기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속편을 아무 사례도 받지 않고 역시 브로크하우스社에서 출판하였다.
1851년에 베를린에서 <<부록과 추가(Parerga und Paralipomena)>>를 내었는데, 이것이 상당한 호평을 받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바그너는 1854년 그에게 <<음악의 형이상학>>을 치사하는 말과 <니벨룽겐의 반지>의 악보를 보내왔다. 바그너는 생존시에 쇼펜하우어의 제자이기도 하였다. 한편, 모짜르트,베토벤,롯시니를 숭배하는 쇼펜하우어는 이질적인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직접 접촉하기를 피하였다. 그는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연주를 듣고나서 ‘바그너는 음악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1858년, 쇼펜하우어가 70번째 생일을 맞이했을 때 세계 방방곡곡에서 축사가 전해왔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변화가 없는 단조로움 일색이었다. 굳이 변화를 찾는다면 가정부가 바뀌고 애견의 털이 흰색에서 잿빛으로 변한 정도였다.
1860년 9월 21일 아침에 쇼펜하우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냉수욕을 하고 나서 식탁에 앉았으나 평상시와는 달리 몸이 좋질 않았다. 의사가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숨이 끊어지고 있었다. 유언장에는 친구와 가정부에게 물려줄 재산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는 1848년 혁명 때에 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죽은 프러시아 병사의 유족과 부상자에게 유산의 일부를 증정할 것이 씌어져 있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은 언제나 구경(究竟) 세계의 합리성과 선을 확신하기에 이른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헤겔철학의 전기(全期)에 쇼펜하우어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 항의하고 나섰다. 그는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악이며,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결과는 오로지 악일 뿐이라는 헤겔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이 염세철학도 헤겔학파와 마찬가지로 칸트에서 출발하였다. 칸트는 의지를 인식보다 우위에 두고 시간이나 공간은 사물의 성질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표상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칸트는 각자의 의지 속에는 개인생활의 어떤 사건과도 동떨어진 원죄, 즉 악의 근원이 있다는 기독교신학의 전통에 동조하였다. 이 점은 쇼펜하우어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칸트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존경심은 대단하여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 2판의 서문에 ‘나의 철학은 칸트에게서 나왔다’고 고백하고,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면 누구든지 두뇌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 정신적으로 재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철학을 모르면 순진한,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스럽고 어린이 같은 실재론에 사로잡히게 되어 다른 일에는 성공을 거두더라도 철학을 할 자격은 없으며, ‘이런 사람은 아직 미성년이고, 칸트에 정통한 사람이라야 성년이다’라고까지 극구 칸트를 옹호하고 있다.
이어서 쇼펜하우어는 인식론의 서두에서부터 형이상학으로 전환한다. 그는 모든 진리의 최종 근거와 원천이 ‘직접직관’ 속에 존재한다고 확언한다. 사람들이 가장 명확한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논리학,수학 및 순수한 자연과학 등은 모두가 그 확실성을 ‘직접직관’에서만 받게 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인식되는 모든 것, 즉 세계는 단지 주관에 대한 객관이며 따라서 세계는 나의 표상(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이며 현상이다. 이 현상은 시간,공간,인과율 등에 의해서 기술되는 과학의 대상이다. 여기까지는 칸트의 주장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만,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인식의 대상일 수 없다고 한 물자체(Ding an sich)를 의지 속에서 발견하였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가장 내적인 본질, 모든 현상의 유일한 핵샘은 의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심리학적인 그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의지(Wille zur Leben)요 힘이요, 끊임없는 노력이다. 우리는 의지를 인식할 수는 없으나 의지야말로 모든 생명체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사실이며, 우리 자신 속에 직접 직관할 수 있다. 이 의지의 객체화는 무기적(無機的)인 자연의 식물계,동물계 그리고 인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러 의지의 객체화 단계의 어디에 속한다. 가령 치아,목청,장(贓)은 객체화된 굶주림, 생식기는 객체화된 성욕이다.
이와같이 세계는 하나의 의지의 표현이지만, 의지는 현상이 되기 전에 시간,공간,인과율에서 독립된 일정한 형태를 취하고 나타난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을 본받아 이것을 이념(이데아)이라고 불렀다. 이념은 의지가 객체화하여 현상, 즉 표상이 되기 위한 단계이다. 즉, 이념은 의지가 객체화되는 형식이다. 의지는 직접 현상이 될 수 없고, 우선 이념이 되고 나서 그 후에 개개의 현상이 되므로 쇼펜하우어는 이념을 직접적 객체, 개물을 간접적 객체화라고 불렀다. 무기계(無機界)에서는 힘, 유기계(有機界)에서는 동식물의 종류, 인류에 있어서는 개성이다. 이념은 의지 자체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불변하며, 개체만이 끊임없이 생멸한다.
의지는 맹목적인 힘으로서 언제나 결핍되고 끊임없이 저지당하므로, 모든 삶은 고뇌로 가득 차 있다. 고뇌에는 끝이 없다. 결핍, 곤궁, 삶을 유지하기 위한 걱정이 첫째의 고뇌이다. 그리고 설사 이것들이 극복되더라도 뒤를 이어서 성욕, 질투, 증오, 탐욕, 병 등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모든 재화는 의지의 내적 항쟁에서 비롯된다.
뭇사람의 삶 자체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은 적극적이고 쾌락은 고통이 없는 상태로 소극적인 것이며, 곧 권태로 이행된다. 그러므로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없다. 욕망이 무한한 데 비하면 만족은 극히 보잘것 없는 것이다. 하나의 만족에 도달하면 곧 새로운 욕망이 고개를 든다. 게다가 세계 자체가 불만과 고통에 시달리는 의지의 표현이고 보면 평화나 안정은 순간적인 환영에 불과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고뇌와 투쟁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첫째는 예술에 의한 구제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참된 철학과 예술은 플라톤의 이념(이데아)을 천재적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이 이데아의 직관이야말로 건축, 조형, 미술, 문학 등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은 의지에 시달리지 않는 직관에로 높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일시적인 해설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자기 자신을 낳은 의지에 제약되어 있으므로 의지에 의해 다시 그 안개 속에 이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은 그렇지 않다. 음악은 의지 자체의 말이다. 음악은 이념의 모사(模寫)가 아니다. 의지 자체의 모사이다. 따라서 음악은 다른 예술과 같이 환영에 대해서가 아니라 본질에 대하여 말한다.
구제의 둘째 본래의 항구적인 일은 의지부정이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려면 도덕을 거쳐 종교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세계의 모든 재해와 허망함을 생각하여 일체의 개체는 같은 의지의 표시임을 깨달을 때 동정이 생긴다. 이것이 도덕의 기초이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고뇌에 동정하는 사람은 벌써 살기를 원치 않게 되어 살려는 의지 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금욕과 고행은 의지를 극복하는 수단이며, 그 목적은 의지의 완전한 소멸을 체득한 성자(聖者)들이 말하는 ‘신의 품속에서의 자기몰입’, 즉 무(無)에 도달하는 것이다.
천재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쇼펜하우어도 사후에야 세상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간행하면서 ‘인류에게 완성된 책을 물려준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곧 이어서 ‘물론 훌륭한 모든 저술이 참으로 알려지는 것은 후세의 일이다’라고 단서를 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사상이나 문체가 매우 예술적인 그의 철학은 특히 예술가나 예술적인 감각이 예리한 사상가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톨스토이는 그를 ‘전인류 중에서 가장 독창적 인간’이라고 불렀으며, 바그너는 ‘나는 독일의 정신문화에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인식이 법칙으로 간주될 날이 올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쇼펜하우어의 제자는 니체일 것이다. 물론 니체는 후년에 그와 방향을 달리하였으나 누구보다도 쇼펜하우어에 심취하였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적극적인 방면, 즉 의지의 긍정은 니체의 손에 의해 커다란 변모를 보기에 이르렀다. 니체는 이를테면 쇼펜하우어의 악마인 ‘삶에의 의지’를 자립의 신으로 삼고, 이를 탈각하는 수단으로써 자기포기를 주장하는 대신에 이것을 더욱 강력히 긍정하여 권력의지(Wille zur Macht)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권력의지는 쇼펜하우어가 불교나 기독교에 동조하여 역설한 우아, 동정, 체념 등의 도덕성을 배격함을 의미하며, 니체는 생존경쟁에서 승리를 획득하기 위한 무자비한 자기긍정을 주장하고 쇼펜하우어가 높이 평가한 덕성(德性)은 노예 도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인간은 모름지기 강자으 전형(典型)인 초인(超人:Ubermensch)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토마스 만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로, 그가 삶의 고뇌를 논한 것을 가리켜 ‘그의 천재적인 필재가 가장 빛나게, 또 가장 냉엄한 완성의 정점에 도달하였다’고 격찬하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기의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철학자가 공적인 입장이나 혹은 사적인 처지에서 완전히 도구로 사용되어 온 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러한 장해를 입지 않고 30년 이상이나 나의 사상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다만 본능적인 충동에서 그렇게밖에는 달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확신을 갖고 진실을 생각하고, 숨어 있는 빛을 밝게 드러낸 것은, 반드시 언젠가는 어떤 지각있는 사람이 알게 되어 그를 움직이고 희열을 느끼게 하며 마침내 마음의 평안을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나의 저작은 정직과 공명을 이마에 써붙이고 쓴 것이라 칸트 이후 유명해진 세 사람의 궤변가의 저작과는 크게 다르다. 나의 입장은 언제나 사려, 즉 이성에 따르고 정직한 말로 일관되어 있으며 지적 직관이니 절대사유니 하는, 바른 대로 말해서 허풍이나 사기와 같은 잘못된 영감을 주는 입장에는 서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정신으로 탐구했으며, 한편으로는 거짓과 사악이 널리 퍼지고 허풍(피히테와 셸링)이나 사기(헤겔)가 크게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하였다. 현대는 이 20년 동안 그 정신적 괴물 헤겔을 최대의 철학자로 떠들어대어 그 소리는 전유럽에 울려퍼지고 있다. 아마도 현대에는 사람에게 줄 월계관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찬미를 음매(淫賣)한 시대의 비난은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해서는 다른 모든 철학이 다 그렇듯이 찬반의 논란이 있어 마땅하지만, 그가 파헤친 세계의 적나라한 모습에 누구나 일종의 전율을 금치 못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이른바 속세의 모습을 속속들이 드러낸 것이다. 그는 여느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복음은 제공하지 못했지만 지혜는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쇼펜하우어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이런 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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