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8

rainbow3 2019. 10. 10. 22:38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의 위대한 질문⑧

 

엘리야! 네가 여기서 할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이냐?”(열왕기상 19:9, 13)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신의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들은 엘리야…그 소리는 돌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부숴 고귀한 영성을 부여한다

 

 

유대민족의 유일신관은 모세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은 유대민족이 야웨만을 섬기겠다고 한 계약이다. 사진은 모세가 야웨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 정상(2285m).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1856∼1950)는 그의 작품 <악마의 제자>에서 “동료인간에 대한 가장 사악한 죄는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이다. 무관심은 비인간성의 본질이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신과 연관된 공동체만을 위해 일생을 숨가쁘게 달려간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교육으로 무장하여 경쟁에서 승리하고 돈, 아름다움, 명성과 권력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현대인의 삶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점을 절실하게 깨달을 것이다.

 

20세기 초 유럽에 등장한 실존주의적 허무주의는 ‘무관심’한 삶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철학이론에 의하면 인생, 그 자체에는 내재적인 의미(意味)나 가치(價値)가 존재하지 않는다.

 

6000억 개의 천체 안에서 개개 인간, 아니 인간이라는 종(種)은 무시해도 될 만큼 미미하다. 인간은 광활한 우주 안에 던져진 미미한 존재로 일생 동안 그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카뮈 <이방인>에 나타난 ‘파멸적’ 허무주의

 

 

 

 

허무주의는 인간이란 동물은 머리를 쳐들고 자랑스럽게 걷지만, 마음 속은 조마조마하며 인생이 살만한 가치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허무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삶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대면해야 하며 결국은 모두 죽으며 철학이나 종교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만들어졌고 주장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의미를 찾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거나 미친 것이며 인간삶의 현실을 대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허무주의 전통은 기원전 3세기 헤게시아스라는 그리스 철학자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행복은 도달할 수 없으며 인생의 목적은 고통이나 슬픔을 피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헤게시아스는 부와 가난, 자유와 속박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는 무의미하며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역설한다.

 

그러니 삶의 목표는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즐기자는 것이다. 특히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니체는 이런 허무주의를 발전시켰다. 1940년 대에 프랑스에서는 사르트르라는 철학자가 <존재와 무>라는 저서에서, 그리고 알베르 카뮈라는 소설가가 <시지프스의 신화>와 <이방인> 같는 소설에서 허무주의를 확산했다.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이방인(L’Etranger, 1942)’에 등장하는 주인공 뫼르소는 프랑스령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사원이다.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여자 친구와 해수욕을 하며, 영화를 본 뒤 하룻밤을 같이 지낸다. 주인공은 사회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통념을 혐오한다.

 

뫼르소는 “어머니가 오늘 돌아가셨다. 아니, 어제인가. 확실하진 않다”라고 말한다. 희로애락할 줄 모르는 인간! 그는 인간이 왜 사는지를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자식으로서 애도의 감정을 보여야 하며,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는 어느 정도의 근신 기간을 가져야 하지만, 그는 여자 친구 마리의 눈치를 보아, 빈 말로라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고 직장에서는 승진하고 싶어한다는 시늉을 해 보여야 한다.

 

그는 레이몽이란 아파트 이웃이 포주라서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보고 ‘우리 모임에 들어오라’고 묻자 ‘그럴게’”라고 말한 후 레이몽의 친구가 되고, 그 친구와 반목하고 있는 아랍인과 마주쳐 대치하다가 대낮의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눈이 아물거려서 이유 없이 그 아랍인을 살해하게 된다.

뫼르소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왜 죽였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당치도 않게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판사는 사형을 선고한다.

 

뫼르소는 이 재판도 얼마나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느끼고 사제가 권하는 속죄의 기도도 거절하고 자기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는 모든 기성의 가치와 습관에 무관심하며 인생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카뮈에 의하면 인간이 가진 합리성과 세계의 불합리성은 부조리를 생산하지만, 대부분 인간들의 ‘의식’은 졸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부조리를 인식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새해가 되어도, 생일이 지나가도,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삼지 않는다. 과거는 순간이다. 아련한 수십 년의 기억들도 순간 안에서 존재한다. 지금부터 1년 후 오늘도 그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순간이다. 뫼르소 역시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삶이 허무하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스토아 철학에 나타난 인류애와 공동체주의

 

기원전 3세기에 등장한 스토아철학에서는 인간 최고의 형태를 ‘호모 아파쎄티코스(homo apatheticus)’라고 정의했다. 즉, 인간의 이성을 흔드는 감정과 충동은 인간의 행복을 해치는 일이기에 항상 금욕생활을 통해 평정심(아파테이아, apatheia)을 유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허무주의적 인간관과는 달리 동료인간의 삶에 깊이 관여함으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새로운 생각이 기원전 10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제도’라는 영적인 운동이다. ‘예언자’는 ‘신의 분노(ira dei)’를 자신의 삶으로 투영시켜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여겨 주저하지 않고 토로하는 인간, 즉 ‘호모 심파테티코스(homo sympathetikos)’이다.

 

대언자는 점쟁이처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공동체를 위해 신의 의지를 대신 말하는 ‘대변자’이다. 예언자는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우주의 기운을 감지하고 인간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자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예언자’에 해당하는 세 가지 히브리 단어가 있다. 이 단어를 살펴보면 예언자의 기능과 그 변천을 추적할 수 있다. ‘예언자’에 해당하는 세 단어 중 가장 오래된 단어는 ‘로에(roeh)’라는 히브리 단어이다. ‘로에’를 직역하자면 ‘보는 사람’ 즉 ‘견자(見者)’다.

 

고대 근동지방에는 미래에 일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의 ‘점’을 쳤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의하면 ‘바루(baru)’라는 사제들은 동물 내장의 모양이나 새가 비행하는 형태 혹은 기름이 물 위에서 드러내는 모양을 통해 미래 일을 점치려했다.

 

기원전 11세기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는 팔레스타인의 도시 ‘도르’에서 온 소년이 신이 들려 몸을 떨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고 기록한다. 성서에서 실제로 가나안 종교인 바알과 아세라 여신의 사제들은 황홀경에 빠져 춤을 추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고 증언한다.

 

두 번째 단어는 ‘호째’이다. ‘호째’는 ‘로에’와는 달리 신의 명령을 어떻게 아는지 그 과정을 언급하지 않는다. 호째는 직업적인 대언자도 아니다. 신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여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다. 호째를 굳이 번역하자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선견자(先見者)’라 할 수 있다.

 

‘예언자’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는 ‘나비(nabi)’이다. ‘나비’를 직역하자면 ‘신의 말을 전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다. 그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신의 음성이나 신들의 회의장면을 목격하고 그것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자’다. ‘나비’를 그리스어로 ‘프로페테스(prophetes)’ 즉 ‘(신을) 대신하여(pro) 말하는 자(phetes)’이다. ‘나비’는 '신의 입’이다.

 

기원전 9세기에 활동한 엘리야는 요르단 동편 출신으로 당시 가나안의 바알종교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했다. 엘리야는 털이 덥수룩하고 허리에 가죽 띠를 맨 전형적인 금욕ㆍ명상주의자였다. 그의 이름의 의미는 “나의 신은 야훼이다”이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을 휩쓸고 있었던 바알신앙에 과감하게 도전한 인물이다. 엘리야의 메시지는 항상 정곡을 찌른다. 바알신은 가나안 지방의 주 산업인 농경에 필요한 비, 천둥, 번개 그리고 이슬을 관장하는 신이다. 엘리야는 바알신앙을 배척하고 당시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과 왕비 이세벨,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 도전하였다.

 

바알신앙은 가나안에서 성행한 ‘풍요종교’로서 바알신과 아스다롯 여신이 성교를 통해 풍작을 초래한다고 믿었다. 이들의 종교의례는 성행위를 실제로 동반하는 성혼례를 치른다. 이들의 신전에는 커다란 목상에 세워져 있었으며, 이 목상 아래서 사람들은 아스다롯 여신 역할을 하는 신전창기(남창)와 실제 성행위를 포함한 종교의식을 거행한다.

 

 

 

 

물질만능주의 바알신앙에 도전한 엘리야

 

바알신앙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대대로 믿어왔던 신앙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이런 신앙이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스며들어온 계기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이 가나안의 도시국가 시돈왕의 딸인 이세벨과 결혼하면서부터다. 그는 이세벨을 통해 바알신앙을 수용하고 사마리아에 바알신전과 아세라 여신상을 세워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물질주의를 최선으로 생각하는 바알주의를 신봉했다.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의 문젯거리로 생각하였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물질만능주의 바알신앙에 엘리야는 야웨신앙으로 매번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도도하게 흘러내려온 조상들의 신앙전통을 강력하게 선포했다. 야웨신은 엘리야에게 아합을 만날 것을 명령한다. 아합과 그의 부인 이세벨은 야웨신을 섬기는 모든 예언자를 살해한 후였다.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라고 꾸짖기 시작한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오히려 거짓된 신들을 섬겨 이스라엘을 망친 자가 바로 아합왕이라고 호통친다.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려는 아합에게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한다. 아합왕은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공개적으로 엘리야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엘리야에게 갈멜산은 모세의 호렙산처럼 신을 만나는 장소였다. 갈멜산 정상에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엘리야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아합과 그를 추종하는 바알종교 선지자 850명이 진열했다. 이 광경을 목격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야웨가 만일 신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신이면 그를 따르라!”

천둥과 같은 엘리야의 외침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그들은 종교를 자신의 물질적 풍요를 위해 믿는 것이지,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정의를 위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깊은 신앙심과 사랑은 자연히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이것이 사회 안에서 실천되면 우리는 그것을 정의라고 부른다. 사랑과 정의는 동전의 양면이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엘리야는 누가 진정한 신인지 가르기 위해서 제물을 놓고 기도하여 그 제물을 불로 태우면 참 신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엘리야의 제안을 모든 사람이 수용하여, 두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서로 자기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한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아침부터 낮까지 단 주위에서 춤을 추며 황홀경으로 들어가 뛰기 시작했다.

 

초기 예언자 형태인 ‘로에’의 모습으로 열렬히 기도했지만 별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칼과 창으로 피가 나도록 자기 몸을 해하면서 더욱 큰 소리로 기도했으나 불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제 엘리야가 나선다. 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로 돌로 단을 쌓게 하고 단 주위에 도랑을 파고, 제물과 제단 위에 물을 12통이나 부었다. 이 물은 도랑으로 흘러가 도랑이 넘칠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제 사람이 아무리 불을 붙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엘리야는 기도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신 야웨여! 기적을 일으켜 불이 내려와 모든 이들이 마음을 돌이키게 하십시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핥듯이 살랐다. 야웨신이 실제로 불을 하늘에서 내려 기적을 보였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 내용은 야웨신의 불은 이스라엘들의 마음에 꺼져가던 불씨에 불을 지펴 자신들의 모습을 환하게 보게 했다고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자신이 가던 길에서 돌이켜 다시 야웨신앙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 엘리야는 바알선지자들을 기손 골짜기까지 쫓아가 그들을 숙청했다.

 

엘리야의 고뇌, “신이여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를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주었다. 이세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알신앙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엘리야가 보여준 야웨신의 놀라운 기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세벨은 자신을 따르는 바알선지자들이 집단적으로 살해됐다는 사실을 접하고 이제 자신의 지상 최고의 목표를 엘리야를 죽이는 일로 설정했다.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했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엘리야는 갈멜산 기적이 아합이나 이세벨의 마음을 돌이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엘리야는 두려워 목숨을 살리려고 급히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유다의 브엘세바는 이세벨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장소였지만, 엘리야는 미친듯이 남쪽으로 더 내려가 숨는다. 이세벨의 미움에 450명의 바알선지자를 꺾은 엘리야는 절망에 빠졌다.

 

엘리야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것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나무 아래 앉았다. 엘리야는 일생을 야웨신을 위해 바쳤고 심지어는 백성들을 바알신앙으로부터 돌아오게 한 기적까지 베풀고, 특히 이스라엘인들을 정신적으로 오염시키는 바알 선지자들을 전멸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이세벨의 살해 위협뿐이었다.

 

엘리야는 야웨신이 야속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이 허무하기도하여 자포자기로 죽기를 간청한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죽은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엘리야가 마침내 목숨을 끊으려 한다.

“내가 왜 지금까지 아등바등 살아왔는가? 인간은 죽으면 다 같은 것이 아닌가? 왜 야웨신은 나에게 확실한 신의 계시를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피곤함에 지친 엘리야는 비몽사몽간에 중얼거리면서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잠들었다. 그 때에 누군가 와서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우는 게 아닌가! 엘리야가 깨어 보니, 사방에는 아무도 없고,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 구워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두 번째로 누군가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했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 상황에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성서에서 ‘길’은 목적지가 아니다. 그 길이 있다고 믿고, 오늘 이 장소에서 일어서는 순간 그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절망의 순간에 누군가 나타나 새로운 ‘길’이 있으니 모색해보라고 응원한다.

엘리야는 왜 일어나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 길을 모색하기 위해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목숨을 건 여행을 시작한다. 그는 40일 밤낮을 걸었다.

 

성서에서 40은 실제 숫자라기보다는 시험과 역경을 포함한 아주 긴 기간을 의미하며 신의 뜻을 알리기 위한 영적인 시간이다. 성서에서 다윗왕과 솔로몬이 각각 정확히 40년 동안 치리(治理, 통치)했다.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비가 40일 밤낮으로 내렸고 이스라엘인들은 출애굽 후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산에 거주하였고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기 전, 사막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시험을 받았다.

 

 

 

 

‘섬세한 침묵의 소리’에서 신을 발견한 엘리야

 

엘리야는 40일 동안 자신만의 시간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된다. 40일 후 엘리야가 도착한 곳은 아주 높은 산, 호렙산이었다. 이전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에서 목동생활을 하다 호렙산에 들어가 가시덤불 가운데 야웨신을 만났고, 그 후 이집트에 들어가 이스라엘인들을 데리고 나와 광야생활을 하다, 호렙산에 40일 동안 금식과 기도를 통해 십계명을 받았다. 엘리야는 40일간의 광야생활을 통해 마침내 신을 대면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며 40일 동안 자신만의 시간을 사막에서 보낸다. 이 시간은 자발적인 고독의 시간으로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신과 동료인간들을 위해 새로운 삶의 가르침을 깨우쳤다.

혼자 있는 시간, 자신의 마음을 보는 시간을 통해, 미래를 위한 비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세도 단순히 몸으로 호렙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야웨신의 경지로 상승해 신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했다고 전한다.

 

엘리야는 호렙산에 있는 한 동굴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몸은 피곤했지만 영적으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야웨의 목소리가 마침내 엘리야에게 들렸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신의 첫 말은 다소 책망하는 소리였다.

“엘리야! 네가 여기서 할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이냐?”

엘리야는 그렇게도 기다렸던 신이 이런 질문을 할지 몰랐다. 야웨신이 명령하여 40일 밤낮으로 걸어와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동굴에 들어왔는데, 그는 왜 이런 질문을 할까?

 

분명 신은 엘리야가 왜 이 장소에 왔는지 알고 계신데, 그는 왜 이런 질문으로 엘리야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일까? 엘리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께 애원한다:

“저는 이제까지 주 당신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당신과 맺은 약속을 어기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저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말한다.

 

야웨는 절망에 빠진 엘리야에게 새로운 신의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말하신다: “이제 곧 내가 너에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 동굴 밖으로 나가 산 정상에 올라서라!”

엘리야는 허겁지겁 동굴 밖으로 나가 눈앞에 펼쳐진 심산유곡을 보았다. 갑자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크고 강한 푹풍우가 몰아쳐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다.

 

엘리야는 그 공포의 바람가운데 신의 모습을 찾았다. 그 바람은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흉흉한 바다를 제압하여 세상을 창조한 바람만큼이나 강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바람 가운데에서 야웨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다. 호렙산을 삼킬 만한 큰 소리가 나더니 땅이 갈라지고 산이 흔들렸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신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진 후에 용암과 불꽃이 튀고 산불이 났지만 그 불 가운데에도 야웨신은 없었다.

 

엘리야는 그 불이 난 뒤에, 세상에서 들어 본 적이 없는 신기한 소리를 듣게 된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엘리야는 새로운 가장 놀랍고 경외로 가득한 야웨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성서는 이 때의 신을 ‘섬세한 침묵의 소리’라고 증언한다. 성서에서 야웨신을 ‘섬세한 침묵의 소리’로 표현한 유일한 구절이다.

 

“침묵은 시온에 계신 신에게 바치는 찬송”

 

신을 만날 때는 사실 말이 필요 없다. ‘섬세한 침묵의 소리’ 그 자체는 신이기도 하면서 신을 만나는 도구이기도 하다. 엘리야는 이 목소리를 듣고 새 힘을 얻게 됐다. 이 신비의 소리는 우리의 육체적인 두 귀가 아니라 영적인 귀를 기울어야만 들을 수 있는 거룩한 소리다.

 

신의 섭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느냐가 관건이다. 한자로 ‘섭리’(攝理)라는 단어는 ‘아프거나 병에 걸린 몸을 잘 조리함’뿐만 아니라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혹은 ‘우주 삼라만상에 숨어 있는 신의 뜻’이란 의미다. 여기에서 ‘섭(攝)’ 자의 모양는 손과 귀 세 개로 구성되어 있다.

신의 섭리는 마음의 손을 추켜올려 육체에 달린 두 개의 귀가 아니라 오랜 묵상을 통해 하심 (下心)한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세 번째 ‘귀’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영감이다.

 

어떻게 하면 내적인 침묵의 소리를 도달하고 들을 수 있을까? 우리는 종종 겉보기에는 침묵할 수 있지만 머리로는 수많은 생각으로 마음이 요동친다. 우리의 영혼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걱정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침묵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에서 지우는 연습이다. 그 침묵의 순간이 바로 거룩한 휴식의 시간이다.

 

시편 65장은 “침묵은 시온에 계신 신에게 바치는 찬송이다”라고 전한다. 야웨신은 호렙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인들에게 천둥과 번개로 말하셨다. 야웨신은 수백 년 후, 엘리야에겐 자신의 현현방식을 대폭 수정했다. 야웨신은 모세에게 보여주었던 바람ㆍ지진ㆍ불 가운데 나타나지 않고 ‘섬세한 침묵의 소리’로 자신을 드러낸다. 신은 자신을 큰 소리가 아니라, 침묵으로 소통하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커다란 소리는 스스로 들리게 하지만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런 소리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거부되기 십상이다. 엘리야를 통해 야웨신은 인간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보다는 수용되고 이해되기를 원한다. 역설적으로 신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섬세한 침묵의 소리’를 선택했다.

 

신의 목소리가 ‘섬세한 침묵의 소리’가 될 때,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호렙산의 거친 폭풍우가 바위를 부순다면, 신의 침묵의 소리는 돌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부순다. 엘리야에게 신의 침묵이 사실 폭풍우나 천둥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침묵은 엘리야를 새로운 미래의 길로 인도하였다. 침묵으로 신의 말씀은 인간의 마음 깊숙이 들어오며 인간 마음의 골수를 쪼갤 수 있다.

 

엘리야는 마침내 신의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부여받았다. 그는 자살까지 생각했던 극한의 상황에서 사막을 40일 밤낮으로 헤매며 신에게 절규했다. 마침내 거룩한 산, 신이 계신 곳, 호렙산에 들어서게 되고, 다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동굴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엘리야는 환희에 차 자신의 외투 자락으로 얼굴을 감쌌다. 인간의 오감을 넘어선 신의 얼굴을 대면할 수 없었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일어나 동굴 어귀에 다시 섰다.

 

야웨신은 조금 전의 질문을 다시 한다:

“엘리야! 네가 여기서 할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이냐?” 엘리야도 이전과 같은 대답을 한다.

“저는 이제까지 주 당신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당신과 맺은 약속을 어기고 주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저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지만, 그는 이제 새로운 미션을 부여받을 마음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러자 야웨는 엘리야에게 세상에 내려가 신의 뜻을 펼치라고 말한다.

“다시 광야길을 건너 다마스커스로 가서 하사엘을 왕으로 세우고, 북 이스라엘로 가서 예후를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엘리사를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그리고 바알신앙에 물들지 않은 7000명을 남겨 새로운 역사를 펼칠 것이다.”

 

“존재의 이유를 알아야 초월한다”

 

미국의 극작가 아더 밀러는 1964년 <비치에서의 사건(Incident at Vichy)>이란 작품을 썼다. 프랑스 비치라는 도시에 나치가 들어와 유대인을 색출하기 위해 사람들을 심문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본성, 죄의식, 공포, 그리고 삶의 의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비치에 사는 한 부유하고 학식이 많은 신사가 나치 앞에 섰다. 그는 자랑스럽게 나치에게 대학 졸업장, 유명인사로부터의 추천서 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서류를 내보였다. 그러자 심문하던 나치가 그를 힐끗 쳐다보면서 “이게 전부냐?”라고 물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자신이 일생 동안 매달려온 이 서류를 보며, 나치에게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치는 그 서류들을 책상 옆에 있는 휴지통에 쓸어버리며 “이제 당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알았지!”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항상 다른 사람의 존경과 인정으로 인생을 살았던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온 존재가 파괴되는 고통을 느꼈다.

 

철학자 니체는 “인생을 사는 이유를 가진 자는 인생의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삶의 존재 이유를 아는 사람은 외적인 성공이나 실패를 초월할 수 있다. 인생의 고통이란 견딜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지닌 사람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엘리야는 신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실제로 자기 삶의 존재 이유를 듣지 못했다. 삶의 거룩한 소명을 40일 밤낮 내면으로의 깊은 영적인 여행을 통해 부활시켰다. 목숨을 끊으려 했던 엘리야는 호렙산에 올라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엘리야 자신의 마음 소리였다. 너무 섬세하고 미세하여 오랜 세월 수련한 사람에게만 선물로 주는 ‘침묵의 소리’가 신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