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9

rainbow3 2019. 10. 10. 23:45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 신의 위대한 질문⑨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요나서 4장 4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두려움 무릅쓰고 깨달음의 진실 추구하는 자세…신과의 대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함 불러내야

 

 

인간에게는 ‘에고’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위대함’이 숨어 있다. 이스마엘과 아합은 이 잠재성을 인식하고 숭고한 여행을 떠난 용기 있는 인물이다.

 

 

미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로 여겨지는 허먼 멜빌이 1851년에 쓴 작품 <모비딕>은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다오(Call me Ishmael!)”로 시작한다. 이스마엘은 이 작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달하고 분석하고 예견하는 인물이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이스마엘은 인생에 대한 깊은 회한을 통해 영적인 병에 걸려 바다로 가려고 한다. 바다는 혼돈과 죽음의 상징이다. 명목상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가려는 사람은 사실은 무모한 일에 도전하는 자이며,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려는 자다. 이스마엘을 포함하여 ‘피쿼트’라는 포경선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다.

 

이스마엘은 소설의 내레이터다. 그는 종종 예술, 지질학, 법률과 문학작품에 대해 분석하는 것으로 보아, 현명한 사람이며 박식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는 스스로 포경선이 “그의 예일대학이며 하버드대학이다!”라고 외친다. 자신의 삶을 경건하게 대하고 그 경험으로부터 자수성가한 르네상스적인 인간이며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는 자유인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 ‘모비딕’처럼, 이스마엘도 신비한 인물로 남는다. 또한 그는 작가 허먼 멜빌의 제2의 자아다. 멜빌은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노동자들과 어부들의 세계를 이스마엘을 통해 자신의 심오한 세계관과 철학을 <모비딕>을 통해 풀어낸다.

 

멜빌은 이스마엘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모비딕>은 아마도 내레이터를 통해 저자와 독자의 관계를 첫 문장에서 설정한 첫 소설일 것이다.

 

성서인물인 이스마엘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지만 후대 신의 은총을 입어 무슬림들의 조상이 된 입지전적 인간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씨받이 하갈을 통해 태어났으나,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이삭을 출산하자 쫓겨난다. 그의 이름은 ‘이스마엘’, 즉 “신이 그의 울부짖음을 들으신다”라는 의미다.

 

불쌍한 영혼, 비참한 방랑자 이스마엘

 

하갈과 이스마엘은 사막에서 비참한 방랑자가 되었다. 그는 불쌍한 영혼이다. 신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축복을 거부당하고 가난에 찌들려 광활한 사막을 돌아다닌다. 이 첫 문장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다오!”는 자신이 피쿼트에 승선하기 전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은 인간인지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피쿼트라는 포경선을 타고 경험 할 흥미진진한 삶의 이야기를 자신의 눈을 통해 전달해 주겠다고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스마엘은 수많은 여행을 했지만 포경선을 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포경 선원들이 머무는 미국 동부 메사추세츠의 뉴 베드포드라는 마을로 간다. 이스마엘은 뉴 베드포드에서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남태평양 출신 ‘퀴쿠엑’ 라 불리는 온몸이 문신으로 새겨진 어부와 한 방에서 지내게 된다. 퀴쿠엑은 고향에서 이웃부족과의 전쟁 후에 적들을 잡아먹었다고 뽐낸다. 한번은 50명을 잡아먹다가 소화불량으로 고생했다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는 고향을 떠난 후, 더 이상 ‘식인’을 할 수 없어 대신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선호하며, 그런 메뉴가 없을 때에는 대합을 넣어 만든 야채수프인 ‘크램 차우더’를 즐겨먹는다고 말한다. 자신이 추장의 아들이지만 문명화된 그리스도교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뉴 베드포드에 오게 되었다. 퀴쿠엑은 작살을 잘 다루는 어부였다. 포경잡이에서 저녁 늦게 돌아온 퀴쿠엑은 우연히 이스마엘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처음 퀴쿠엑은 이스마엘을 죽이겠다고 난리쳤지만 여관 주인의 개입으로 이 둘은 친구가 된다. 이스마엘은 퀴쿠엑의 착한 마음씨에 서서히 감동되어 이 둘은 서로 의기투합하고 포경선을 탈 것을 결심한다. 그들은 미국 동부에서 고래잡이 산업의 전통적인 섬은 낸터컷으로 배를 타고 간다.

 

이스마엘과 퀴쿠엑은 향유고래의 뼈와 이빨로 장식된 무시무시하게 생긴 피쿼트라는 표경선에 승선한다. ‘피쿼트’라는 이름은 17세기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에 거주했던 미국 원주민으로 전멸된 부족이었다. 이 부족의 이름을 딴 배의 이름 피쿼트는 승선한 모든 사람의 운명을 예견한다.

 

피쿼트는 추운 크리스마스 날 여러 인종이 섞인 선원들을 싣고 고래를 잡으러 나선다. 배가 따뜻한 바닷물을 만나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아합. 그는 향유고래의 턱으로 만든 의족에 의존하여 용의주도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갑판에 등장한다. 멜빌은 ‘아합’이란 이름을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왕 이름에서 따왔다.

 

아합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이세벨이 신봉하는 바알종교를 들여와 이스라엘을 혼돈에 빠뜨렸다. 아합과 이세벨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피쿼트의 선장 아합도 전형적인 영웅이다. 고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아킬레우스와 오이디푸스, 셰익스피어의 햄릿, 그리고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치명적 결함이 있다. 그것은 ‘자만심’이라고 번역되는 ‘휴브리스(hubris)’이다.

 

 

 

 

아합은 주체할 수 없는 자만심의 노예가 되어 자신이 신처럼 원하는 바를 자연의 이치에 거스른다 해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합은 전형적인 비극영웅으로 우리로 하여금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불행이 과한 것처럼 보이며, 동시에 우리도 그와 같은 불행에 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아합은 자신의 한쪽 다리를 물어뜯어간 엄청난 고래를 이 세상의 악의 화신으로 여긴다. 그는 이제 이 전설적인 흰 고래를 포획하러 마지막 여정에 나선 것이다.

 

바닷속 심연, 모비딕의 정체는?

 

아합의 천적인 모비딕은 향유고래이다. 독자는 모비딕의 생각이나 감정, 의도를 감지할 수 없다. 많은 비평가가 모비딕을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전지전능한 신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모비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좌절시키며 그를 정복할 방법은 없다.

 

인간이 모비딕에 대처하는 방법은 모비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거나 도피하는 일이다. 이스마엘은 고래의 특징을 표현하려고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실패한다. 이스마엘이 지적한 것처럼, 고래는 바다 밑에서 생활하기에 인간은 고래가 물에 잠깐 올라왔을 때 관찰할 뿐이다.

 

모비딕은 바다와 같다. 인간은 바다의 수면만 볼 뿐이다. 바닷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바다의 심연을 본 적이 없다. 더욱이 이스마엘은 고래 전체를 본 적이 없다. 그는 고래의 어느 부분이 뼈대이고 머리인지, 그리고 지느러미인지 가늠할 수 없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모비딕이다.

 

<요나서>는 구약성서에서 4장으로 구성된 예언서 중의 하나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은 <요나서>의 영감을 받아 재해석한 소설이다. <모비딕> 전체에 요나의 주제들이 곳곳에 숨어 이야기를 구성하는 신화소(神話素: Mythmes)가 되기 때문이다. <요나서> 없이 <모비딕>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멜빌은 <모비딕> 9장에서 이스마엘과 퀴 은 뉴 베드포드에서 포경선원들의 예배당에 간다.

 

12월 일요일 아침에 그 교회에서 메이플 신부가 전하는 요나에 관한 설교를 듣는다. “선원 여러분! 이 <요나서>는 4장, 즉 네가닥의 실로 구성되어 있어 성서의 강력한 철제 밧줄과 비교해서는 보잘것없는 가닥들입니다. 선원 여러분! 이 이야기는 저와 죄가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살아계신 신이 있다는 안내서입니다.

 

요나의 죄는 그가 의도적으로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 요나는 신으로부터 도망쳐 신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만든 배가 신의 힘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멜빌은 존경받는 메이플 신부의 설교를 통해 인간들이 만든 배도 신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비딕>은 신이 인간에게 가하는 심판의 도구라는 주제를 암시한다.

 

요나는 고대 이스라엘왕 여로보암(기원전 786∼746)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다. 느닷없이 신은 요나에게 신탁을 통해,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정복하려고 전쟁을 걸어오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신의 말을 대신 전하라고 명령한다. 이스라엘의 신이 앗시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회개의 예언을 전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민족주의자인 요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신봉하는 신이 이스라엘인들만을 위한 신인데, 그들의 생존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앗시리아로 가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신의 명령을 용납할 수 없었다. 요나에게 ‘신’이란 자신이 속한 민족공동체와 신앙공동체만을 위한 신이지, 모든 민족을 위한 신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나는 신으로부터 도망쳐 ‘다시스(Tarshish)’로 가려고 항구 욥바(오늘날의 텔 아비브 근처)로 갔다. 그가 욥바에 도착했을 때 다시스로 가는 배는 이틀 전에 떠난 후였다. 유대인 전설에 의하면 그 당시 며칠 전부터 해일이 일어나 그 배가 다시 욥바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다시스’가 어디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학자들은 ‘다시스’가 바울의 고향인 터키의 ‘다소(Tarsus)’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스에 대한 다른 어원은 ‘노(櫓)’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타르소스’에서 유래했다. 지중해에서 바람이 없는 경우 닻을 이용하는 배는 항구에 정박해 놓지만, 닻이 없이 ‘노’를 이용해 항해하는 배는 항상 항해할 수 있기 때문에 정규적인 항해를 하는 상인들이 선호했다. 요나는 해일로 다시 돌아온 배를 욥바에서 발견하고 승선했다.

 

 

 

 

 

“깊은 잠을 자는 자여! 신께 도움을 청하라”

 

요나가 승선한 배가 항해를 시작하자마자 큰 해일이 불기 시작하여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사공들은 공포에 질려 제각기의 신을 불러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다. 이들이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는 높은 파도와 함께 흔들렸고, 살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모든 물건을 바다에 집어던졌다. 요나는 일생 동안 사회정의와 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예언자로 살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요구를 거절하고 스스로 자포자기의 상태로 진입한다.

 

배가 좌초될 상황에서 자신은 배의 맨 아래층으로 내려가 ‘깊은 잠’으로 진입한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잠은 두 가지가 있다. ‘야센’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비활동적인 상태가 되다, 잠자다”라는 의미이고 ‘라담’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잠에 골아떨어지다, (약물에 취해) 깊이 자다”라는 의미이며 종종 신과 대면하기 위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행위를 내포하기도 한다.

 

요나는 자기가 누구인지 배의 맨 아래층으로 들어가 누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깊은 잠을 자게 된 것이다. 요나가 탄 배가 높은 파도와 폭풍으로 좌초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요나는 전신 마취한 환자처럼 심연의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선장이 요나를 깨우면서 “깊은 잠을 자는 자여! 신께 도움을 청하라. 혹시 당신의 신이 우리를 기억하고 죽지 않게 할 수 있다!” 선원이나 어부들은 광활한 바다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운명이 얼마나 하찮은지 매일매일 깨닫는 사람들이다. 약간의 기후변화로 인해 자신들이 쉽게 죽음의 위험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무명 선장의 말은 고대 이스라엘의 신관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질문이다.

 

이스라엘신이 이방인인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자가 바로 무명의 선장이다.

인간들이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모두 방법을 강구하게 될 때, 죽음의 그림자를 거둘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찾게 된다. 선장은 오랜 항해를 통해 일생 동안 보지 못한 엄청난 해일을 잠재울 존재는 신밖에 없다고 직감했다. 모든 선원과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데, 배 밑창에서 ‘깊은 잠’을 자는 요나가 이 어려움을 해결해 줄 열쇠를 쥔 인물이라 직감했다.

 

선장은 누가 이런 재앙을 초래했는지 알기 위해 제비를 뽑자고 제안한다. 고대 사회에서 제비를 뽑아 신의 뜻을 헤아리려는 수 많은 풍습이 존재했다. 구약성서 <에스더서>는 전체가 ‘푸림절’ 축제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푸림’이란 말이 ‘제비뽑기’라는 의미다. <에스더서>에서는 신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과를 조작하기도 한다.

 

하만은 페르시아 제국의 사제로 유대인을 몰살 할 방법을 찾고 있었을 때, 제비를 뽑았다. 성서는 신이 개입하여 제비가 열두째 달에 떨어져 충분한 시간을 벌어 하만의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일반인들이 점을 치거나 제비를 뽑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이 행위는 사제의 특권이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가슴받이에 신성한 돌을 지니고 다니면서 신의 뜻을 알려고 시도했다. 다윗왕은 전쟁 전에 점을 쳤고, 실제로 이스라엘 왕들은 전쟁 전에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점쟁이나 예언자들에게 물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찾으려 할 때, 그들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에게 기도했고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제자로 영입했다.

 

‘경외한다’는 것은 무지의 고백이다

 

제비는 ‘당연히’ 요나에게 떨어졌다. 선원들은 요나에게 자신들이 처한 재앙이 초래된 이유를 묻는다.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가? 네 직업과 고향, 네 나라, 너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라!”

요나는 “나는 보잘것없는 히브리 사람입니다만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야훼신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망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경외한다’라는 의미는 사물과 생물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그것들에 대해 자신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깨달음이며 그 깨달음을 통해 삼라만상에 대한 신비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영어로 그런 상태를 ‘awe’라고 하고 그것에 대한 표현을 ‘awesome’이라 한다. 요나는 ‘깊은 잠’을 통해 자신과 신의 전지전능을 깨달은 것이다.

 

요나가 아무리 도망쳐도 부처님 손바닥인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선원들은 기겁했다. 이들의 항해에 부정이 탄 것이다. 인간이 자기가 꼭 해야 할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회피할 때, 그것이 초래하는 불행은 그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교훈이다. 요나의 자기희생적이며 삶의 모델이 되는 행동을 기대한 선원들은 요나의 무책임한 회피가 가져다 줄 불행을 몸소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나에게 소리쳤다. “어쩌자고 당신은 이런 일을 하였소?”

 

파도가 점점 거세지자 선원들은 당황했다. 요나는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당신들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바로 나 때문에 이 태풍이 당신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

선원들은 요나의 자포자기의 말을 듣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선원들은 육지로 되돌아가려고 사력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요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면서 신에게 기도 한다.

 

“주님, 빕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주십시오.”

그들은 요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졌다. 폭풍이 일던 바다가 잔잔해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배와 같다. 각자가 맡은 일을 책임 있게 행할 때 인생이란 항해를 안전하게 마칠 수가 있다.

 

요나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망할 때,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요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신은 바다에 큰 물고기, 고래 한 마리를 마련해두어 그를 삼키게 했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낸다.

 

큰 물고기가 요나는 삼켰다는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말 사람이 고래 뱃속에서 3일 동안 지낼 수 있는가? 요나가 큰 물고기 안에서 3일 동안 지냈다는 이야기는 은유나 상징일 수밖에 없다.

심층심리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큰 물고기의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한다. 그곳은 자연이며, 밤이고, 죽음이다. 여기에서 충분한 시간을 지내야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요나서> 2장에는 느닷없이 신을 찬양하는 노래가 등장한다. 요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야훼를 불렀더니, 야훼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스올(사후세계) 한 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외쳤더니, 야훼께서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바다 한가운데, 깊음 속으로 던지셨으므로 큰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야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습니다.”

 

선과 악, 신과 인간의 합일 발견한 요나

 

요나는 배 밑창에서의 깊은 잠을 큰 물고기 뱃속이라는 더 근원적인 장소에서 경험하며,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장소에서 한 번 더 자신을 바라본다. 그가 내려간 곳은 다름아닌 ‘스올’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모두 ‘스올’로 간다고 생각했다. 이 스올은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새로운 탄생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통로이기도 하다.

 

요나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물이 나를 두르기를 영혼까지 하였으며, 깊음이 나를 에워쌌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휘감았습니다. 나는 땅속 멧부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 가두어놓으려 했습니다만, 야훼, 나의 하나님, 야훼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지셨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상태인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에 가서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인 ‘깊음’으로 간다. 거기에서 거대한 산의 뿌리인 멧부리를 목도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과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의 심연이 하나임을 발견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관과 우주관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닫는다.

 

요나는 거기에서 소크라테스식의 깨달음인 ‘자신의 무지’를 발견한다. 서로 화해할 수 없고 일치할 수 없는 양극의 합일, 선도 악도 없고, 신도 인간도 없고, 모두가 하나인 상태를 발견한다. 소위 ‘양극의 일치’인 ‘코인시덴티아 오포지토리움(coincidentia oppositorium)’을 경험한다.

 

야훼는 ‘뭘 좀 아는’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기로 약속한다. 야훼는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뭍에 뱉어냈다. 요나는 우주 삼라만상의 원칙을 목격한 후, 더 이상 도망치는 비겁자가 아니라 신의 명령을 새롭게 수행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요나는 야훼의 미션을 다시 듣는다.

“너는 어서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외쳐라.”

요나는 고래 뱃속의 경험으로 이제 힘을 얻어 외친다.

“사십일 후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요나는 악한 니느웨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기 위해 도심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났다. 니느웨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닌가!

 

요나는 이들에게 회개하라는 말을 하지 않고 단순히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멸망할 것이라 선포했는데 그들은 자진하여, 심지어는 왕이 칙령을 내려 금식을 선포하고 사람들은 모두 회개의 상징으로 굵은 베옷을 입었다. <요나서> 저자는 이 광경을 극대화하기 위해 짐승들도(?) 베옷을 걸쳤다고 증언한다. 

 

은혜·자비·사랑, 어머니의 본질이 곧 신이다

 

신의 본질은 첫째로 ‘은혜롭다’이다. 이 단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눈’으로 상대방에게 친절하고 상대방의 고통을 공감할 뿐만 아니라 용서하는 마음이다.

둘째로 신은 ‘자비롭다’. ‘자비롭다’에 해당하는 ‘라훔’은 원래 ‘어머니의 자궁’이며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희생과 사랑’이며 ‘원수까지 껴안을 수 있는 한없는 자기 희생적 사랑’이다. 이것은 어머니가 갓난아이의 모든 실수를 감싸주고 그 아이에 몰입하여 온전히 그 아이를 위해 사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셋째로 신은 ‘사랑이 한이 없으신 분’이다.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는 ‘라브 헤세드’라고 기록되어 있다. ‘헤세드’는 자기희생적인 사랑으로 보통 신의 사랑이나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다. 요나는 신의 이런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배 밑창과 고래 뱃속 경험을 통해 신을 만났지만, 그 깨달음이 삶으로 이어지기는 힘들었다. 요나는 이제 니느웨인들이 멸망하지 않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다고 신에게 대든다. 야훼신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요나에게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라고 책망하셨다.

 

요나는 니느웨 동편에 우뚝 솟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아 니느웨가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다. 야훼신은 요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은 그늘을 지게 하는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서 니느웨의 운명을 지켜보는 요나를 시원하게 해줄 셈이었다.

 

박 넝쿨이 자라 올라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좀 전에 죽겠다던 요나는 그늘 하나로 삶의 의미를 찾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 신은 벌레 한 마리를 마련하여 박 넝쿨을 갉아 먹게 하여 식물은 시들고 말았다.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 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요나는 일상생활의 불편함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하며 다시 한번 신에게 하소연한다. 신은 이 어이없는 요나에게 좀 전에 한 질문을 반복한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의 대답은 점입가경이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나서 죽겠습니다.”

그러자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 12만 명도 더 되고 짐승도 수 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서>는 여기서 마친다. 요나가 이 질문에 대해 무어라고 대답했는지 침묵만 있을 뿐이다. 신이 한 종교나 한 민족만을 위한 신이라면, 그것이 신이겠는가? 야훼신이 니느웨인들을 위한 신이 아니라면 가짜일 것이다. 그 신이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부두족을 위한 신이 아니라면 그런 신은 사기일지 모른다.

 

요나는 멜빌의 소설에서 이스마엘과 아합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모비딕> 소설에서 내레이터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이스마엘은 아직도 ‘모비딕’이란 고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임무는 사람들에게 모비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고래가 아니란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 살아남은 자다. 그것은 마치 니느웨를 구원하는 야훼를 이해 못하는 요나와 같다. 요나는 또한 아합과 같다.

 

‘모비딕’을 절대악으로 상정하고 끝까지 싸운 아합은 끝내 죽고 만다. 요나도 니느웨를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절대악으로 여기지만, 그 악은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아니, 니느웨는 신의 은총을 받아 신이 살아있음을 증언하는 증거가 됐다.

 

인간은 ‘에고’ 뛰어넘는 위대한 잠재력 지녀

 

인간에게는 우리가 상정한 ‘에고(ego)’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위대함이 숨겨져 있다. 인간은 위대해질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고 그 잠재성의 발휘로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몇몇 사람만이 이 잠재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찾으려 목숨을 바쳐 영적인, 그래서 숭고한 여행을 떠난다.

요나, 이스마엘, 아합이 바로 그런 이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억누르는 거대한 ‘자기’를 ‘고래’라는 괴물로 만나 씨름한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3일 있었고, 이스마엘과 아합은 모비딕을 만나 3일 동안 사투를 벌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거대한 자기’라는 괴물을 만나 쉽게 포기하고 과거의 자아로 돌아가 일생을 산다.

‘요나 콤플렉스’란 우리 모두가 가진 최선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수행하기를 회피하는 마음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최선이 무엇인지 찾기를 두려워하고 적극적으로 탐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적게는 우리 가족, 넓게는 많은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요나는 생전 보지도 못한, 심지어는 원수지간의 니느웨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 것이다. 만일 요나가 자신만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다면 그는 ‘무명씨’로 남게 된다. 요나의 선교로 12만 명이 넘는 니느웨인들이 생존할 수 있다. 만일 요나가 그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멸망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기중심’의 이기적 유전자를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스펙을 위해 무한경쟁시대에 강자가 되기 위해 살아간다. 학교, 기업, 국가 모두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선이라고 착각하고 산다. 그런 생각과 삶은 진부하다. 왜 많은 사람이 진부한 삶에서 안주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고 있나?

우리는 모두 요나 콤플렉스에 걸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책임 회피의 심리는 두려움에서 온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요나 콤플렉스로 모는 다른 요인이다. 우리는 ‘획기적인 삶’을 사는 것이 남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들이 비웃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지 못하고 ‘안정적인 삶’에 안주한다. 남들이 원한 삶에 나를 맞추어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도 지나고 보면 대부분은 가짜다. 우리를 안정적으로 느끼게 해주기보다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을 줄이고 내적 성장과 성취를 최소화하여 우리를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기필코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 그것을 탐색하고 탐색한 바의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모든 것엔 희생과 대가가 따른다. 진부함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위대함을 추구할 때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두려움에 직면해야 한다.

한쪽 다리를 잃고 죽을지 모르지만 피퀘트라는 포경선에 몸을 실은 아합 선장과 이스마엘처럼, 내키진 않지만 원수의 나라에서 사랑과 심판의 말을 전한 요나처럼, 두려움과 맞서는 여행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

 

신은 질문한다.

“네가 화내는 것이 옳으냐?”

신과의 대화,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함을 불러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모두에게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다오(Call me Ishmael!)”라고 말할 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