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내편) 제물론 1 - 자연의 피리소리
남곽자기가 안석에 기대앉아 하늘을 보며 한숨을 짖고 있었는데, 멍한 것이 자신조차 잊은 듯했다. 안성자유가 그의 앞에서 시중을 들고 있다가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몸은 본시부터 마른 나무처럼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까? 마음은 본시부터 불 꺼진 재처럼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오늘 안석에 기대고 계신 모습이 전의 모습과 다르십니다.”
자기가 말했다.
“내가 지금 나 자신을 잊고 있는 것을 알았느냐? 너는 사람들의 피리소리는 들었지만 땅의 피리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네가 땅의 피리 소리를 들었다 해도 하늘의 피리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가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기가 말했다.
“대지가 내뿜는 기운을 바람이라고 한다. 바람이 일어나지 않으면 별일이 없지만, 일어나면 모든 구멍이 성난 듯 울부짖는다. 너만이 그 바람 부는 소리를 듣지 못하겠느냐? 산과 숲의 술렁임과 백 아름드리 큰 나무의 구멍들이 코와 입과 귀와도 같으며, 목이 긴 병이나 술잔과도 같고, 절구통과도 같고, 깊은 웅덩이, 얕은 웅덩이와도 같은데, 물 흐르는 소리, 화살 나는 소리, 꾸짖는 소리, 바람들이 마시는 소리, 외치는 소리, 아우성치는 소리, 둔하게 울리는 소리, 맑게 울리는 소리를 낸다. 앞의 것들이 소리를 내면 뒤따르는 것들도 따라서 소리를 낸다. 소슬바람에는 작은 소리로 답하고, 회오리바람에는 큰 소리로 답한다. 사나운 바람이 자면 모든 구멍들이 비게 되는데, 너만이 나뭇가지가 하늘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자유가 말했다.
“땅의 피리 소리란 여러 구멍에서 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피리 소리란 대롱에서 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늘의 피리 소리는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말했다.
“온갖 물건을 불어서 모두 제각기 자기 소리를 내게 하는데 모두가 그 스스로 작용을 하지만 성난 듯 소리치는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겠느냐?
♣ 장자(내편) 제물론 2 - 위대한 말은 담담하다
지혜가 많은 사람은 여유가 있지만 지혜가 작은 사람은 남의 눈치만 본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고 조잡한 말은 수다스럽기만 하다.
잠잘 때는 혼백에 의해 꿈을 꾸고, 깨어나면 몸에 의해 활동한다. 외물과 접하여 교섭을 가져 매일처럼 마음은 갈등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너그러운 사람도 있고 심각한 사람도 있으며 꼼꼼한 사람도 있다. 두려움이 작을 때는 두려워 떨지만 두려움이 크면 멍해진다.
사람들이 시비를 가릴 때에는 마치 쇠뇌의 줄을 퉁기듯 재빠르게 행동한다. 자기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할 때에는 마치 신에게 맹세하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들이 날로 약해질 때에는 가을과 겨울에 초목이 시들듯 쇠잔해진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일에 자꾸만 빠져 들어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묶여진 것처럼 욕망에 억눌린다는 말은 그들이 늙으면서 시들어 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죽음에 가까워진 자의 마음은 다시 살아나게 할 수가 없다.
♣ 장자(내편) 제물론 3 - 현상은 있어도 형체는 없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걱정, 탄식, 변덕, 두려움과 경박함, 방탕함, 뽐냄, 허세 같은 사람의 마음이, 음악이 공간에서 생겨나고 버섯이 땅 기운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밤낮으로 우리 앞에 서로 바뀌어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 싹이 튼 곳은 알지 못한다.
아침저녁으로 이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그 근원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다. 그것들이 아니면 나도 존재할 수 없고, 내가 아니면 그것들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가까울 것이나 그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참된 주재자가 있을 것도 같지만 특별히 그 증거를 찾을 수는 없다. 그것의 작용에 대해서는 이미 믿고 있다 해도 그 형체는 볼 수가 없다. 그런 현상은 존재하나 그 형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백 개의 골절과 아홉 개의 구멍과 여섯 가지의 내장이 갖추어져 있다. 우리는 그 중 어느 것과 친한가? 당신은 그것을 모두 좋아하는가? 그 중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있는가? 모두가 같다면 그 모든 것이 신하와 첩 같은 것인가? 그런 신하나 첩 같은 것들은 서로 다스릴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이 번갈아 가며 서로 임금이 되었다 신하가 되었다 하는가? 그래도 참된 임금은 따로 존재할 것이다. 그 현상을 이해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참된 지배자의 존재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 장자(내편) 제물론 4 - 인생을 달리듯 살지 말라
형체를 가지고 태어났으면 몸을 손상시키지 말고 다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밖의 물건들과 서로 맞서서 마찰을 일으켜 인생을 달리듯 살아가면서 발길을 멈추지 못한다면 슬픈 일이 아닌가?
평생을 발버둥치면서도 그가 이루어놓은 것은 하나도 없고, 일에 지쳤으면서도 성과는 알지 못한다면 슬프지 않은가?
사람들이 그를 보고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육체의 노화를 따라 그의 마음도 그와 같이 늙어간다면 어찌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람의 삶이란 본시부터 이처럼 한심한 것일까? 나만이 홀로 한심하고 사람들 중에는 한심하지 않은 이들도 있는 것일까?
♣ 장자(내편) 제물론 5 - 마음으로 스승을 삼는다
스스로 지니고 있는 마음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그 누가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마음의 변화를 인식하고 마음을 스승을 삼는 사람만 있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스승이 있다. 그런데 마음으로 스승을 삼지도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그것은 오늘 월나라로 떠나면서 어제 이미 도착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하는 자는 비록 우임금이라 해도 알아줄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어쩔 수 있겠는가?
♣ 장자(내편) 제물론 6 - 말은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말로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 말하는 것은 일정하지 않다. 과연 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는 않는 것일까? 말이 새끼 새의 우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거기에 구별이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도는 어디에 숨겨져 있다가 진실과 허위를 드러내며, 말은 어디에 가려져 있다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가? 도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말이란 존재한들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도는 작은 성취에 숨겨져 있으며, 말은 화려한 수식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옳다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그르다고 한다.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려면 밝은 지혜로써만 해야 할 것이다.
♣ 장자(내편) 제물론 7 - 상대적인 판단
물건은 저것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이것이 되지 않는 것도 없다. 저것은 저것의 입장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것으로서 알게 되면 곧 저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에 말미암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말인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도 있다. 가능한 것이 있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고,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가능한 것이 있다. 옳음이 있어 그릇됨이 있고, 그릇됨이 있어 옳음이 있다.
그래서 성인은 이런 것에 의하지 않고 그런 것을 자연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옳음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은 또 이것이 된다. 저것도 한가지 시비가 되고, 이것도 한가지 시비가 된다.
그러면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는 것인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이 없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추라 한다. 도추가 되어야 둥근 고리의 중심을 차지한 꼴이 되어 무궁한 변화에 따를 수 있게 된다.
옳음도 역시 무궁한 변화중의 하나이고, 그름도 역시 무궁한 변화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밝은 지혜로써 판단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하는 것이다.
♣ 장자(내편) 제물론 8 -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을 손가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을 손가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못하다. 말(馬)을 가지고 말을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을 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한 개의 손가락과 같은 것이다. 만물은 한 마리의 말과 같은 것이다. 가능한 것은 할 수 있고, 불가능한 것은 할 수 없다.
도는 행하여짐으로서 이루어지고, 물건은 이름 불리어짐으로서 인식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어째서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
물건에는 본래부터 그렇게 될 요소가 담겨져 있으며, 물건에는 본래부터 가능한 요소가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 물건이란 없으며, 그렇게 가능하지 않은 물건이란 없는 것이다.
♣ 장자(내편) 제물론 9 - 파괴가 완성이며 완성이 파괴이다
예를 들어 종채와 기둥, 문둥이와 서시, 진기한 것과 괴상한 것을 놓고 볼 때, 도안에서는 모두가 통하여 한가지가 된다.
분산은 다른 면에서는 완성이 된다. 완성은 다른 면에서는 파괴가 된다. 모든 물건에는 완성과 파괴가 없으며 통하여 한가지가 된다.
오로지 통달한 사람만이 모든 것이 통하여 한가지가 됨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개인의 판단을 사용하지 않고 보편적인 영원한 것에 모든 것을 맡긴다.
보편적이고 영원하다는 뜻의 용(庸)은 작용이란 뜻의 용(用)과 통한다. 용(用)은 또 통(通)과 뜻이 통한다. 통(通)은 제대로 된다는 득(得)과 뜻이 통한다.
알맞게 제대로 된다면 거의 도에 이른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었는데도 그렇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도라고 하는 것이다.
♣ 장자(내편) 제물론 10 - 조삼모사
정신과 마음을 통일하려 애쓰면서도, 모든 것이 같음을 모르는 것을 조삼이라 말한다. 무엇을 조삼이라고 하는가?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던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려고
“아침에는 세 개 저녁에는 네 개(朝三暮四)를 주겠다.”
라고 말하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었다.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
라고 말하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분이나 사실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기뻐하고 성내는 반응을 보인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시비를 조화시켜 균형 된 자연에 몸을 쉬는데, 이것을 일컬어 양행(兩行)이라 말한다.
♣ 장자(내편) 제물론 11 - 존재 자체까지 잊는다
옛날 사람 중에 지혜가 지극했던 사람이 있었다. 지극한 경지란 무엇인가?
처음부터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극하고도 완전한 것이어서 여기에 더 무엇을 보탤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다음의 경지는 사물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아무런 구별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경지는 사물에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옳고 그른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시비가 드러난다는 것은 도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도가 무너지는 것으로 인해 편애가 생기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루어짐과 무너짐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루어짐과 무너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 장자(내편) 제물론 12 - 영원하고 평범한 것에 맡겨라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있는 예는, 옛날 소씨가 금을 타던 경우이다.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없는 것은, 옛날 소씨가 금을 타고 있지 않던 경우이다.
소문은 금을 탔었고, 사광은 지팡이를 짚고 음악을 들었으며, 혜자는 오동나무 안석에 기대어 담론을 했다. 이 세 사람의 지혜는 모두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후세에까지 사적들에 기록으로 전하여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이 남들이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자기들의 특이함을 남들에게 밝히려고 애썼다. 밝혀질 것이 아닌 것을 남들에게 밝히려 했기 때문에 결국은 견백론(堅白論)의 어리석음으로 끝났던 것이다. 또한, 소문의 아들도 소문의 기술을 계승하는데 그치고 평생 성취해 놓은 것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과 같은 것을 성취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무엇이든 성취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들과 같은 것을 성취라고 말할 수가 없는가? 그렇다면 사물이나 우리에게는 성취란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어지럽히는 빛을 성인들은 없애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본위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영원하고 평범한 것에 자기를 맡겼던 것이다. 이것을 밝음이라 말하는 것이다.
♣ 장자(내편) 제물론 13 - 인식과 평가는 완전한 것이 못 된다
하나의 이론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이와 같이 밝은 지혜인가, 이와 같지 않은 것인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이 모두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궤변과도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적이 있을 것이며,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그 전도 있을 것이다.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있고 없는 것도 없었던 적이 있을 것이며, 일찍이 있고 없는 것도 없었던 그 전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없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 때도 있고 없는 것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없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지금 내게는 이미 이론이 있다. 그러나 내가 전개한 논리 중에 과연 이론이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 장자(내편) 제물론 14 - 나아감 없이 자기 분수를 따라라
세상에 짐승의 가을 털끝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태산을 작다고 여길 수도 있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살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팽조를 일찍 죽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늘과 땅은 우리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있고, 만물은 우리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다. 이미 하나가 되어 있으니 이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하나로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이론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나라는 것과 이론은 두 가지가 되며, 그 두 가지와 하나로 또 세 가지가 된다. 이렇게 나가면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계산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보통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그처럼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데로 나가는데도 세 가지가 되었으니, 하물며 있는 것으로부터 있는 데로 나가는데는 어떻겠는가? 나아감 없이 자기 분수를 따르기만 해야 될 것이다.
♣ 장자(내편) 제물론 15 - 사람들의 분별이란 옳지 못하다
도에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말(言)에는 항구성이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말에는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말에는 왼편이 있고 오른편이 있으며, 논(論)에는 설명과 분석이 있고 분별이 있으며, 대립이 있고 다툼이 있다. 이것을 여덟 가지 덕이라 말한다.
천지사방 밖의 일을 성인은 살피기만 하지 말하지 않는다. 천지사방 안의 일을 성인은 논하기만 하지 설명하지 않는다.
춘추는 세상을 다스리는 길을 쓴 책으로 옛 임금들의 뜻이 실려 있는데, 성인은 일을 설명하기만 했지 일의 성격을 분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분석해야 할 것에 대해 분석하지 않은 것이 있고, 분별해야 할 것에 대해 분별하지 않은 것이 있다.
어째서인가? 성인들은 모든 것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나, 보통사람들은 모든 것을 분별함으로써 자기를 내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별하는 사람들은 옳게 보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 장자(내편) 제물론 16 - 드러나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위대한 도는 말로 표현하지 않으며, 위대한 이론은 말로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위대한 사랑(仁)은 사랑하지 않는 듯하며, 위대한 청렴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대한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도가 밝게 드러난다면 도가 아니며, 말이 이론화하면 불충분한 것이다. 사랑을 늘 한다면 완전한 것이 못 되며, 청렴함이 분명히 드러난다면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용기가 남을 해친다면 완전한 것이 못된다. 이 다섯 가지를 버리지 않고 있어야만 도를 향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가 그의 지혜로써는 알 수 없는 곳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면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 누가 말로 표현되지 않은 이론이나, 도의 모습을 지니지 않은 도를 알고 있는가? 만약 그런 것을 잘 아는 이가 있다면 그를 두고 자연의 보고인 천부(天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물을 부어도 차는 일이 없고, 거기에 있는 것을 퍼내도 마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근원은 알 수가 없으니, 이런 경지를 바로 빛을 싸서 감추는 보광이라 말하는 것이다.
♣ 장자(내편) 제물론 17 - 분별은 의미 없는 것이다
설결이 왕예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물건은 모두가 다 같다는 말의 근거를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느냐?”
“그렇다면 물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느냐? 내가 말하는 안다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느냐? 내가 말하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느냐?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에 병이 나고 말라죽게 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렇더냐? 사람은 나무 위에서 두려워 벌벌 떠는데 원숭이도 그러하더냐? 이 들 중 어느 것이 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것이냐?
사람들은 소·양·개·돼지를 잡아먹고, 고라니와 사슴은 부드러운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잘 먹고, 솔개와 까마귀는 쥐를 좋아한다. 이들 중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맛을 알고 있는 것이냐?
원숭이는 편저의 암컷이 되고, 고라니는 사슴과 교미를 하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어울려 논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미인이라 하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 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들을 보면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와 사슴은 그들을 보면 뛰어 달아난다. 이들 중 누가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것이냐? 내가 보건대 어짊과 의로움의 기준이나 옳고 그른 판단의 방향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다. 내 어찌 그 분별을 알 수 있겠느냐?”
♣ 장자(내편) 제물론 18 - 지극한 사람은 이해를 초월해 있다
설결이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이롭고 해로운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지인은 이해(利害)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
왕예가 대답했다.
“지인이란 신묘한 것이다. 큰 연못을 말릴 뜨거운 불이라 해도 그를 뜨겁게 할 수가 없고, 큰 강물을 얼어붙게 하는 추위도 그를 춥게 할 수 없다. 천둥과 번개가 산을 무너뜨리고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놀라는 일이 없다. 그런 사람은 구름을 타고 해와 달에 올라앉아 세상 밖에 노니는 것이다. 죽음과 삶도 그에게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데 하물며 이해의 평가야 어떻겠느냐?
♣ 장자(내편) 제물론 19 - 가치의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
구작자가 장오자에게 물었다.
“나는 공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성인은 세상일을 하지 않으며, 이로움도 쫓지 않고 해로움도 피하지 않는다. 무엇을 추구하지도 않고 도를 따르지도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말한 것처럼 표현되며, 말을 해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먼지 묻은 세상의 밖에서 노니는 것이다'
공자는 이 말이 터무니없는 말이라 하였지만, 내게는 묘한 도를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오자가 말했다.
“그것은 황제(黃帝)가 들었다 해도 당황할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대는 너무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달걀을 보고서 닭 우는 것을 바라고, 탄환을 보고서 새 구이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그대를 위해 얘기를 하려하니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성인은 해와 달을 의지하여 행동하고 우주를 옆에 끼고 있듯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행동은 자연에 합치되고 몸은 혼돈 속에 두며, 모든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보통사람들은 고생스럽게 몸과 마음을 쓰지만 성인은 아무 생각 없이 지냅니다. 억만년에 걸친 변화 가운데 몸을 맡기면서도 다만 한결같이 순수한 도를 지켜나갑니다. 만물을 모두 있는 그대로 두고, 따듯이 시인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감싸는 것입니다.”
♣ 장자(내편) 제물론 20 - 사람들의 판단은 불완전한 것이다
내 어찌 삶을 즐기는 것이 미혹한 일이 아님을 알겠는가? 내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자와 같지 않음을 알겠는가?
여희는 예 땅의 경계를 지키는 관리의 딸이었다. 진나라에서 그녀를 처음 데려왔을 때에는 슬픔에 옷깃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임금의 방에 들어가서 임금과 호사스러운 자리를 같이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자, 그녀는 처음에 울었던 일을 후회했다.
내 어찌 죽는 사람이 그가 처음에 삶을 바랬던 일을 후회하지 않음을 알겠는가?
♣ 장자(내편) 제물론 21 - 삶도 죽음도 모두 커다란 꿈이다
꿈속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던 사람이 아침이 되어서 울게 되는 경우가 있다. 꿈속에서 슬피 울던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사냥을 나가기도 한다.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른다. 또 꿈속에서 그 꿈을 풀이하기도 한다. 꿈에서 깬 뒤에야 그것이 꿈인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깨어있다고 생각하고 아는 체를 하여 임금이니 목동이니 하지만, 어리석은 일이다.
나와 그대는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대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꿈인 것이다.
이러한 말을 사람들은 이상한 말이라 할 것이다. 만세 뒤에 위대한 성인을 만나서 그 뜻을 알게 된다 해도 그것은 늦은 것이 아니다.
♣ 장자(내편) 제물론 22 -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나와 그대가 논쟁을 했다고 하자. 그대가 나를 이기고 나는 그대를 이기지 못했다면, 과연 그대가 옳고 나는 그른 것일까?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는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과연 내가 옳고 그대는 그른 것일까? 그 어느 쪽은 옳고 어느 쪽은 그른 것일까? 우리 모두가 옳거나 우리 모두가 그른 것일까? 나나 그대나 모두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본시부터 멍청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올바로 판정을 해달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대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올바로 판정을 해달라고 한다면, 이미 그대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올바로 판정을 해줄 수 있겠는가?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올바로 판정을 해달라고 한다면, 이미 나와 의견이 같은데 어떻게 올바로 판정을 해줄 수가 있겠는가? 나나 그대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올바로 판정을 해달라고 한다면, 이미 나나 그대와는 의견이 다른데 어찌 올바로 판단을 해줄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올바로 판정을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면, 이미 나나 그대와 의견이 같은데 어찌 올바로 판정을 해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나 그대나 다른 사람들이나 모두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논리를 믿겠는가?
♣ 장자(내편) 제물론 23 - 변하는 이론은 무의미한 것이다
변하는 이론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자연의 분수로서 모든 것을 조화시키고 무궁함으로써 모든 것의 바탕을 삼는 것이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사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무엇을 자연의 분수로써 모든 것을 조화시킨다고 하는 것인가?
그것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옳은 것이 만약 정말 옳은 것이라면,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만약 진실로 그런 것이라면, 그런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나이도 잊고 의리도 잊고 무한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 장자(내편) 제물론 24 - 지혜에 의한 평가는 부질없다
망양이 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조금 전에는 걸어다니다가 지금은 멈춰 있습니다. 당신은 조금 전에는 앉아 있다가 지금은 서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일정한 마음가짐이 없는 것입니까?”
그림자가 말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내가 의지하는 것도 또한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내가 의지하는 것은 뱀 껍질이나 매미 날개 같은 것일까요? 어찌 그런 까닭을 알겠으며, 어찌 그렇지 않은 까닭을 알겠습니까?”
♣ 장자(내편) 제물론 25 -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그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자기 자신이 즐겁게 느끼면서도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니 엄연히 자신은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물화(物化)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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