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지 원 *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 연구교수
目次
Ⅰ. 들어가는 말
Ⅱ. 道와 物
Ⅲ. 物의 構成
Ⅳ. 心과 身
Ⅴ.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춘추 말기에서 전국시기 고대중국은 역사적 대변혁의 시기였다. 빈번한전쟁의 발발과 불안한 정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 존망의 극한 환경에 처하게 하였다. 장자가 ‘마음’에 대하여 관심을 둔 것은 시대적 특수성 속에서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절박한 욕구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장자에 있어 ‘생명’은 道로부터 만물에 주어진 나름의 몫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나름의 몫’ 이란 저마다 주어진 개별적인 것으로서 그에게만 주어진 고유한 몫이다. 하나하나의 생명존재는 자기만의 목적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목적 안에서 스스로 생장 변화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인간에게도 이러한 생명의 자생력으로서의 ‘삶의 의지’가 있고, 이는 마음에 있다. 장자는 마음을 생명 활동의 주체로 생각했다. 때문에 마음에 대한 중시는 장자에게 있어 생명에 대한 중시였을 것이다.
문헌을 통해 살펴보면 ‘心’ 字는 論語 에 6차례 老子 에10차례 등장하고 있다.
공자는 ‘心’ 과 ‘仁’ 을 노자는 ‘心’ 과‘ 虛’ 를 연결해 마음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시도하였다. 하지만‘心’은고대철학의 영역에서 명확한 철학 범주로 형성화되지는 못하였다. 전국 중후기 ‘心’ 字는 孟子 와 莊子에 각기 120차례 180차례 등장하며 철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게되고, 공자와 노자의 비교적 소박한 방식의 마음에 대한 이해는 장자와 맹자에 의해 각기 독특한 형태의 心學으로 발전하게 된다.
국내 『莊子』의 ‘心’ 에 대한 연구는 정세근의 '장자의 심론', 강신주의 '장자철학에서 마음과 삶의 문제' 몇편을 찾아볼 수 있으나, 道와 氣의 질적 변화를 통해 생성되는 莊子의 마음(心)과 몸(身)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장자에게 있어서 인간은 만물 가운데 하나의 재이며 道와 氣의 질적변화를 통하여 탄생된다.
때문에 장자의 마음(心) 과 몸(身)에 대한 고찰은 道와 氣 그리고 物의 상호관계 속에서 연구 되어야한다.이를 통해서만이 온전히 장자의 마음(心)과 몸(身)이 가진 특성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필자는 본 논문에서 莊子 에 나타나는 마음(心)과 몸(身)을 장자 철학의 핵심범주인 道와 物, 그리고 氣의 관계를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道와 物
도가에서 道의 의미는 자연계 만물의 본체나 본원을 의미한다.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道를 만물존재의 근거로 생각한다. 장자는 道가 하늘과 땅을 낳는(生天生地) 시원이며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보편적 근거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체 도란 정(情)과 신(信)이 있으나 행동도 없고 형체도 없다. 전할 수는 있으나 받을 수는 없고, 터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스스로 근본과 뿌리가 되며, 천지가 아직 생기기 전의 옛날부터 본래 존재하였다.
귀신이나 상제를 영묘하게 하고, 하늘과 땅을 낳는다. 가장 높은 곳보다 더 위에 있으면서 높은 척하지 않고 가장 깊은 곳보다 밑에 있으면서 깊은 척하지 않는다.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면서도 오랜 세월이라 여기지 않고, 까마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면서도 늙었다고 하지 않는다.”
장자의 말은 다음과 같은 내포적 의미를 가진다. 道는 진실로 존재하며, 우리의 인식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道는 절대 독립적인 자기 원인자이며, 만물의 변화 과정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로서 천지만물의 생성자이다. 장자는 노자의 道의 범주를 계승 그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지만, 道와 物의 관계에서 노자와는 다른 입장을 보인다. 먼저 노자의 道와 物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자
노자에게 있어 천지에 앞서 생겨난 道는 만물의 시원이며 천하의 어미로서 천지의 뿌리가 된다. 그는 道에 의한 만물 생성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으며,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
『老子』ㆍ42章 “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
“도가 만물을 생기게 하고, 덕이 기르며, 물체가 형상을 지니게 하고, 세가 만물을 완성한다.”
『老子』ㆍ51章 “道生之,德畜之,物形之,勢成之”
道와 萬物은 변화과정의 양극이며, 모든 변화 과정의 출발점이다. 一에서 多,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 전체에서 개체, 추상에서 구체, 형이상학적 道에서 氣를 통한 형이하의 物로의 변화 과정 가운데 萬物이 생겨난다. 만물은 道의 본질인 덕을 품수 받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며, 道는 德의 방식으로서 만물 가운데 존재, 만물의 근거가 된다.
만물은 커지고(大) 가고(逝) 멀어지고(遠) 돌아오는(反) 과정을 통해 각기 그 뿌리로 돌아가게 된다. 일체의 사물은 모두 상반상생의 대립 변화 가운데 조화를 이루며 만물은 道에서 나와 다시 道로 돌아간다. 때문에 노자는 “돌아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라고 말한다.
장자 역시 스스로 근본이 되어 하늘과 땅을 낳는 道는 만물 존재의 근거이며 만물은 道로부터 부여 받은 본질의 德을 통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道와 物의 관계에 있어 노자와는 다른 관점을 강조한다.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도란 어디에 있습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없는 곳이 없소
동곽자가 다시 물었다. 분명히 가르쳐 주십시오 장자가 대답했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소.
동곽자가 어째서 그렇게 낮은 것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장자는 돌피나 피에 있다고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점점 더 낮아집니까? 하고 동곽자가 묻자 기와나 벽돌에도 있소 하고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차츰 더 심하게 내려갑니까? 하고 물으니 똥이나 오줌에도 있소 하고 대답했다.
동곽자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장자가 말했다. ………사물을 사물이게 하는 것은 사물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모든 사물 속에 있소.”
여기서 장자가 이야기 하는 사물을 사물이게끔 하는 것(物物者)은 道를 말한다.
道와 物의 관계에서 보면 둘의 사이는 동 떨어져 있지 않다.이는 道와 物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道는 사물의 존재 근거로서 사물 가운데에 존재하며 이로써 사물은 사물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道는 만물을 포함하고 있으며 만물 역시 道 가운데 융합되어 존재한다. 장자는 특히 道의 遍在性과 우주일체의 全體性을 강조하며 만물이 하나의 道이며 하나의 道가 만물임을 주장한다.
장자는 道의 두루있음(無所不在)을 강조하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변화속에서 道가 시원이자 생성 변화과정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장자는 道가 하늘과 땅을 낳는(生天生地)다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道가“ 가장 높은 곳보다 더 위에 있으면서 높은 척하지 않고 가장 깊은 곳보다 밑에 있으면서 깊은 척하지 않으며,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면서도 오랜세월이라 여기지 않고, 까마득한 옛날보다 더 오래면서도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시간과 공간 그리고 선후와 높고 낮음의 차별을 부정하고 있다.
장자는 道의 시공간의 무한성을 바탕으로 道가 사물과 동 떨어져있지 않고 어디에든 존재한다(無所不在)는 宇宙一體觀을 확립, 하나로 통한다고 주장을 한다. 장자에 의하면 道는 만물 존재의 근거이며 만물은 道의 본질인 德을 품수받아 존재하게 된다.하지만 道의 무한성은 유한한 만물의 운행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때문에 道와 사물의 떨어짐이 없는 우주의 운행은 유기적인 宇宙一體觀을 구성하게 된다.
장자는 道가 宇宙流行의 출발점이라는 것과 만물의 돌아옴(反)과 도로 돌아감(復歸)에 대해 강조하지 않는다. 장자는 만물의 자화(自化) 즉 자연의 운행 변화를 강조한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에는 끝도 시작도 없으나 사물에는 죽음과 삶이 있소. 사물의 완성에 의지할 수는 없소. 때로는 텅 비고 때로는 가득 차서 그 모습이 일정한 위치에 있지 못하오. 세월은 막을 수가 없고 시간도 멈출 수가 없소.
만물은 소멸하고 생성하며 가득 찼다가 텅 비곤 하여 끝났다고 하면 다시 시작되오. 이것이야말로 내가 위대한 도의 참뜻을 말하고 만물의 이치를 논하는 까닭이오. 사물이 생겨나 변화하는 것이 마치 말이 달리듯 재빠르오. 움직여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시간에 따라 변동되지 않는 것이 없소.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될까? 라고 하는데 대저 모든 것은 본래 스스로 변화하게 마련이오.”
“하나의 나누어짐은 하나의 완성이며, 하나의 완성은 또 하나의 파괴이다. 모든 사물은 완성이건 파괴건 다 같이 하나이다.”
道에는 시작과 끝이 없지만, 만물은 죽음과 삶이 존재한다. 이것이 道와 사물의 근본적이 차이이다. 만물의 태어남과 죽음, 이루어짐과 훼손됨은 단지 변화의 서로 다른 표현 형식일 뿐이며 모든 사물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 道의 각도에서 보면 만물의 변화는 다시 하나로 통하며 만물은 모두 자연의 운행변화의 과정에 있다. 때문에 장자는 만물이 당연히 道로 돌아가야 한다 또는 그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만물은 道와 더불어 자연의 거대한 변화(大化) 가운데 존재해야 한다. 때문에 장자는 다음과 같이이야기한다.
道와 物의 관계에서 장자는 되돌아감보다는 사물과 더불어 할 것을 강조했지만, 인간의 본질인 德과 自然本性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여전히 復歸를 강조한다.
“조물주와 벗이 되어 천지의 일기에서 노닐려고 한다.”
“나는 지금 조물자와 벗이 되려한다. 싫증이 나면 다시 아득히 높이 나는 새를 타고 이 세계 밖으로 나아가 무하유지향에서 노닐며, 끝없이 넓은 들판에 살려한다.”
이상 道와 物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장자는 노자가 이야기한 우주 본원과 시원으로서의 道를 인간의 정신 경지로 내재화 시키고 있다. 이 경지는 “홀로 천지의 정신과 오가며 만물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정신의 경지이다.
Ⅲ. 物의 構成
앞서 道는 만물 존재의 근거이며 道와 사물은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그렇다면 道와 경계가 없는 만물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노자는 만물의 구성을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품으며,충기로서 조화를 이룬다.”라는 말로 설명하지만 道와 氣, 陰陽 그리고 萬物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장자는 노자의 사유에서 한발 더 나아가 氣가 사물과 道를 이어주는 매개체임을 밝히고 있다.
“근원을 살펴보면 본래 삶이란 없었던 거요 그저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소. 비단 형체가 없었을 뿐이 아니라 본래 기도 없었소.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생기며, 형체가 변해서 삶을 갖추게 된 거요. 이제 다시 변해서 죽어가는 거요 이는 춘하추동이 서로 사철을 되풀이하여 운행함과 같소.”
“그래서 천지란 형체가 큰 것이고 음양이란 기가 큰 것이다. 도는 그 모두를 감쌀 만큼 크고 넓다.”
장자는 만물의 시원이자 우주생성의 출발점으로서의 道를 강조하지 않는다. 존재 서열로 이야기하면 道와 사물은 간격이 없이 자연의 거대한 변화의 유행 가운데 존재하며, 만약 논리적 순서를 이야기 한다면, 道→氣→形의 순서를 가진다. 근원을 살펴보면그냥 흐릿하고 어두운 곳에 섞여있는 道는 變하여 氣를 낳고 氣는 有形의 사물을 낳고 유형의 사물은 삶과 죽음이 있게 된다. 變과 化는 장자 宇宙生成論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道와 만물의 유행은 모두 끊임없는 變과 化 가운데 있으며 장자는 道와 만물의 운행이 멈춤이 없이 능동적임을 강조한다. 이중 天地는 유형의 현상세계를 대표하는 존재이다. 음양은 氣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범주이며 道는 이러한 일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일체의 변화는 모두 道의 유행 가운데 이루어진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變은 일반적인 양적 변화가 아닌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道는 질적 변화를 통해 氣를 낳고 氣는 질적 변화를 통해 유형의 만물을 낳는다. 이는 하나의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논리적인 流行의 歷程이다. 만물존재의 근거로서의 道는 우주의 원리이며 형이상학적 존재로서 인간의 감각기간으로서 인식할 수 없는 진실 존재이다.
때문에 장자는 道는 무형이지만 그 가운데 情과 信이 있다고 말한다. 形은 형체를 가진 만물을 의미한다. 그리고 氣는 道와 形의 매개이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氣는 道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치인가 아니면 만물을 구성하는 물질원소인가? 氣는 道와 만물의 매개체이자 道와 形의 교집합으로 당연히 동시에 道와 形의 교집합으로 당연히 동시에 道와 形의 일정부분의 특성을 모두 가진다. 때문에 氣는 추상적이며 또한 구체적이다. 또한, 능동성과 물질성의 원리원칙을 모두 가지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氣는 물질성을 지니고 있는 氣이다. 하지만 물질성이 구체적인 유형의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氣는 구체적인 유형의 물질인 동시에 원리원칙으로서의 형이상학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다.
장자가 말하는 “천하는 하나의 기로 통한다.”는 말은 氣의 형이상학적인 면의 표현이다. 氣는 道와 마찬가지로 우주 만물 가운데 두루 존재하고 있다. 氣 자체로서는 비록 혼합되어 있는 하나지만, 그 가운데는 음양이기와 능동성의 원리원칙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장자는 “음양은 기의 큰 것이다.”라고 말한다. 음양이기의 능동성과 교환 작용은 질적 변화를 가져오며 이로부터 구체적인 유형의 만물이 구성되게 된다.
道는 어떻게 질적 변화를 통하여 氣를 만들고, 氣는 어떻게 질적변화를 통하여 만물을 만드는 것일까? 道가 어떻게 질적 변화를 통해 氣를 만드는지에 대해서 장자는 “우주의 밖에 대해 성인은 그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대강을 말하지도 않는다.” 라며 정확한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억지로 설명하고자 하면 도가 스스로 변화한다는 결론으로 귀결시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氣가 어떻게 질적변화를 통하여 만물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사는 것은 기가 모이기 때문이며,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 되오. 이처럼 죽음과 삶은 뒤쫓는 것이니 내가 또 어찌 괴로워하겠소!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요. (사람들은 사물에 미추의 차별을 두어)아름다우면 신기하다 하고 추악하면 썩어 냄새가 난다고 하오. 썩어 냄새가 나는 것이 다시 변화해서 신기하게 되고 신기한 것이 다시 변화하여 썩어 냄새가 나게 되는 법이오. 때문에 천하는 하나의 기로 통한다고 하오.”
“지극한 음기란 고요하고 차며 지극한 양기란 밝고 덥소. 고요하고 찬 음기는 땅에서 나오며 밝고 더운 양기는 하늘에서 생기오. 두 가지 기가 섞여서 서로 통해 화합하면 거기 만물이 생겨나오. 이러한 현상은 무엇인가가 있어서 주관하는 것 같으나 그 모습은 눈으로 볼 수가 없소.”
氣는 그 스스로 음양의 원리 원칙을 포함하고 있으며, 음양이기는 서로 통하고 조화를 이루어 질적변화를 만들어낸다. 사람과 만물의 구성은 모두 음양이기의 조화(和)와 뭉침(聚)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음양이기의 조화(和)와 뭉침(聚)으로써 인간과 만물의 구조가 이루어진다는 장자의 사유는 노자의 “만물은 음을 지고 양을 품으며, 충기(?氣)로서 조화를 이룬다.” 의 발전된 해석이다.
Ⅳ. 心과 身
마음(心)
심(心)은 장자철학에 있어서 매우 정의하기 어려운 철학범주이다. 莊子 가운데 “心” 字는 도합 177차례 등장한다. 이 가운데 중인지심(衆人之心), 유봉지심(有蓬之心), 성심(成心), 기심(機心), 적심(賊心) 등은 장자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심(心)이며 성인지심(聖人之心), 중심(中心), 상심(常心), 일심(一心), 지인지심(至人之心)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심(心)이다.
장자에 의하면 인간은 심(心)이 생겨나면 분별지가 생겨나며, 이 분별지에 의해 서로 다른 2종류의 심(心)이 생겨난다. 그 첫 번째는 물욕에 의하여 발생하게 되는 주관인식의 심(心)이다. 주관인식으로 가려진 마음의 작용은 사람을 어지럽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혼란스럽게 하며 인간의 온전한 삶을 방해하는 근원이 된다. 때문에 장자는 심(心)의 분별작용을 잊을 것을 주장한다.
두번째는 영부(靈府) 영대(靈臺)의 심(心)이다. 이 마음은 虛靜止의 본성을 체현하여 道와 더불어 사물을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 영부(靈府) 영대(靈臺)의 심(心)은 장자가 생각한 인심(人心)의 자연 상태이다.
장자는 일반 사람들의 마음 즉 인심(人心)의 감정적 인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인심(人心)의 감정적 인식은 각종 사생(死生), 존망(存亡), 궁달(窮達), 빈부(貧富)등의 외재적인 물욕을 추구하지만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장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영부(靈府) 영대(靈臺)의 마음이다.영부(靈府)는 정신의 집이며 영대(靈臺)는 虛靜하여 외부 사물들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마음의 체(體)이다.
비록 장자가 마음을 영부 영대의 마음과 감정적 인식의 마음으로 분류하고 있으나 자각과 자각하지 못하는 본체는 모두 하나의 마음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장자의 마음개념은 다양한 마음의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장자가 말하는 마음의 서로 다른 상태의 근본적 차이는 마음공부의 실천 여부에 달려있다. 장자의 용어로 이야기하면 심재(心齋)를 실천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의 차이이다.
심재(心齋)란 심(心)의 뜻을 하나로 집중하여 잡념을 제거하고 귀로서 듣거나 심(心)으로사유하는 것이 아닌 비어있는 氣로서 道를느끼는것이다. 이러한 虛靜의 상태에서 道를 인식한 정신의 상태를 심재(心齋)라고한다.장자가 이야기하는 심재(心齋)의 마음공부는 老子ㆍ10章 에서 말하고 있는 척제현람(滌除玄覽)의 마음공부를 직접 계승하고 있다.29)
노자는 척제(滌除)의 행위주체와 현람(玄覽)의 관조 주체가 마음이라는 것을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장자는 심재(心齋)개념을 도출함으로써 척제(滌除)의 행위주체가 마음이며 척제(滌除)로서 도달하게 되는 현람(玄覽) 역시 마음의 관조 주체로서의 정신적 경지임을 밝히고 있다.
장자에 의하면 마음공부가 되지 않은 심(心)은 충동적이며 쉽게 외부 사물을 추구하는 물욕에 빠져, 스스로 되돌아오거나 반성하지 못한다. 또한, 외물과 외부의 상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 중 주관적인 견해와 욕망이 생겨남으로써 결국은 자신의 부정적 변화(異化)를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심(心)들이 장자가 이야기하는 성심(成心) 기심(機心) 적심(賊心)의 마음이며 마음공부의 대상이 된다.이 마음들은 비록 심(心)의 자연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일반적인 실제의 마음이다.
심재(心齋)의 마음공부를 한 심(心)은 자각적으로 외물과 외재한 상대가치에 의한 부정적 변화(異化)를 배척한다. 이를 통해 본래의 虛靜止의 자연상태를 회복, 道를 체험함으로써 개체 생명의 진정한 주인(眞君眞宰)이 된다.
정리해 보면 장자 역시 노자와 마찬가지로 심(心)을 이야기할 때 인간을 사유 주체로 생각한다.사유주체로서 자아의식을 형성한 후 인간의 마음은 2가지 상태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타자와 상대적인 자아의 주관의식의 마음. 이 마음은 쉽게 선입견과 욕망으로 이분화 된다. 또 다른 마음은 사물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 체 도의 주체를 관조하는 마음이다. 장자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 노자와 비교해 매우 많은 묘사를 하고 있다.
주관의식의 마음을 성심(成心), 손도지심(損道之心), 기심(機心), 적심(賊心)과 같은 용어로 나타냄으로써 다양한 환경 가운데 주관의식의 부정적 변화현상을 묘사한다.
주체를 관조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영부(靈符), 영대(靈臺), 이명지심(以明之心), 심재지심(心齋之心), 상심(常心) 등으로서 형용함으로써 오직 주체의 마음을 관조하는 마음만이 道를 깨달아 道와 더불어 자연의 거대한 운행변화 가운데서 노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 (精神)
장자는 마음을 이야기할 때 항상 정(精), 신(神) 또는 정신(精神)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 『莊子』 이전의 문헌가운데 정(精) 字와 신(神) 字의 용례는 많이 보이나, 精神이 함께 사용된 용례는 장자外, 雜篇에 처음 등장한다.
“『莊子』라는 책에서 사용되는 精과 神의 개념은『老子』로부터 나온 것이다.” 『老子』ㆍ21章
“그윽하고 깊숙함이여, 그 안에 정미한 것이 들어 있다.”(窈兮冥兮,其中有精) 『老子』ㆍ6章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것을 현빈이라고 한다.”(谷神不死,是?玄牝).
노자가 이야기하는 精과 神 2글자는 모두 道 자체를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장자는 “대체 지극히 작다함은 작은 중에서도 더욱 작은 것이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만물 중의 큰 것이고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만물 중의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말한다. 精은 비록 無聲無臭이지만 실질적으로 상상을 통해 마음으로 알 수 있는 존재이다. 精의 신묘하고 무궁한 작용을 神이라고 한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谷神’은 虛無의 작용이며 또한 道의 작용이다. 때문에 ‘谷’으로 비유한다. 불사는 이러한 精의 작용이 능히 만물을 무궁히 생성할 수 있음을 설명하며 때문에 현빈(玄牝)에 비유한다.
장자의 핵심사상은 노자의 객관성의 도를 내재화시켜 인생의 경계지도로 만든 것이다. 때문에 객관성의 精과 神역시 내재화되어 인간의 마음 활동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마음은 하나의 혈육 덩어리가 아닌 精이다. 마음의 精활동이 즉 神이다. 그것을 합하여 精神이라 한다.
장자에게 있어 정(精)은 血肉으로 구성되는 심장기관이 담지하고 있는,마치 道와 같이 볼 수 없으나 실제로 존재하는 사유능력과 주체의식, 정신의 경지를 이야기하며, 神은 道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작용을 이야기한다.
외,잡편에서 장자가 이야기하는 정신(精神)은 마음의 활동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精神은 道로부터 생겨난다. 道로부터 부여받은 精과 神 때문에 마음의 기능은 작용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직접 道로부터 부여받은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마음활동의 수련을 통하여 주체의 그러함(自然)을 관조하고 道와 감응하여 道를 깨닫고 드러내는 담지체가 될 수 있다.
몸(身) 그리고 생명과 형체(生形)
『장자』에서 ‘身’ 字는 인간의 생명(수명)을 의미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의미는 인간의 신체 즉 인간의 생명구조의 유기적 전체를 의미할 때이다. 다음은 몸(身)에 대한 장자의 이야기이다.
“경계하고 삼가 해서 당신 자신의 몸을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형으로도 무위를 따라야 하고 마음으로도 조화되어야 합니다.”
“정말 생명을 존중하는 자는 비록 부귀하다 하더라도 의식주 때문에 몸을 다치게 하지는 않고 비록 가난하고 천한 자라 하더라도 이득 때문에 몸을 괴롭히지 않는다. 요즘 고위 고관으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의식주 따위에 마음이 빼앗겨 그것만 소중히 여기며 이익만을 보고 경솔하게 그 몸을 망쳐 버린다. 어찌 미혹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천지에는 각기 머물 집이 있고 음양에도 각기 깃들 곳이 있소. 당신의 몸을 자연에 어긋나지 않게 소중히 지켜 나가면 만물은 저절로 왕성해지오. 나는 유일한 도를 잘 지키며 만물의 조화에 몸을 맡기고 있소. 그러니까 내가 몸을 다스려 온 지 천이백년이나 되어도 내 몸은 아직 쇠하지 않은 채로 있는 거요.”
“몸을 올바르게”에 이어서 나오는 “형으로도 무위를 따라야 하고 마음으로도 조화 되어야 한다.”의 내용으로보아‘ 身’ 字가 몸을 의미할 때는 실제로 내재적인 마음(心)과 외재적인 형(形)의 두가지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莊子』 중 ‘身’ 字와 ‘形’ 字는 실질적으로 각기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莊子』의 책 속에서 ‘身’ 字와 ‘生’ 字는 德性과 形體를 대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德性에 편중되어 있다. 때문에 장자가 말하는 전신(全身) 혹은 전생(全生)의 의미는 때때로 全德과 같다. 그러나 장자가 ‘形’字를 쓸 때는 외재의 감각기관 혹은 形骸(오관백체)를 의미한다. 이때의 形을 장자는 덕(性) 혹은 마음과 더불어 두 개의 사물 또는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莊子』중 ‘生’ 字는 개체생명을 의미한다. 인간의 신체는 개체생명의 담지체라고 할 수 있다. 개체생명의 시야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의 구성성분은 외재 형구(形軀)의 모양이 아니라 내재한 마음의 덕성이다. 때문에 장자는 인간의 몸(身)과 생명(生) 그리고 형체(形)를 구분한다. 인간의 외재 형구는 만물의 流行과 더불어 변화하기 때문에 치신의 道는 심(心)을 다스리는 것에 있지, 형(形)을 다스리는것에 있지 않다.
『莊子』에는수신(修身) 치신(治身) 보신(保身) 완신(完身) 존신(存身) 전생(全生) 양생(養生) 존생등의 단어들이 자주 보이는데, 保, 修, 全, 養, 治의 대상은 자연과 함께 유전하는 외재적인 형해가 아닌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여 사물과 유전하지 않는 生의 주인인 진군(眞君) 진재(眞宰) 또는 심재(心齋) 이후의 마음을 이야기한다.
장자에게 있어 개채 생명의 가치와 생명의 담지체인 신체의 존재 의의는 내재덕성의 함양에 있다. 德充府에 등장하는 불구지만 도덕적인 인물들의 모습은 비록 외재형구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재한 마음의 德을 상하게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몸(身)과 마음(心)의 관계
장자는 몸과 마음의 관계를 심(心), 정(精), 신(神), 정신(精神)과 형(形)의 대립관계로 설명한다. 장자는말한다.
“옛사람은 외계 사물의 변화에 따라 순응하면서도 안의 정신은 사물에 좌우되지 않고 항상 안정되어 변화가 없었다. 지금 사람은 안의 정신이 외물에 좌우되어 흔들리고 외계에 순응하지 못하고 사물에 거역하고 있다.”
심(心)과 형(形)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내외관계이다. 마음은 안형은 밖이며 마음과 몸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장자는 옛 사람들을 통해 현재의 사람들을 풍자한다. 옛사람은 “외계사물의 변화에 따라 순응하면서도 안의 정신은 사물에 좌우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마음작용에 대한 수양 이후 도달할 수 있는 상태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항상 안의 정신이 외물에 좌우되어 흔들리고 외계에 순응하지 못하고 사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지 않고 있다.
장자에게 있어 형(形)은 신체의 외재적인 형구를 의미하며, 끊임없이 유전한다.
끊임없는 변화 가운데 인간의 신체에 내재하여 사유기능을 가지는 것이 마음이며 이 때문에 자아의 주체의식이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마음공부를 거치지 않은 심(心)은 오상아(吾喪我)의 주체를 관조하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나(我)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외재형구와 물욕의 유전을 추구하며 주관의식을 관조하지 못하는 심(心)은 개체생명의 진정한 주재자가 될 수 없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잠들면 꿈을 꾸어 마음이 쉴 새가 없고 깨어나면 또 육체가 활동을 시작하여 쉴 새가 없다. 마음은 분쟁을 일으키고 날마다 다툰다.... 죽음에 가까워진 마음은 다시 회생시킬 수 없다.”
잠들어 마음이 쉴 새가 없는 것은 꿈속에서 외부의 사물과 접하여 어지러워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장자가 이야기하는 마음은 주관의식의 마음 즉 나를 의미한다.
나와 타자와의 대립은 나와 외물과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꿈속의 마음작용은 휴식 정지 상태에 들어간 것 같으나 실제로는 끊임없이 부귀와 명리와 같은 외물과 타자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이 때문에 마음은 투쟁하게 된다. 사람은 비록 꿈에서 깨어나지만, 오히려 그 육체의 활동으로 인해 외부의 사물에 대한 무한한 물욕을 만족하게 하기 위하여 분쟁을 일으키고 날마다 다투게 되어 종극에는 종신토록 구원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장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대저 천하 사람이 숭상하는 것이란 부와 귀 장수와 명예이다. 즐기는 것이란 몸의 안락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 예뿐 여자, 황홀한 음악이고 깔보며 싫어하는 것은 가난과 비천 요절과 나쁜 소문이다.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이란 몸이 편안치 못함 입이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함 몸이 아름다운 옷을 걸치지 못함 눈이 예쁜 여자를 보지 못함, 귀가 황홀한 음악을 듣지 못함 등이다.”
사람의 마음이 주관의식의 상태일 때는 잠자거나 깨어있을 때를 막론하고 항상 사물과 접하여 어지러운 마음의 투쟁상태에 있게 된다. 하루하루 형구와 감각기관의 무한한 욕망을 만족하게 하기 위하여 외물을 추구하고 그러한 상태의 지속은 개체생명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
때문에 장자는 “몸을 고달프게 한 뒤 쉬지 않으면 지쳐버리고 정기를 쓰되 그치지 않으면 피로해지며 피로해지면 고갈되어 버린다.”라고 말한다. 외물을 추구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인간은 종극에 죽음에 가까워져서 구원할 수 없고, 개체생명의 활력과 자연본성을 회복할 수 없게 된다.
마음공부를 하지 않은 심(心)은 몸(身)의 부속물이며 스스로 몸을 주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마음은 외부의 형구에 집착하여 타자와 대립함으로써 자화(自化)할 수 없고 또한 다른 사물과 더불어 물화(物化)할수 없다. 심(心)의 외부에 대한 집착은 마음으로 하여금 내불화(內不化)할 수 없게 만든다. 결국, 마음은 몸을 주재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이는 몸과 마음에 부정적 변화작용을 가져온다.
부정적으로 변화된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그 근본이 된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마음공부의 목적은 자연의 유행과 더불어 몸은 변해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外化而內不化)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래 말 없는 가르침이 있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속으로 완성된 마음”
“외형의 변화에 놀라지만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보려 하지도 들으려 하지도 말고 정신을 안에 간직한 채 고요히 있으면 육체도 저절로 올바르게 될 거요
반드시 고요하고 맑게 하여 당신의 몸을 지치지 않게 하고 정신이 흔들리지 않게 하면 장수할 수가 있소
눈에 비치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으며 마음에 분별이 없으면, 당신의 정신을 지키게 될 것이고 육체는 장수하게 될 거요
당신의 안의 것을 소중히 삼가고 밖에 대한 지식을 막으시오.”
마음공부를 통하여 마음이 몸의 주인임을 자각하게 되면 개채생명의 진군(眞君), 진재(眞宰)로서의 마음이 갖춘 실천능력은 형구의 간섭을 벗어나 외형의 변화가 있어도 마음에 상함이 없도록 한다. 주체의 마음을 관조하는 심(心)을 확립한 후 비로소 의식적으로 몸과 생을 온전히 할 수 있다. 때문에 장자는 정신을 안에 간직한 채 고요히 있으면 육체도 저절로 올바르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안의 것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안을 변화하지 않게 하여 마음이 몸 주인의 위치를 확립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안의 것을 소중히 한 다음에야 비로소 의식적으로 밖의 이목을 막을 수 있다. 만약에 스스로 자각적으로 몸과 마음의 이화를 막을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수고롭지 않으며 형(形)은 장생하게 된다. 마음을 다스리면 몸의 각각의 구성부분은 각기 그 편안한 위치에 머물게 되어 자연히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된다.
Ⅴ. 나오는 말
윗글에서 필자는 장자 철학의 중심 범주들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莊子 의 마음(心)과 몸(身)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장자는 노자의 道의 범주를 계승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道와 物의 관계에 대해 노자는 만물의 시원으로서의 道와 사물이 우주 변화 과정의 양극단임을 강조한다. 만물은 커지고 가고 멀어지고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각기 그 뿌리로 돌아간다.
장자는 노자와는 다르게 만물의 자화(自化) 즉 자연의 운행변화를 강조한다. 道의 각도에서 보면 만물의 변화는 다시 하나로 통하며 만물은 모두 스스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때문에 道와 物의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장자는 특히 道의 遍在性과 우주일체의 全體性을 강조하며 만물이 하나의 道이며 하나의 道가 만물임을 주장한다.
장자에 의하면 道와 간격이 없는 만물은 道의 질적변화를 통해 생성되게 된다. 道는 變하여 氣를 낳고 氣는 有形의 사물을 낳는다. 氣는 그 스스로 음양의 원리원칙을 포함하고 있으며, 음양이기는 서로 통하고 조화를 이루어 질적변화를 만들어낸다. 사람과 만물은 모두 음양이기의 조화(和)와 뭉침(聚)에 의하여 탄생한다.
사람의 탄생과 함께 마음이 생겨나며, 마음이 생겨나면 분별지가 생겨난다. 그리고 이 분별지에 의해 주관인식의 마음과 虛靜止의 본성을 체현한 영부 영대의 마음이 생겨난다. 이러한 마음의 서로 다른 상태의 근본적 차이는 마음 공부의 실천여부를 통하여 판단할 수 있다. 장자에 의하면 마음 공부가 되지 않은 심(心)은 충동적이며 쉽게 외부 사물을 추구하는 물욕에 빠져, 스스로 되돌아 오거나 반성하지 못한다.
심재(心齋)의 마음 공부를 한 심(心)은 자각적으로 외물과 외재한 상대가치에 의한 부정적 변화(異化)를 배척한다. 또한, 마음 공부를 통해 본래의 虛靜止의 자연 상태를 회복, 도를 체험함으로써 개체생명의 진정한 주인(眞君眞宰)이 된다.
장자는 몸과 마음의 관계를 심(心)과 형(形)의 대립관계로 설명한다. 심(心)과 형(形)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내외관계이다. 마음과 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음 공부를 하지 않은 심(心)은 몸(身)의 부속물이며 스스로 몸을 주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마음 공부를 통하여 자각적으로 몸과 마음의 부정적 변화(異化)를 막을 수 있다면, 몸은 편안한 위치에 머물게 되어 자연이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된다.
이는 홀로 천지의 정신과 오가며 만물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道와 합일된 궁극의 경지이며 장자 마음이 추구하는 목적이다.
【참고문헌】
◆ 원전
『老子』
『莊子』
『論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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