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古典『孟子』와『莊子』*
安炳周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Ⅰ. 나의 古典『孟子』와『莊子』
1. 머리말
2. 譚嗣同의『仁學』
3. 前朝忠臣尊崇의 의미
Ⅱ. 孟子의 民本思想
1. 孔子와 孟子의 다른 점
2. 孟子의 放伐論
3. 聖人槪念의 內包의 變化
4. 『孟子』의 ‘不若與衆’
Ⅲ.『莊子』의 萬物齊同의 哲學
1. 절대의 밝은 지혜 ‘明’
2. 自由를 說한 思想家莊子
3. 萬物齊同과 因循主義
4. 或使와 莫爲
※ 이 글은 2014년 6월 14일(토) 춘계학술대회에서 원로학자 초청특강으로 본 학회 초대회장이신 尙虛 安炳周선생님의 <나의 古典『孟子』와『莊子』>라는 발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Ⅰ. 나의 古典『孟子』와『莊子』
1. 머리말
나는 나의 古典을『孟子』와『莊子』로 삼고 공부하여 왔다.
『孟子』에는 性善說과 民本思想이 있어 정말 좋고,『莊子』의 無爲自然의 사상 속에는 세속의 累를 면하게 해주고 亂世의 患難을 막아주는 ‘절대의 밝음(明)’과 좌절했을 때나 불행해졌을 때의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福音이 있어 나는 감히 이 두 古典을 ‘나의 古典’이라고 말한다.
『孟子』의 性善說속에는,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어진 마음(不忍人之心)’과 인․의․예․지의 四端을 가지고 있다는 先天良心論과 사람은 누구나 堯․舜과 같은 聖人이 될 수 있다는 人間平等論이 보인다.『孟子』를 반드시 완독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공손추장구上의 6장과 등문공장구上의 1장․고자장구上의 1장~7장․고자장구下의 2장 등만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맹자가 세상에 큰 공이 있는 것은 性善을 말하였기 때문”이라 한 程子의 말을 朱子는 참으로 진실된 正論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는데, 이 말은 지금도 有效하다. 세상이 더욱 어지러워지고 善人보다는 惡人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일수록 이 ‘性善’의 신념은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닐까.
맹자는 또한 ‘性善’의 具顯者들이라 할 옛 聖人들의 공통점을 “한가지라도 不義를 행하고 한 사람이라도 죄짓지 않은 사람을 죽이고서는 천하를 얻는다하더라도 하지 않는 데 있다”(공손추장구上의 2장)고 하였다.
그 本原의 理念이 희석된 채 君臣上下의 名分만 무성했던 ‘있어 왔던 儒敎’의 일면 때문에 자칫 유교에 등을 돌리려는 나를 꽁꽁 묶어 두는 맹자의 이 正論. 나는 이래서 그의 民本思想과 이 正論을 지금도 정말 좋아하고 있다.
한편 나는 고통과 좌절을 겪을 때에는『장자』를 읽으면서 그 고통과 좌절을 밝게, 즐겁게 이겨내는 힘을 찾곤 한다.『장자』의 無爲自然의 사상과 그 속에 보이는 ‘遊’의 개념은 경우에 따라 나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遊’는 참으로 莊子思想가운데의 중요한 思想槪念이다.
그러나 이 ‘遊’는 차원 낮은 유흥의 ‘유’는 물론 아니다. 정신의 절대 자유의 경지에 노니는 것이다.
‘無何有之鄕’(소요유․응제왕)에서 노니는 것이고, ‘無極之野’(재유)에서 노니는 것이고, ‘無人之野’‘建德之國’‘大莫之國’(이상 산목)에서 노니는 것이다.
『장자』의 내편․외편․잡편의 全篇에 보이는 ‘遊’자는 106회나 된다고 하는데『장자』에는 또한 ‘上與造物者遊’(천하)․‘遊乎天地之一氣’(태종사)․‘遊乎萬物之所終始(道의 세계에 노님)’(달생)․‘遊於物之所不得遯(萬物齊同의 세계에 노님)’(태종사) 등의 ‘遊’를 볼 수 있고, 철학적인 개념으로서의 ‘遊心’의 경지를 표현한 것으로는 ‘知遊心於無窮’(즉양)․‘遊心於物之初’ (전자방)․‘乘物以遊心’(인간세)등이 있어 그 遊의 경지가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精神의 경지임을 말해주고 있다.
維新變法을 시도하다 실패한 淸末公羊學派의 한 사람, 34세의 나이로 刑場에서 피를 흘리고 죽은 유명한 譚嗣同.『仁學』이라는 혁명적 저술의 저자인 담사동. 그는 敎主(『禮記』․禮運편의 大同思想의 創始者로서의 孔子를 말함)를 제외하고는 莊子와 孟子를 높이 평가하였다.
『仁學』에서 그는 淸末에 이르기까지의 中國思想史위에는 ‘君統’, 즉 君主制原理만이 무성해서 敎主의 가르침에 잘 맞는 저술이 매우 드물게 되어버렸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휴지 조각이나 다름 없는 塵編들, 그리고 기왓장이나 자갈 부스러기 같은 무가치한 瓦礫들 속에서 良書와 美玉에 해당하는 책(著述)을 찾고자 하면 明末淸初의 黃宗羲의『明夷待訪錄』과 역시 명말청초의 王夫之의 저술들이 해당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中國哲學史의 일반적 상식과는 다르게 黃宗羲의 학문이 陸象山․王陽明에서 나오고 그 陸․王을 莊子사상의 후계자로, 周濂溪․張橫渠위로 孟子를 王夫之의 淵源으로 보고 있다. 淸末公羊學派에서는 이런 관계구도 속에서 大同世界에 적합한 사상가로 莊子와 孟子를 들고 있다.
필자가 여기 이 글의 제목으로 “나의 古典『孟子』와『莊子』”를 택한 데는 이 公羊學派의 생각에 전적으로 影響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일정 부분의 영향은 분명히 받은 바 있다.
2. 譚嗣同의『仁學』
『淸議報』제19·20호(光緖25·1899·明治32)에 揭載, 뒤에 『飮氷室文集(3)』에 수록되어 있는 梁啓超의 日本에서의 강연, 「중국의 宗敎改革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孔子門下의 二大敎派로 大同敎派와 小康敎派를 들고 있다.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의 소개자인 島田虔次( 『中國革命の先驅者たち』1965)에 의하면, 이 글은 단편이지만 이른바 「康·梁의 公羊學」을 알기 위해 매우 편리한 글이다.
그리하여 大同敎派의 큰 스승[大師]은 莊子와 孟子이고 小康敎派의 大師는 荀子라고 하고 있다.
康有爲·梁啓超와 더불어 譚嗣同(1865~1898)도 淸末公羊學派의 한 巨人이다. 담사동의 字는 復生(복생), 號는 壯飛, 湖南瀏陽사람이다. 독서인 집안 출신의 그는 “어느 나라의 變法(維新革命)에서도 피를 흘리지 않고 성공한 事例는 없다. 중국에서는 변법 때문에 피를 흘린 예를, 그런데, 나는 아직 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나라(중국)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 자기의 피를 흘려 자신을 혁명의 祭物로 삼는 인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나부터 시작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變法실패 후 일본 公使館측으로부터의 亡命권고를 거절하였다.
譚嗣同도 康有爲나 梁啓超처럼 戊戌變法(1898년戊戌9월21일) 실패후에 외국에 망명할 찬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계초에게 後事를 의탁하고 스스로 捕吏의 손에 잡혀 3일후 訊問·裁判·判決등 일체의 法的節次를 생략한 채 직접 刑場에 보내어지고 말았다. 이 때 함께 殉難한 사람은 모두 6명. 世稱「戊戌六君子」라 한다.
譚嗣同殉國의 이 에피소드는 바로 널리 선전되어 維新失敗로 좌절된 청년 지식인들을 더 할 수 없이 크게 격려하였다.
뒤에 一世를 風靡한 革命宣傳冊子 『革命軍』의 저자 鄒容(1885~1905)등은 항상 담사동의 遺影을 座右(자리 오른편)에 걸고서 매일 革命에의 굳은 의지를 새롭게 닦았다고 한다.
鄒容은 1903년의 蘇報事件으로 체포되어 上海에서 1905년에 獄死하게 되는데, 그는 동지인 章炳麟이 체포되었다고 듣자 스스로 租界警察에 出頭入獄하였던 것이다. 스스로 잡혀갔던 譚嗣同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을 奮起시킨 것은 譚嗣同의 장렬한 죽음 만이 아니었다. 그의 저술 특히『仁學』이 또한 사람들을 크게 啓發하였던 것이다.『仁學』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군주제 원리(君統)만이 盛하게 되면서 堯·舜이후로 可히 모델로 삼을 만한 政治가 없게 되고, 孔子의 참다운 大同의 敎義(孔敎)가 衰亡하자 夏·殷·周三代이후로는 배울만한 가치 있는 책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만일 휴지조각과 다를 것이 없는 책들(塵編) 속에서 良書를 구별해 찾고 기왓장이나 자갈 부스러기(瓦礫) 속에서 美玉을 주워서 孔子의 大同의 가르침에 합당한 것이 있기를 바란다면 黃宗羲의『明夷待訪錄』이 그 경지에 가까울 것이다.
黃다음으로는 船山이라는 號로 불리우는 王夫之의 遺著를 들 수 있는데, 黃·王의 저서는 모두 君主와 人民의 관계를 살피는데 있어 백성을 측은히 여기고 그 관계를 개탄하는 바가 있다.
黃宗羲는 陸象山·王陽明의 흐름을 받은 사상가인데 陸·王은 莊子를 방불케할 정도의 그 계승자이며(黃出于陸王, 陸王將纘莊之彷佛), 王夫之는 周濂溪·張橫渠의 흐름을 받았고 周·張은 또 孟子思想의 遺産을 계승한 자들이다(王出于周張, 周張亦綴孟之墜遺).
그런데 黃宗羲·王夫之와 明末三大遺老로 並稱되면서 名實과 得失이 正反對가 되는 사람은 顧炎武이다. 顧炎武는 程·朱의 흐름을 받고 程朱는 荀子의 학문의 계승자이니 그 학문은 군주제원리[君統]을 說한 것 뿐이다.
족히 매도할 가치 조차도 없다(若夫與黃王齊稱, 而名實相反, 得失背馳者, 則爲顧炎武. 顧出於程朱, 程朱則荀之雲礽也. 君統而已, 豈足罵哉)."
이상 담사동『仁學』의 이론은 程朱學을 荀子의 학문의 후계로 보는 등 철학사의 상식과 맞지 않는 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莊子와 孟子를 孔子의 大同의 敎義에 합당한 사상으로 보고 있어 孔子門下의 大同敎派의 큰 스승으로 역시 장자와 맹자를 꼽는 梁啓超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다.
孟子사상 속의 儒敎的革命理論은 중국역사상 특히 王朝의 交替期에 照明을 받게 되는데 宋末元初의 鄧牧의 『伯牙琴』, 明末淸初의 黃宗羲의『明夷待訪錄』, 淸末民國初의 譚嗣同의『仁學』 등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易姓革命으로 새 왕조가 탄생하는 데 있어서는 전 왕조 忠臣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다. 새 왕조의 혁명주체세력이 전 왕조의 忠臣을 제거함은 말할 것도 없으나 革命成功후에는 그 전왕조 충신을 도리어 尊崇하게 되는 경위에 대한 흥미 있는 서술이『仁學』에는 보이고 있다.
3. 前朝忠臣尊崇의 의미
『仁學』에서는 새로 탄생한 新王朝(革命王朝)의 帝王(後主)가 前王朝의 충신 즉 前主의 忠臣을 革命완수 후 정권이 안정된 뒤에 어떻게 존숭하는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그런데 어떤 사람이 前王朝의 군주(前主)를 위해 죽는 것, 그래서 新王朝의 새 군주(後主)의 탄생을 죽음으로 방해하는 것은 後主의 입장에서 깊이 憎惡하여 마지 않을 바가 됨은 勿論이다.
그러나 易姓革命이 완수되어 그 정권이 안정되게 되면 곧 신왕조에서는 전 왕조의 殉節者들을 제사 지내주면서 존숭한다.(而事甫定, 則又禱之祠之, 俎豆之,尸祝之).
이것은 新王朝쪽에서 그 신왕조의 후세의 신하들이 自己(즉 新王朝)를 위해, 새로운 革命세력의 출현을 죽음으로 막아주는 忠臣이 되기를 요구함과 같다(豈不亦欲後之人之爲我死).
이것은 마치 옛날의 어떤 자가 아내를 娶하는 데 있어 다른 남자의 수작에 쉽게 따라 가는 사람보다는 나를 위해 그 사람을 심하게 욕하고 강하게 꾸짖을 여인을 취하는 것과 같다(猶古之娶妻者, 取其爲我詈人也).
군주가 暴虐無道하여 獨夫와 民賊인데도 오히려 그러한 無道한 군주를 충성으로 섬기는 것은 이것은 桀이나 紂를 도와주는 자들이다. 이것을 어떻게 中正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君爲獨夫民賊, 而猶以忠事之, 是輔桀也, 是助紂也. 其心中乎, 不中乎)."
위의『仁學』의 글에 보이는 「獨夫」는『孟子』에서는 「一夫(獨夫·一夫는 모두 포학무도해서 民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군주를 의미함. 梁惠王章句下)」라고 표현하였다. 『荀子』의 議兵篇에는『書經』泰誓편을 인용, 「獨夫受」라고 하고 있다. 한편 民賊이란 백성을 해치는 존재라는 뜻인데 이 말은『孟子』告子章句下에 보인다. 또한『孟子』에는 「어찌하여 그 王道政治·民本政治의 本然으로 돌아가지 않느냐」라는 뜻의 「蓋(盍)亦 反其本矣」라는 강력한 인상의 文章이 보이는데 담사동의『仁學』에서도 「아아! 어찌하여 그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느냐(嗚呼, 盍亦反其本矣)」라는 孟子流의 文章이 눈에 띄고 있다. 孟子의 民本思想이 譚嗣同에게 준 깊은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Ⅱ. 孟子의 民本思想
1. 孔子와 孟子의 다른 점
孟子는 유교사상사에 있어 공자의 正統繼承者이고 유교의 亞聖이다.
그러나 朱子의 말처럼 여름엔 얇은 옷 겨울엔 두꺼운 옷을 입듯이 공자와 맹자는 다른 점이 있다.
먼저 간단히 언급하면 첫째로 儒敎思想史의 展開과정 속에서 孔子의 사상이 名分論的인 경향이 강한 데 비해 맹자는 革命論이 두드러지고 있다. 中國思想史속에서 儒敎的革命論이 큰 比重을 차지하게 되는 時代相에 따라 그 때마다 밝게 照明되었던 것은 孟子의 革命論이었다.
둘째로는 孔子와 孟子가 생각하는 ‘聖人’개념이 다른 점이다. 학자들이 흔히 ‘聖人槪念의 內包의 變化’라고 하는 것인데 학문을 통한 聖人의 경지로의 到達가능성을 확신을 가지고 언급한 사람이 孟子라는 사실이 孔子와 다르다.
셋째로 다른 것은 孔子와 孟子의 음악론이다. 음악에 의한 人間의 性情의 陶冶보다는 人民에 대한 배려에 더 관심을 쏟았던 孟子의 政治論的音樂觀에서는 孔子에서와 같은 音樂에 대한 깊은 이해를 찾기가 힘들다. 이것이 孔子와 孟子의 음악 이해의 다른 점이다.
2. 孟子의 放伐論
맹자의 시대는 공자의 시대와 달리 周王室은 이미 그 명맥을 다시 붙들어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衰亡의 길로 접어들었다. 통치자들은 전쟁에 狂奔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今天下之人牧, 未有不嗜殺人者-『孟子』梁惠王장구上), 따라서 民生은 水火의 재난 속에서 한시도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었다.
名分論보다 백성들의 經濟安定이 우선하게 되었으며, 名分論보다 오히려 革命論이 正義具現理念으로서 보다 우선으로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湯王이 夏桀을 추방(放)하고 武王이 殷紂를 토벌(放)하였다고 하니 그런 일이 있었느냐라는 질문과 臣下가 그 임금을 죽여도 좋으냐는 질문을 받고
"仁을 해치는 자를 賊이라고 하고 義를 해치는 자를 殘이라 하며 殘賊之人은 이것을 一夫라고 합니다. 一夫인 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아직 임금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梁惠王下)"
라고 答한 孟子의 말은 革命論으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혁명론은 곧 放伐論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또 “임금이 신하를 土芥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 (離婁장구下)는 말이나 “반복해서 諫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자리를 갈아치운다(反覆之而不聽則易位)”(萬章장구下)라는 말에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民賊”이란 말을 더 인용할 것도 없이 革命의 不可避性과 그 妥當性을 孟子는 명분론을 내세워 排除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리고 이 孟子의 革命論(放伐論)은 그 근거를 民意를 기본으로 하는 天命에 두고 있어『書經』의 政治理念과 같은 線위에 서 있다.
天子가 天을 代行하여 백성들을 통치한다는 間接的天治主義에서 天子의 改廢를 天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無言의 天의 의사를 알 길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天命思想은 民本思想과 연결된다. 民心이 天心이란 말처럼 民意가 곧 天意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그것을 따른다(民之所欲, 天必從之)”는 말이『書經』(泰誓上)에 보이거니와
“天視는 우리 백성들이 보는 것을 따르고 天聽은 우리 백성들이 듣는 것을 따른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라고 한『書經』(泰誓中)의 귀절은『孟子』(萬章장구上)에 그대로 인용되고도 있다.
또한 ‘天命’은 無常(天命靡常-『詩經』大雅·文王편)하여 한 王朝의 永久執權을 하늘은 절대로 보장하지 않고 있거니와 ‘民心’은 無常(民心無常-『書經』蔡仲之命편)하다는 말도 있어 한 王朝의 永久집권을 허락하지 않는 民心이 天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3. 聖人槪念의 內包의 變化
그런데 君臣之分만 단순평판적으로,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北宋 士大夫들에 의해 儒敎思想史위의 孟子의 地位는 특히 그의 放伐論때문에 위태로와지게 된다. 특히 司馬光의 「疑孟」이나 李覯의 『常語』에 있어서의 孟子排斥은 그 深刻의 수준이 매우 깊었다.
이러한 北宋士大夫들에 의한 孟子拒斥論에 일일이 변론하면서 亞聖으로서의 孟子의 지위와 권위를 防衛한 것은 朱子의 「讀余隱之尊孟辨」이라는 논문이다. 「余隱之가 쓴 尊孟辨을 읽고서」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 속에서 주자는 “仁義를 행하여 天下가 歸服하게 되면 이는 理勢의 必然이니 그만두려 하여도 아니될 것이다(行仁義而天下歸之, 理勢之必然, 雖欲辭之, 而不可得也)”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같은 표현속에서 朱子가 단순평판적인 名分보다도 上位에 ‘理勢의 必然’ ‘理’ ‘天命’ ‘民意’ 등의 개념을 놓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함께 朱子의 尊孟의 동기, 즉 亞聖으로서의 孟子의 지위를 확고하게 防衛한 理由의 하나로서, 우리는 孟子에 있어서의 聖人槪念의 內包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원래 중국 고대에 있어서 ‘聖人’은 하늘(天)의 道, 즉 宇宙의 理法을 체득하여 이에 근거해서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규범을 세운 王者이거나 또는 그에 준하는 사람을 의미하였다. 옛날의 이상적인 왕을 유교에서는 古之聖王으로 일컫고 있는데 堯임금과 舜임금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고, 또 王者는 아니었지만 周公과 같은 사람이 바로 옛 聖人이다.
孔子는 몸이 쇠약해지기 전에는 꿈을 꾸면 周公을 그리워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聖人들의 경지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저 멀리 있는 이상적인 경지일 뿐이고, 그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지로 생각되기 쉬웠었다.
“聖人의 경지를 실현한다는 것은 堯임금이나 舜임금도 오히려 힘들게 생각하였을 것이다(堯舜其猶病諸)”(『論語』雍也편)라고 孔子는 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論語』에는 ‘聖’ 또는 ‘聖人’이라는 말이 절대적으로 적게 보이고 그 대신 ‘君子’라는 말은 100회가 넘지 않을까 할 정도로 많다. 그런데 孟子는 그보다 적은 편이다. 오히려 ‘聖’ 또는 ‘聖人’이 근 50회 정도 보일 정도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달하기 힘든, 저 멀리 있는 이상적인 인간으로서의 聖人槪念이 孟子에 와서는 누구나 노력하면 舜임금처럼 될 수 있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滕文公章句上)라고 변화한 것이다. 이것이 학자들이 말하는 ‘聖人槪念의 內包의 變化’이다.
이른바 宋朝六賢의 筆頭에 위치한 北宋의 道學者 周濂溪(周敦頤, 1017~1073)의 저서 『通書』의 제20장 ‘聖可學章’에 이르러서는 학문의 목적은 돈벌이나 立身揚名과 같은 利己的인 데로부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聖人이 되는 데 두어질 정도로 높이 格上되어 設定된다.
孟子에 의한 ‘聖人槪念의 內包의 變化’가 宋代新儒學이라고도 불리우는 朱子學과 우리나라 朝鮮朝性理學의 學問觀에 미친 영향은 실로 莫大한 바가 있다.
일찌기 『재팬 애즈 넘버원』의 시대에 미국이 일본에 배웠듯이 이제는 日本도 어떤 부분 한국에 배워야 할 것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한국의 글로벌 人才育成力』이란 책을 저술한 岩淵秀樹(이와부찌 히데끼)氏는 人才育成力의 文化的背景을 논하면서 한국인의 배움(學問)의 열기의 배경에 儒敎(性理學)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삼성·LG·현대 등 한국 기업 약진의 源泉을 물은 이 책에서는 그 유교적(성리학적) 학문관이 “모든 사람이 배워 노력하면 누구나 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임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孟子의, 周濂溪의, 朱子學의, 退溪의, 栗谷의 ‘聖可學論’을 의미함은 不問而可知이다.
다음은 孟子의 음악론에 언급할 차례이다.
4. 『孟子』의 ‘不若與衆’
「不若與衆」은『맹자』(양혜왕장구下)에 보이는 말인데 많은 사람(대중)들과 더불어 음악을 즐기는 것이 최고라는 뜻이다.
魯나라의 유명한 樂師(악사)인 摯(지)가 처음 연주한 「關雎」(관저)라는 음악의 마지막 樂章, 이것을 원문에서는 「關雎之亂」이라고 하였는데, 어지럽다는 뜻의 亂이라는 글자가 여기서는 음악의 마지막 악장(樂之卒章)이라는 뜻이다.
이름이 ‘지’라는 노나라 악사(즉 師摯)가 연주한 「관저」라는 음악, 그 중에서도 그 마지막 악장의 감동이 아직도 식지 않아, 孔子는 이것을 “아름답고 성대하게 아직도 귀에 가득하다”(洋洋乎盈耳哉-『논어』태백편)라고 하였다.
공자와 음악은 떼어 놓을 수가 없다. 이것은『莊子』(秋水편)에도 보이는 이야기인데, 공자가 匡(광)이라는 땅에 여행하였을 때의 일이다. 공자를 陽虎라는 사람으로 誤認하여 宋나라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서 공자일행을 겹겹이 포위하고 그 행동의 자유를 구속하였는데, 이같은 逆境속에서도 공자는 태연히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전혀 멈추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음악을 즐기실수 있는 것입니까(何夫子之娛也)”라는 제자 子路의 항의 속에서 공자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逆境앞에 태연할 수 있었다.
『논어』(팔일편)에서는 또 魯나라의 太師(악사의 長)와 심오한 음악 이론을 논한 공자의 말이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역시『논어』의 태백편에는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이라 하여, 음악에서 학문의 완성을 期하는 「成於樂(성어악)」이란 표현이 보이고, 역시『논어』의 술이편에는 “游於藝”라고 한 孔子의 말이 보이고 있다.
나는 “游於藝”의 이 「游」의 뜻을『莊子』逍遙遊등『莊子』全篇에 106회나 보이는 「遊」의 경지, 더 나아가 서양의 괴테와 동시대의 유명한 철학자 쉴러가 말하는 ‘觀念의 高等遊戱’의 경지까지 引伸하고 包括해서 해석하고 싶고 ‘藝’도 예·악·사·어·서·수의 六藝에 국한하지 않고 藝術全般으로 包括引伸해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공자가 음악에 대한 높은 品位의 깊은 理解를 표현한 말을 우리는 또『논어』의 述而편에서 찾을 수 있다.
공자는 齊나라에 있을 때 韶(소)라는 古典음악(舜임금의 음악)을 듣고 난 뒤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모를 정도
로 이 古典음악에 專一하게 몰입하였으며(三月不知肉味), “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이같은 <최고의>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不圖爲樂之至於斯也)”라고 하였다.
그런데 백성이 나라의 근본[民本]이라는 백성들에 대한 배려에 專一한 관심을 集中시키고 있는 孟子의 政治論的音樂觀에서는 孔子에서의 이상과 같은 音樂자체에의 깊은 이해를 찾기가 힘들다.
『孟子』의 萬章章句下에는
"伯夷는 聖人의 淸한 자(聖之淸者)요, 伊尹은 성인의 任한 자(책임감이 강한 성인-聖之任者)이고, 柳下惠는 성인의 和한 자(聖之和者)요, 孔子는 성인의 時(宜適中)한 자(聖之時者)이다."
라는 말이 보이고, 이어 “孔子를 集大成한 분이라고 이른다(孔子之謂集大成)”라고 하면서 集大成의 뜻을 金으로 소리를 퍼뜨리고 玉으로 소리를 거둔다고 “金聲而玉振之也”라고 말하고 있다. 뒤에 이어지는 말을 더 인용할 것도 없이 集大成은 管弦樂의 大合奏의 완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孟子를 음악에 沒理解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임이 틀림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孟子』에『論語』에서와 같은 음악에의 깊은 이해가 보이지 않는 것은 救時의 急務에 관심이 集中될 수 밖에 없는 時代相의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밖에 없다.
『孟子』(양혜왕장구下의 제1장)에 보이는, 많은 사람과 더불어 음악을 하며 즐기는 것이 제일이라는 뜻의 ‘不若與衆’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孟子』의 일부 원문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王(齊王)을 만났더니 王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대답을 못했다는 莊暴(장포)라는 사람의 말을 듣고, 맹자가 왕을 찾아 갔다.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장포에게 말씀하셨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라는 孟子의 질문에 王은 <부끄러워서> 얼굴 빛이 변하면서 “과인은 先王의 <古典>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세속의 <流行>음악이나 좋아할 뿐”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맹자는 단호하게 <古典음악과 流行음악을 가릴 것 없이>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시면 齊나라는 이상적인 좋은 정치가 곧 실현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지금의 유행음악이 옛 고전음악과 같습니다(今之樂由古之樂也)”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由는 猶(같을 유)와 같다."
孟子자신, 孔子의 말로 인용하면서 “鄭聲(鄭나라의 음란한 유행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古典正樂을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다(『孟子』,盡心章句下)”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古典音樂과 流行音樂을 정말 같다고 하였을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今樂=古樂」이라고 한 것은『孟子集註』에 朱子가 引用한 范氏의 말처럼 孟子가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切於救民)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范氏는 또 “孔子의 말은 나라 다스리는 正道요, 孟子의 말은 救時의 急務”라고 말하였는데 이 救時之急務속에서 우리는 孟子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孟子는 또 “혼자 음악을 즐기는 것과 다른 사람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의 어느 쪽이 더 즐거우냐”는 질문을 던져 왕으로부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 이상 좋은 것이 없다(不若與人)”는 답변을 들은 다음 더 나아가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은> 많은 대중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즉 “많은 대중들과 더불어 즐기는 것이 최고다(不若與衆)”라는 답변을 王으로부터 유도해낸다.
그리하여 맹자는 왕에게 그의 民本精神에 입각한 ‘與民同樂’ ‘與百姓同樂’을 강력하게 권유하기에 이르는데 그러기 위해 그는 今之樂(금지악)과 古之樂(고지악)이 같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音樂그 자체에의 藝術的感動과 沒入의 모습을 많이 보이고 더 나아가 음악에 의한 人間의 情性의 陶冶라고 하는 면이 많이 강조된 孔子(『論語』)에 비해,『孟子』에서는 맹자 자신 음악에 沒理解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孔子에서와 같은 음악에 대한 깊은 理解를 찾기가 힘들다. 금지악과 고지악이 같다는 말에도 분명 문제점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까지 ‘대중과 더불어(與衆)’ ‘백성들과 더불어(與民, 與百姓)’을 강조한 孟子의 民本思想은 다른 의미에서 그 가치를 절대로 貶毁(폄훼)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참고로 添言하면『莊子』(天地편)의 경우에는 장자의 음악론이 특이하다. “훌륭한 음악은 촌사람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고(大聲不入於里耳), 俗樂은 도리어 환성을 지르며 웃어대고 좋아한다”고 하고 따라서 “지극한 말(至言)이 나오지 않는 것은 俗言이 勝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大聲과 俗樂, 至言과 俗言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大聲과 至言에 대해 俗樂과 俗言을 분명히 ‘온 천하 사람들의 迷惑(以天下로 惑)’이라 하면서도 이 天下의 迷惑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되지도 않을 것을 억지로 고치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迷惑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莊子의 自由放任主義의 한 단면이다.
大聲(훌륭한 음악)과 俗樂을 엄격히 구별은 하면서도 대중들의 俗樂에의 陶醉를 억지로 뜯어고치려 하지 않는 自由放任이 莊子의 입장이다.
Ⅲ.『莊子』의 萬物齊同의 哲學
1. 절대의 밝은 지혜 ‘明’
『莊子』(齊物論편)에는 이러한 말이 보인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허리병이 생기고 반신불수가 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사람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면 벌벌 떨며 두려워하게 되는데, 원숭이도 그러한가?
사람·미꾸라지·원숭이의 세가지 중에서 누가 올바른 거처[正處]를 아는가?
사람은 소와 양, 개와 돼지를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소리개와 까마귀는 쥐를 즐겨 먹는다. 사람·사슴·지네·소리개(와 까마귀)의 이 네가지 중에서 누가 올바른 맛[正味]를 아는가?
암컷원숭이를 숫컷원숭이가 자신의 짝으로 여기고, 사슴은 같은 사슴 종류와 교미하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함께 헤엄치며 노닌다.
毛嬙(모장)과 麗姬(이희)를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물 속으로 깊이 도망하고, 새는 그들을 보면 힘껏 달아난다. 원숭이·사슴·미꾸라지·모장(과 이희)의 이 네가지 중에서 누가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正色]을 아는가?―라고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莊子의 주장은, 세상의 모든 相對的인 가치를 絶對的인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 人間의 迷惑이 있다는 것이다."
老子의 『道德經』(77章)에는 “하늘의 道는 여유 있는 데서 덜어서 부족한 쪽에 보충해 주는데, 사람의 道는 그렇지 않다. 부족한 쪽을 덜어서(착취해서) <오히려> 여유 있는 자에게 바친다”라고 있다. 이것은 老子가 人間社會의 현실을 하늘의 도[天之道]에 反하는 것으로 본 것을 의미한다.
사람과 하늘(人과 天)의 가치 기준의 反轉이라고 할 수 있는 老子의 이 생각은 莊子에도 계승되어, 장자는 사람이 절대의 밝은 지혜를 가지고 과오가 없는 행동을 하려면 일체의 先入觀이나 상대적 가치관의 固定觀念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할 것을 주장한다. 장자는 “그래서 明晳한 認識(즉 절대의 밝은 지혜=明)으로 판단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故曰莫若以明)”라고 말하고, 또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를 쓰지 않고 불변의 自然에 맡긴다. 이것을 일컬어 ‘明晳한, 절대의 밝은 지혜로 밝힌다’고 하는 것이다(爲是不用, 而寓諸庸, 此之謂以明-齊物論편)”라고 말하였다.
莊子의 이 절대의 밝은 지혜로서 한다(以明)는 提言을 일체의 이돌라(偏見)로부터의 해방을 說한 프란시스·베이컨에 유사하다는 지적(佐久協, 『이것이 中國人이다!』, 2008)도 있는데 장자가 베이컨보다 2000년 가까이 앞서 생존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2. 自由를 說한 思想家莊子
상식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가치를 큰 소리로 비웃는 사상가 장자의 저서『莊子』의 첫머리는 이런 말로 시작된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鯤이라고 한다.”
이 세상 북쪽 끝 검푸른 물결 일렁이는 북극의 바다에 鯤(곤)이라는 이름의 물고기가 있는데 이 鯤의 크기는 몇 千里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수천리나 되는 이 거대한 물고기 鯤이 어느 때이던가 커다란 變身을 하여 그 등의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새로 변화한다. 이 거대한 새는 그 이름을 鵬(붕)이라고 한다.
이 터무니 없이 큰 붕새가 한 번 온몸의 힘을 떨쳐 하늘 위로 날으면 그 날개는 어찌나 큰지 하늘을 덮은 구름으로 착각할 정도다.
이 붕새는 이제 남쪽 바다로 떠나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다름아닌 하늘의 못, 天池이다.
상식을 뛰어 넘은 무한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으로 날아가는 鵬새를 통해, 통쾌한 諧謔의 철학자 장자는 그가 주장하는 절대 자유의 경지를 우리에게 제시하려 한다.『莊子』의 첫머리 逍遙遊편의 첫머리를 장식한 장자 특유의 寓話이다. 소요유는 곧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라는 뜻이다.
논술과 寓話의 배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字數는 65,000여 字이고 33편으로 편성되어 있는 것이『莊子』이다. 內편이 7편, 外편이 15편,雜편이 11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莊周(장주) 즉 장자 본인의 自著로 볼 수 있는 것은 내편의 7편만이고 외편과 잡편은 후속의 장자학파에 의해 假託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그러나 이것도 전문학자들에 따라서 장자의 自著篇名의 지정에 異說이 분분하여 定說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莊子』를 『老子道德經』과 함께 중국 고대의 道家哲學의 原典으로 보는 것은 철학사의 상식인데도 여기에도 異說이 없지 않다.
郭沫若이 『十批判書』에서 장자를 공자의 제자 顔回계통의 儒者출신이라 한 바도 있거니와, 이보다 앞서 淸末의 사상가 譚嗣同이나 梁啓超등 公羊學派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공자의 學(大同理念)의 二大支脈을 맹자와 장자로 보고 있다.
이것은 물론 철학사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다. 儒家라 하면 곧 공·맹을 연상하고 道家라 하면 곧 노·장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이 철학사·사상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哲學·思想에 대한 철학사의 상식에 어긋나는 이같은 견해가 한편에 있는 것은, 그러나 흥미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莊子』의 철학체계가 전국시대 후기로부터 말기에 이르는 사이에 道의 개념을 중심에 놓은 形而上學·存在論으로 정비되기에 이르러서는, 荀子·墨家·名家등의 예외를 제외한 다른 모든 학파의 사상체계 속에 편입되어 그 기초적 第一哲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가와 도가 사이의 사상적 交涉은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었던 것이다.
원래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사색에 약해서 사상체계의 기초정립에 불안요인이 있었던 儒家가 전국시대 말기로부터 시작되는 『周易』의 經典化과정에서『莊子』의 道의 형이상학·존재론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것으로 편입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에 대하여는 『周易』의 繫辭傳등을 근거로 최신의 연구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주역 계사전』을 儒家와 道家의 타협의 산물이라고까지 말하는 이도 있다.
3. 萬物齊同과 因循主義
모든 對立과 差別은 虛妄한 것이라는 것이 莊子의 萬物齊同의 哲學과 因循主義이다. 장자는 萬物存在의 근본원리를 道라 하여 이 道의 견지에서 보면 현실세계의 모든 對立과 差別은 虛妄한 것이 되어 만물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게 된다고 한다.
『莊子』의 齊物論편에는 ‘天鈞’과 ‘兩行’이란 말이 보이는데 천균이란 곧 세속의 시비의 價値的偏見을 是도 없고 非도 없는 實在의 ‘하나[一]’ 에 조화하고 心知의 分別을 放棄하는 저절로 같은 絶對의 一이고, 兩行이란 곧 모든 矛盾과 대립을 동시에 성립시키는 渾沌이다. 이것이 萬物齊同의 哲學이다.
이러한 萬物齊同의 철학에서는 極小가 오히려 極大가 되고 큰 것이 오히려 작은 것이 된다. “천하에 가을 털끝보다도 큰 것이 없고, 태산은 작다(天下莫大於秋毫之末, 而大(泰)山爲小-제물론)”라는 命題는 이러한 만물제동의 철학에서 가능해진다.
그리고 勿論, 이같은 萬物齊同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절대의 밝은 지혜[明]로서 판단하여야 함을 莊子는 말하고도 있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또한 『史記』(권130)에서 道家의 학술을 설명하여 “虛無를 근본으로 하고 因循을 그 작용으로 한다(其術以虛無爲本, 以因循爲用)”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因循은 無爲自然으로 말미암아(因) 따른다(循)는 뜻이니, 이 무위자연의 因循主義의 근거가 곧 만물제동의 철학인 것이다.
이 만물제동의 철학을 근거로 道와의 一體化를 이루는 과정에서 장자는 노자에 비해 더욱 철저화된다. 老子의 無爲나 莊子의 無爲가 人爲를 배척하는 점에서는 같으나 노자의 무위가 外向的인 데 비해 장자의 무위는 더욱 내면화하여 無心으로까지 철저화된다.
老子와 莊子의 무위자연의 철학의 근저에는 현실세계의 대립과 차별상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식이 깔려 있다. 동양철학 속에서 否定의 論理와 否定의 精神은 老子와 莊子에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無心의 경지로까지 철저화된 장자의 무위는 道와의 일체화를 통해 대립차별의 현실세계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운 삶을 획득할 수 있다고 장자는 말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 부득이한 현실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자유로운 삶을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장자의 철학을 고답적 현실순응주의라고까지 평가하는 학자도 있지만, 장자의 因循主義는 단순한 현실순응의 논리는 아니다. 不自由한 현실로부터 절대자유로의 장자의 초월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 속을 돌파해 나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안고 뛰어넘는 包越의 論理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인순주의의 기막힌 효용인 것이다.
道와의 일체화, 無心의 경지에 들기 위한 수양의 방법으로 莊子는 ‘心齋’(人間世편)와 ‘坐忘’(大宗師편)을 들고 있다. ‘心齋’는 마음의 虛無化(마음을 비움)의 뜻이고 ‘坐忘’은 手足이나 신체의 作爲를 물리치고 耳目의 감각 작용을 제거하여 육체를 떠나고 心知까지도 버리고서 모든 사물에 자유로이 소통하는 道와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인위를 버리고 무위자연을 말하는 점에서도 노자와 장자는 같다. 인위적인 관점에서 쓸모없는 이른바 無用이 실은 有用한 것이라는 가치의 전환을 말하는 점에서도 노자와 장자는 같다. 그런데 이 無用의 有用으로의 전환도 바로 도가철학의 인순주의의 효용임은 말할 것도 없다.
4. 或使와 莫爲
『莊子』(장자철학)에 있어서의 ‘變化’의 문제와 ‘道’의 문제를 탐구하려 할 때 우리는 장자의 철학에서 主宰者는 있는 것인가[或使]와 없는 것인가[莫爲]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흘러가고 굴러가면서 변화해가는 이른바 流轉變化, 이 유전변화에 타고 노니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화와의 일체화’이다. 변화와 한몸이 되는 것이다. 장자에 있어서는 變化와의 일체화가 곧 道와의 일체화이다. 莊子는 이것을 體逝(山木편)라고도 하고 與時俱化(山木편)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을 때에는 내 몸에 닥치는 운명을 必然으로 받아들여 따르게 되는데『莊子』에는 또한 運命的必然에의 隨順을 의미하는 것으로 物의 변화에 타고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는 乘物以遊心(人間世편)이라는 말이 있고, 生에도 편안하고 死에도 편안하여 삶에 집착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安時而處順(養生主편‧大宗師편)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장자에 있어서의 이같은 변화와의 일체화가 바로 道와의 일체화일 수 있기 위하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否定의 정신에 근거한, 정신의 절대자로의 높은 次元의 超越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 장자철학의 깊은 뜻이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아니된다. 낮은 차원, 物의 차원에서 줏대 없이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고 達觀없이 因循하는 것이 아님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익에 마음이 끌려가지도 않고(不與利遷, 天道편), 외물에 끌려 物과 함께 옮겨다니지 않는다(不與物遷, 德充符편).
장자는 일체만물의 生成變化의 모습을 命으로서, 天으로서, 自然으로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物의 변화를 命으로서 받아드린다(命物之化,德充符편). 장자는 이같은 토대 위에서, 다시 말하여 모든 變化와 流轉의 모습을 높이 초월한 위에서 그 참모습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변화와 유전의 참모습 속에서 調和와 기쁨을 찾고, 끊임없이 生成하고, 유전변화해가는 만물과 따뜻한 봄날과 같은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莊子』에는 이것을 與物爲春(德充符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변화에 타고 노니는 것, 변화와의 일체화, 이것을 道와의 일체화라고 할 수 있는 가능근거는 이상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거니와, ‘變化’와 ‘道’의 문제를 궁구함에 있어서는『莊子』해석상의 두가지의 대립된 큰 흐름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變化’ 그 자체를 ‘道’로 보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도’를, ‘변화’ 그 자체를 초월한 변화의 밖에서 찾는 해석이다. 전자는 생성 변화 유전하는 만물의 변화 그 자체의 밖에 따로 주재자가 없다[莫爲]는 해석이고, 후자는 주재자가 변화의 밖에 따로 있다[或使]는 것이다.『莊子』齊物論편의 원문 “咸其自取, 怒者其誰邪”의 해석에서 대립된 두 견해는 딱 갈라진다.
중국 晉의 郭象이래의,『莊子』해석의 한쪽의 큰 흐름에서는 「咸其自取」쪽에 무게를 두어 해석한다. “<모든 소리의 울림은> 모두 스스로(자기원인에 의해서) 취하는(그렇게 되는) 것이니, 소리나게(怒하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을 배후에서 소리나도록 하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것으로, 이 문구를 「노자기수야(怒者其誰邪), 함기자취(咸其自取)」의 倒置形의 문구로 보거나, 아예 「怒者其誰邪」를 의문문이 아닌 反語의 문구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郭象류의 이상과 같은 해석에 반대하는 다른 한쪽의 큰 흐름에서는 「怒者其誰邪(소리나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의문문의 뒤에는 그것을 그것이도록 하는, 예를 들어 眞君‧眞宰와 같은-주재자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 含意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상의 제물론편의 해석에서 전자의 해석을 취하고, 또한 변화에 타고 노니는 것, 변화와의 일체화를 道와의 일체화라고 할 때에는 장자의 ‘道’는 바로 무한변화의 변화 그 자체라고 보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변화 그 자체를 道라고 할 때, 이러한 운동변화의 自己外的원인의 부정이론은 대체로 郭象해석에 의한『莊子』를 그 원류로 하는 중국 또는 조선조 철학사에서의 氣哲學의 공통이론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郭象을 莊子에 대한 반역자라고까지 하면서 그 류의 해석에 반대하는『莊子』의 다른 주해자들은『莊子』에 보이는 ‘眞宰’‧‘眞君’이라는 擬人的인 호칭(齊物論편)과 ‘造物者(大宗師‧應帝王편)’와 造化者를 비유한 ‘大冶(冶는 대장장이, 大宗師편)’ 등을 들어 운동변화하는 만물을 그렇도록 시키는 어떤 초월자나 근원자를 인정하는 본체적 사상의 요소가 장자의 사상 속에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변화의 배후에 주재자가 있다는 주장이다.
운동변화하는 만물을 그렇도록 시키는 어떤 초월자나 근원자를 인정하는 本體的思想의 요소가 장자의 사상 속에 있다고 보는 주석을 따른다면, 우리는 그것이 중국 宋代의 朱子學의 理氣二元哲學의 思辨發展의 與件이 되었음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장자의 철학은 주자학에 있어서도 그 철학체계 구축을 위한 第一哲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莊子』의 다른 편(則陽편)에서는 오히려, 운동변화의 배후에 주재자가 있다[或使]든가 주재가 없다[莫爲]든가 하는 或使와 莫爲의 논쟁은 아직 物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고 결국은 잘못된 이론이라고 한 太公調의 말이 보이고 있기도 하여 장자철학의 깊이의 무궁무진함을 보여 주고 있다.
끝으로 몇마디 附言하고 이 稿를 마칠까 한다. 중국 고대의 철학사상 가운데 ‘죽음’의 문제를 가장 진지하게 凝視한 것은『莊子』가 유일하다.
宋나라 때의 羅勉道가 “道家에서는 죽음[死]을 변화[化]라고 말한다(道家以死爲化)”라고 한, 이 道家는 곧 莊子를 의미한다.
『莊子』(大宗師편)에는 “子祀‧子輿‧子犁‧子來네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했다.
‘누가 無를 머리로 삼고 生을 등뼈로 삼고 死를 꽁무니로 삼을 수 있는가? 누가 生과 死, 存과 亡이 한 몸임을 아는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와 사귀고 싶다.’ 하고는 네 사람이 서로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고 서로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자 마침내 막역지우가 되었다”라는 설화가 보인다.
그런데 얼마 뒤 이 莫逆之友네 사람 가운데 子來가 병에 걸려 헐떡거리면서 막 죽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빙 둘러싸고 울고 있었는데 子犁가 가서 위문하고 이렇게 말했다.
“쉿! 저리들 비키시오! 이 엄숙한 변화의 작용을 방해하지 마시오(叱避, 無怛化)”
무달화(無怛化)의 化는 死와 같고 怛(달)은 놀라게 한다는 뜻. 무달화는 결국 엄숙한 변화의 作用[죽음]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니 이 경우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生의 終末정도의 뜻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 五木寛之라는 작가가 쓴 『新老人의 思想』(2013)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 “죽음을 惡이라고 보는 文化, 그리고 늙음을 屈辱으로 부끄러이 여기는 文化로부터의 脫出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닥친 시급한 과제다”라는 글을 읽었다.
나는 이 課題에 대한 해결책을『莊子』에서 찾기를 권하고 싶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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