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일반

조선 후기 성(性)의 실상과 배경

rainbow3 2020. 1. 26. 17:58


조선 후기 성(性)의 실상과 배경


- 『기이재상담(紀伊齋常談)』을 중심으로 -           * 정 병 설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 서론


성(性)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성매매, 성희롱, 성교육 등 성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가 쉽지 않다. 그만큼 사안이 미묘하고 복잡하다. 그런데 그에 앞서 논의 자체를 꺼리는 경향마저 있어서 더욱 문제이다.

인간사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돈과 성은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버려두고 인간사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적절한 답을 마련하자면 먼저 역사적으로 성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역사를 알아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조선시대의 성은 억압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지배 이념인 유교가 성을 엄격히 통제했고, 법과 제도가 그 억압을 강제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조선 사람들은 도덕과 법을 잘 따랐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열절(烈節)이라는 유교의 엄격한 억압적 성윤리 등으로 인하여 이런 오해가 있었지만, 열절은 일부 상층 여성에게나 해당되었지, 조선 사회 전체가 이런 성적 억압에 눌려 있지는 않았다. 그나마 상층여성에게 가해진 성적 억압도 조선 전기는 조선 후기만큼 강하지 않았다.


본고는 조선 후기의 성을 바탕에서부터 차근히 살펴보고자 한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성에 대한 그의 유명한 삼부(三部) 저작인 성의 역사 에서 성을 구성하는 세 개의 축을 “성과 관계된 지식의 형성, 그것의 실천을 규제하는 권력체계, 그리고 개인이 그 안에서 스스로를 성의 주체로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해야만 하는 형태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1) 이를 바꾸어 말하면 성에 대한 지식과 정보, 성에 대한 권력의 대응, 그리고 성적 주체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성과 관련된 지식, 권력, 주체의 세 범주를 설정한 것이다. 본고도 이 세 범주에 따라 조선 후기의 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성에 대한 지식은 의학 분야에서 살피기로 한다. 굳이 푸코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동양에 성과학(性科學)이 부재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의 경우 기껏 양생서(養生書) 정도에서 성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이다. 그 대략은『동의보감(東醫寶鑑)』과 같은 의학서에 거의 수용되어 있다. 여기서는『동의보감』을 대상으로 조선의 성 지식을 살피기로 한다.

다음으로 성에 대한 권력의 대응은 명문화된 법전과 실제 권력의 대응을 나누어 살필 것이다. 주로 『대전회통(大典會通)』과 『대명률(大明律)』의 성 관련 조항과『심리록(審理錄)』에 나타난 실제 형사 사건 판례를 통해 성의 양상을 살필 것이다. 물론 이들 자료만으로 조선 후기 성의 이해 수준과 실상을 알 수는 없다. 어쩌면 이들 자료를 조사함으로써 문학작품이 조선 후기의 성을 아는 데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학작품은 성적 주체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다.


1) 미셸 푸코 저, 문경자, 신은영 옮김, 『성의 역사』 2, 나남, 1990, 18~ 19쪽.

* 이 논문은 2010년도 성곡학술문화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음.

주 제 어: 기이재상담, 성소화, 섹슈얼리티, 소대남편, 화처 sexual openness, sexual oppression, Giijaesangdam 紀伊齋常談.



최근 필자는 『기이재상담(紀伊齋常談)』이라는 한문본 성소화집(性笑話集)을 번역, 해설하여 소개한 바 있다.2) 『기이재상담』은 총 31편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비록 많은 수는 아니나 조선 후기 성의 여러 양상을 두루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연구 자료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이 책을 면밀히 분석하여 조선 후기에 성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살펴보고, 여기서 도출된 결론을 확대하여 조선 후기의 성에 대해 논할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성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점에 유념하여 이야기에서 내세운 것이 아니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 현상에서 실상을 찾도록 노력할 것이다. 물론 성의 실상은 문학작품에만 표현되어 있지 않다. 춘화, 노리개 등의 그림, 조각 등에서도 보인다. 본고는 이 모두를 고려하겠지만 따로 분석 항목을 설정하지는 않는다. 대상을 넓힘으로써 자칫 논점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인문학 연구의 주제가 추상적 관념적인 것보다, 몸, 성 등의 구체적이며 물질적인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들 분야는 이념 또는 관념을 중시한 인문학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분야이기도 하다. 사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추상과 관념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2008년 한국한문학회에서는 ‘한국한문학과 성담론’을 특집으로 학술지를 간행한 바 있다.3) 여기에는 강명관의 「조선시대의 성담론과 성」, 진재교의 「조선조 후기 문예공간에서 성적 욕망의 빛과 그늘」, 김경미의 「조선후기 성 담론과 한문소설에 재현된 섹슈얼리티」, 윤채근의 「조선 후기 남성훼절 서사에 나타나는 섹슈얼리티의 양상」 등이 실려 있어서, 조선시대 성과 그 문학적 표현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가 이루어졌다. 또 『기이재상담』을 소개한 필자의 책 『조선의 음담패설』에서도 약간의 새로운 견해를 보탠 바 있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성이 지식, 이념, 법, 제도, 권력 등의 여러 부분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떤 원칙과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하는지, 그런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답변을 시도하지 않은 듯하다. 본고는 비록 시론에 그칠지라도 이 물음에 대해 답을 준비하는 모험을 감행하고자 한다.

리 결론을 앞질러 말하면, 조선 후기는 기본적으로 성적 개방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분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 질서 유지와 관련되는 부분에서만 엄격히 규제될 뿐이라는 것이다.


2) 정병설 풀고씀, 『조선의 음담패설』- 기이재상담 읽기-, 예옥, 2010.
3)『한국한문학』 42, 한국한문학회, 2008.



2. 지식과 법


2.1. 의학


전근대 조선에서 성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은 찾을 수 없다.
성에 대한 지식이라야 중국 고대의 양생서에서 비롯된 것이 거의 대부분인데, 양생서에 성에 대한 논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대상이나 현상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 또는 분석하지 않았다. 대개 성욕의 억제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성기의 모양이나 구조, 그리고 그것이 운동하는 방식 등을 명명하고 묘사하고 분류하고 계량화하고 체계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정(射精)이 가져오는 손실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과 주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서술은 조선의 양생서는 물론 그 논리를 수용한 조선의 의학서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4)

본고에서는 조선의 대표적인 의학서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통해 성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대략 살피기로 한다.


먼저 『동의보감』의 제1부라고 할 수 있는 「내경편(內景篇)」에 있는 정(精)에 대한 설명을 보자.


"정은 지극히 보배로운 것이다. 정이란 가장 좋은 것을 말한 것이다. 사람의 정은 가장 귀한 것이지만 그 양은 매우 적어서 온몸의 정을 다 합하여야 모두 한 되 여섯 홉이 된다. 이것은 남자가 16세까지 정을 배출하지 않았을 때의 분량으로, 한 근의 무게가 됨을 말한다. 정을 쌓아 가득히 채우면 석되가 되고, 정을 손상하거나 잃으면 한 되가 채 안 된다. 정과 기는 서로를 길러주는데, 기가 모이면 정이 가득하게 되고 정이 가득하면 기가 왕성하게 된다.5)"


『동의보감』은 인간의 몸은 정(精)에서 만들어진다고 보고 있다. 정이 몸의 근본인 셈이다. 그러니 정은 잘 관리될 필요가 있다. 정의 배설을 억제하여 정을 쌓으면 기가 왕성하게 된다. 기가 왕성하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이고 그러면 오래 잘 살 수 있다. 오래 잘 살기 위해서는 정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양생의 핵심이다.


이 견해는 얼핏 일리가 있는 진술로 보이기도 한다. 정(精)을 정자로 보면 정자로부터 인간의 몸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현대 의학의 견해와도 다르지 않다. 또 정의 양을 구체적으로 표시한 것이 과학적 서술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들이 과학적 서술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명제들은 합리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은 당대를 대표하는 의학서인데도, 적어도 성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근거 없는 현상 분석과 논리적 비약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동의보감』의 제2부는 「외형편(外形篇)」이다. 「내경편」이야 워낙 기(氣), 정(精), 혈(血) 등 신체의 내적 활동을 다룬 것이어서 과학이 미발달한 상황에서는 과학적 서술이 쉽지 않겠지만, 「외형편」은 신체 자체를 다룬 부분이니 검증 가능한 명제들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쳐보면 성기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그다지 과학적인 서술이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전음(前陰)’에는 남녀 성기에 생긴 병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처방을 보면 「내경편」과 마찬가지로 양정론(養精論)에 입각해 있다. 성을 과도하게 사용한 것 등을 주요 병인(病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3부인 「잡병편(雜病篇)」을 보면 ‘부인(婦人)’ 항목에 ‘음양교합피기(陰陽交合避忌)’조 등 성과 관련된 조항이 있는데, 여기서도 ‘병정일(丙丁日)과 현망회삭일(弦望晦朔日), 그리고 벼락치고 어두운 날 등은 성행위를 피하라’ 등의 비과학적인 서술이 있을 뿐이다. 어디서 유래한 처방인지 어떻게 검증이 가능한지는 따지지 않고, 전해들은 속설을 옮겨놓은 수준의 서술만 있는 것이다. 몸에 관한 한 조선 최고의 지식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동의보감조차 이 정도이니, 조선에 성에 관한 지식이 없었다고 해도 망발이라는 비판은 면할 것이다.


4) 김성수, 「16~ 17세기 양생서 편찬과 그 배경」, 『한국사상사학』24, 한국사상문화학회, 2005 등에서 양생서 편찬과 의학서와의 관계를 대략 엿볼 수 있다.

5) 허준 엮음, 동의과학연구소 옮김, 『동의보감』 1, 휴머니스트, 2002, 223쪽.


2.2. 법


조선의 법전은 『경국대전』으로 대표된다. 『경국대전』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후 개수를 거듭하여, 영조 때의 『속대전』, 정조 때의 『대전통편』,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종 때의 『대전회통』으로 이어졌다. 이들 법전은 기본적으로 『경국대전』의 틀과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부분적으로 새 법령을 넣기도 하고 또 종전의 법령 가운데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빼기도 했다. 그리고 전대 법전에서 증산(增刪)된 내용은 후대의 법전에 자세히 표시했다. 따라서 『대전회통』만 봐도 해당 법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대전회통』은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각각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이다. 이 가운데 조직과 인사 문제를 다룬 「이전」, 재정과 조세를 다룬 「호전」, 군사를 다룬 「병전」과 건축, 토목을 다룬 「공전」은 성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
다만 과거 시험과 각종 예식을 다룬 「예전」은 성과 밀접히 연관된 혼인 문제에 대한 부분이 약간 있다. 실제로 성을 규제하는 법령은 거의 「형전」에 있다.


먼저 「예전(禮典)」에 있는 성과 유관한 혼인 관계 조항을 간단히 정리한다.6)


○ 남자 15세, 여자 14세면 비로소 결혼을 허락한다.
○ 사대부로서 처가 사망한 자는 3년을 지낸 뒤에 개취(改娶)한다. 만일 부모의 명이 있거나 4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는 경우에는 1년 후에 개취함을 허락한다.
○ 혼인은 『가례(家禮)』에 의하여 지내되 먼저 납폐(納幣)한 뒤라도 양가 부모의 상이 있게 되면 삼년상이 마치기를 기다린다. 위반하는 자는 가장이 장(杖) 일백대를 맞는다.
○ 관향(貫鄕)이 다르더라도 만일 성자(姓字)가 같으면 혼인하지 못한다.
○ 결혼의 시기를 넘긴 자가 있으면 한성부와 제도(諸道)에 엄칙(嚴飭)한다. 한성부와 제도는 우심(尤甚)한 자를 찾아서 호조(戶曹)와 영읍(營邑)으로 하여금 특별히 돕게 한다.
○ 자신이 상중에 있고 아들의 기복(朞服)이 끝나지 않은 자로서 혼례를 빨리 지내게 되면 불근거상률(不謹居喪律)로써 논죄(論罪)한다.
○ 역적의 집 손녀(孫女)는 이혼(離婚)하지 못하게 한다.


「예전(禮典)」은 혼령을 제한하여 조혼을 막는다든지, 상중에 혼례를 올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게 한다든지, 어떤 이유로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을 결혼하도록 돕는 등 혼인을 자연스런 인간 관습으로 보아 그것을 규제하는 내용이다. 이런 혼인의 규제는 결국 유교적 사회 질서의 유지를 위한 것이다. 사회 질서와 무관한 별도의 성적 규범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은 직접적으로 성을 규제하는 『형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조선의 형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형법전인 『대명률(大明律)』을 준용하였다. 『경국대전』에도 「형전」이 있지만 그것은 『대명률』의 보완에 지나지 않았다. 형법의 기본적인 틀과 세부적인 사항은 『대명률』에 기대고, 『경국대전』은 부분적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게 변용을 가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먼저 『대명률』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대명률』에서 성을 구체적으로 규제하는 법규는 「형률(刑律)」 ‘범간(犯姦)’에서 보인다.7)

범간조의 하위 조목을 쭉 나열하면, ‘범간(犯姦)’ ‘종용처첩범간(縱容妻妾犯姦)’ ‘친속상간(親屬相姦)’ ‘무집옹간(誣執翁姦)’ ‘노급고공인간가장처(奴及雇工人姦家長妻)’ ‘간부민처녀(姦部民妻女)’ ‘거상급승도범간(居喪及僧道犯姦)’ ‘양천상간(良賤相姦)’ ‘관리숙창(官吏宿娼)’ ‘매량위창(買良爲娼)’이 있다.

범간조는 직접적인 성행위를 규제하는 법규지만, 제목을 보아서도 대략 알 수 있다시피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의 성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와 누구가 하는 성행위를 규제할 뿐이다.

친척 간에 못하게 하고, 하층 남성과 상층 여성이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며, 관리가 창녀를 끼고 자지 못하게 하고, 양가녀를 팔아서 창녀로 만들지 못하게 한다. 엄밀히 말하면 성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대한 규제이다.


6)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번역한 『대전회통』을 사용했다. 동방미디어에서 그 원문을 인터넷을 통해 서비스하고 있다. 번역은 이해하기 쉽게 필자가 약간 바꾸었다.

7)『대명률』에도 「호율(戶律)」에 혼인에 관한 조항이 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혼인의 문제를 경국대전보다 훨씬 상세히 열거하고 있다. 그 제목만 뽑아보면, ‘남녀혼인(男女婚姻)’ ‘전고처녀(典雇妻女)’ ‘처첩실서(妻妾失序)’ ‘축서가녀(逐婿嫁女)’ ‘거상가취(居喪嫁娶)’ ‘부모수금가취(父母囚禁嫁娶)’ ‘동성위혼(同姓爲婚)’ ‘존비위혼(尊卑爲婚)’ ‘취친속처첩(娶親屬妻妾)’ ‘취부민부녀위처첩(娶部民婦女爲妻妾)’ ‘취도주부녀(娶逃走婦女)’ ‘강점량가처녀(强占良家妻女)’ ‘취악인위처첩(娶樂人爲妻妾)’ ‘승도취처(僧道娶妻)’ ‘양천위혼인(良賤爲婚姻)’ ‘몽고색목인혼인(蒙古色目人婚姻)’ ‘출처(出妻)’ ‘가취위율주혼매인죄(嫁娶違律主婚媒人罪)’이다.



이러한 『대명률』의 규제는 『경국대전』에 별다른 첨산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졌고,『속대전』에 와서야 보완이 이루어졌다. 보완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속대전』 「형전(刑典)」 범간조의 내용이다.


○ 대개 간범률(姦犯律)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처벌하나 죄인이 잉태한 경우에는 자식을 낳은 후에 처분한다.
○ 사족(士族)으로서 시마(緦麻) 이상의 친척이나 시마 이상의 친척의 처를 간음한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교살(絞殺)하고, 대공(大功) 이상 친척의 양첩(良妾)을 간음한 자도 교살하며, 상천(常賤)으로서 장모를 간음한 자는 참살(斬殺)한다. 동모이부(同母異父)의 누이를 간음한 자는 교살하고, 종부형제(從父兄弟)의 처를 간음한 자는 장(杖) 일백대와 유형(流刑) 삼천리(三千里)에 처한다.
○ 사족의 부녀로서 음욕을 자행하고 풍속과 교화를 문란케 하는 자는 간부와 아울러 교살한다.
○ 비부(婢夫)로서 처의 상전을 간음한 자는 남녀를 모두 때를 기다리지 않고 참살한다.
○ 사족의 처녀를 겁탈한 자는 간음의 성립 여부를 물론하고 주범이든 종범이든 모두 때를 기다리지 않고 참살한다.
○ 궁녀로서 외인과 통간한 자는 남녀 모두 때를 기다리지 않고 참살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속대전』에서 보완한 것은 조선의 풍속에 따라 법규를 좀 더 세밀하게 규정한 것뿐, 성의 규제가 사회적 관계에 대한 것이라는 틀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친척의 범위를 세밀히 규정하여 가까운 친척과의 간음을 더욱 강하게 규제하고, 선비집 부녀의 성적 문란 또는 그 부녀에 대한 성폭행을 더욱 엄히 규제하여 양반 사회의 신분 질서를 더욱 공고히 지키려는 뜻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의학서와 법전을 통해 보면 조선은 성에 대한 지식이 별 필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을 그저 사회적 관계의 일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은 인간적 관계 형식이 문제일 뿐 성행위의 세부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행위로서의 성은 그저 의학적으로는 쓸데없는 낭비로 치부되었을 뿐이고, 사상적으로는 유교 이념에 따라 절제되어야 할 욕망에 불과했다.



3. 성의 실상


조선 후기 성의 실상은 어떠했을까?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조선에 성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거의 축적되지 않은 만큼, 성의 실상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성은 꼭 필요한 연구 분야이지만 연구 자료가 없어서 연구하기가 어려운 영역이 되었다. 필자는 선행 저술에서 조선시대 성의 실상에 대해 관견을 붙인 바 있지만 미흡한 수준이다. 거기서 필자는 조선이 현대인의 선입견보다 성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 만을 몇몇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었을 뿐이다. 여기서는 하층의 혼속을 중심으로 조선의 성적 개방성을 살핀 다음, 18세기 후반 사형죄인 심리기록인 『심리록(審理錄)』에 나타난 성 관련 범죄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성의 실상을 약간이나마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후기의 상황을 알기 이전에 조선 전기와의 간극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조선 후기의 상황을 더욱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최근 출간된 손종흠 교수의『조선남녀상열지사』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열다섯 건의 간통 사건을 찾아서 자세히 해설하고 있다.8)

그런데 이 책을 보면 다룬 사건들이 모두 조선 전기에 국한되어 있다. 17세기 초인 광해군 때 사건이 마지막이다. 왜 그럴까? 저자가 일부러 조선 후기의 사례를 배제한 것 같지는 않다.

손종흠 교수가 제시한 간통 사건은 이런 것이다. 그는 열다섯 건의 사건을 네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 사대부 남성이 기생첩을 사이에 두고 벌인 쟁탈전.

둘째, 아버지나 장인의 여자와 간통하거나 첩으로 삼는 패륜.
셋째, 도덕군자로 추앙을 받으며 정치적으로도 성공한 이들을 둘러싼 추문.
넷째, 왕실이나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신분이 낮은 노비나 승려들과 정을 통하는 경우.

’ 열다섯 사건을 보면 모두 양반이나 명관(名官)들의 추문이다.


설령 이런 유형의 간통 사건을 찾고자 해도 『조선왕조실록』조선 후기 부분에서는 이런 간통 사건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일이 거의 없어졌다고 단언할 수 없겠지만, 조선 후기에 오면 이런 일들은 공론의 영역에서는 거의 논의되기 어려웠던 듯하다.

더욱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 전기의 간통 사건을 보면 유교 사회인 조선이 이렇게까지 ‘문란’한지 놀라게 된다. 그것도 못 배우고 가난한 하층민이 아니라 최고의 학자나 고급 관리 등 상층 귀족의 일이다. 유교 사회라면 적어도 저지른 간통에 대해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은 느낄 법도 한데 그나마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병조판서의 딸인 명문가 여성이 남편에게 간통 현장을 적발 당하고도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고 하며, 아내의 부정을 말하는 사위에게 장모가 ‘뭐 그런 어린 아이들 장난을 가지고 흥분하느냐’고 도리어 꾸짖었다는 부분도 있다. 그 사위가 나중에 병마절도사까지 되었다니, 조선 후기라면 도저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한다. 게다가 이들 사건의 죄질을 판단하는 임금조차 간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문란’한 조선 전기에 비하면 조선 후기는 성에 대한 억압이 훨씬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드러진 간통 사건이 거의 없다고 해서 조선 후기를 성적 억압이 철저히 관철된 사회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먼저 결론을 말하면 상층의 양반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은 전기보다 훨씬 강화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도 축첩과 기생 제도 등 남성의 성적 방종을 부추기는 제도는 건재했다. 19세기 중반 조선에 온 프랑스 선교사는 조선을 성적 방종이 판치는 사회로 그리고 있다.

샤를르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풍기의 문란은 모든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과반수가 그들의 진짜 부모를 모르고 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이다”라고 적고 있다.9) 또 이 글은 어떤 여자가 겁탈 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저는 당신 딸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강간을 막을 수 있을 정도라고 덧붙이고 있다.


8) 손종흠, 『조선남녀상열지사』, 앨피, 2008. 필자는 『서평문화』72호(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2008년 겨울호)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 바 있다.

9) 샤를르 달레, 안응렬 역,『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원저는 1874년 파리 출간), 229쪽. 이 기록은 다블뤼 주교(1817~1866)의 편지를 인용한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가 고국에 보낸 편지는 외국인이 한국을 잘 모르고 쓴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이 한국의 낯선 문화를 과장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선교사는 외국인이긴 하지만 쉽게 국외자로 돌릴 수 없는 무게가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조선 민중 사이에 깊이 들어갔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문서를 살펴보고 여기에다 문학작품까지 견주어보면, 이들의 발언을 결코 허황한 과장으로 돌릴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조선 후기는 의외로 성적으로 개방적이었다.


성적 개방성의 대표적 양상은 혼속에서 볼 수 있다. 흔히 남성이 둘 이상의 아내를 두는 축첩 제도는 잘 알고 있지만, 여성이 둘 이상의 남편을 두는 관행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축첩으로 대표되는 중복혼(重複婚)이 상층의 권력과 재산이 있는 남성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하층 남성들 사이에서도 행해진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이런 개방적 혼속은 고문서나 문학작품 특히 성소화집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알 수 있다.


과문인지 몰라도 남편을 둘 이상 둔 하층 여성의 혼속에 대해서는 필자의 선행 저술에서 처음 제기한 듯하다. ‘소대남편’ ‘소대남진’ ‘소대서방’ 등의 말이 있다. 종전 연구에서는 이 말을 ‘샛서방’ 또는 ‘간부(間夫)’라고 풀이하면서, 부적절한 관계 또는 주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은밀한 관계로 이해했다.

그런데 『기이재상담』『유년공부(酉年工夫)』등의 성소화집은 물론, 『포의교집』과 같은 애정소설을 보면, 하층 여성이 자신의 소대남편을 본남편이나 시집에 숨기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10)

 『심리록』의 사례들을 봐도 남편들은 모두 아내의 간통을 익히 알고 있다. 즉 소대남편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숨겨야만 하는 불륜 관계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조선왕조실록』기사로도 확인되며 노비 문서와 같은 고문서를 통해서도 유추된다.


10) 정병설, 앞의 책, 65~68쪽. 해설 「소대남편, 하층민의 혼인 풍속」 참조. 『유년공부』는 일본 도쿄대학에 소장된 자료이다.『포의교집』은 앞의 책에서는 거론하지 않은 자료이다.

『포의교집』에서 여주인공 양파는 남편이 있는데도 버젓이 시부모의 비호까지 받으면서 양반 남성과 관계를 지속한다. 또 이 작품에는 양파가 궁중의 잔치에 여령(女伶)으로 불려가는 장면이 있는데, 여령은 서울의 아이가 없는 여자들 중에서 강제로 뽑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부분의 주석을 보면, 여령으로 한번 불려 가면 본남편도 자기 부인의 귀속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한다. 국가는 하층 여성들의 결혼 증거를 오직 출산에서만 찾았고, 실질적인 사실혼 관계는 잘 인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권력이나 재산이 없어 배우자감마저 상층 남성에게 뺏긴 성적 빈곤층이라고 할 수 있는 하층 남성이 중복혼을 하였다는 사실은 놀랍다. 하층 남성에게는 ‘화처(花妻)’가 존재했다.

국어사전에서는 화처를 ‘노리개첩’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화초첩’과 같은 말이라고도 한다. 종전에는 화처에 대하여 잠깐 데리고 노는 첩 정도로 이해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화처는 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계층이 문제였다.


화처는 단순한 첩이 아니다. 정약용은『흠흠신서』에서 ‘화처는 첩을 이른다(花妻謂妾也)’라는 주석을 단 바 있다. 화처는 정약용이 주석을 달아야 할 정도로 『흠흠신서』의 잠재적 독자라고 할 수 있는 양반 집권층 남성들에게 낯선 용어였다. 화처는 양반의 첩이 아니라 하층 남성의 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심리록』등 여러 문헌에 나오는 용례로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그런데 하층 남성이 첩을 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내 한 명도 건사하기 어려운 하층 남성이 둘 이상의 부인을 거느린다는 것은 다른 사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승정원일기』 1768년 7월 8일조에 보면 “세상에서 화처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처입니다. 상놈을 처첩으로 논할 수는 없겠지만, 만일 그를 첩이라고 말한다면, 그 법률 적용이 목숨을 빼앗는 것에 그칠 수 없습니다(俗所謂花妻者 卽妻也 常漢雖不可以妻妾論之 而若謂之以妾 則律不止於償命矣)” 라는 부분이 있다.

먼저 상놈은 처첩으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양반들이 행하는 정식 결혼이 없으니 처첩을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처음 만난 여자와 얼마간 살면서 자식을 얻었다면 그를 처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어차피 제대로 된 결혼 절차도 없이 살았으니 이혼도 필요가 없을 터인데 그 상태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 살면서 자식을 얻었다면 그 여자는 처와는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다. 그 때 붙여진 이름이 화처일 것이다.11)

이리저리 떠도는 행상은 고향에 처가 있고 또 오래 머무는 다른 곳에 화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화처가 양반의 처와 비슷한 지위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때는 첩과 비슷한 위상에 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모호한 위상 때문에 화처의 개념은 전기부터 후기까지 조선 전 시기에 걸쳐 문제가 되었던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화처에 대한 용례는 이미 조선 전기인 성종 때부터 보인다. 그런데 화처를 법률적으로 어떻게 정의할지는 조선 내내 문제였다. 『정조실록』1781년 10월 20일조에는 “선조 임금 때 화처를 첩에비겨 법률을 적용한 사례가 있다고 했다(宣廟時花妻比妾之律)”고 했다.

한편 같은『정조실록』1793년 11월 25일조에는 한 평민 여성에게 “이름이 화처지만 그냥 길에서 만난 사이와는 다르며 결혼한 근거도 있고 사는 집도 뚜렷하다고 했다(名雖謂之花妻 判異於行露之鶉奔 其娶也有據 其居也有素)”라고 했다. 명목으로야 첩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처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12)


조선 후기 양인 혼인의 실상을 잘 보여준 것으로 알려진 박의훤 상속 문서의 경우는 화처의 실제 사례를 짐작케 한다.13) 박의훤은 죽기 전에 여덟명 자식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는 상속 문서를 남겼다. 박의훤은 자기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다섯 번째 처 이전의 처들은 모두 다른 남자를 만나 자기를 떠났다면서 전처 자식들에게는 재산을 조금만 나누어주겠다고 했다. 박의훤의 다섯 부인 가운데 정처(正妻)가 누구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첫 아들을 낳은 부인 외에는 모두 화처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 다섯 부인 가운데 어떤 부인은 박의훤을 소대남편으로 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대남편과 화처는 서로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현재로서는 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층의 중복혼은 상당히 널리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경우든 소대남편이나 화처가 성적 개방성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11) 고상안(高尙顔, 1553~ 1623)의 『효빈잡기(效嚬雜記)』를 보면, 신사년(辛巳年, 1581) 고상안이 함창군수로 있을 때 내린 판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갑(甲)의 처를 을(乙)이 유인해 간 것에 대해, 갑이 을을 고발한 사건에 대한 것이다. 을은 자신은 갑에게 반비(班婢)을 소개하여 화처로 삼게 할 정도였다면서, 자신은 갑의 본처를 유인할 까닭이 없다고 변명했다. 이에 고상안이 갑에게 범인을 을로 지목한 이유를 묻자, 갑은 을의 집에 자기 집 기물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상안은 다시 을을 불러 갑의 기물이 집에 있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을은 갑에게 샀다고 했다.

고상안은 이 말을 듣고 을에게 ‘너가 갑에게 화처를 소개했다면 갑의 본처는 너희 집을 불태우고 싶을 정도로 미웠을 것이다. 그러니 갑이 너희에게 기물을 팔았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을의 처에게 칼을 씌웠다. 과연 수일 후 을은 갑의 처를 돌려보냈다. 대개 이 사건은 을의 처가 갑의 처를 유인하여 함께 지내고자 하여, 먼저 반비를 갑에게 소개해서 갑의 의심을 없앤 후 갑이 화처의 집에서 자는 틈을 타서 그 계획을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관계가 복잡하고 문맥이 약간 불명확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화처를 매개로한 민간의 복잡한 혼인 관계를 보여주는 실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12)『명종실록』 1553년 윤3월 14일 및 『명종실록』1553년 9월 30일 조에도 화처가 일종의 양인의 첩이며 실제로 정처(正妻)와 비슷한 지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용례가 있다.

13) 문숙자, 「다섯 처를 둔 양인 박의훤의 재산상속문서」, 『문헌과해석』 7, 문헌과해석사, 1999 참조.



이제 이런 조선 후기의 개방적 혼속을 염두에 두고 몇 건의 성 관련 범죄를 통해 성의 구체적인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감안되어야 할 점이 있다.

본고가 연구 대상으로 택한 『심리록』의 자료적 한계이다. 『심리록』은 18세기 후반 정조 대에 편찬된 형사판례집으로 사형 대상 범죄 1,112건을 다루고 있다.14) 사형 대상 범죄를 다룬 만큼 성 관련 범죄도 경범죄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상황을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성 관련 범죄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나 『추국일기(推鞫日記)』 등 일차적인 형사 심문 자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등에도 왕이 직접 관여한 사건들이 거론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자료는 다룬 범죄가 중범죄이다.
따라서 『심리록』과 마찬가지의 자료적 한계가 있다. 실제로 『심리록』에 있는 사례 상당수는 『정조실록』에도 올라 있다.


이 밖에 정약용이 편찬한 형사 사건 판결 지침서인 『흠흠신서(欽欽新書)』도 대상 자료에 포함될 수 있지만, 이것은 중국 사례가 중심이어서 조선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성의 일반적 양상을 알기에는 『묵재일기(默齋日記)』․『미암일기(眉巖日記)』․『이재난고(頤齋亂藁)』등의 개인 일기류나 『휘사총요(麾事總要)』․『벽영수록(碧營隨錄)』․『기양문첩(岐陽文牒)』 등의 지방 행정 관련 기록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 우리 학계의 연구 수준은 여기에까지 미치지는 못한 듯하다.15) 본고는 개인 일기나 지방 행정 기록의 검토는 차후의 과제로 삼고, 『심리록』의 자료적 한계를 명심하면서 대상을 검토한다.


14) 심재우, 「심리록 연구- 정조대 사형범죄의 처벌과 사회통제의 변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논문, 2005 참조.
15) 『기양문첩』은 충청도 연기현과 관계된 기록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홈페이지에 있는 심재우 교수의 해제에 의하면, 이 책에는 흥미로운 사례들이 많다고 한다. 예컨대 박동이(朴同伊)라는 양반이 상한(常漢) 이익채(李益采)의 정혼(定婚)한 딸을 취하고자 자신이 그녀를 잠간(潛奸)했다고 소문을 퍼뜨려 처녀가 음독자살한 사건이 있다. 조사과정에서 박동이는 양반이면서도 생활이 열악해 30세가 다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실정이 드러났다. 박동이는 자신의 혐의를 부정하면서, 자신이 비록 양반이긴 하지만 가난하여 하천(下賤)과 다름없으며, 상한이라도 부유한 자와는 결혼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가난한 양반은 부유한 상민과 결혼할 꿈도 못 꾸었다는 흥미로운 사례 등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쪽 자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성과 직접 연관된 부분에서도 유용한 정보가 적지 않게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


『심리록』에는 남편이 간통 현장을 적발하여 간부를 죽인 사건이라든지, 남편이 행실이 불량한 아내를 죽인 살인 사건 등이 다루어져 있다. 『심리록』에 나타난 몇 건의 성 관련 사건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차진성이 아내 득절(得節)을 강간한 김일연(金一淵)을 현장에서 칼로 찔러 죽인 사건.

이 사건에 대해 정조는 “차진성은 제 아내가 다른 사람과 몰래 간통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단지 간부(奸夫)가 세력이 있는 자였기 때문에 분풀이를 할 수 없었다. 난동이 일어나자 홧김에 손찌검이 간부에게까지 옮겨가 결국 찔러 죽인 뒤에야 끝이 났으니, 차진성의 소행은 죄줄 만한 단서가 없다. 사형에 처하는 것은 법리(法理)에 크게 어긋난다”라는 전교를 내렸다.


2. 음세형이 화처(花妻)인 순랑(順娘)이 주지현(朱之賢)과 몰래 간통하자, 주지현을 때리고 발로 차서 이튿날 죽게 한 사건.

『정조실록』에도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음세형은 이미 여러 차례 간통 현장에 갔는데 자신이 피해를 볼까봐 감히 어쩌지 못하다가 마침내 간부와 한방에 있는 현장을 잡고 간부를 찔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조는 순랑이 화처이긴 하지만 음세형과의 관계를 부부로 인정할 수 있고, 또 순랑 또한 아무 남자나 남편으로 삼는 계집은 아닌 듯하므로, 둘의 부부 관계를 인정하여 간통 현장을 잡은 형률에 의거하여, 음세형은 한 차례 훈계를 한 후 풀어주라고 했다.


3. 조명근(曺命根)이 그의 아내인 삼매(三每)의 행실이 더러운 것에 격분하여 직접 칼로 찔러 그 자리에서 죽게 한 사건.

『흠흠신서』에도 실려있다. 사건은 오히려 그 동안 조명근이 간부한테 여러 차례 맞았고, 마침내 간부가 조명근의 처와 함께 조명근을 죽이려고까지 하자 엉겁결에 조명근이 처를 찔러 죽인 것이라고 한다.

정조는 이 옥사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조명근을 풀어줄 것을 명했다.


4. 청상과부인 한 여인의 음행을 듣고는, 오빠와 외숙이 함께 여인을 강에 빠트려 죽인 사건.

오빠 구성대(具性大)는 사건 심리 과정에서 죽었고, 외숙 이언이 문제였는데 살인죄로 사형을 시키자는 견해와 패륜에 대한 응징이니 목숨까지 빼앗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으로 견해가 엇갈렸다.

정조는 이미 구성대가 죽었으니 목숨 하나 잃은 일로 두 사람까지 죽일 이유는 없다며 이언은 심문의 고통을 더한 후 풀어주라고 했다.


위의 사건은 모두 간통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이 결국 살인과 연결되어 임금이 심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살인죄 가운데, 셋은 간통 현장에서 간부나 처를 죽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일종의 윤리적 살인으로 한 여성의 음행을 집안 식구들이 사사로이 징벌한 것이다.

간통 현장에서 간부를 살해한 것에 대해서는 죄를 물을 수 없다는 형률이 있다. 이를 등시살사율(登時殺死律)
이라고 부른다. 비록 살인죄가 무겁기는 하지만 간통죄 역시 살인죄가 용서될 수 있을 정도로 막중하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또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 건의 간통 사건 모두 남편이 간부를 두려워했다는 사실이다.

뒤집어 말하면 간부들이 발각을 두려워하며 은밀히 간통을 한 것이 아니라 드러나게 떳떳이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조선 후기 성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 사건인 음부를 집안 식구들이 강에 빠트려 죽였다는 사건에 대해서, 정조는 음부의 소행이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남편이 아니라 외숙까지 징벌에 나선 것 역시 도를 넘는 행동이라고 보았다. 과부가 음행이 없었다면 살인자를 살려두지 않았겠지만, 여인에게도 죄가 있으니, 또 심리 과정에서 이미 한 명이 죽었으니, 이것으로 사건을 종료하자는 것이 정조의 취지였다.


『심리록』에서는 남편을 두려워하지 않는 간부와 남편에게 간통 사실을 숨기지 않는 아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와 간부의 간통에 격분하는 남편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집안 여성이 혼외의 관계를 맺는 것을 비판 부정하는 식구들이 드러나 있다. 윤리 도덕에 의해 여성의 간통이 비판되지만, 실제로는 하층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지 않게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간통이 공공연히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비판되는 긴장 관계가 조선 후기 성의 실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다음에 다룰 성소화집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4. 성 이야기


조선 후기 성의 실상에 대해서는 의학서도 법전도 형법판례서도 만족할만한 정보를 주지 못한다. 물론 각종의 방대한 역사 자료를 모두 검토한다면 실상에 근접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작품은 좋은 자료가 된다. 더욱이 문학은 다른 어떤 자료에서도 찾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 감정을 그리고 있으며, 또 균형감과 완전성을 갖춘 자료이기도 하다. 성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문학작품으로는 사설시조, 판소리계 소설, 애정소설 등을 들 수 있다.


판소리계 소설로는 우선 『춘향전』․『변강쇠가』를 들 수 있으며, 노래가 전하지 않는 작품으로는 『계우사』 곧 『왈짜타령』이 있다. 또한 사설시조는 단형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성의 여러 측면을 때로는 은유적으로 때로는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한문애정소설은 『금오신화』․『주생전』․『운영전』 등에서 시작하여 조선 후기의 『절화기담』․『포의교집』으로 이어진다.

최근 발굴된 한문희곡 『북상기(北廂記)』․『백상루기(百祥樓記)』등에는 종전의 작품에서 보여준 애정표현을 넘어서는 강한 성표현들이 있어서 주목된다.16) 물론 이런 문학작품들도 중요하지만, 성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은 단연 소화집(笑話集), 특히 성소화집(性笑話集)이다. 성 이야기를 많이 다룬 소화집으로는 『어면순』․『속어면순』․『명엽지해』등이 있다.


이들 문학작품을 모두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본고는 우선 논의의 편의상 기이재상담만 분석한다.17)『기이재상담』은 최근 필자에 의해 처음 번역 소개된 유일본 자료로, 수록된 31편 모두가 어떤 형식이든 성과 관련을 맺고 있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성소화집이다. 비록 작품수는 많지 않지만 조선 후기 성의 실상을 다각도에서 보여줄 수 있는 풍부함을 갖춘 자료이다. 수많은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자칫 논지를 흩트리기보다 한 작품에 집중하는 편이 조선 후기 성의 실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기이재상담』은 원래 일본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의 고서점에 있던 것을 일본인 소메야 도모유키(染谷智幸) 교수가 구입하여 필자에게 소개했고, 올해 소메야 교수는 이 책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기증하였다. 그런데 『기이재상담』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각수록(覺睡錄)』․『거면록(袪眠錄)』과 이본 관계에 있다. 『각수록』 전편과 『거면록』의 일부가 『기이재상담』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이재상담』이 바로 국립중앙도서관의 두 자료로부터 필사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한 예를 들면『거면록』에는 제목만 있는 작품이 『기이재상담』에는 전편 수록된 것도 있다. 『기이재상담』과 이 두 자료는 같은 근원으로부터 파생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자료에 대해 처음 연구논문을 제출한 김준형 교수는 『기이재상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각수록』에 대해 “수록된 모든 이야기가 성 이야기고, 수록된 이야기의 내용 대부분이 비도덕 반윤리적인 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패설집과 일정한 차이”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18) 조선 후기 성의 실상을 파악하기에 적합한 자료임을 알게 하는 진술이다.


16) 안대회, 「19세기 희곡 북상기 연구」, 『고전문학연구』 33, 한국고전문학회, 2008.
정우봉, 「미발굴 한문희곡 백상루기 연구」, 『한국한문학연구』 41, 한국한문학회, 2008.

17) 정병설, 앞의 책, 「조선시대의 성과 이야기」에 이들 소화집에 대해 간략히 해설하였다. 이하 『기이재상담』에 대한 자세한 해설도 이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18) 김준형, 「각수록에 나타난 성과 그 의미」, 『국어문학』 40, 국어문학회, 2005.



먼저『기이재상담』 31편 이야기를 성과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1. 화산거사전(花山居士傳)

유학자가 사냥꾼의 아내와 관계를 맺다.


2. 역장군전(力將軍傳)

남녀의 성행위를 전쟁에 비유한 우화.


3. 곽박전(郭朴傳)

광거사(狂居士)가 역원 마을의 미희(美姬)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시를 짓다.


4. 양인상혼(兩釼相婚)

삼십이 넘은 노총각이 서른 살이 다 된 과부를 속여 관계를 맺다 총각의 유혹에 과부가 넘어간다.


5. 이매지마(爾賣芝麻)

우활한 시골 선비가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아내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손님에게 물건을 사주면 바지를 벗겠다고 하다가 대갓집으로부터 봉변을 당한 이야기.


6. 야호위제기(夜壺爲祭器)

제기를 사러갔다가 요강을 제기로 알고 사온 바보 같은 시골 선비.


7. 날초행매(辢椒行媒)

담양의 아전이 고추 빻는 여인을 속여 관계를 맺다.


8. 시상비부(柿商非夫)

어떤 여인이 집으로 온 곶감 장수를 결혼식 날 하루 잠깐 본 사위로 오인하고 딸과 잠자리를 갖게 했다는 이야기.


9. 할비도혼(割臂圖婚)

십 년 가까이 절개를 지킨 서른 살 가까운 과부를 이웃의 선비가 속임수로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


10. 교양물지형(咬陽物之刑)

시골 선비가 우여곡절 끝에 안동 부사가 되나 판결을 할 수 없어 부인의 지시를 따르다가 지시를 잘못 알아듣고 백성의 양물을 깨물라는 어이없는 명령까지 내렸다는 이야기.


11. 벽승양물(劈僧陽物)

선비가 중과 어떤 여자의 부정한 관계를 발각하여 둘을 협박하여 돈을 빼았는다는 이야기.


12. 오천제수복(誤穿弟嫂服)

형이 실수로 동생 내외가 자는 방에 갔다가 제수씨의 바지를 입고 나갔다는 이야기.


13. 양물퇴암(陽物退巖)

재산과 재주보다 크고 힘센 양물을 가진 남자를 택한 재상 딸.


14. 빈려산승(牝驢産僧)

노새와 관계를 맺은 중.


15. 역와시유(易瓦示喩)

아래에 있을 수 없다며 첫날밤에 남편 배위에서 관계를 맺은 공주가 아침에 부마의 기지로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


16. 음문접구(陰門接口)

촌사람 부부가 한 겨울에 딸집에 가는 길에 부인이 길가에서 오줌을 누다가 음모가 땅에 붙었는데 남편이 입김을 불어 그 것을 떼려다가 오히려 남편의 수염마저 땅에 붙어 부부가 이상한 자세로 계속 있었다는 이야기.


17. 음낭무입처(陰囊無入處)

선비집의 두 딸이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허황한 재주를 선보이는 남자들은 거절하고 현실적으로 성행위가 중요하다고 한 이웃집 도령에게 두 자매가 모두 결혼했다는 이야기.


18. 환옥우(環屋隅)

좁은 방에 아들 넷과 함께 사는 상인 부부가 깜깜한 밤에 아이들 눈을 피해 부부 관계를 맺으려고 방을 빙빙 돌다가 아이들에게 들킨 이야기.


19. 백죽현곡(柏鬻懸嚳)

농부가 딸집에 가서 밤에 잘 때 발가벗은채 몰래 잣죽을 먹으러 갔는데 상투가 갈고리에 걸려 아침까지 발가벗은 채로 학처럼 서 있었다는 이야기.


20. 해협양인(蟹挾兩人)

시골 여인이 콩밭 두둑에 앉아 오줌을 누다가 게에게 물려 아파하고 있었는데, 그 것을 떼 달라는 부탁을 받은 노승이 또 게를 떼려다가 게에게 입이 물려 둘이 이상한 자세로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


21. 습사부족(習事付足)

한 방에 기거하는 형부가 처제에게 결혼 연습을 시킨다며 관계를 맺었는데 나중에 동서가 이 사실을 알고 처형을 속여 관계를 맺어 복수했다는 이야기.


22. 부이접형(附耳接型)

속임수로 이웃집 처녀와 관계를 맺은 갖바치와 이를 알고 갖바치 부인을 속여 관계를 맺은 처녀의 아버지.


23. 반남무안(潘南務安)

서른 살이 넘도록 시집을 못간 처녀가 야외로 가서 치마로 얼굴을 덮고 아래를 다 내놓고 아무 남자나 마음대로 하도록 했는데, 어떤 더벅머리 총각이 얼른 관계를 맺고 도망갔다. 이후 여자에게 태기가 있어 쌍둥이를 낳았는데 아버지를 몰라 성을 짓지 못해 고을원에게 성을 내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고을원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각각 반남 박씨와 무안 박씨로 하라고 했다는 이야기.


24. 보지자지(寶之刺之)

한 선비가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의 덕을 시험하기 위해 ‘자지’와 ‘보지’가 무엇인지 물어봤다는 이야기.


25. 구열양물(口劣陽物)

경상도 선비와 서울 선비가 만났는데, 서울 선비가 경상도의 풍속은 상중에도 부부가 한방을 쓴다며 놀리자, 경상도 선비가 서울 선비는 상중에 고기를 먹지 않느냐며 우리는 비록 어쩔 수 없어 한방은 써도 관계는 맺지 않는다고 반박했다는 이야기.


26. 후공소과(後孔小科)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아전이 운영하는 여관에 가서 점쟁이의 지시에 따라 여관 주인의 아내에게 관계 맺기를 청하는데, 강청을 못 이겨 여자는 결국 뒤쪽을 허락한다. 남편이 돌아오자 선비는 얼른 도망을 가는데, 아내에게 경위를 들은 아전은 자신이 선비를 모시고 올 테니 앞을 주라고 한다. 아전이 선비를 쫓아가자 선비는 자신을 잡으러 오는 줄 알고 도망쳤다는 이야기.


27. 역우환처(易牛換妻)

어떤 사돈 둘이 소를 바꾸어 장에 갔다가 술에 취해 소 등에 올라탔는데 소는 당연히 원래 자기 집으로 가고 사돈은 각각 상대 안사돈과 자게 되었다는 이야기.


28. 다산탈음(多産脫陰)

어떤 선비가 딸집에 가서 취해서 안채로 잘못 들어갔는데, 여인들 틈에서 자다가 어떤 여인이 성기를 만지는 바람에 깨어 일어나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


29. 서사복첩(筮仕卜妾)

병조판서 홍봉한의 첩을 홍봉한의 허락을 받고 겁간한 무관 문객.


30. 기간치학(㚻奸治瘧)

상민 아무개가 학질을 치료한다면서 선비를 묶어놓고 선비와 관계했는데 선비는 부끄럽고 분하여 열이 나 학질이 나았다는 이야기.


31. 피쉬결망건(避倅結網巾)

어떤 진사가 자기 친척 과부의 부탁에 따라 포천 현감에게 백성들이 잣을 따는 수고를 줄일 것을 청하는데, 그 노역의 고초를 말하면서 어떤 과부의 아들이 태어날 때가 되었는데도 그 노역을 하기 싫어서 뱃속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이 말 저 말 둘러댔다면서, 과부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까지 암시한다.


이것을 다시 성적 관계, 관계방식, 실행 여부에 따라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에서 본 바와 같이 『기이재상담』의 31편은 어떤 형식, 어떤 수준으로든 모두 성과 연관되어 있다. 직접적인 성관계는 없다 하더라도 성기와 관련되어 있거나 성에 대한 생각 또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


직접적인 성관계를 그리지 않은 이야기는 모두 11편인데 이들을 보면, 먼저 실수로 성기가 노출되거나 잘못하여 성기가 얼어붙어버린 경우 등의 단순한 실수담이 있다. 이런 실수담에서 지금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조선시대의 풍속을 읽을 수 있다. 잠을 잘 때 옷을 다 벗고 자는 일이 적지 않았다든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상대를 오인하는 일이 곧잘 벌어졌다든지 하는 것 등이다.


또한 13번, 17번, 24번의 이야기도 조선 사람들의 성의식을 살피는 데 대단히 의미 있는 자료이다. 13번과 17번은 동일한 유형의 이야기로, 처녀가 남편을 고를 때 성적인 능력이 높은 자를 고른다는 것이다. 13번에서는 성적인 능력이 우수한 남자를 골랐고, 17번은 성행위가 현실적인 능력임을 표방한 신랑을 골랐다.

성적 능력이 현실적인 능력이며, 이것은 부나 권력, 그리고 문장으로 대표되는 교양보다 훨씬 중요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나타나 있다. 성적인 능력이 현실적으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은 24번의 유학자의 성의식과도 통한다.


24번은 16세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황과 조식의 성의식을 우스개로 빗댄 것이다. 어떤 선비가 두 대가의 학문적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두 사람을 찾아가 각각 ‘자지’와 ‘보지’가 무엇인지 물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식은 저속한 질문을 한다면서 선비를 내쫓았는데, 이황은 이 글자를 멋지게 한문 문장으로 풀어서 대답했다. 그래서 선비는 이황의 수준이 한 수 위임을 알았다는 이야기이다. 실제 역사에서 드러난 바로도 조식은 사상적으로 엄격한 학풍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실천을 중시하는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이황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관용적인 태도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이들 이야기를 통해서 성은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므로 저속하다고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성소화 향유자의 성의식을 읽을 수 있다.


19) 필자의 앞의 책에서 이황과 조식, 그리고 유학자의 성의식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뒤의 작품 해석도 별도의 언급이 없으면 필자의 앞의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한편 성관계를 그린 20편 가운데 두 편, 곧 2번과 3번은 주체와 대상의 성적 관계는 형성되어 있지만, 성적 관계의 수준은 다른 작품과 전혀 다르다. 2번은 성행위를 전쟁에 빗댄 우화이며, 3번은 그저 미인을 바라보고 관계를 원한다는 욕망만 드러나 있다. 이 밖에 특이한 것으로는 21번과 22번을 들 수 있다.

두 작품은 일종의 반복담이다. 속임수로 당한 것을 같은 방식으로 되갚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한 작품에 두 차례의 성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두 작품 모두 속이는 사람은 남성이고 속는 사람은 여성이다. 여성들은 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여성을 수동적인 성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생각이 드러난 것이다.


관계방식 중에 가장 많이 나타난 것은 합의와 속임이다. 합의에는 네 편이 있다. 합의로 분류되는 관계는 부부 관계이거나 지속적인 불륜 관계이다.
합의는 이야기 흥미소로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인지, 이런 관계의 이야기에서 성은 이야기의 중심에 놓여 있지 않다. 반면 속임은 어떤 방식으로 상대를 속여서 성욕을 채웠는지 하는 것 자체가 이야기가 될 수 있기에, 이 관계 방식을 이용한 이야기에서 속임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성에 대해 무지한 여인을 엉뚱한 말로 속여 성욕을 채우거나, 절개를 지키려는 과부에게 속임수를 써서 접근하여 과부의 본능을 자극하여 과부의 도덕심을 무너뜨린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30번은 특이한 유형인데 상민이 양반에게 학질을 고쳐주겠다며 강간을 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양반이 먼저 학질을 고쳐달라고 청했고, 결과적으로 양반의 학질도 나았으니 꼭 속였다고 할 수도 없으며, 또한 양반이 마지막 단계까지 순순히 응했으니 반드시 강간이라고 할 수도 없다. 여기에 이 이야기의 매력이 있다. 상민은 양반에게 아무런 책잡힐 일을 하지 않고 훌륭히 양반을 욕보인 것이다.


관계방식 가운데 속임 다음으로 많은 것이 실수이다. 실수로 성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횡재담처럼 들리는 것도 있다. 대상이 돈이 아니라 성이라는 차이밖에 없다. 8번의 곶감장수 이야기가 그렇다. 다른 소화집에도 이런 이야기가 적지 않다. 한편 27번과 28번의 이야기는 단순 실수담이다. 어이없는 실수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 유인 두 편, 요구 한 편, 명령 한 편, 이용 한 편이 있는데, 이들은 거의 특이한 사건을 그리고 있다. 유인 이야기 두 편 가운데 1번은 유학자가 행로에 사냥꾼 집에 머물면서 주인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자세한 정황이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26번처럼 양반 남성이 하층 여성에게 성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양반 남성이 하층 여성에게 대놓고 성을 요구하는 모습은 현실에서도 드물지 않았던 듯하다.

18세기 이운영의 「임천별곡」에는 양반이 평민 여성에게 동침을 요구하다가 면박을 당하는 모습이 풍자적으로 그려져 있다.20) 또 17세기 박취문의 『부북일기(赴北日記)』에는 무관(武官)이 자신의 임지로 가는 도중에 여러 부류의 여성들과 끊임없이 잠자리를 가진 것이 기록되어 있다. 숙박한 주인집의 안주인이나 비(婢), 기생등과 관계를 맺었다. 물론 이것도 남성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유인 방식을 보여주는 다른 하나인 26번은 특이하게도 여성이 남성을 유인한 것이다. 소화집에 그려진 성관계의 대부분은 남성이 주체인데 이 이야기는 여성이 주도적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남자를 경험하지 못한 못생긴 노처녀가 들에 나가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아래를 다 내놓았더니 겨우 해질녘에야 더벅머리 총각 하나가 얼른 관계를 맺고 도망쳤다는 이야기이다. 이로써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여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 관청에 성을 내려줄 것을 청했고 고을원이 성씨를 내려준 것이 그 성씨의 유래라는 이야기이다. 일종의 성씨 유래담이며, 특정 성씨를 놀리는 조롱담이다. 상대를 놀리기 위해 일반적인 성관계를 역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역전된 성관계를 통해 선조가 태어났다고 놀리는 것이다.


명령의 방식을 보여준 29번은 한 무관 문객이 병조판서 홍봉한 집에서 관직을 구하며 머물러 있을 때 벌인 일이다. 문객은 어느 날 어떤 계기로 홍봉한에게 홍봉한의 첩과 관계를 맺는 것이 소원이라고 청했다. 그런데 홍봉한이 선뜻 그 청을 들어주면서 무관은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첩과 관계를 했다. 첩으로서는 강간을 당한 셈이다. 짐승같은 행동이라 도저히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여성은 그저 수동적인 성의 대상일 뿐이다. 첩과 관계를 맺고 싶다는 문객이나, 쉽게 허락하는 홍봉한이나, 그리고 허락한다고 대청 마당에서 바로 관계를 맺는 문객 모두 거리낌이 없다.

성을 인간적 교감 또는 사랑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원초적 욕망의 해소라는 관점에서만 보고 있는 듯하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전근대 조선 하층 여성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에는 하층 여성의 시각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하층 여성의 굴욕감은 도저히 씻을 수 없었을 것을 짐작된다.

하층 여성의 굴욕감을 직접적으로 노래한 작품으로는 해주 기생 명선이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노래한 「기생명선자술가」를 들수 있다.21) 이 작품에서 명선은 열두 살에 남자와 잠자리를 한 후 ‘금수와 일반이라’고 한탄했다. 자기 인생이 그렇다는 것인지, 상대의 행위가 그렇다는 것인지, 세상이 그렇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명선이 어린 나이에 겪은 짐승과 같은 강제적인 성관계로 인한 굴욕감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20) 이승복, 「임천별곡의 창작 배경과 갈등의 성격」, 고전문학과 교육 18,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2009 및 신현웅, 「옥국재 이운영 가사의 특성과 의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논문, 2010 참조.

21) 정병설, 『나는 기생이다』, 문학동네, 2007에서 번역 소개했다.


관계방식의 마지막 유형은 14번의 이용이다. 중이 사람이 아니라 노새를 구슬려 관계를 맺었으므로, 인간과 짐승과의 관계이므로 이용이라고 했다. 그런데 14번 이야기로 26번 이야기를 다시 보면, 대상의 입장에서는 첩이나 노새가 다를 바 없다. 문객에게 당한 첩도 그 관계로 보면 짐승과 마찬가지이므로 이용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첩이나 노새나 모두 수동적인 성적 대상에 불과하다.


이처럼『기이재상담』에 나타난 성의 관계방식은 합의, 속임, 유인, 명령, 요구, 이용, 실수 등 다양한데, 그것은 성행위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이재상담』에 실린 여러 이야기에서 성행위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성적 관계를 보면, 상호 승인에 기초한 합의를 논외로 하면 성관계는 거의 남성이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위치에 서 있다.

여성이 주도하는 경우는 서른 살이 넘도록 남자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결혼 못한 노처녀의 이야기밖에 없고, 15번의 부마와 공주의 이야기는 공주가 부부 관계를 주도하려고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공주가 잘못을 시인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성관계는 남성이 주도해야 한다는 믿음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신분 또는 계층으로 말하면 동등한 계층 간의 관계는 어떤 관계라도 상관이 없지만, 계층의 차이가 있으면 성별에 따라 문제가 달라진다. 상층남성이 하층 여성과 관계를 맺는 일은 흔하지만, 거꾸로 하층 남성이 상층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이재상담』에서도 상층 남성과 하층 여성의 관계는 세 편이 확인되지만, 하층 남성과 상층 여성의 관계는 한 편도 보이지 않는다. 상층 남성과 하층 여성의 관계는 구체적으로는 유학자와 사냥꾼의 처, 아전과 시골아낙, 선비와 아전 처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상하층의 신분 또는 계층 차이를 엄격히 따지면서,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층 남성과 상층 여성의 관계는 앞서 살핀 것처럼 법전에 명기된 불법이다. 그러니 감히 그 관계를 이야기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15번 부마와 공주 이야기 등에서 보여준 생각에 따르면 성관계는 남성이 주도해야 한다. 남성이 주도해야 하는 성관계를 하층 남성이 주도한다는 것은 하층이 상층을 지도하고 지배한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하극상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남/녀, 상/하의 관계방식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작품은 30번이다. 상민이 학질을 잘 치료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 양반이 치료 부탁을 했다. 상민은 양반의 간청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데, 치료를 한다면서 양반을 산으로 데려가서 말뚝에다 양반을 묶어놓고 강제로 관계를 맺었다. 상민에게, 그것도 남성에게 당한 것이 분하고 부끄럽고 화가 나서, 양반은 열이 올라 그 바람에 학질이 떨어져버렸다. 이후 양반의 부인이 학질을 앓게 되었는데 부인은 자기한테도 그 상민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양반은 화를 내며 막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남/녀, 상/하에다가 동성애적 관계까지 등장시키고 있다. 학질은 오한과 고열이 증상인데 놀라게 하거나 열을 올리게 함으로써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상민은 이미 학질 치료로 이름이 높았다. 이미 강제적인 동성애로 병자의 열을 올리게 하여 치료에 효험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양반이 되자 더욱 효험이 좋았다. 양반은 동성애적 관계뿐만 아니라 상민에게 당했다는 생각 때문에 화가 더 올랐다. 이야기에서 양반의 학질은 당일부터 바로 나았다고 했다. 더욱이 양반 부인이 치료 부탁을 하자 양반은 화급히 말을 막았다. 아무리 치료가 중하다 해도 상민이 양반 부인을 욕보이는 것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이재상담』을 통해 보면 조선 후기의 성은 철저히 인간관계 또는 권력관계의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 권력관계는 더욱 큰 틀에서는 유교적 신분 질서의 유지와 연결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성은 철저히 사회 질서 유지의 측면에서 다루어졌던 것이다.



5. 성과 신분 질서


푸코는 『성의 역사』 제1권에서 “내가 제기하려고 하는 물음은 ‘왜 우리가 억압 받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그토록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22)

종전의 성 억압설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푸코의 반성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억압이 있었는지 제대로 따져보기도 전에 억압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조선은 과연 성이 억압된 사회인가? 『기이재상담』을 보면 조선시대에 정말 성적 억압이 있었는지 되묻게 된다. 작품에 나타난 거침없는 성표현과 당당한 성행위들을 보면 오히려 지금이 조선시대보다 더 억압된 것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조선 남자들은 할 수만 있다면, 상대만 있다면, 심지어 억지로 강제로라도, 성적 욕구를 해소하고자 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물론 이것은 성소화집에 그려진 것이므로, 이것을 가지고 조선 후기의 성풍속을 속단할 수 없다. 하지만 실제 기록에서도 유사한 정황이 포착된다.


앞에서 인용한 19세기 조선에 온 프랑스 선교사의 말은 극단적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에 능력이 닿는 남자라면 첩 두는 일을 별로 꺼리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상층 남성들이 성적 욕구 해소를 위해 자기 부인이 아닌 기생 등 하층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야담을 보면 지방관으로 가서 기생과 관계를 맺지 않고 엄격히 자기를 관리한 양반을 주위 친구나 심지어 임금까지 합세하여 훼절시키는 이야기가 적지 않은데, 이는 관리가 기생 등 하층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이 일반적임을 말해준다. 조선은 국왕부터 승은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궁녀들과 관계를 맺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한중록』같은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임금은 수많은 궁녀와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에는 기생 오입까지 했다. 사도세자도 그랬고 정조도 그랬다. 국왕부터 이런 형편이니 상층 남성의 성적 방종에 대해서 대체로 관대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2)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성의 역사』 1, 나남, 2004, 32쪽.


상층 남성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하층으로 그대로 옮겨졌다. 상층 남성들에게 성을 유린당한 하층 여성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상층 남성들에게 자기 계층의 여성을 빼앗긴 하층 남성들 또한 어쩔 수 없이 성에 대해 개방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상층 남성들에 의해 먼저 깨진 일부일처제의 이상은 하층에서는 이미 구조적으로 지켜질 수 없었다. 하층 남성들에게 일부일처제란 구조적인 성적 결핍을 의미했다.

소대남편이니 화처니 하는 일종의 중복혼(重複婚)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상층의 축첩이나 하층의 중복혼이나 모두 성적 개방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에 성적 억압을 경험한 계층은 상층 여성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적 억압이라고 하면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적 개방성 속에 하층 여성에 가해진 모진 폭력들을 생각하면, 상층 여성에 가해진 성적 억압은 어떤 면에서는 보호로 볼 수 있는 면도 있다.

그 예로 『기이재상담』29번 홍봉한의 첩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명령을 받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강간을 당한 하층 여성에게 성적 개방성은 세상에서 버려진 증거일 뿐이다. 그에게는 상층 여성이 겪는 성적 억압이 오히려 보호로 보일 것이다. 하층 여성의 상황은 그만큼 열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상층 여성만 보호 받는 성이라면 그 보호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정말 성을 보호하자는 것이면 왜 하층 여성의 성은 보호하지 않았을까? 이런 점을 고려하면 조선 사회가 상층 여성의 성을 보호하려고 했던 뜻이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뜻은 너무도 분명하다. 바로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한 것이다. 또 그들이 지키고자 한 혈통의 순수성은 신분 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 사회가 보호한 것은 상층 여성의 성이 아니라 신분 질서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 후기의 성은 전체적으로 억압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신분 질서의 유지를 위해 상층 여성의 성적 폐쇄성이 강화되었을 뿐이다. 실상은 이런데, 상층 여성에게 가해진 규제 또는 보호로 인해, 조선 사회 전체가 성적 억압이 엄했던 것처럼 오인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상을 오해하게 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성에 대한 표현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인욕(人欲)을 없애는 것을 지상과제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조선의 주류 유학인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심학(心學)이다. 심학을 대표하는 서적인 『심경(心經)』은 중국,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만 널리 읽혔다. 몸의 문제를 다루는 의학서인 동의보감 조차 심학의 논리를 따라 ‘사람의 몸은 한 나라와 같다’고 하면서 몸을 주재하는 것은 심(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몸이 마음의 통제를 받아야 하듯이, 성도 마음의 절제를 받아야 했다. 욕망의 일부인 성은 실제로 억제하지는 못하더라도 권장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욕망은 곧 본능이니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억누르는 것을 자연스럽지 못하다고도 했다. 성을 억압하는 것을 순리에 맞지 않다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공식적으로 널리 논리화되지는 못했다.23)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성욕의 표출은 억제되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다. 상황이 이러니 성과 관련된 표현물은 많이 나올 수 없었다. 성과 관련된 표현이야 드물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기록되어 전해지거나 공식적으로 표출될 자리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23) 이런 생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사람으로 허균을 들 수 있다. 허균은 안정복이나 이덕무와 같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엄중한 비판을 받았다. 이덕무는 “이탁오(李卓吾),안산농(顔山農), 하심은(何心隱)에 이르러 욕망을 인간의 본성으로 여겼고, 우리나라의 허균은 남녀의 음행을 천명(天命)으로 여겨 ‘내 마땅히 하늘을 따르겠다’고 까지 했으니 그 폐단이 극심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靑莊館全書』).

허균이야 극단적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야담을 보면 자기를 보고 늦은 밤에 찾아온 처녀를 준엄히 꾸짖어 돌려보내는 등 너무 엄하게 욕망을 절제한 사람들을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다고 비판하거나 오히려 벌을 받게 하는 이야기가 많다. 『한중록』을 보면 영조는 혜경궁을 거의 꾸짖지 않았다는데, 드문 꾸중 가운데 남들이 다하는 투기(妬忌)도 하지 않는다고 혜경궁을 꾸짖기도 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여자를 들였는데도 어찌 아무말도 하지 않았냐는 말이다. 또 영조는 자기가 사랑하는 딸 화순옹주가 남편 김한신을 따라서 절곡(絶穀)을 하고 죽었을 때, 모든 신하들이 정려(旌閭)할 것을 주장했지만 아버지를 두고 죽은 것을 불효라고 하면서 포상을 막았다고 한다. 유교 윤리로야 투기는 말아야 하고 열절을 지켜야 하지만, 모두 인간적인 정리에는 위배된다는 생각에서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욕망은 절제되어야 마땅하지만, 무리한 억제는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다고 본 것이 조선의 일반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성을 억압하지 않았다. 단지 몸보다 마음이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며, 성욕 등 인간 욕망의 절제를 권장했으며, 그에 따라 성의 공적인 표현과 전승이 제약을 받았을 뿐이다. 상층 여성의 성을 억압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억압한 것은 신분 질서이지 성이 아니었다. 위의 논의들을 바탕으로 조선의 규범을 대표하는 법전에 규제된 성을 다시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의 세가지 원칙을 따른 것이 확인된다.


첫째 성은 자연스러운 결합이어야 한다.

둘째 성은 절제해야 할 욕망이다.

셋째 성은 인간관계를 나타낸다.


조선의 법은 근친간을 규제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동성애도 마찬가지 이유로 규제된다. 『영조실록』을 보면, 1767년 윤7월 경상도 산청에서 일곱 살 여아가 아이를 낳은 괴변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아이의 아버지는 소금장수로 밝혀졌는데, 열두 살 이하의 아이와 간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에 따라 소금장수는 처벌을 받았고, 여아 역시 음기가 꽉 찬 괴물이므로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했다.24)

영조는 옛부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다 뜻이 있는 듯하다고 평을 달았다. 조선에서는 법률에 규정하건 말건 자연의 순리에 어긋난다는 것은 곧 규제의 대상이었다. 자연스러움의 기준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것은 대개 본성과 분수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람끼리, 사랑은 이성 간에, 혈족은 위계가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보고 있다.


둘째 원칙은 거상 기간 중에 결혼을 못 올리게 하는 법령에서 알 수 있다.
성을 억눌러야 할 욕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부모 상중에 결혼을 한다는 것은 부모의 상을 경건히 치를 뜻이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한다. 결혼을 성욕을 채우는 행위로 보기 때문에, 경건해야 할 부모 상중의 결혼은 불경한 것이 된다. 실제로 기이재상담의 한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거상 기간 중에는 결혼한 부부라도 잠자리를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다.


마지막 원칙은 법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성을 하나의 인간관계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권력관계로 파악한다. 하층 남성이 상층 여성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은 둘을 가까운 인간관계로 둘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궁녀가 다른 남자와 관계하면 남녀 모두를 죽인다는 법령은 이 원칙의 가장 엄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성을 인간관계로 바라보고, 나아가 그것이 사회 질서와 연결됨을 고려하여, 사회 질서를 위하여 성을 규제하는 것이다.


24) 『승정원일기』1767년 8월 5일조.



6. 결론


본고는 성소화집(性笑話集)『기이재상담(紀伊齋常談)』을 중심 자료로 삼아 조선시대 성의 실상을 살핀 글이다. 문학작품을 살피기 전에 먼저 성에 대한 지식, 성에 대한 규제, 성의 실상을 개관하였다.


먼저 성에 대한 지식은『동의보감』을 주대상으로 하여 살폈다.『동의보감』에 기술된 성은 상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이지도 않다. 중국 양생서(養生書)의 추상적 관념적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을 뿐이다. 성에 대한 언급이 없지 않지만 그것이 성 과학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정(射精)을 억제하여 양정(陽精)을 보존함으로써 건강을 지킨다는 가설 등을 단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성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그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명률』과 『대전회통』등의 법전에서 보인 성에 대한 규제를 보면 역시 성 지식이 별반 필요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에 규제된 성은 사실성을 규제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규제한 것이었다. 유교 사회의 사회 질서 또는 신분 질서를 규제했을 뿐 성행위 자체를 규제하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 성의 실상은 18세기 정조대의 형사판례집인 『심리록』을 주대상으로 살폈다. 『심리록』은 모두 사형 판결을 받은 형사 사건들만 다루고 있어서 일반의 성풍속을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문학작품이나 다른 사료를 참고하며 볼 때 흥미로운 사실들을 읽어낼 수 있다.


문학작품은 성의 실상을 비교적 다양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판소리계 소설, 사설시조, 한문애정소설, 성소화집 등에 유관한 내용이 많다. 본고는 그중에서 성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은 성소화집을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기이재상담』이라는 새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그것이 성소화집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거기에 반영된 조선의 성현실은 놀라웠다. 놀라운 성적 개방성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이재상담』등을 통해 살펴본 조선 후기 성의 실상은 종전의 억압설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성이 억압되었다는 것은 상층 여성에 국한된 것이고, 그나마 그것도 실제로는 성이 억압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성억압보다는 신분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규제였던 것이다. 그나마 상층 여성이 아닌 상층 남성은 축첩을 일삼았고, 하층은 하층대로 개방적인 성적 공간에 노출되었다.

하층 여성은 ‘소대남편’, 하층 남성은 ‘화처(花妻)’로 대표되는 일종의 중복혼(重複婚)의 배우자를 가질 수 있었다. 하층의 남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여러 명의 배우자와 살았던 것이다. 이런 하층의 개방적인 혼속은 본고가 처음 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더욱 상세한 검토가 요망되는 부분이다.


하층의 개방적 혼속은 상층 남성의 축첩 등으로 인해 생긴 성적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하층민의 성적 자유는 자신의 삶을 누리는 자유가 아니라 생존의 수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보면 조선은 한 남자에 한 여자 즉 일부일처의 성적 이상(理想)이 별로 지켜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상층 여성에게 가해진 성적 억압, 그리고 욕망 억제의 유교적 이상에 따른 성적 표현의 통제가 조선을 성적 억압이 강한 사회처럼 비치게 했을 뿐이다.


현대 한국은 조선시대에 비해 천지가 개벽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랍게 변화했다. 건물과 의복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고, 언어도 전대와는 소통이 힘들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언어가 바뀌면서 사상이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에 비하면 성문화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근본적인 부분은 아직도 바뀌지 않은 듯하다. 성적 표현의 자유 또는 개방성은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낮은 듯하지만, 실제로 은밀히 유통되는 포르노그라피나 유흥 산업, 매춘 등은 결코 작지 않다. 성적 억압이 심한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성이 너무 열려 있다는 생각도 든다. 현대 한국이 처한 산적한 성 관련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도 이 분야의 역사적 연구는 더욱 심화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