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시대에서의 비판적 합리주의(Ⅰ)
인문학 강의 _ 격동의 시대와 자아의 인식
일반적으로 우리는 과학을 과학기술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기술이 창출됐는지, 그리고 왜 하필 서구 근대과학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게 됐는지를 검토해보면 과학기술에 대해 좀 더 심층적인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대체로 과학은 과학적 탐구 과정에서의 자세와 태도, 탐구 결과로 얻어진 정보와 지식, 그리고 이 성과를 적용해 만들어진 기술과 수단 등 세 국면으로 나눠 고찰할 수 있다. 그것을 각각 ‘과학정신’, ‘과학지식’, ‘과학기술’이라 부를 수 있다.
물론 이 세 국면은 엄격하게 나눠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서로 혼동하거나 과학기술을 과학 그 자체인 것처럼 착각하면 과학기술 시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이 시대에서 배태되는 갖가지 문명적 해악을 극복할 방안을 찾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우선돼야 할 것은 ‘과학정신’에 대한 이해다.
과학정신은 과학적 탐구에 임하는 과학자의 자세와 태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합리성, 비판성, 자율성, 개방성, 보편성 등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특히 중요한 것이 이른바 ‘비판적 합리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적 자아 인식이 함축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형이상학적 사고와 경험주의 사고
나폴리 국립박물관에 있는 소크라테스 흉상 받침대에는 그리스어로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지금 비로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원래 내가 항상 잘 생각해 본 다음에 가장 좋은 생각(logos)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따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일세.” [크리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다가, 왜 죽게 됐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그는 ‘로고스’를 위해서 로고스를 실천하다가 로고스 때문에 죽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로고스’는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냥 소리를 낸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된 내용을 말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에 포함된다고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이처럼 ‘로고스’는 넓은 의미의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라틴어 번역어인 ‘라치오(ratio)’도 언어의 의미가 빠지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다.
로고스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생각하는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된 내용’인데, 이 두가지 면이 서로 어울려야 온전한 생각이 이뤄진다. 그런데 생각하는 작용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고 그 내용에만 관심을 둔다면 어떤 ‘느낌’을 갖거나 ‘깨달음’ 에 이를지는 몰라도 온전한 생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사고 기능 중에서 사고 작용과 사고 내용 중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고 내용에 비중을 두면 논증 과정보다는 그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 더 심화되면 대상들 간 관계를 동적으로 파악해 논리적이든 인과적이든 변증법적이든 그 필연적 연관성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과학적 세계관이나 종교적 우주론 혹은 그 밖의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체계는 이런 이성적 기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맥락에 따라 독단적, 교조적, 사변적, 종합적 및 체계적 합리성이라 부를 수 있다.
철학에서는 플라톤을 위시해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를 거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헤겔과 마르크스, 베르그송, 하이데거,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거대 담론을 시도하는 학파들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철학은 일관되고 폐쇄적이며 정합적 체계 창출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성을 ‘독단적 합리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사고의 과정에 비중을 두면 논리 전개에 관심을 기울이며 논증의 타당성과 개념의 명료성, 그리고 명제의 진리성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사물을 파악하고 현상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인식과 판단에는 흔히 감정이나 욕구, 직관과 충동이 개입하게 마련인데, 우리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파악되고 인식된 과정을 면밀히 검토하고 정당화하는 근거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이성의 기능이 사변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경험적, 구체적, 실증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이것이 활성화될수록 경험과학적인 양상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그것을 논증적, 비판적, 구체적, 분석적 및 실천적 합리성이라 부를 수 있다.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해서 아리스토텔레스,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캄을 거쳐 흄을 중심으로 한 경험론자들 입장에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포괄적으로 이성 능력 자체를 비판한 칸트와 러셀을 비롯한 넓은 의미의 분석철학적 전통, 그리고 비판적 합리주의 기치를 내건 포퍼에 와서 그 특징이 선명하게 부각되는데, 주로 이성의 비판 기능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비판적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합리성의 이 두 측면을 기능적인 면에서 엄격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을 혼동하면 사고의 형태와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서구문명, 그 중에서도 과학문명의 특성을 이해하기 어렵다.
정치제도에 따라 형성되는 사고 과정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신화의 시대에는 신들과 영웅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중요한 언어 형태였다. 주로 운문을 표현 수단으로 했고, 신과의 관계와 신의 의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영웅들 이야기가 주류를 이뤘었으며, 의사소통 때도 감정과 정서에 호소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형태 역시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신정 체제인 것이 보통이었다. 그 이후 상업 문화 발달로 교류가 활발해지고 인간이 자신에 대한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신보다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진 것이며, 이에 따라 사유와 언어 형태도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언어가 다른 사람과의 소통 도구로 더 비중 있게 부각되면서 그 기능은 주로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됐고, 상업 활동의 보편화에 따라 제도화된 민주정치는 개인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켜 언어를 대화와 설득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게다가 이 시기에 음성 문화는 문자 문화로 이행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표현 수단의 변경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유 형태의 도입을 의미한 것이다.
운문에 의해 상대를 감동시키고 공감대를 넓혀가는 방식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산문에 의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을 밝히고 이것을 근거로 논증을 펼치며, 이 논증이 다시 기록될 때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지는 형태로 사유하도록 강요된다는 것이다.
한편, 이런 현상을 가속화하는 언어 외적인 요소로 다양한 정치 형태를 들 수 있다. 고대 문화 형성기에 대부분 지역에서 실지된 군주제와 과도기에 실시된 귀족제나 참주제, 그리고 유일하게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서 실시된 민주제 등이 있었다.
민주정치는 다수 국민에 의한 통치로,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의견 수렴과정이 필요하고, 그것이 곧 대화다. 이 대화를 통해서 상대를 설득시키거나 논증을 통해 자기 의견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민주정치는 언어가 권력의 원천이 됨으로써 성립되는 정치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감정과 직관과 영감이 지배하던 신화시대에서 언어 비중이 운문형태로부터 산문형태로 변화하던 시기에, 그리고 다수가 정치 현실에 등장해 연설과 변론술, 논증술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적 정치형태에서 표면적으로 당대 대표적 지식인인 소피스트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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