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크 라캉의 주체 개념*
문장수(경북대)
[한글 요약]
라캉은 그의 철학의 전개에 따라, 주체 개념에 대한 세 가지의 다른 이론을 전개했다. 그렇다면, 이들 세 중에서 어떤 하나를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선택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이들 세 이론들은 전체로서의 주체 이론을 풍부하게 하는 부분적인 이론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 논자의 입장이다. 이에 본 연구는 전체적 구조의 관점에서 라캉의 주체 이론들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우선 첫째로, 그는 상상계 이론에 집중하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판하고 해체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함의하는 자기 확실성으로서의 주체 개념은 거울 단계에서 문제가 된 자아의 일반적인 기능인 자기 기만성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라캉은 상징계 이론에 집중하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기표에 의해 구성된 주체와 이러한 기표적 주체가 무의식과 가지는 관계를 가장 잘 고려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캉 철학의 세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실재계 이론이 부각될 시기에 와서 주체의 문제는 다시 그 전체적 방향을 앞의 두 단계와는 전혀 다르게 바꾼다. 여기서는 상징적 논리와 욕망이론과는 상반된다고 할 수 있는 환상의 이론이 주체 이론의 주요한 대상으로 부각된다.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의 주체를 전체성에서 반성하는 것이 라캉의 주체 이론의 핵심이다. 그런데 증상 개념이 이러한 이질적인 세 차원이 공통적으로 수렵하고 교차하는 집합점이다.
즉 이러한 세 차원은 증상이라는 분절점을 중심으로 선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코기토가 바로 이러한 증상적 분절점이다. 따라서 상기의 이질적인 세 차원은 코기토를 기점으로 선회한다.
주제분야 : 프랑스 철학, 정신분석학
주 제 어 : 쟈크 라캉, 정신분석, 주체 개념, 데카르트, 코기토
* 이 논문은 2008년도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연구과제개발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1. 문제 제기
라캉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논의 대상이 무엇이든 종잡을 없는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그의 주체 개념이다. 잘 알다시피, 한편에서 라캉은 사유와 존재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존재를 포기하고 사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곧 뒤에 우리는 사유를 포기하고 존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라캉의 해석자들도 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그러나 논자는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이 표면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동일한 입장을 지지하며, 결과적으로 주체 개념을 보다 더 풍부하게 한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논자는 상상계를 분석하던 시기에 그가 제기하고 이해한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 실재계를 분석하던 시기에 제기하고 이해한 코기토 개념, 그리고 마지막으로 증상 개념을 분석하던 시기에 제기하고 이해한 코기토 개념을 차례로 분석하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변천사 안에서 어떻게 발전적으로 수정되는가를 해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해명은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포스트-모던 시대에 어떻게 변천되는가를 보게 할 뿐만 아니라, 라캉을 의미 있게 해독하는데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정신분석학의 토대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2. 상상계와 코기토
라캉은 1966년의『에크리』속에서, 우리는 ‘거울의 국면’(the mirror phase)과 ‘코기토’(the cogito)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1] 여기서 말하는 ‘거울의 국면’이라는 개념은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살바도르 달리와 정기적인 교류를 하는 동안에 고안된 ‘거울의 단계’(the mirror stage)라는 개념의 다른 표현이다. ‘거울 단계’라는 이러한 개념은 1949년의 논문, “정신분석학적 경험 속에서 해명된 나(the I)의 기능의 형성 요소로서 거울 단계” 속에서 보다 명시적으로 그 의미가 해명되었다.
두 살 정도의 유아는 아직 자기의 육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즉 그의 육체는 아직까지 조각난 육체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 자기를 보면서 몹시 좋아한다. 왜냐하면, 거울 속에서 그는 완성된 자기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완성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는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바라보는 자는 바라보여진 자 속에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거울에 비친 그 이미지는 본래의 자기와 다른 것, 즉 타자이다.
따라서 아이는 결국 타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처지에 있다. 그러고 나르시시즘의 본질은 이러한 이미지에 근거한 공허한 완성, 즉 착각에 근거한다. 따라서 우리는 거울 단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나’(the I) 혹은 ‘자아’(the ego)란 ‘상상적 맹목성’(imaginary blindness)과 ‘기만’의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라캉의 입장에서는 자아란 프로이드가 생각한 것처럼 ‘이드’(Id)와 ‘초자아’(Superego) 사이에서 양자의 갈등을 적절하게 조정하여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정신의 구원자 혹은 정신분석학적 치료를 가능하게 하는 보증자가 아니,
차라리 모든 종류의 환상과 특히 편집증(paranoia)의 근원이다.
그런데 2살 정도의 유아들에게 육체적 운동의 불완전에 근거한 조각난 이미지와 거울 속의 완전한 이미지 사이에 일종의 부조화 내지는 괴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이는 분명 쉽지 않다.
그러나 라캉은 그러한 부조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상상계에서 구성되는 이러한 부조화에 감금된 주체를 ‘좌절’(frustration) 2] 된 주체라고 한다. 그리고 라캉은 거울 단계의 조각난 이미지 때문에 구성된 일종의 공격성이 있는데, 이를 ‘상상적 공격성’이라고 한다.
이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보상을 요구하는 극단에 치달을 수 있다. 말하자면, 거울 단계의 조각난 이미지에 감금되면 사후적 증상으로서 편집증적 증상에 빠지게 되며, 동시에 거울 속의 완전한 이미지의 착각에 사로잡히면 그 사후적 증상으로서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편집증과 나르시시즘은 한 동전의 두 측면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나르시시즘에 근거한 조증은 편집증에 근거한 보상, 즉 충족될 수 없는 보상을 요구하면서 곧 우울증으로 치달을 수 있다.
결핍에 대해서 부연하자면, 라캉는 인간의 세 가지 기본적인 결핍을 ‘좌절’(frustration), ‘거세’(castration) 그리고 ‘박탈’(privation)이라고 한다.
좌절이 상상계에 근거한 결핍이라면, 거세 3] 는 상징계에 근거한 결핍이고 박탈은 실재계에 근거한 결핍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라캉은 결핍이 단순한 대체에 의해 보상되거나 메워질 수 있다면, 그것을 ‘현실적’(실재적)이라고 정의하고 ‘박탈’이라고 명명한다.
반면에 결핍이 ‘법’에 의해 인정된다면, 그것은 ‘상징적’이라고 정의하고 ‘거세’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대체에 의해 매워질 수도 없고 법에 의해 인정될 수도 없는 결핍을 라캉은 ‘상상적’이라고 정의하고 ‘좌절’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좌절이 상상적(상상계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대상은 현실적이다. 좌절된 아이에게 있어서 결핍된 대상은 항상 현실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박탈은 현실적인 결핍(실재계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 대상은 상징적이다. 예를 들어 나의 책상 위에 ‘논리학 저서’의 부재는 현실적인 결핍이지만, 상징적인 법에 근거한다. 왜냐하면, 현실계에선 하나의 사물이 있거나 아니면 없지만(or), 상징계에선 하나의 대상이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and). 즉 상징계는 언제나 현전과 부재의 법이 적용되는 세계이다. 저서의 부재는 현실적이지만, 그 대상은 현전성을 전제한 부재이기에 상징계의 법에 종속된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거세가 상징적 결핍(상징계에서 구성된 것)이라고 해서 그 대상인 남근도 상징적인 것은 아니다. 거세의 대상인 남근은 ‘-ψ’로 상징되는 ‘상상적인 남근’이다. ‘Φ’로 표기되는 ‘상징적 남근’은 거세될 수 없다. 통상적으로 라캉이 말하는 거세된 ‘남근’(phallus)이란 곧 거부당한 ‘향락’(jouissance)이다. 그러나 남근은 향락의 본질이 아니다. 향락을 지시하는 직접적인 기표는 없다. 반면에 남근은 향락의 도정의 각 단계들을 간접적으로 표시하고 의미화하는 기표이다. 즉 남근은 향락이 야기한 장애, 증상, 환상, 행위 등을 외면화하는 주기표이다. 4]
‘자아’ 또는 ‘나’란 근본적으로 기만과 환상의 장소라는 것을 해명해 준 것이 ‘거울의 국면’에 대한 분석의 성과이다. 이에 라캉은 우리는 이제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거울의 국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데카르트에 있어 코기토는 명증적이고 투명한 자기, 즉 사유하는 자아를 지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코기토로서의 자아가 근대 과학의 모든 객관성과 보편성의 토대이다.
데카르트 이후 거의 삼백 년 동안 서양 정신사를 지배해 온 주체 개념들은 거의 모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의존했다. 그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데카르트의 이러한 코기토가 기만과 환상의 토대라고 역설한다. 그런데 물론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에 대한 라캉의 이러한 비판이 있기 이전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및 다양한 영역의 구조주의자들에 의해 구성된 구조 개념들도 이미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을 해체하는 데 몰두했다.
즉 일체의 의식적 사유들을 조정하는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 일체의 신화, 의례, 믿음, 습관 등의 하부에서 그들을 조정하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 개념, 푸코의 ‘에피스테메’, 알튀세르의 ‘주체 없는 과정’, 일체의 주체와 객체, 안과 밖, 공간과 시간 등의 대립들에 앞선 데리다의 ‘차연’ 등은 모두 주체의 ‘하부’ 혹은 ‘배후’ 혹은 ‘이전’에 있는 모종의 토대를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여, 이들은, 푸코가 인간은 죽었다고 선언했듯이,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인 코기토로서의 자아뿐만 아니라 일체의 주체 철학을 철학으로부터 영원히 말살하려고 했다. 5]
그러나 라캉은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과 구조주의자들의 구조 개념을 수용하지만, 주체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주체철학을 구축하는 것을 자기의 일생의 사명으로 삼는다.
그가 코기토를 비판한다면, 이는 그가 주체를 해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체를 구제하기 위해서이다. 즉 프로이드와 달리, 라캉은 ‘자아’(ego, the I)와 ‘주체’(subject)를 구분한다.
‘자아’란 거울단계에서 발견되는 ‘나’의 기능 내지는 메커니즘으로서 근본적으로 기만과 환상의 장소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자기를 망각하는 자기-인식이다. 따라서 자아의 기능들에 참조하여 구성된 ‘나’의 정의는 주체를 정의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자아’가 상상계의 주제 하에서 구성된다며, ‘주체’는 이와는 전혀 다른 논리인 상징계의 논리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에 라캉이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된 구조’ 6] 로 정의한다손 치더라도, 그는, 구조주의자들과 달리, ‘주체 없이는 어떠한 구조도 과정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은 주체로부터 독립된 어떤 신비의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인 주체이다. 그러나 무의식으로서의 이러한 주체는 명증적인 것도 아니며 투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말하는 코기토로서의 자아 개념에 정면으로 상반된다. 간단히 말하면, 라캉도 데카르트적 자아 개념을 해체하는 데 동의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구조주의자들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라캉은, 주체 개념을 적극적으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후자들과 다른 길을 간다.
그러나 라캉은, 상징계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해 종전에 가졌던 입장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그는 ‘코기토는 무의식의 주체이다.’ 7] 고 명시적으로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의 구조주의자들이 반데카르트주의자임을 선언할 때, 자기는 데카르트적 전통의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라캉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라캉의 반대자들까지 혼란케 했다. 8] 라캉의 이러한 돌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장을 바꾸어 논의하고자 한다.
1] 참조, Lacan, Jacques. Écrit, I, Paris, Seuil, 1966, p. 93.
2]참조, 질베르 디아트킨, 『자크 라캉』, 임진수 옮김, 교문사, 2000, p. 40.
3]라캉에 있어 거세란 상징적 기호의 사용에 의해 야기된 모든 종류의 결핍을 총 망라한다. 거세란 남근기에 남자 아이 또는 여자 아이가 상상하는 결핍적인 남근을 지시한다. 이 시기에 남자 아이는 거세의 위협을 동반한다면, 여자 아이는 작은 남근, 즉 남근의 부제로 결핍을 느낀다. 따라서 상상된 남근을 존재 결핍의 기표 또는 상실의 기표로 간주한다. ‘상상적 남근’에 대비되는 ‘상징적 남근’이 있다. 라캉은 전자를 ‘-ψ’로 후자를 ‘Φ’로 표기한다. 후자는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부정될 수 없다. 그리고 라캉은 거세에 ‘주-기표’의 위지를 준다. 그런데, 기표는 다른 기표와의 대립에서 존립한다고 한다면, 모든 기표는 동등한 지위를 가질 것이다. 이에 대해 구체적인 해명은 없다.
4] 참조, 나지오, 『자크 라캉의 이론에 대한 다섯 편의 강의』, 임진수 옮김, 교문사, 2000, p. 59-60.
5]참조, Mladen Dolar, “Cogito as the Subject of the Unconscious”, in Jacques Lacan, ed., by S. Žižek, Volume II, Routledge, 1998, p. 4-5.
6] Lacan, Jacques, Le Séminaire, livre XI :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Ed. J.-A. Miller, Paris, Seuil, 1973, p. 23.
7] 참조, Dolar, ibid., p. 6.
8]참조, Dolar, ibid., p. 6.
3. 상징계와 코기토
라캉은 자기의 연구의 기획을 ‘프로이드에게로의 회귀’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이러한 종착역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역이라고 말한다. 라캉이 볼 때,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순수한 주체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러나 라캉이 볼 때,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도달한 최종 상황을 명제로 구성할 때 철저하지 못했.
라캉의 관점에서는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꿈의 가설을 통해서 감각실재론을 해체하고 악신의 가설을 통해서 논리-수학적 명제의 필연성까지도 판단중지하게 하는 상황에서는 일체의 의미론적 사유 전체의 중지를 함의한다. 그러한 최종의 순간에서는 어떤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는 말을 하는 ‘나’가 아니라, 모종의 소리를 내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만을 생산한다고 가정되는 ‘초점’만이 남는다. 이러한 ‘초점’의 존재에 대해 나는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다. 이는 순수 공집합과 같은 것으로 ‘무’ 또는 ‘공허’ 자체이다. 이에 라캉은 이처럼 완전히 은폐되어 있는 주체를 지시하기 위해 하나의 새로운 기호($)를 고안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이러한 공허한 초점에 대해서 가장 명석․판명한 인식을 가질 수 있기라도 하듯이 말한다.
즉, 자기 투명성, 자기 명증성이 코기토의 본질적 속성이다. 뿐만 아니라, 잘 아는 것처럼 데카르트는 이를 실체화하여 이러한 공허한 초점을 세계의 일체의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로 간주하면서 영원불멸한 영혼 개념 및 신에 의해서 창조된 정신 개념을 여기에 결부시킨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논리에서 코기토는 신이라는 대타자의 보증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신 존재는 코기토의 확신에 의존되어 인식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라캉도 데카르트의 순환오류를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캉은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라캉 자신이 말하는 무의식의 주체와 동일한 지평에 있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코기토를 경유하지 않고는 무의식 개념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듯이, 라캉이 말하는 주체는 코기토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무의식은 의식적 사유가 이용하는 수단인 언어기호와 그것의 규칙인 문법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즉 무의식도 우리의 일상적 언어기호를 사용하며 언어의 용법인 은유와 환유를 또한 사용한다. 그러나 퍼즐 게임에서 단 하나의 요소만을 뒤틀어도 전체가 혼란해지듯이, 무의식의 문법은 우리의 일상적 문법에서 통용되는 은유와 환유로는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뒤틀어져 있다.
때문에 꿈에 대한 아무리 좋은 해몽도 완전할 수는 없다. 꿈으로 드러난 기표는 단지 기표일 뿐, 주체의 진정한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라캉에 따르면, 주체의 진정한 실재라고 할 수 있는 ‘향락’(jouissance)은 마치 칸트의 물자체처럼 어떠한 기표로도 드러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언어 구조의 약간의 이동 내지는 변천이 무의식이듯이,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의 주체는 코기토를 경미하게 이동시켜 놓은 것 혹은 약간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즉 무의식의 주체는 근대 과학적 객관성의 보증자인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코기토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주체는 그 동일한 코기토의 보이지 않은 이면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이 탐구하는 주체는 근대 과학적 주체인 인식론적 주체라는 동일한 주체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탐구 방식은 과학적 탐구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의미론적 주체 배후에 있는 비의미론적 비합리적 요소를 해명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라캉에 따르면, 방법적 회의의 결과로 주어진 데카르트의 코기토 개념이 함의하는 존재도 사실은 이미 정신분석학이 도달한 그러한 존재 개념을 포착했다는 것이다. 즉 존재하기 때문에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데카르트가 주장할 때, 우리는 사실 존재와 사유 사이에서 사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확실한 것은 나의 사유뿐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데카르트도 존재란 어떠한 일관성도 없고 토대도 없는 완전한 블랙홀, 즉 일체의 합리성을 벗어나 있는 공허라는 것을 직관했다. 우리의 감각적 지각들의 존재가 그러하듯, 우리가 접하는 존재자들은 상상력의 변덕들일 뿐,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심야에 강도를 만나, 생명과 돈 중에 양자택일하도록 강요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돈을 포기하고 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듯이, 우리는 존재를 포기하고 사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 철학의 용도는 여기까지이다.
라캉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존재하는 주체’와 ‘사유하는 주체’가 다르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사유하는 주체가 존재하는 주체와 동일한 주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캉의 입장에서는 사유된 주체 속에는 사유하는 주체, 즉 존재하는 주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즉 주체는 사유를 통해서 드러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사유는 본질적으로 주체를 왜곡시키기 때문에, 사유는 곧 주체의 ‘상실’(aphanisis)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 속의 자기 이미지에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자기가 들어 있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사유는 언어를 통하여 진행된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주체의 상실 구조를 증시한다면, 이는 언어 자체가 주체의 소외화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언어는 자기 부정성과 이원성을 함의한다. ‘아’라는 소리는 ‘어’라는 소리에 대비되기 때문에 자기의 기능을 수행하듯이, 그러한 대비가 없는 단 하나의 기호 ‘아’가 있다면, 이는 ‘아’소리의 있음과 그 소리의 부재, 즉 침묵 덕분에 기능한다. 따라서 기호는 자신들의 내적 차이에 근거하여 기능한다. 즉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기호는 없다. 일체의 기호들은 그가 속한 전체적 구조 속에서 기능과 의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기호는 필연적으로 반쪽을 결여하고 있다. 기호가 실종시키고 있는 그 반쪽이 주체가 존재하는 장소이다. 주체도 물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호가 아니라, 기표를 통해서 드러난다. 기호가 일상적인 의미를 지닌 일반적인 언어라면, 기표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드러난 무의미한 표현들이다.
즉 ‘나’라는 관념이 결여된 실언, 꿈, 환상 등이 기표이다. 정신분석학은 바로 이러한 기표들의 문법을 해명하려고 한다. 기표이든 기호이든 이들은 다 같이 타자를 목표로 주어진 것이며, 타자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된다. 이에 의미는 타자, 특히 대타자의 담론이다. 완전히 은폐되어 있는 주체의 공간이 존재의 장소라면, 타자의 공간은 의미의 장소이고 양자의 교차점이 기표들의 장소이며 곧 무의식의 장소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기표들을 의미를 지닌 기호를 통해 해석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무용한 것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아래 주석과 같이 된다. 9]
9] 참조, Dolar, 전개서, p. 10.
자크 라캉의 주체 개념
언어를 통한 주체의 소외화의 과정과는 반대로 분리 과정은 주체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다.
라캉이 말하는 분리과정은 의미론적 기호와 함께 있는 대타자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면서 그러한 기호 너머에 있는 대타자의 결핍 및 욕망을 볼 때 일어난다. 아이가 자아감을 가지는 최초의 순간은 대타자의 결핍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동시에 그 순간은 주체 자신의 결핍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사실 주체와 대타자 사이에는 결핍 외에 공통적인 요소는 아무 것도 없다. 주체의 장소가 존재의 장소라면, 대타자의 장소는 의미의 장소이다. 따라서 양자가 만나는 중첩의 장소가 바로 결핍의 장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핍의 장소가 곧 무의식의 장소이고 기표의 장소이다. 다시 말하면, 무의미한 기표가 발생하는 것은 주체와 대타자의 대면에서 발생하듯이, 무의식이란 주체와 대타자가 마주쳐서 발생시킨 효과음의 가상적인 장소이다. 라캉은 은폐되고 결핍된 주체를 표시하기 위해 빗장을 친 대문자 ($) 기호를 사용하듯이, 은폐되고 결핍된 대타자를 지시하기 위해 빗장을 친 대문자 (Ᾱ)를 사용한다. 빗장이 그어진 대문자 A가 존재하는 장소가 바로 이 교차점이다. 그런데 라캉에 따르면, 대타자의 결핍들은 대타자의 기호들 중간 중간의 침묵들 사이에 존립한다.10] 엄마는 계속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에 중지와 침묵, 즉 인터발을 사용한다. 이러한 침묵들 11] 사이에서 아이는 엄마의 결핍, 즉 욕망 12] 을 본다. 그러나 그 욕망이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아이는 엄마의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지는 회의하면서, 자기 자신을 엄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제공하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의 가장 원시적인 모습이며 곧 최초의 주체성의 형식이다. 자신을 엄마의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하는 것, 이는 자기 자신의 상실, 소멸, 즉 죽음을 의미한다. 대타자와 주체 사이의 욕망의 변증법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최초의 대상은 자신의 소멸과 자신의 죽음의 환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주체의 결핍과 대타자의 결핍의 교차는 하나의 특별한 대상을 구성하는데 이것이 소위 ‘대상a’(objet petit a)이다. 혹자는 이를 ‘소대상 a’ 또는 ‘소문자 대상 a’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데 라캉에 있어 ‘a’라는 기호는 알파벳의 첫 번째 문자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autre)라는 불어 단어의 첫 글자이다. 이에 의미를 살려 혹자는 ‘대상 소타자’라고 번역하기도 한다.13]
또한 어떤 사람은 불어의 발음을 그대로 살려 ‘오브제 a’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14] 소대상 또는 소타자란 곧 ‘큰 대상’ 또는 ‘큰 타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겠는데, 사실 라캉은 소문자 ‘a’로 표기되는 소타자(autre)와 대문자 ‘A’로 표기되는 대타자(Autre)를 구분하여 사용한다.
라캉에 있어 대타자 15] 란 일차적으로 엄마를 지시한다. 프로이드는 일체의 대상들에서 그것의 가장 미지적인 차원을 지시하기 위해 ‘대사물’(das Ding, Thing) 16]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 프로이드의 이러한 대상 개념에 착안하여, 라캉은 대타자 안에 숨어 있는 가장 알 수 없는 핵심, 즉 대타자의 욕망 안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를 지시하기 위해 ‘대상 a’ 또는 보다 정확히 ‘소타자 대상’이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따라서 이 용어는 나의 닮은꼴로서의 타인, 즉 타아(alter ego)를 지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대타자가 엄마라는 특별한 타자를 지시한다면, 소타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타자일반을 지시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 체계 내에서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상 a’는 “기표의 형식적 체계가 낳은 잉여” 17] 이며, “기표의 체계의 원인인 잉여-향락” 18]이며, “무의식의 구조 속에 있는 구멍” 19] 이며, ‘욕망의 대상-원인’(object-cause of desire)이다. 즉 ‘대상 a’은 욕망이 추구하는 대상(목표)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욕망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라캉에 따르면, 요구는 인간이 원하는 생리적, 의식적, 무의식적 소원의 총체를 의미하고, 욕구는 식욕, 수면욕 등 원하는 대상이 주어지면 충분히 만족되는 생리적, 생물학적 소원이며, 요구에서 욕구를 뺀 나머지의 영역이 욕망과 욕동이다.20] 욕망은 법이 없으면 없다는 차원에서 아버지의 법 21] 에 종속된다.
그러나 욕동22] 은 욕망과 달리 법에 종속되지 않으며 모종의 환상을 통해 항상 자기만족을 구한다.
예를 들어,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 말할 때, 그 현상은 단순히 보는 것과 다른 응시의 차원으로 일종의 환상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적인 응시를 통해 욕동은 만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금지된 것을 소원하기에 영원히 텅 빈 만족을 취한다.
10]참조, Lacan, Le Séminaire, Livre XI, 1964, p. 194 : “기표들을 가로지르는 인터발(틈, 사이) -이러한 인터발도 기표구조의 일부를 구성한다-속에 내가 환유라고 명명한 바위 것의 장소가 있다. 기표들의 바로 이러한 틈들 사이로 내가 욕망이라고 명명한 바의 것이 족제비처럼 기어 다니고 미끄러지고 도망친다.”
11]사실 침묵도 언어적 전체 구조의 부분을 구성한다.
12]라캉에 있어 결핍은 욕망과 거의 교환적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의욕한다는 것은 결핍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13]참조, 정경훈, “대상, 주체, 그리고 심미적인 것 : 칸트와 라캉의 미학”, 영미어문학, 제78호, 2006, p. 179.
14]참조, 박찬부, 『라캉 : 재현과 그 불만』, 문학과 지성사, 2006, p. 18.
15]대타자란 주체의 무의식상에 가장 중요한 타자를 지시한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엄마이다. 그러나 신이나 특정의 신화적 인물도 특정의 무의식의 주체에게 있어 무의식적 행위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할 경우엔 대타자가 될 수 있다. 분석기법과 관련하여, 분석가 자신이 환자의 대타자로 전이될 때, 분석이 본격적으로 간능하다고 말한다.
16] 이를 혹자는 ‘대상’ 또는 ‘사물’이라고 번역한다.
17]나지오, 전개서, p. 154.
18]나지오, 전개서, p. 154.
19] 나지오, 전개서, p. 154.
20]참조, 정경훈, “대상, 주체, 그리고 심미적인 것 : 칸트와 라캉의 미학”, 영미어문학 제78호, 2006, p. 179.
21]정신분석학에서 아버지는 법과 거의 동의어이다.
22]프로이드의 ‘Trieb’에 대해 최초의 불어 번역자들은 이를 ‘본능’(instinct)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라캉은 이를 ‘충동’(pulsion)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라캉은 이를 나중에 다시 ‘욕동’(dérive)로 번역할 것을 제안했다.
4. 실재계와 코기토
라캉은 실재계에 대한 탐구를 심화하면서, 존재와 사유 중에서 사유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대신에 우리는 존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종전까지의 모든 이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러한 정반대의 입장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분명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이하에서의 논자의 과제이다.
실재계에 대한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환상이다. 달리 말하면, 라캉은 환상 개념을 통해서 실재 문제를 해명한다. 라캉에 따르면, 환상은 주체로 하여금 실재를 대면케 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라캉적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있어서, 존재는 기표 및 그의 일체의 변별적 작용들에로도, 온갖 종류의 상상적 대상들에로도, 과학적 탐구의 객관적 대상들에로도,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다룰 수 있는 일상적인 구체적 대상들에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기표의 연쇄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즉 아무리 진실한 기표도 무의식의 진실을 포착하여 드러내지 못한다.
불륜 문제로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과 부인은 각자 자기 정당화의 연쇄에 사로잡혀 상대방이 자기의 입장을 이해해 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듯이, 기표는 무의식의 진실을 드러내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하고 다른 기표에게 책임을 위임한다. 그러나 환상은 이러한 미끄러짐을 중단시키는 유일한 방책이다. 그렇다고 환상이 문제의 결핍된 대상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완전히 해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환상은 단지 존재의 흔적, 대리자 혹은 보충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자기도 싸르트르의 실존적 자기도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흔적 혹은 대리자일 뿐이다.
환상에 대한 예를 들자면, 엄마의 젖가슴을 잃은 아이가 자기 자신의 몸을 ‘젖가슴’과 동일시하는 경우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즉 여기서 주체는 자기 자신이 곧 대상 자체가 되는 분열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환상의 구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기 위해, 라캉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만들었다 : “$ ◇ a”. 여기는 횡선이 그어진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 또는 ‘소멸된 주체’를, “a”는 “대상 a”를 지시한다.
그리고 가운데 기호(◇)는 논리학에서의 연어기호(∧)와 선언기호(∨)의 융합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 기호는 포함과 배제, 필연성과 우연성, 함축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지시한다.23]
그런데 이 마름모 기호는 라캉의 체계에서는 기표를 상징한다. 따라서 환상을 기술하는 이 공식의 함의는 이러하다. 즉 “주체의 소멸이나 일그러짐의 순간은 주체가 기표에 예속될 때 겪는 균열이나 분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24] 달리 말하면 환상의 동작주, 즉 환상의 구조를 조직하는 요인은 피분석가와 같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의 활동과 기표(아이나 엄마의 외침)의 동시적 작품이다. 따라서 결국 ‘대상 a’가 환상의 동인이다.
이러한 공식을 통해 우리는 ‘대상 a’의 속성을 어느 정도 기술할 수 있다. 즉 ‘대상 a’는 한편에서 오직 내적이고 주체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외적이고 객체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내적이면서 외적이고, 주체적인 것이면서 객체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내적인 것도 아니고 외적인 것도 아니며 주체적인 것도 아니고 객체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함의하는 것이 ‘대상 a’이다.
이러한 고려는 이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재해석하게 한다.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근본적인 명제에서 데카르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존재와 사유의 일치이다.
그러나 라캉은 존재의 항과 사유의 항의 교집합은 수학적으로 가능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라캉은 아래 도식처럼 이러한 교집합의 여집합 25] 을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존재의 항은 ‘나는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며, 사유의 항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내가 사유하는 곳에서는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나는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다.
그런데 라캉은 전자의 항, 즉 자아의 존재가 상실된 채 사유만 발생하는 장소에서 바로 무의식의 정의 26]를 본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이란 의지적이고 자기 통제적인 자아가 상실된 무의미한 기표의 연쇄 망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사유가 진실한 사유이다.
반면에 존재의 항, 즉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순수 초점으로서의 자기, 차후의 다른 일체의 사유를 발생할 사유의 생산자로 이해된 자기존재(moi-je), 이는 사실 이미 언어적 추론의 결과로 주어진 관념적 존재이고 대상화된 존재, 즉 사이비 존재이다. 보다 더 단순화시켜 말하면, 우리가 통상 이해하고 있는 존재란 사유, 즉 무의식의 진실된 사유가 결여된 장소이다. ‘나의 존재’ 또는 ‘자아 실체’ 등은 이처럼 진실한 사유가 빠진 상상적 혹은 환상적 존재의 영역에 거주한다. 따라서 ‘나’란 기만의 장소이다. 사유가 없는 존재의 영역, 그것은 기만적인 자아가 거주하는 거짓 존재의 영역이다. 이것이 거짓 존재인 것은 사실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는 이미 언어에 의해 구성된 존재, 즉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존재가 없는 사유의 영역, 즉 무의식적 기표들의 연쇄망의 영역은 진실된 사유이기는 하지만 ‘나’, ‘자기’,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다. 물론 ‘나’란 기만적이고 거짓이기에 그러한 기만적인 ‘나’가 없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진정한 주체도 여기서는 완전히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의식의 주체, 즉 빗장이 그어진 주체가 거주하는 곳이 바로 ‘존재 없는 사유’의 장소이다. 사유만 있고 존재는 없기 때문에, 진정한 주체는 왜곡된 기표로 현전할 뿐 진정한 존재를 은폐하고 있다.
(사유 없는) 존재의 영역과 (존재 없는) 사유의 영역을 이처럼 특성화하고서 다시 라캉은 프로이드의 ‘이드’를 전자에 ‘거세’를 후자에 정초시킨다. 이드, 즉 욕동은 비-사유이며 실재의 차원에 속한다. 따라서 ‘이드’는 ‘나는 사유하지 않는다 ; 나는 존재한다’는 영역에 배당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moi-je, I, Ego)는 언제나 존재의 선택이다. 즉 나는 항상 존재하는 나이며 여기에 있다고 간주된 나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본질적인 존재를 놓치고 있다. ‘나’란 따라서 거짓 존재로 싸여 있다. 이에 본질적인 나의 존재가 있어야 할 것이고, 굳이 말하면 그것은 ‘비아’(pas-je, non-I)라고 명명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존재의 영역은 일부분이 삭제되어 있는데, 삭제된 그 부분을 보충해야 하는 것은 바로 ‘비아’이며 ‘이드’이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 외에도 삭제되고 말소된 또 다른 ‘나’가 있다. 이는 ‘비아’ 혹은 ‘무아’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본질적인 존재로서의 ‘나’이다. 따라서 ‘이드’는 진정한 존재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지만 기술될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드’가 언어의 차원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이에 이러한 ‘무아’는 그저 ‘그것’(id, Es, ça, It) 27] 로 표현된다.
즉 욕동은 비인칭적인 것이지만 문법적 주어를 표시하는 기능어로 나타난다. 라캉은 욕망은 기표의 영역에서 구성된 것이고 따라서 논리적이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표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인 환유는 우리의 일상적인 논리로부터 약간 일탈해 있지만 여전히 의미론적 논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욕동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욕동이 언어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라캉에 따르면, 욕동이 따르는 규칙은 문법, 특히 촘스키가 말하는 통사론적 문법구조에 거의 상응한다. 욕동은 기표들의 환유 속에서 언급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향한다. 대신에 욕망은 기표들의 틈들에서 거주한다. 라캉에 있어 기표들의 틈, 분리, 욕망, 환유는 거의 교환적이다. 반면에 주체는 은유와 교환적이다.
‘나는 호수이다.’에서 ‘나’는 은유로서만 표현될 수 있듯이, 나의 욕망의 대상은 무지개처럼 다가서면 더 멀리 물러선다. 그것은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이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기껏 욕망의 대상에 인접한 대상을 고집했을 뿐이다. 인접성의 원리에 지배되는 환유가 욕망의 현전원리라면, 유사성의 원리에 지배되는 은유는 주체의 현전원리이다. 이를 종합하여 라캉은 ‘주체의 은유가 욕망의 환유의 토대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28] 그러나 욕동은 은유에도 환유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욕동의 현전 원리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나’(moi-je, Ego, I)라는 실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이드’, 즉 ‘욕동’이 만든 환상의 결과이다. 어떤 소박한 경험론자가 외적 물리적 존재와 언어적 논리적 의미 영역을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물리적 실재에 속하는 자라고 고려하면서 그러한 ‘나’를 직관한다고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환상이다. ‘자아’란 상상적인 것이지 실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아가 우리들의 일상적 삶을 영위하게 하는 통제자의 지위를 갖는다. 결국 우리는 모두 환상에 예속되어 있다.
라캉에 따르면, 사유 없는(무의식이 빠진) 존재의 차원인 자아의 영역뿐만 아니라, 이것에 대비되는 영역, 즉 존재 없는(자아가 빠진) 사유의 영역인 무의식의 영역에 대해서도 부분적인 삭제와 말소를 말할 수 있다. 존재의 차원에서 우리는 실재적 존재인 ‘이드’ 혹은 ‘비아’를 상실하고 오직 환상적인 존재인 ‘자아’ 존재만을 보고 있듯이, 사유의 영역에서도 삭제되고 말소된 부분이 있다. 즉 무의식의 영역에도 기표들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번역되는 차원이 있지만, 영원히 어떠한 기표로도 들러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삭제된 부분이 있다.
라캉에 따르면, ‘-ψ’로 기술되는 ‘거세’(castration) 29] 와 ‘향락의 박탈’(privation of jouissance) 30] 이 여기에 한다. 기표들은 무의식적 사유의 소재들이고 결과들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기표들은 결핍을 중심으로 선회한다. 거세란 바로 궁극적인 토대인 존재 의미의 결핍을 지시한다. 법, 즉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발생한 상징적 결핍이 (남근의) 거세라면, 대체 가능한 현실적 결핍은 (향락의) 박탈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거세와 박탈 때문에 무의식이 구성된다. 즉 한편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 때문에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어떠한 사랑도 큰타자의 향락을 충족시킬 수 없는 대리보충일 뿐이기 때문에 무의식이 구성된다. 왜냐하면, 무의식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향락은 블랙홀과 같은 구멍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라캉의 향락은 칸트의 물자체와 같이 접근 불가능한 실재이다. 이를 도식화 하면 아래와 같다.
23]참조, Richard Boothby, “Figurations of the objet A”, Freud as Philosopher, in Jacques Lacan, ed., by S. Žižek, Volume II, New York, Routledge, 2001, pp. 160-162.
24]Lacan, Jacques. Écrit, Paris, Seuil, 1966, pp. 815-6.
25]참조, Dolar, 전게서, p. 17.
26]참조, Dolar, 전게서, p. 20 : 라캉은 ‘무의식’, ‘전의식’ 그리고 ‘의식’이라는 프로이드의 1차적 지형학에서 ‘무의식’ 개념을, 그리고 ‘이드’, ‘자아’ 그리고 ‘초자아’라는 프로이드의 2차적 지형학에서 ‘이드’ 개념을 여전히 유용성이 있는 개념으로 간주하면서 이들을 자기의 이론에 편입시키려고 노력한다.
27] 이를 임진수는 ‘거시기’라고 번역한다. 왜냐하면, ‘이드’는 본질적으로 성적인 차원, 소위 향락과 연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8]참조, Dolar, 전게서, p. 14.
29]남자는 상징적인 결핍, 즉 거세에 직면하게 되고, 여성은 현실적인 결핍, 즉 박탈에 직면해 있다. 달리 말하면, 남성은 모든 여성을 독차지 하는 우두머리로부터 여성의 소유를 금지 당하고 있으며, 위반했을 때는 거세의 위협을 받는다. 따라서 남성의 향락은 항상 거세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어두머리의 남근과 결부되어 있다. 반면에, 여성은 그러한 거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여성의 향락은 한계가 없고 무한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성은 작은 남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자 아이는 엄마를 만족시켜 주려는 욕망을 가지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큰타자의 향락은 불가능하다.’는 명제가 유래한다. 결국 남자는 거세의 위협을 가지면서 성관계에 임하고, 여자는 부정적인 남근, 즉 소외된 남근의 형태에서 성교에 임한다. 따라서 양자 모두 성적 관계에서 만족을 갖지 못한다.
30]향락이란 프로이드의 쾌락 개념의 불충분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라캉이 고안한 개념이다. 심적 충동은 편집증 또는 마조히즘 등과 같이 불쾌를 지속하고 반복하는 경향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향락을 심적 에너지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세 종류의 향락을 구분한다. 심적인 억압이 이상적으로 방출되어 완전한 쾌락을 성취하는 경우를 ‘큰타자의 향락’이라고 하고, 부분적인 방출을 ‘남근적 향락’, 방출되지 않고 억압되어 머무르는 부분을 ‘잉여-향락’이라고 한다.
존재 항에서 말소되어 있는 ‘이드’ 또는 ‘비아’의 실질적 존재와 사유 항에서 말소된 채 은폐되어 있는 ‘거세’와 ‘향락’의 결핍들은 함께 결합하여 두 항의 교집합 영역을 구성한다. 즉 이드적인 욕동이 선회하는 중심 돌쩌귀가 바로 블랙홀과 같은 결핍된 토대인 거세이다. 계속 강조하지만, 거세란 페니스의 절단이 아니라, 일체의 심리적 욕망이나 욕동을 가동시키는 토대의 상실 내지는 은폐를 지시한다. 즉 거세는 주기표인 남근의 억압과 욕망의 대상의 상실 양자 모두를 지시한다.
무의식이 아버지의 법에 의해 구성된 상징적 차원의 영역이라면, 에고나 자아의 실체론적 존재는 상상적 산물이다. 양자에 말소된 부분들, 즉 ‘이드’ 또는 ‘비아’와 ‘거세’ 또는 ‘박탈’은 같이 결합하여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를 구성한다. 종합하여 말하면, 우리의 심리적 상황은 상징계, 즉 아버지의 법에 종속되기 이전에 먼저 상상계에 몰입한다. 따라서 언어적 상징과 그것이 구성한 대타자 속에서 야기된 소외 이전에 상상계에서 야기된 소외, 즉 존재 환상을 가지면서 감당 해야 하는 소외가 있다.
프로이드의 ‘에고’나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바로 ‘내가 존재하는 실체라는 존재 환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단순히 말을 하는 순수한 초점인 공허한 나를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간주하면서 자아 존재의 환상이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나’란 ‘이드’(그것)나 ‘비아’(pas-je)의 진정한 존재를 소외시키는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우리는 사유를 포기하고 이러한 존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무의식(적 사유)을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존재의 환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적인 힘인 무의식적 사유는 자아적 사유를 자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침탈한다. 결국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실재계의 ‘주체’가 아니라, 그러한 실질적 자아존재의 흔적이고 얼룩이다.
즉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사실 그 반대를 말하기 위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 명제는 ‘일체의 사유의 생산자이고 의지의 결정자인 나는 다른 어떠한 존재에 앞서 존재하는 실체이다.’는 믿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라캉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실체는 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이러한 환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
5. 증상과 코기토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라는 세 차원은 최종적으로 증상이란 축을 중심으로 종합된다. 그리고 코기토가 바로 이러한 증상의 중심축이다. 말하자면, 코기토 그 자체가 라캉이 말하는 세 차원의 분절점이다. 즉 코기토는 우선 상상적 자아를 넘어서 있는 주체성을 고려하게 하는 초점이며, 다음으로 상징적 주체를 넘어서 있는 주체성을 고려하게 하는 초점이다. 그리고 오직 익명적 욕동을 통하여서만 주어지는 궁극적인 실재적 주체는 양자의 순환으로 통해서만 포착될 수 있다. 즉 실재적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로부터 독립해서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증상의 핵심은 사유와 존재의 불가피한 불일치에 근거한다. 결국 코기토의 증상은 우리가 상상계와 상징계 중 그 어떠한 차원을 활용하든 실재를 불가피하게 놓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일종의 심리적 증상들을 가지고 사는 동물이다. 증상이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통의 원인에 대한 자기 자신의 진단까지 포함한다. 말하자면, 증상에 대한 자기 진단 그 자체가 이미 증상이다. 인간 외에 자기 병을 진단하고 해석하는 동물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상은 일상적인 의미를 지참하는 ‘기호’(sign) 31] 들을 통하여 나타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정의하면, 말하는 존재가 의도하지 않고 본의 아니게 발설한 무의미한 말들, 실수들, 꿈들, 즉 라캉이 ‘기표’(기호표현, S1)라고 명명한 장치들을 통하여 드러난다.
분석가가 환자의 증상에 참여한다고 할 때, 그가 참여하는 대상은 바로 이러한 기표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증상은 두 가지의 하부 구조에 의존한다. 하나는 무의식의 지식(S2)이며, 다른 하나는 향락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특성으로 가진다면, 향락은 성적인 것이지만 “성적 관계란 없다”는 명제로 특성화 된다. 그런데 무의식의 구조는 일상적 언어적 구조와 유사하지만, 약간 뒤틀려 있다. 이러한 약간의 뒤틀림은 그것에 대한 어떠한 일상적 해석도 완전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향락은 대타자의 향락, 즉 근친상관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타자의 향락이란 완전한 두 존재의 결합을 함의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온전한 존재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우리의 육체는 항상 부분적인 육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남녀관계는 부분들의 일시적 접촉일 뿐이다. 사실 무의식 그 자체 향락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향락은 번역할 수 없는 실재적 차원이다.
즉 향락이란 잃어버린 실낙원 혹은 망각된 존재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욕동을 통한 부분적인 일시적 만족을 가질 뿐, ‘욕망의 진정한 원인-대상’(대상a)을 포착할 수도 향유할 수도 없다.
사실 정신분석학에서 문제시되는 대상은 항상 욕망과 연관된다. 말하자면 정신분석학은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 또는 욕망이 추구하는 대상을 문제시 삼는다. 이때 가장 중요한 대상은 ‘타자’ 또는 ‘자아’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자아와 타자는 거의 동일한 것이다. 아이가 가지는 원초적 자아는 거울 단계에서 구성된 상상적 이미지로서의 자아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타자의 이미지이다.
왜냐하면, 거울 속의 이미지는 내 눈 앞에 전개되는 타자의 이미지의 연장이다. 그런데 우리의 무의식은 이러한 전체성으로서의 자아 혹은 타자의 이미지 이전에 ‘젖가슴’, ‘자지’, ‘똥’, ‘시선’, ‘목소리’ 등과 같은 부분적 대상들을 더 중요시한다. 이러한 부분 대상들은 사랑이나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획득이나 상실의 대상이다.
전체로서의 육체란 이미 상상력이 구성한 상상적 대상이다. 따라서 ‘자아’, 즉 ‘에고’는 상상적 대상이다. 그런데 상상적 이미지에 대비되는 것으로 상징적 기호(법,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구성되는 대상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대타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 대상들은 결국에 동등해져 ‘대상a’로 포섭된다.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 도식화하면, 상상계에서 구성된 자아와 상징계에서 구성된 무의식적 주체 사이에 ‘소타자’라고 할 수 있는 ‘대상a’가 자리 잡는다. 따라서 ‘대상a’는 일차적으로 실재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는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일자가 나머지 양자를 지탱한다. 따라서 자아, 대타자 그리고 소타자는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사람에 따라 강조되는 요소가 다를 뿐이다. 극단적 광신도들은 상대적으로 대타자에 보다 더 예속된 자라고 할 수 있다면, 나르시스트(자아 도취자)은 자아의 완전성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람들은 ‘대상a’를 중심으로 욕동과 욕망을 적절히 반복한다고 하겠다. 즉 한편에서는 허기지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음식을 씹거나 영화를 볼 때처럼 순간순간 환상을 즐긴다. 하지만 이러한 만족은 결코 지속되는 법이 없다. 마치 음양의 조화처럼, 만족과 불만은 반드시 교대한다. 음식의 씹은 즐거움은 포만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반드시 곧 과식의 불쾌를 만나게 하고 따라서 씹고자 하는 욕동을 포기하게 한다.
31] 기호(sign)는 기의(signifié, signified)와 기표(signifiant, signifier)로 구성된다. 즉 기호란 항상 의미를 가진다.
6. 맺는말
이상에서 보았듯이, 라캉은 그의 철학의 전개에 따라, 주체 이론을 과감하게 수정하고 변혁시켰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러한 급변에도 불구하고 라캉은 전체로서 일관성을 계속 유지한다.
이에 본 연구는 라캉의 주체 이론의 전체적 구조의 관점에서 이러한 개별적 이론들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우선 첫째로, 그는 상상계 이론에 집중하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판하고 해체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함의하는 자기 명증성, 자기 투명성, 자기 확실성으로서의 주체 개념은 거울 단계에서 문제가 된 자아의 일반적인 기능인 자기 기만성, 자기 무지 등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존재와 사유 중에서 택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사유를 선택했다. 그런데 사유는 전적으로 기표의 논리에 의존한다. 따라서 그는 존재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사유에서 존재를 연역한 것은 잘못이다. 존재하는 ‘나’와 사유된 ‘나’는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첫 번째 단계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라캉의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라캉은 상징계 이론에 집중하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상상계적 자아와 상반적 관계에 있는 주체, 즉 기호표현에 의해 구성된 주체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고려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코기토는 기표적 주체가 무의식과 사이의 관계를 잘 해명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간주된다. 즉 여기서는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해체되고 부정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프로이드에게로 귀환’하기 이전에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중간 역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코기토는 첫 번째 단계에서 가진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지위를 가진다. 또한 여기서는 특히 기표에 의한 주체의 소외 과정과 이것의 상대자인 분리과정이 집중적으로 분석된다. 그렇게 하여 이제 주체는 욕망의 주체로 부각된다.
그러나 라캉 철학의 세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실재계 이론이 부각될 시기에 와서 주체의 문제는 또 다시 그 전체적 방향을 앞의 두 단계와는 전혀 다르게 바꾼다. 즉 여기서는 상징적 논리와 욕망의 지평과는 상반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욕동과 환상의 영역이 주체 이론의 주요한 대상으로 부각된다. 욕망이 상징적 논리와 연관되어 구성된 것이라면, 욕동은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실재적 차원이다. 그런데 실재적 차원의 존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환상이다. 따라서 상상적 자아나 상징적 주체는 실재적인 진정한 ‘주체’에게 접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사실 상상적 자아와 상징적 주체를 해체하고 남는 최후의 일점으로서의 자기-존재이지만, 이도 여전히 실재적 존재는 아니다. 실재는 우리에게 결코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를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선택된 존재는 환상적 존재일 뿐이다.
주체 이론의 이러한 세 가지 전개 속에서 어떤 하나를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선택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이들 세 이론들은 전체로서의 주체 이론을 풍부하게 하는 부분적인 이론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 논자의 입장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의 주체를 전체성에서 반성하는 것이 라캉의 주체 이론의 핵심이다. 그런데 증상 개념이 이러한 이질적인 세 차원이 공통적으로 수렵하고 교차하는 집합점이다. 즉 이러한 세 차원은 증상이라는 분절점을 중심으로 선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코기토가 바로 이러한 증상적 분절점이다. 즉 상기의 이질적인 세 차원은 코기토를 기점으로 선회한다.
우선 첫째로, 코기토는 주체로 하여금 상상계적 자아를 넘어 서게 하는 돌쩌귀이며, 둘째로 상징적 주체를 넘어서게 하는 돌쩌귀이다. 급기야 이러한 선회를 통해 궁극적인 토대, 즉 ‘익명적인 욕동’ 32] 의 실재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욕동의 실재성은 상상계나 상징계에 독립하여 있는 그대로 포착되지는 않는다.
사유와 존재의 불가피한 불일치가 증상의 핵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의 주체성은 바로 이러한 증상의 핵에 의존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나’, ‘자기’, ‘주체’ 등은 증상의 효과이다. 라캉과 데카르트의 차이는 바로 이점에 있다. 라캉의 입장에서는 명증적이고 투명한 데카르트적 주체는 증상의 효과일 뿐이다. 그렇다고 주체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32]욕동은 어떠한 기표로도 드러날 수 없는 물자체와 같은 것이다.
참고 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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