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심리학

라캉의 수치심에 대한 고찰

rainbow3 2020. 3. 18. 03:25


수치심과 시선*

-라캉의 수치심에 대한 고찰

 

정 락 길(강원대학교)

 

 

<국문초록>

 

프로이드 이후 정신분석학에서 수치심에 대한 논의들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전통적인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된 가족 형성의 외상에서 수치심을 설명해왔다면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좀 더 근원적으로 수치심을 동물과 인간의 경계 사이에서 등장하는 존재 모순의 상처로부터 탄생하는 정서(affect)로서 바라보고 있다.

이 논문은 수치심을 이론적으로 크게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 관계에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 불안(angoisse)으로부터 파생하는 정서로서의 일차적 수치심과 문화와 사회의 진입으로부터 나타나는 이차적 수치심으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현실적 양태로서의 수치심이란 이러한 두 단계의 수치심이 얽혀지고 변형되어 나타나는 복잡한 정서로서 우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 정의로부터 논문은 다양한 수치심의 논의들 중에서 특히 자끄 라캉의 수치심과 시선의 관계를 중심으로 수치심의 임상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라캉은 수치심을 상상적 상호주관성의 차원 속에서 나타나는 시선의 문제로서 주로 해명하고 있다. 지각적 차원의 대상이 아닌 시선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 a이며 팔루스의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논문은 관음증과 노출증에서 나타나는 시선과 수치심의 관계를 검토한 후 라캉의 수치심의 논의가 인간의 존재론적 차원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논문은 거식증의 병리적 양상을 수치심과 시선의 문제와 연관 하에서 검토하면서 정신분석학적 치료론에서 얼굴(visage) 개념의 중요성을 결론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라캉의 임상에서 정신병자는 실재의 상태 속에 가두어진 자이고 그래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이루어지지 못한 자이다. 반면에 신경증자는 실재와의 대면이 부인되거나 연기된 채 욕망의 환상이 과도하게 투여되는 자아 이상/초자아의 환상 속에 시달리는 자이다.

여기에서 라캉 치료론의 중요한 쟁점으로서 거울단계에서의 이미지가 지닌 역할의 중요성을 다시 검토해야 함을 논문은 주장하고 있다. 논문은 얼굴이 실재의 불가능성과 상상계의 과도한 동일시를 넘어 주체가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구성하는 유동적 외양이자 허울로서 기능함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자 한다.

따라서 모든 주체가 삶속에서 다양한 얼굴을 구성하듯이 끊임없이 유동하며 형성되는 그러한 내면의 구성적 장으로서의 얼굴의 개념을 주요한 치유적 개념으로서 제기하고 있다.


□ 주제어
수치심, 시선, 자끄 라캉, 대상 a, 얼굴

 

* 이 논문은 2007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07-361-AM0056)
이 논문은 2015년 12월 11일 제 7회 전남대, 강원대, 원광대 인문한국사업단 연합학술대회 “부끄러움, 마음, 치유”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에서 <수치의 정신분석, 그리고 영화>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하여 게재한 글이다.

 

 

Contents


1. 들어가며
2. 수치심과 팔루스
3. 수치심과 시선 / 대상 a
4. 육체의 수치심 - 거식증
5. 수치심의 가능성과 얼굴

 

 

1. 들어가며

 

성경의 창세기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유혹의 선악과를 이브와 아담이 따먹고 난 후,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되어 그들의 벗은 몸을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렸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1)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는 나체로부터 의식의 탄생이라는 철학적 주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탄생과 연관된 수치심의 문제를 흥미롭게 드러내고 있는 예이기도 하다.

슈나이더가(Scheneider)는 “인간 존재는 직립 보행하면서 네 발로 걸었던 자세에서 감추어져 있던 것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생식기관은 드러나게 되었고 동시에 감추어지게(보호를 요구하게) 되었다. 드러남과 감춤의 관계의 형성과 함께 ‘창피하다’는 느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2)라고 주목하면서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계통발생학적(phylogénétique) 가설이 수치심의 문제와 근원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치심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논의는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그 정서의 근원을 해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으로부터 지상으로 추락하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성의 차이, 수치스러운 신체 기관의 등장이 함의하는 부분대상의 문제, 죄의식의 문제라는 정신분석학의 주요한 주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주제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대치될 수 있을 것이다.

수치심이라는 정서는 여성과 남성에게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가?

수치심은 개인적 자존감의 문제인가 타자의 시선의 문제인가?

수치심은 죄의식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수치심의 경험으로부터 인간이 자기비하, 자기애적 상처(blessure narcissique)로 나아가다 자살로 까지 이어진다면 이러한 병리학적 원인은 무엇인가?

수치심은 사적인 감정인가 공적인 감정인가? 등등.


클로드 자넹(Claude Janin)은 정신분석학 내에 수치심이 정신분석학에 던지는 복잡한 이론적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우선 프로이드가 그의 저작에서 사용한 독일어 Scham의 영어 번역어 해당하는 shame3)으로부터 불어번역어 honte(수치심), pudeur(부끄러움) 등의 번역에 이르기까지 용어에 대한 번역의 문제가 존재함을 지적한다.

또한 프로이드 이후의 자아심리학, 대상관계 이론, 프랑스 정신분석 등의 다양한 이론적 입장들에 따라 수치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차이들이 존재함을 지적하고 있다.4)

자넹은 프로이드의 Scham이 불어 honte, pudeur 등으로 번역되어 지고 있는데 우리말로 하면 부끄러움을 의미하는 불어 pudeur는 honte(수치심)보다는 좀 더 승화된 정서에 가깝고 내적인 것(intime)과 주로 연관되어 있다면 honte는 pudeur 보다는 더 강렬한 자기애의 상처(blessure narcissique)로부터 출발해 불명예스러운 것, 혹은 사회적인 것으로 점차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 또한 정신분석학 내에서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함을 지적하고 있다. 자넹은 이러한 다양한 이론적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정신분석학은 초자아는 죄의식에 수치심은 자아 이상과의 관계에서 주로 기계적으로 바라보아 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자넹은 이러한 고전적 정신분석학과 달리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수치심은 내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성적인 욕동이론 혹은 자기애에 대한 성찰과 깊숙이 연관되어 지면서 서서히 그 이론적 토대를 다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는 수치심을 대상 상실의 경험과 연관된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관계로부터 비롯된 일차적인 수치심의 단계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된 이차적인 수치심의 단계에 대한 이론적 분리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수치심은 두 단계가 묘하게 얽혀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넹이 지적하듯이 정신분석학 내에서 수치심에 대한 이론적 주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카이 사토시는 세르쥬 티스롱(Serge Tisseron)의 말을 빌려 수치심/부끄러움이 최근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이유에는 어떤 역사적 맥락의 과잉결정이 있음을 지적한다.5) 그것은 부끄러움을 가족 형성의 외상에서 주로 설명하려는 전통적인 정신분석의 한계에 대한 비판과 정신분석의 언어적 전회 이후의 상대적으로 경시된 정서(affect)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6)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죄책감을 중심으로 수치심을 바라보는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폭압적인 초자아의 아버지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면 현대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소비경제가 야기한 향락적 개인주의로부터 수치심에 대한 현대의 긴급한 윤리학적 차원의 요청이 안팎에서 제기되는 시대적 상황이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프로이드가 주목하듯이 수치심은 동물과 인간의 경계 사이에서 등장하는 존재 모순의 상처로부터 탄생하는 정서이다. 

모든 독이 약의 기능을 지니고 있듯이 수치심은 인간을 자살에까지 이르게 하는 병리적 정서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승화의 가능성으로서의 수치심은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고 깨우치는 반성적 신호일수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간략하게 되짚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자넹의 글이 보여주듯이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수치심을 둘러싼 논의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고 이에 대한 세세한 분석을 행하기에는 필자의 능력과 물리적 지면이 허락하지 않고 있다.

논문의 제목이 예비하듯이 논문은 수치심을 타자의 시선과의 관계의 양상을 중심으로 규명하고자 할 것이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추방되자마자 인간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감추었다. 이와 같이 수치심은 어떤 시선의 응답으로서 주체가 겪는 정서(affect)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시선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특히 자끄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에게 주요한 이론적 성찰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자끄 라캉에 따르면 우리의 옷들이 감추는 것은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감추는 것이다.

라캉은 수치심을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연관된 수치심의 존재론(hontologie)으로 확장하여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7) 논문은 라캉의 이러한 수치심의 존재론을 라캉의 정신분석 체계 안에서 팔루스(phallus), 이미지, 시선(regard), 그리고 얼굴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명해 나가고자 할 것이다.

라캉은 수치심을 상상적 상호주관성의 차원 속에서의 나타나는 시선의 문제로서 제기하고 있다. 지각적 차원의 대상이 아닌 시선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의 원인으로서의 대상 a이며 팔루스의 개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논문은 예비적 단계로서 이러한 팔루스의 개념에 대한 해명후에 관음증과 노출증에서 나타나는 시선과 수치심의 관계를 검토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거식증의 병리적 양상을 검토하면서 정신분석학적 치료론에서 얼굴(visage) 개념의 중요성을 결론적으로 제기하고자 할 것이다.


라캉에게서 이미지는 단순히 환영과 오류의 근원이 아니다. 이미지는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주체가 창조해내는 일종의 분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선 누구나 그 거울로부터 투명하게 비추어지는 자신을 확신하지 못하듯이 거울은 주체에게 항상 눈과 시선(regard) 사이에 어긋남을 던져주는 스크린으로 기능한다.

거울에 반영된 얼굴은 눈과 시선사이에서 구축되어지는 공간이자 나의 존재를 받쳐 주는 기표이지만 동시에 불안과 결핍이 잠재해있고 어떤 의미를 요구하고 있는 무엇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라캉의 임상에서 정신병자는 실재의 상태 속에 가두어진 자이고 그래서 상징계로의 진입이 이루어지지 못한 자이다. 반면에 신경증자는 실재와의 대면이 부인되거나 연기된 채 욕망의 환상이 과도하게 투여되는 자아 이상/초자아의 환상속에 시달리는 자이다.

여기에서 라캉 치료론의 중요한 쟁점으로서 거울단계에서의 이미지가 지닌 역할의 중요성을 다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논문은 얼굴이 실재의 불가능성과 상상계의 과도한 동일시를 너머 주체가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구성하는 유동적 외양이자 허울로서 기능함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주체가 삶 속에서 다양한 얼굴을 구성하듯이 끊임없이 유동하며 형성되는 그러한 내면의 구성적 장으로서의 얼굴의 개념을 주요한 치유적 개념으로서 논문은 결론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1) 이동수, 「구약성경에 나타난 부끄러움」(『장신논단』14,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 사상과 문화연구원, 1998), pp.8-15.

2) Schneider, M., “Le franchissement du seuil, Freud et la thématique du regard”, in Clinique Méditerranéennes, Césure du regard, Cliniques du visuel(Toulouse : Erès, numéro 51/52, 1996), p.22.
3) 제임스 스트레치(James Strarchey)의 프로이드의 영역본(Standard Edition)에는 shame으로만 번역되고 있음을 자넹은 지적하고 있다.
4) 자넹은 프랑스 정신분석 내에서도 다양한 프로이드에 대한 이론적 해석에 따라 scham의 불어 번역이 다르게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Claude Janin, “Pour une théorie psychanalytique de la honte”, In Revue Française de Psychanalyse(Paris : P.U.F.,tome LXVII, numéro 5, 2003), pp.1658-1665.
5) 우카이 사토시(Ukai Satoshi), 「어떤 감정의 미래-‘부끄러움의 역사성」(『흔적』 (1),문화과학사, 2001), p.45.
6) 사토시는 이러한 흐름에서 앙드레 그린(André Green)과 니콜라 아브라함(Nicholas Abraham), 마리아 토록(Maria Torok)의 작업을 거론하고 있다. 포스트 프로이드의 프랑스 정신분석에서 라캉을 중심으로 한 정신분석 흐름과 함께 이들의 작업은 충분히 인상적인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음을 그는 주목하고 있다.

7) Jacques Lacan, Le Séminaire XVII, L'envers de la psychanalyse(Le Seuil, Paris, 1991), p.209.

 

 

2. 수치심과 팔루스

 

많은 영화들이 보여주듯이 짝사랑하는 남자의 앞에서 얼굴이 빨개지는 소녀의 모습과 같이 부끄러움, 혹은 수치심은 불안할 때 몸에 땀이 나는 현상과 같이 마음과 육체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결되어 있는 정서이다. 그리고 안면홍조증이 설명하듯이 육체와 욕망의 분리가 얼굴을 통해 연출되는 미묘한 신경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프로이드에게서 근원적 불안이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되는 상실경험으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수치심의 정서는 구조적으로는 이러한 이자적 관계로부터 비롯되지만8) 불안보다 뒤에 형성되는 정서이자 사회적 성장 속에서 그 양태가 얽혀지고 변형되어 지는 복잡한 정서이다.


우선 프로이드의 논의부터 간략히 살펴보자. 사실 프로이드는 수치심 자체를 정신분석의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자넹에 따른다면 프로이드는 일차적 수치심과 이차적 수치심과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로 다양한 텍스트에서 수치심을 일별하고 있다.

우선 꿈의 분석에서 프로이드는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부끄럽지만 많은 사람들의 꿈에서 발견되는 나체의 쾌감을 말하면서 인간은 어느 순간에는 노출되고 보여주고 싶은 어떤 소망이 존재함을 주목하고 있다.9)

또한 <여성성>에 관한 글에서 프로이드는 “특별히 유별한 여성적 특성으로 여겨지는 수치심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습적인 것으로서, 거기에는 성기의 결점을 덮어 버리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10)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우선 부끄러움은 보여지지 않아야 할 것을 감추는 것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여성은 페니스가 부재하기에 결핍된 존재이고 이 결점을 덮기 위해 베일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부끄러움은 여성에게 우세한 정서로서 프로이드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프로이드의 수치심에 대한 언급은 ‘꼬마 한스’에서 수치심과 억압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11) 라캉은 프로이드의 ‘꼬마 한스’의 예에서 수치심과 팔루스(phallus)의 관계를 주목하면서 팔루스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수치심을 여성만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조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로서 바라보아야 함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우선 라캉에게서 팔루스는 프로이드적 의미에서 성적 기관으로서의 페니스와는 다른 개념이다.
팔루스는 이러한 기관의 기능, 즉 상상적이고 상징적인 기관이라 할 수 있다. 팔루스는 기의 없는 기표이며 이 기표는 욕망의 이유를 부여하는 특수한 기표이다.

하지만 “주체는 궁극적으로 무에 불과한 남근(생물학적인 차원에서는 여성에게는 없는 것이고 남성에게는 거의 없는 것으로 라캉은 이야기한다.)을 완벽한 만족을 매개하는 육체적 기관으로 승격(혹은 비하)시킴으로써 결여를 메우려고 한다.”12)

상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팔루스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결핍(manque)된 무엇으로 “팔루스에 대해 주체가 갖는 입장 혹은 태도, 더 정확히 말하면 주체가 팔루스에 대해 갖는 구조적, 논리적 위치의 관점에서, 혹은 팔루스와 관련해서 각 주체가 취하는 향유의 방식에 따라 남녀”가 구분되어 진다.13)

 

라캉은 팔루스를 시각적 충동과의 연관 속에서 여러 번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의 시각적 충동이 향하는 곳에서 발견되는 결핍으로서의 팔루스의 문제를 잘 보여주는 그림을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8) 라캉 역시 모자 관계로부터 수치심의 문제의 근원을 해명하고 있다.
9) 지그문트 프로이트,『꿈의 해석』(열린책들, 2003), p.297.
10) 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열린책들, 2003), p.178.
11) 프로이드는 어린 시절 고추를 드러내며 소변을 보기를 즐겼던 한스가 어느 순간 수치심을 느끼게 되면서 소변을 숨어서 보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억압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프로이트,『꼬마 한스와 도라』(열린책들, 2003), p.139.

12) 팔루스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는 홍준기의 글을 참고 하였다. 홍준기,『오이디푸스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아난케, 2008), p.63.
13) Ibid.

 

Amor and Psyche, by Jacopo Zucchi

 

 

 

위 작품은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안토니오 주치(Antonio Zucchi)의 <에로스와 프시케>라는 그림이다.

그림은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에서 신랑인 에로스의 모습이 궁금했던 프시케가 궁금증을 이길 수 없어 한밤중에 기름 등을 켜고 에로스를 보려하는 순간 기름이 떨어져 에로스가 깨어나는 그 순간을 장면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프시케가 바라보는 것은 에로스의 얼굴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에로스의 남근이고 주치는 이 남근을 꽃다발로 가리고 있는데 세부를 클로즈업한 그림을 자세히 보면 꽃은 에로스의 팔루스를 가리고 있다.

그리고 라캉은 이 그림의 중심에서 이 꽃다발이 감추는 것에서 남근의 부재를 주목한다. 즉 꽃다발이라는 스크린에 가려져 눈은 아파니시스(aphanisis : 사라짐)를 발견하게 되고 여기서 성은 사라짐이자 결핍으로 설명되며, 이 나타남과 사라짐의 움직임을 통해 욕망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즉, 신화적 인물 프시케가 희랍어에서 영혼(l’âme)을 에로스가 욕망을 의미함을 상기한다면 이 그림이 포착하는 순간은 프시케가 에로스를 마주하는 순간으로 프시케는 Φ(moins phi)라는 상징을 발견하는 주체의 탄생을 그려내고 있음을 라캉은 이야기한다.

 

“내 자신이 여러 번 이야기 했듯이, 나는 기표의 결핍이 산출되는 자리의 상징으로서 그것을 Φ 라는 상징으로 지시했다.(...) 이 그림에서 (...) 모든 기표들 사이에서 Φ라는 상징의 특권이 드러나고 있다. 이 기표는 항상 숨어 있고, 감추어져 있다.
(...) 욕망의 순수 기표와의 주체의 명명되지 않은 관계, 왜냐하면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인데, 그 관계가 육체라는 건물 전체의 어딘가에 정확히 자리 잡힌 기관으로 투사되고 있다.”14)

 

이러한 라캉의 사유에서 팔루스의 의미를 이해했을 때 우리가 서론 부분에서 이야기한 우리가 옷을 입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감추는 것이라는 말의 좀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은 어머니의 가슴과 아이의 관계에서 어머니를 육체 전체로 인지하는 프로이드의 포르-다 게임의 단계에 대한 재해석으로부터 팔루스의 속임수가 드러나는 단계를 규명하고 있다.

이 단계는 바로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에 위치하는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은 팔루스를 가진 어머니가 아닌 팔루스가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를 알게 되는 아이의 단계이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아이는 팔루스의 술책(le leurre du phallus)을 기획한다.15) 아이는 그것이 있다는 듯이 보여주려 한다(donner-à- voir).16) 즉 어머니가 팔루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아이는 어머니의 결핍을 우선 가리려고 하고 그리고 메우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술책의 상호 주관적인 변증법에 참여한다. 근본적으로 채울 수 없는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만족될 수 없는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이는 그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통해 그 자신이 속임수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길에 참여한다. 메울 수 없는 이 욕망을 속이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를 팔루스로 대체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편과 팔루스가 되고자 하는 아이의 편 양쪽에서 일어난다.)”17)

아이는 자신을 어머니에게 팔루스로서 제공한다. 이 팔루스는 아이가 창출한 이미지이고 그러하기에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자기애적환상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18)


라캉이 이자 관계에서 드러내는 것은 대타자(Autre)의 장소에 있는 결핍을 알게 되면서 이러한 어머니를 메꿀 수 있는 것의 팔루스의 이미지, 이 상상적 팔루스의 집요함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거세를 감추고 메우기 위한 이 팔루스는 상상적인데 왜냐하면 아이는 없거나(여자아이) 아주 작을 뿐이기 때문이다(남자아이).

이 대타자를 매혹시키기 위해서, 그의 사랑을 붙잡아 매기 위해서 아이는 팔루스의 상상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아마도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서로의 팔루스의 결핍을 부정하고 서로가 서로의 결여를 메워줄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이 결핍은 당분간 감추어질 수 있고 아이는 ‘기만의 천국’19)에서 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 거짓말이 밝혀지는 순간, 즉 아이가 그 팔루스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대타자에게 드러나는 그 놀람의 순간, 이 주체의 팔루스가 무(rien)임이 드러나는 순간 대타자에 의해 주체는 박탈되고 아이는 근원적 수치심에 좌절하게 된다.
이와 같이 라캉은 수치심을 대타자의 시선의 응답으로서 팔루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감춤과 드러냄의 놀이에서의 놀람의 순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제 대상 a로 순환되는 시선의 문제를 통해 수치심의 문제를 해명해 보도록 하자.

 

14) Lacan, Le Séminaire, livre VIII, Le Transfert(Seuil, 1991), p.282-292.
15) Lacan, Le Séminaire, livre VI, La relation d’objet(Seuil, 1994), p.351.

16) Ibid., p.272.
17) 가로의 설명은 필자에 의한 것이다. Ibid., p.194.
18) Ibid., p.71.
19) Ibid., p.194.

 

 

3. 수치심과 시선 / 대상 a

 

라캉에 따르면 ‘거울 단계’론에서 조각난 육체의 아이는 처음으로 거울 앞에서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통합된 자아, 이상적 자아(ego idéal)를 오인을 통해 상상적으로 구성한다. 이 이미지는 그에 따르면 환희(jubilation)의 순간이자 인간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행복의 환영적 기억이기도 하다.

그것은 성장 속에서 자기 망각되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집요하게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라캉은 거울의 다른 측면, 이미지의 다른 측면에는 근원적인 유기적 혼란, 근원적인 좌절(détress), 생명의 찢겨짐의 불안이 존재함을 주목한다.20) 그것은 바로 혼란스런 상태로 존재하는 일련의 정서들(affects)로 이루어진 조각난 육체라는 실재(réel)이다.21) 아이가 거울을 통해 구축하는 이미지를 통해 조각나고 찢겨진 정서들은 통합하고 이러한 이미지에의 동일시를 통해 아이는 근원적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거울단계에서의 일차적 동일시에 의해 환영적으로 탄생하는 이상적 자아로서의 이미지는 아이를 구원하는 이미지이지만 항상 실재와 상징계의 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라캉은 이 이상적 자아는 자아가 스스로를 대상으로 여기는 자아이자 동시에 대타자의 시선 속에서 그 응답을 찾는 기능을 수행함을 주목하고 있다.22) 거울단계가 나와 타자를 구분하기 시작하는 단계라는 점에서 아이는 자기가 발견하게 된 이미지들이 타자에게도 동일시되고 인정될 수 있는지를 타자의 눈을 통해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그 눈은 모호한 눈이자 주체에게 두려운 낯설음(inquiétante étrangeté)을 야기하는 눈이기도 하다. 그래서 라캉의 거울 단계의 이미지가 드러내는 사실은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시선의 매력과 동시에 그 불안이기도 하다. 아이가 거울 그리고 어머니의 눈에서 발견하는 것은 투명한 거울의 반영이 아니라 보는 것의 어떤 불가능성이자 결핍이다. 그래서 눈으로부터 시선(regard)의 탄생이 진행된다.

라캉에게 시각(vision)과 시선(regard)은 분열되어 있다.23) 시선은 해부학적인 눈이 포착하는 시각을 넘어 존재하는 것으로 욕망을 추동하는 것이지만 어떤 대상으로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시선은 라캉에게서 객곽적인 차원의 시각을 넘어 붙잡을 수 없는 무엇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라캉은 여기서 시선을 대상 a와 연관시켜 정의한다. 라캉의 대상 a의 개념은 대단히 복잡한 개념으로 그의 사유가 상상계(imagimaire), 상징계(symbolique), 실재(réel)에 대한 관심의 변화에 따라 진행되어 왔다고 평가되듯이 대상 a는 세 개념(RSI)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는 개념이다. 우리는 서론에서 수치심이 불안보다 늦게 나타나는 정서(affect)임을 이야기한바 있다.
라캉은 불안을 인간의 존재론적이고 구조화된 정서로 이야기 하면서 그것을 일종의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24) 라캉은 불안을 기표로서 포착할 수 없는 대상으로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25) 대상 a는 욕망과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기표로 붙들어 매어지지만 항상 무엇인가가 남겨지는 잔여이기에 포착 불가능한 불가능성의 실재이고 이상한 향락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주이상스 응축물(plus-de-jouir)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주이상스의 응축물과 연관된 대상들로 가슴(입), 똥(항문), 시선(눈) 그리고 목소리들을 주요한 네 가지의 예로 들고 있다.26) 이것들은 육체의 조각들로서 대타자와 함께 이루어지는 작업 즉, 어머니와 아이가 함께 나누는 쾌락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것의 아이의 생의 초기에서부터 생물학적, 본능적 차원을 잃어버리고 걸치기(étayage)개념이 보여주듯이 관계적 망 속에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20) Lacan, Ecrits, éd. du Seuil(Points, 1966), pp.113-116. 유아의 좌절의 경험에 대해서 라캉은 프로이드가 「억압, 증상 그리고 불안」의 글에서 Hilflosigkeit(라캉은 이것을 détress로 번역하고 있다.)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를 존재론적 불안의 개념으로 제기하고 있다.
21) 실재가 상상계와 상징계의 효과들에 의해 산출되는 현실(réalité)이 아님은 이미 많은 연구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실재는 우선 상상계와 상징계 밖에 존재한다. 그것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며 말할 수 없고 상상 불가능한 것이고 불가능성(l’impossible)이다. 실재는 하지만 기표를 통해(기표의 실패를 통해), 즉 기표의 연쇄인 상징계를 통해 (거기에는 구멍이 있다.) 가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라캉은 육체 역시 대타자와 실재와의 관계에서 사유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의학적 육체를 비판하면서(의학적 육체는 기능에 의해 작동하는 하나의 완결체를 구성하는 상징적 육체이다. 그런데 라캉에게는 항상성의 원칙을 거절하고, 또한 쾌락의 원칙을 거절하는 육체의 이상한 운동이 존재한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의 육체를 설명하는 다음 글에서 라캉은 “육체는 기표의 작용에 의해 스스로를 대타자를 맞이할 준비하고 있다.(Le corps fait le lit de l’Autre par l’opération du signifiant.)”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육체는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을 표상하는 은유로서 정의된다. 우리는 라캉에게서 세 가지 육체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상징계의 육체는 주이상스를 비우고 분리하는 상징계의 작용에 의한 육체, 거울 단계에 나타나는 조각난 육체에 일관성이라는 생각을 부여하는 상상적 육체, 그리고 살아있는 육체이자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육체로서의 실재의 육체가 그것이다. 육체를 이렇게 임의적으로 세 차원으로 분리하였지만 RSI의 관계는 복잡한 얽힘 속에서 존재하며 육체 역시 이러한 구조적 관계로부터 바라보아야 함을 라캉은 주장하고 있다. Lacan, “Conférence donnée à l’institut français de milan”, le 18 décembre 1967 à 18 h 30, in Scilicet n° 1(Paris, Seuil, 1968), pp.51-59.

22) Ibid., p.119.
23) 라캉은 이 저작에서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가시성과 비가시성 Le visible et l’invisible』을 중심으로 시선의 문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그의 대상 a 개념을 가지고 전개하고 있다. Lacan,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Livre XI, pp.83-89.
24)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대상은 필연적으로 어떤 사물이나 물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적 혹은 주관적 존재와 대립되는 것도 아니다. 라플랑슈와 퐁탈리스는 프로이트에게서 이 대상이라는 개념을 마음의 불꽃, 원한 등등의 정념과 같은 대단히 넒은 개념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대상은 인식적 개념에서의 객관성을 의미하기보다는 대상이 충동 혹은 욕망의 대상이란 의미에서, 즉 지각적 대상이나 과학적 대상이라는 의미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대상성(objectalité)이란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충동 혹은 욕망의 대상은 정신분석학에서 환영적 대상이 근본적임을 말하는 데로 나아가게 된다.
25) Lacan, L’angoisse, Le Livre X(Seuil, 2004), p.91.
26) 아이가 모성적 대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숙의 과정을 이해한다면 이 대상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가슴을 통해 젖을 빨며 똥을 싸며 어머니의 시선과 알아들을 수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내사(introjection)해가면서 성장해 나간다.

 

 

라캉이 시선을 대상 a와 연관시킨 이유는 시선에는 시각으로부터 탄생하지만, 즉 우리의 육체의 부분 대상인 눈으로부터 잘려지고 육체와 분리된 무엇인가에 아이가 매혹되고 있다는 사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욕망의 장으로서의 이미지인 그림(tableau)에는 항상 기하학적 시각과 사물이 주체에게 되돌려주는 어떤 무엇의 교환 사이에서 가림막이기도 한 스크린이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즉 대타자와 주체 사이의 매개의 장소로서 스크린의 핵에는 대상 a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라캉에 의한다면 욕망의 대상은 각자의 판타즘 속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각자의 판타즘의 존중 사이에서 사랑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판타즘이 깨지는 순간에 사랑에 참여한 주체는 배반감과 절망에 신음한다. 이 판타즘이 깨지는 순간은 또한 팔루스로 존재함(여성)을 혹은 팔루스를 소유하고(남성) 있다는 팔루스의 술책이 드러나는 순간이자 각각의 주체에게 깊은 수치심을 야기하는 순간이다.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여성은 욕망과 새침함 사이에 정확한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고 지적하듯이 부끄러움은 감춤과 드러남의 긴장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이 긴장에 대한 타인의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독특한 페티시즘이 있는 사람과 정상적인 사람의 사랑을 가정해보자.
이 둘의 사랑은 독특한 페티시즘이라는 고유한 성적 상징계를 지니고 있는 자에 대한 정상적인 자(그(그녀) 역시 고유한 성적 상징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의 수락에 따른 약정이 있을 경우에 가능하다.

그래서 항상 이 약정이 깨질 경우 주체는 배반감, 수치심에 힘들어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약정이 깨지는 것은 어떤 시선에 의해서이다. 그 시선은 시각적인 차원을 너머 있기에 볼 수 없는 것이고, 동시에 욕망의 운동이 추동되는 것이자 표상의 형상들인 그림에서 우리의 시각이 본 것으로부터 미끄러져 지나가는 것이며 주체들 사이의 가면의 놀이에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27)

라캉은 그래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나타난 수치심에 대한 사르트르의 글은 “수치심, 부끄러움에 대한 현상학으로 타자의 시선에 의해 산출된 특이한 수치심과 연관된 두려움”을 서술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리고 수치심의 현상학이란 “상상적 상호주관성의 차원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타인이 나를 보는 것을 내가 보는 이중의 응시이고 거기에서 어떤 제삼의 개입자는 보이는 나를 본다. (...) 단지 내가 타인을 보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나를 보는 그를 보며 어떤 보는자(voyant)는 나를 본다. 그것은 제 삼의 항(보는 자)을 내포하는데 즉 그는 내가 그를 보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28)

 

아마도 관음증과 노출증에 대한 예는 시선과 수치심의 관계에 관한 예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라캉은 시선을 축으로 벌어지는 상호 주관성의 변증법이 드러나는 중요한 예로 관음증과 도착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시각적 충동이 도착으로 나타나는 관음증에 관해, 라캉은

 

“관음증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보는 자의 행위의 순간에 주체는 어디 있고 대상은 어디 있는가?(...)

주체는 도착증자로서 원환의 끝에 위치한다. 원환은 대상의 주위를 돈다. 대상은 미사일이고 미사일은 도착하여 과녁을 타격한다. 대상은 여기서 시선이다. 시선은 주체인데 그를 타격하여 정확히 과녁에 맞추어 버린다.”29)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욕망의 원인(대상 a)이 욕망의 조건이라면 관음증자에게 시선은 욕망의 운동의 절대적 조건이다. 그 시선은 무엇인가? 그는 대타자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관음증자는 시선을 통해 타자의 내밀한 무엇을 자신이 노출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타자를 욕망의 시선으로 담고자 한다. 그는 타자의 이미지 속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부인한 채 외양 너머 무엇이 있음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자이다.


노출증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노출하는 행위의 기술은 그 주체가 타자가 가지지 않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이 드러냄의 행위를 통해 노출증자는 타자를 단순한 시각적 매혹 속에서 존재하는 것과 거리가 먼 무엇인가 속에 포획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타자가 지니고 있지 않다고 가정되는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쾌락의 행위를 통해 타자가 결핍된 무엇인가 속에 몰입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수치심 속에 관여시키는 것이다.”30)

 

노출증자가 찾는 것은 시선이 나타나는 순간, 여성이 비명을 지르는 그 순간이다. 노출증자는 그냥 목격자일 뿐인 타자가 부끄러워하거나 놀라기를 바란다. 어떤 의미에서 사실 그 사람은 누구여도 되는 사람이다.

외설이 주체의 욕망의 이면을 드러내듯이, 노출증자의 도착적 행위는 수치심의 이면이자 시선이 드러내는 대상 a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라캉의 표현에 따른다면 노출증자가 의도하는 것은 대타자의 장속에서 시선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출증자는 대타자의 장에서 어떤 주이상스를 포착하고자 하는 도착의 주체이기도 하다.

노출증자는 위에서 설명한 팔루스를 두고 벌어졌던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대타자의 시선을 그 자신의 욕망의 시선, 즉 자기의 팔루스를 인정하기를 바랬던 그 욕망의 시선으로 대치하면서 대타자를 되찾아 오기를 갈망한다. 그 자신이 연출하는 허구적 연극의 주연 배우로서 그는 대타자가 행한 배반으로부터 겪었던 그 수치심을 노출을 통해 회복하려 하는 자이자, 다시 대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이다. 반면에 관음증자는 열쇠구멍 사이로 보는 장면으로부터 어머니와의 상상적 합일 불가능성을 부인하며 여전히 그 소유의 환상을 꿈꾸고 있다. 도착의 이 두 양태에 대해 라캉은 죄 없는 자이기도 한 그들은 대타자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타자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대타자의 귀환을 믿는 신자라고 주목하고 있다.


라캉에 의하면 결핍의 팔루스를 부인한 채 주체가 팔루스의 술책의 운동에 들어가는 순간 주체는 구조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자기애적 상처를 받게 되어있다.

어머니는 아이의 요구에 응답하는 어머니이자 동시에 다양한 욕망이 부여된 여자이자 인간이다. 자기애적 상처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가 대타자의 시선에 의해 그 주체의 거세라는 결핍이 드러나는 순간에 발생한다.

외출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학교에서 백점을 맞은 시험지를 보여주는 아이에게 무덤덤하게 잘했어 하고 대답하는 순간 아이가 꿈꾸었던 팔루스의 응답으로서의 시선 대신에 어머니의 시선의 애매함(결핍된 시선)에 아이는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아이는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수치심은 그래서 상상적 팔루스에 의해 형성되었던 아이의 어떤 자신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추락이 너무나 심각하게 되는 경우 인간은 수치심에 의해 죽을 수도 있고 더욱이 산다는 것 자체의 수치심(honte de vivre)을 느낄 수도 있다.31)
현상학적으로 본다면 성적 도착증자에게 의식적 차원의 부끄러움은 거의 부재하고 있다. 자넹은 파슈(Pasche)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주목하면서 도착증에 대해

 

“도착증자는 타인을 그 총체성으로 지각하거나, 그를 인정하거나, 혹은 그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받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도착증자는 스스로 자신의 인격을 타락시키는 것에서 자신의 주이상스를 발견한다. 수치심은 자주 도착의 대가로서 존재한다.”32)라고 주목하고 있다.

 

자넹이 지적하듯이 도착증자의 행위는 자가 성애적이고 근원적으로는 피학적인 판타즘이다.

사르트르는『존재와 무』에서 자신이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대상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 대상으로 환원된 나를 발견하는 순간 수치심을 느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관음증자가 다시 되돌아온 시선에 의해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것은 대상으로 환원된 나, 즉 시각적 충동으로 환원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서 충동은 때로는 본능으로도 해석되는 용어이기도 하고 라캉에 따른다면 부분 충동은 오직 만족을 위해 떠도는 운동이자 그 의미를 찾지 못한 승화되지 못한 리비도이기도 하다.

관음증이나 노출증에서 수치심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충동으로 환원된 인간, 순수한 섹스로 환원된 인간을 우리가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순간은 많은 포르노 영화에서 보여주는 상투화된 장면에서의 어떤 이상한 느낌이기도 하다. 포르노 영화에서 행위를 연기하는 여배우는 보통의 영화에서 금지된 정면의 시선을 향한다. 이 정면의 시선은 관객을 시각에서 가장 현실적인 감각인 촉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일종의 브레히트적 소격효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그래서 관객은 이 순간에 이상한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관객이 그 순간 환상으로부터 현실을 마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로 환원된 그들에게서 우리는 환상의 측면을 택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할 수도 있으며, 혹은 벌거벗겨진 인간들의 스펙터클에서 인간과 동물의 그 경계를 확인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수치심은 이러한 선택들의 중핵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27) Lacan,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pp.83-89.
28) Lacan, Les Ecrits Techniques de Freud, texte établi par Jacques-Alain Miller (Seuil, 1975), p.332.
29) Lacan,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p.204.

30) Lacan, Le Séminaire, livre VI, La relation d’objet, p.272.

31) Lacan, Le Séminaire XVII, L'envers de la psychanalyse, p.220.
32) Janin, op. cit, p.1693.

 

 

4. 육체의 수치심 - 거식증

 

 

옆의 사진을 보자. 사진 속에 소녀는 거울을 통해 무엇을 보는 것일까?
위 그림에서 수치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거울의 바깥에 거식증에 걸린 한 소녀가 있다. 그 소녀는 해골과 같은 죽음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거울밖에 서 있다. 우리는 그녀의 뒤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거울 속에는 수줍게 손을 모은 채 현실의 소녀를 바라보는 뚱뚱한 소녀의 시선이 있다.

소녀의 실재와 반영의 이미지 사이에는 공백의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임상이 보고하듯이 폭식증이 남자에게 지배적이라면 거식증은 주로 여성들에게 지배적인 증상이다. 거식증에 걸린 소녀를 인위적으로 연출해놓고 있는 위의 이미지는 현대 시대의 매체에 의해 생산되는 미적 이상으로서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불가능성에 소진되고 있는 어떤 소녀의 이미지로 일단 읽힐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카프카의 <단식 광대>라는 작품을 살펴보자.

짧은 그 소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는 도시 전체가 단식 광대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단식하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날수록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모두가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단식 광대를 보고자 했다. 나중에 가서는 종일 조그만 격자 창살 우리 앞에 죽치고 않은 예약 신청자들도 있었다.(...) (의심이 되어) 관객이 뽑은 감시인들도 있었다. (...)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단식 광대는 단식 기간에는 결코, 어떤 일이 있어도, 강요를 당한다 하더라도 음식물을
먹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예술의 명예가 그것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점차 단식하는 그를 잊어갔고 결국에는 그만이 단식하는자이자 동시에 단식에 만족하는 관객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안타깝게도 그 일로 만족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저는 제 입에 맞는 음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그런 음식을 찾아낸다면, 이런 이목을 끄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배불리 먹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33)

 

카프카의 <단식광대>는 거식증자의 피학증과 대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작품이다.
라캉은가족 콤플렉스에서 이유(離乳)콤플렉스(Le complexe de sevrage)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34) 그런데 라캉이 거식증에서 주목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하다.

우선 충분히 수유 받지 못해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 아이가 이유 콤플렉스를 통과하는 도중에 갑작스럽게 침입한 동생을 맞이하게 된다. 이유콤플렉스 단계에 있는 아이는 동생이 만족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에 들러붙어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라캉이 거식증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유년기의 형성과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시기와의 이상한 결합이다. 아이는 이유의 과정에서 만족되지 않는 결핍의 경험을 하게 된다.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이상적 자아의 환희 대신에 거식증의 아이는 반쯤 만족된 상태에서, 즉 우리가 주23)에서 설명했던 조각난 육체의 경험이 상상적 육체로 통일되지 않은 채 다음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동생이 태어났고 아이는 동생이 어머니의 가슴속에 행복하게 매달려 있는 것을 본다. 동생에 의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신 대신 다른 아이가 어머니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그 행복의 이미지에 대한 아이의 시선은 invidia의 시선, 탐욕(voracité)의 시선이다.35) 탐욕(voracité)이라는 말로 라캉은 거식증 증상에서 나타나는 구강적 충동과 시각적 충동의 연관성을 미묘히 암시하고 있다. 이 이미지에 대한 시선으로부터 아이는 미래에는 몸과 이미지가 통일되는 완전함의 상태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성장하며 이 이미지를 기대하며 아이는 상징계에 진입하게 된다.


라캉의 복잡한 이야기를 정리한다면 아이는 이유의 과정에서 불충분한 만족에 의해 강제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박탈당한다. 이 박탈로부터 아이는 결핍의 경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는 이상적 자아의 손상을 입게 된다. 게다가 동생의 탄생으로부터 아이는 이상한 이미지를 질투와 욕망이 결합된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어머니 가슴에 들러붙어 있는 동생의 모습으로부터 미래에 지금의 결핍을 메울 이미지를 상징화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아이는 조각난 육체에 통합적 기능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상적 육체의 빈곤한 이미지와 수동적으로 바라본 상징적 육체의 이미지의 과정이라는 모순된 갈등의 과정 속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식증의 아이를 특징짓는 이미지는 몸과 정신이 분리된 그러한 이미지이다.

그래서 라캉은 이 자아 이상의 이미지가 유령(double)과 같은 것으로 육체와 분리된 무엇으로 작동한다고 이야기하며 이러한 형성과정을 거식증의 무의식적 형성과정으로 가설화한다.
여기서 잠시 아브라함 토록(Abraham Torok)의 함입(incorporation)의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토록은 아이의 텅 빈 입(bouche vide)의 예를 통해 우유를 먹는 아이가 말을 배우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텅 빈 입의 결핍을 언어를 통해 대치해 나감을 내사(introjection)라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타자(어머니)가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아이는 입의 공백(vide), 은유적 의미에서 허기를 메꾸기 위해 상상적 사물을 삼키게 된다. 상상적 사물이 무의식 깊이 박혀 있는 것이 함입이며 이것은 상실에 대한 애도의 작업의 실패의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타자로부터 받은 깊은 상처가 있으며 주체에게 비밀로 감추어지는 깊은 수치심이 존재한다.36)


거식증의 존재는 그래서 스스로를 버려진 존재로서 보고 있는 존재이다. 또한 주체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우유를 먹고 있는 동생을 향해 탐욕에 빠진 시선을 던지고 있다. 즉, 동생의 입과 어머니의 가슴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이미지에 대해 주체는 입을 벌린 채 그리고 탐욕의 시선으로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거식증의 주체에게는 거울 단계를 통과하며 형성되었던 자기애적인 상상적 이미지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식증의 주체는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가 형성되어지지만 좋은 형식의 장소로서의 육체의 상상계는 빈곤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37)


라캉은 거식증은 무(rien)를 먹는다라고 이야기 한다. 시몬느 비너(Simone Wiener)의 해석에 따르면 이 무를 먹는다라는 것은 은유이다.38) 거식증자가 무를 먹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육체를 참혹함까지 이끌게 하는 육체에 대한 수치심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방어하기 위해서다.

음식물에 대한 거부, 타인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나타나는 구토의 증상들은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그들의 수치심을 드러내는 피학적 주이상스이다. 중독자가 끊임없이 탐닉하는 것은 비워진 육체에서 요구하는 충동의 순환이지만 대상 a를 통해 그것은 만족될 수 없다.

위 그림에서 소녀는 거울 속에 무거운 육체를 본다. 이 무거운 육체는 끊임없이 비워져야 한다. 토록의 말에 따른다면 함입된 그의 상상적 육체를 위해, 모든 주이상스로부터 깨끗해진 어떤 육체를 가지기 위해, 그래서 관음증과 노출증의 주체가 결여를 메꾸어야 할 대타자가 존재함을 믿는 신자라고 한다면 거식증의 대타자는 모든 학대에도 노예가 주인의 주이상스를 위해 섬기듯 이 대타자의 명령에 따르는 그러한 육체이다.

비너는 “거식증자의 시선의 차원은 내면화된 미적이상에 의해 현존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육체의 시각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두려움을 감수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타자의 시선의 요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타자의 시선이 실존적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마도 이 주체는 육체적인 그의 이미지의 현실을 볼 수 없을 것이다.”39)
거식증자가 느끼는 육체에 대한 수치심으로부터 카프카의 <단식광대>가 먹고 싶었던 그 맛의 음식을 찾아내는 것, 그 어려운 과제가 치료의 창조적 공간에 놓여 있음을 비너는 주목한다. 비너는 주목하기를 현대의 이미지 문화의 폭압적인 확산으로부터 더욱 증대되어 나타나는 이러한 거식증의 증상에서, 그 거식증의 소녀들에게 필요한 이미지가 현대 사회의 이미지 문화의 모델에서 발견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40)

 

33) 프란츠 카프카, 권혁준 역, 「단식 광대」, in 『카프카 단편집』(지식을 만드는 지식,2013), pp.165-182.
34) Lacan, Les complexes familiaux(Paris, Navarin, 1984). 거식증에 관한 라캉적 해석에 따른 임상의 예들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했다. Gilbert Hubé, “L’anorexie mentale, impasse de l’envie」”, in La clinique lacanienne, 2003/1 (no 6). Éditeur : ERES./ Simone Wiener, “En quete de rien ?”, in Essaim, 2008/1, n 20.

35) 라캉은 invidia(‘그 자리에 없는 것에 대해 탄식을 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가 videre(‘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Lacan,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p.131.

36) 아브라함 토록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프랑스로 망명하여 활동한 정신분석가이다. 그는 ‘함입’에 관한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수치심, 은밀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누가 창피해야 하고 누가 숨어야 할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파렴치함, 치욕, 부당한 행위에 대해 죄를 무는 것이 주체인가? (...) 하나의 지하묘지(crypte-감추어진 내적 비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수치스런 비밀이 자아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은 자신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고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는 것이다.

애도가 (은유적) 말들과 함께 잘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치심을 위해 사용된 은유들이(애도의 과정에서 환기 된다면) 이상의 상실에 의해 무효화되는 이유이다. 주체의 해결책은 수치심의 효과를 비밀 속에서 쇠락되기를 기다리면서 폐기하는 것 뿐이다.”
Abraham Torok, L’écorce et le noyau(Champs/Flammarion, 1987), p.267.
37) 라캉은『세미나 13권, 신톰(Le sinthome)』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세계를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분석하고 있다. 조이스는 어릴 적 구타를 당할 때 육체의 고통을 별로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그의 문학세계는 실재와 상징계의 연결만이 있고 상상계는 심각하게 파손되어 있다. 만약 조이스가 구원이 되었다면 그것은 글쓰기의 행위를 통해 가능했을 것이라고 질베르 위베(Gilbert Hubé)는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거식증자에게 상징적 육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중요한 치료적 과제이기도 하다.Gilbert Hubé, op. cit.
38) Simone Wiener, op.cit., p.145.

39) Ibid., p.147.
40) Ibid.

 

 

5. 수치심의 가능성과 얼굴

 

70년대에 라캉은 수치심을 존재 질문과 연결시키는데 철학의 존재론의 용어를 특이한 그만의 일종의 말놀이로 변형하여 ‘hontologie’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수치심의 존재론이란 존재 자체와 연관된 수치심이라는 정서(아펙트)의 문제이다. 그것은 팔루스를 소유하려는 것에의 결핍이 아니라 존재로의 결핍, 즉 임상적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산다는 것의 수치심으로 불리는 것이기도하다.

여기서 수치심이란 자신의 존재에 의해 당황하게 된, 혹은 존재 그 자체의 결핍에 의해 당황하게 된 주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치심이란 말하는 존재의 조건이자 너무나 많은 충동을 가진 무거운 (육체)존재의 수치심이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의 결핍으로서의 수치심이다.

당황하게 된 주체, 무로부터 당황하게 된 주체, 자신의 육체로 환원된 주체 이 모든 주체는 말하는 주체이다.
존재의 당황함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기표의 효과에 떠도는 주체가 아니라 존재는 바로 어떤 의미화를 요구하는 자이다. 아마도 우리가 거울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러한 말함의 무언의 행위일 것이고 이 무언의 행위로부터 나의 정체성의 안정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의 가치가 등장한다. 프로이드가 위험을 예견할 때 불안신호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듯이 부끄러움은 수치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우리에게 존재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어떤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수치심은 스스로가 나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사 앞에서 나체가 될 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 어떤 병이 있다는 것, 결점과 흠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 단 그것에 대해 무치(無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놀라고 깨닫게 될 때 수치심은 우리에게 중요한 윤리적 가치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질베르 위베가 그의 글에서 적고 있는 거식증자의 말을 들어보자.

 

“(환자는 말하기를)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나는 색들을 봐요, 하지만 그것은 어떤 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요. 시선은 죽었어요.
나는 얼룩들을 보고 어떤 얼굴들을 보아요.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어요. 어떤 것도 의미를 주지 않아요.”41)

 

환자의 고백 속에는 시각은 존재하지만 시선은 결핍되어 있다. 본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도 없고 그것은 어떤 시선에 의해서도 유혹되지 않고 있다. 사물들은 그녀를 더 이상 응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논문은 얼굴이라는 개념을 중요한 인문치료의 가능성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라캉은 타자(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와의 만남에서 형성되는 외양으로서 상블라블(semblable)이란 개념을 일종의 이상적 자아의 형식으로 제기한 바 있다. 상블라블은 다른 모습들(타자들)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외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은 이러한 이미지(상상계의 맥락에서)의 기능의 필연성과 그것의 기만적인 가능성을 동시에 지적한다. 라캉이 기만의 가능성에 지속적으로 경계를 표했다면 그 이유는 아이가 거울 속에 투영된 이미지로부터 대타자의 확인을 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상실을 부정하는 자기애적 환상의 집요함이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블라블은 비슷하다는 의미이지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이미지에는 거부하고 싶은 낯섬과 이상함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은 당연히 스펙터클의 사회가 조장하는 아름답고 멋있는 외양으로서의 얼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논문이 주장하고자 하는 거울에 반영된 얼굴은 눈과 시선 사이에서 구축되어지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그것은 세월 속에서 변화되는 얼굴에 대한 나의 다른 모습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얼굴은 진리를 위장하고 감추는 무엇이라는 의미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아니다. 얼굴은 얼굴을 구성하는 다양한 모습들(faces)이 함께 어우러진 존재(l’êtreensemble)로서의 시뮬타스(simultas)이다. 얼굴의 진리를 포착한다는 것은 닮음이 아니라 모습들(faces)의 동시성(simultaneité)과 이것들을 함께 유지시키고 결합시키는 불안한 힘(puissance)들이다.”라고 주목하고 있다.42)

어쩌면 얼굴에 대한 마주섬은 인문치료의 최종적 과정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다양한 얼굴들 속에는 부끄러움, 수치, 분노, 불안 등등 수많은 정서들이 복잡한 방식으로 드러나 있고 또한 얼굴은 주체의 증상이라는 의미에서 다양한 성찰적 가능성을 인문치료에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얼굴이라는 이 개념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활용한 인문치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필자의 의도이기도 하다. 추후의 연구 속에서 이러한 과제를 약속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41) op. cit.

42) Giorgio Agamben, Moyens sans fins-Notes sur la politique, Rivages poche Petite Bibliothèque(1995), pp.111-112.

 

 

■ 참고문헌 ■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