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예이츠와 S. 지젝: 실재의 탐색

rainbow3 2020. 4. 22. 16:59


예이츠와 S. 지젝: 실재의 탐색

 

이 규 명

 

 

우리말 요약:

“비전,” “비잔티움,” “탑”으로 점철되는 예이츠의 플라토닉한 과업인 현실에서 실재로의 항해의 차원과는 달리 지젝은 인간이 상징적, 물리적 현실을 탈피하여 실재로의 이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 현실과 실재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현실이 실재의 단서임을 주장함으로써 신-플라톤주의를 함의한다.

이 점은 지젝이 애독하는 라캉의 『훔쳐진 편지』(The Purloined Letter)에 대한 독해에도 드러난다.

이와 달리 예이츠는 무의식의 실재를 신비로운 영역으로 바라봄으로써 프로이트의 입장을, 지젝은 무의식의 실재를 기호로 바라봄으로써 라캉의 견해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확대재생산하듯이 지젝 또한 라캉의 텍스트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하여튼 예이츠와 지젝은 현실의 공간을 넘어 혹은 현실의 공간 안에서 실재를 탐색한다는 점이 니체적인 불멸성의 비전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주제어: 예이츠, 지젝, 라캉, 프로이트, 실재, 상징, 비전
저자: 이규명은 부산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외래교수이다.

 

 

I. 들어가는 말

 

모든 인간은 식자건 무식자건 사물너머 저편의 세계를 알고자 한다. 최근에 운명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에도 나오듯이, 중세의 사제들이 수도원에서 고독하게 경전을 탐구하는 것과 원시인들이 무언의 신에게 제례를 거행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당면한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현상이면에 숨겨진 진리를 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충족을 지향하는 인간은 불만족스런 현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각종 주술, 마술, 도술, 미신, 종교, 신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설사 인간사를 초월한 영역이라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현실로 환원한다. 그것은 생자필멸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출생과 죽음이라는 두가지 숙명적 순환에서 연유한다. 삶은 요절복통의 고통이며 죽음은 좌불안석의  두려움이다. 인간은 전자를 명증한 현실로 보아 살을 꼬집어 안도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며, 후자를 불투명한 차원으로 보아 걱정하면서 두려워한다.

인간은 고요와 평안의 항상성이 주어지는 엔트로피 정지의 차원보다 일상을 반복하는 분주한 자갈밭과 악취 나는 거름 밭을 왕래하지만 그래도 현재의 삶이 이승세계보다 더 좋을 것이다. 인간이 삶을 자각하고 인식하는 것은 현재의 이 순간이며, 그 순간은 현재의 삶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평생 여러 종교를 섭렵한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텅 빈 인간』(“The Hollow Men”)에서 “이것이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다. 굉음 없이 그저 훌쩍임으로”(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not with a bang but a whimper)라고 삶의 피안으로 나아가는 불가역적인 삶의 항해를 토로한다.

그러니 인간의 수준에서 이 ‘압도적인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사 이래 수많은 선각자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진리를 찾기 위하여 유랑걸식하며 산속으로, 강가로, 바닷가로, 저자거리로 현실의 이면을 뒤지고 다닌다. 진리를 찾아 산속으로 출가한 사람들은 얼마 후 진리를 체험했다며 환속하여 저자거리에서 야단법석을 치른다. 이런 인간의 안타까운 운명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천년 전에 하나님이 유대 땅에 예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특정한 로컬리티(locality)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사물의 발현이 전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지점을 필두로 시작되어 전체화되기 때문이고, 그 의도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불가지의 차원이다. 공교롭게도 이 신성한 날짜는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시한폭탄처럼 매일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고마운 구세주를 믿지 않고 고집스럽게 배낭을 짊어지고 처자, 왕국, 직장을 버리고 집을 나선다. 그들은 컴컴한 토굴 속에서 ‘산은 산이 아니다’1) 혹은 ‘인생은 마른 똥 막대기다’2)라는 불가해의 화두(koan)와 사투를 벌린다. 이하에 전개되는 내용은 비전의 시인인 예이츠의 실재탐색의 과정과 삶의 개성화의 단계로서 ‘실재계’(the Real)를 주장한 라캉(JacquesLacan)의 이론을 재해석하는 지젝(Slavoj Žižek)의 실재에 대한 견해를 토대로 이것이 반영된 예이츠의 시작품을 분석하고 현실적인 측면에서 실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소견으로 결론지을 것이다.

 

 

II. 예이츠의 항해

 

예이츠는 어릴 적부터 삶의 실재를 지향하고 삶의 잠재적 요소를 탐색했다.
그가 몰두한 것은 신비주의, 심령론, 점성술, 연금술이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초자연 현상 연구모임인 ‘고스트 클럽’(The Ghost Club),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Kabbalah)에 치중하는 ‘황금여명회’(Golden Dawn)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신비주의자 가운데 그가 특히 애정을 느낀 인물은 천상을 방문한 기록을 남긴 18세기 신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와 블레이크(William Blake)였다(CW 145).

또 신지학자인 채터지(Mohini Chatterjee)3)가 연구한 힌두교의 신비주의에 경도되었다(CW 98).

아울러 예이츠는 영매인 부인의 도움을 받으며『비전』(A Vision)을 창작했다. 물론 일부 평자는 예이츠의 실재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대해서 지적신뢰성의 부재, 인식의 오류, 비이성적인 사고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이츠의 시작품속에 등장하는 “비잔티움”, “탑”, “메루산”, “쿠훌린”, “드루이드”, “라피스 라줄리”, “델포이 신탁”,“마이클 로버티즈”, “가이어”, “장미”, “잉거스”, “영매”4), “바퀴”, “마녀”, “이니스프리”와 같은 개념들은 모두 실재의 기호학적인 재현이다.

그런데 예이츠가 지향하는 항해는 미래로의 항해가 아니라 과거로의 항해5)이다.

이는 그가 시작품 속에서 갈망하는 가장 이상적인 터전을 학문과 예술의 고장인 “비잔티움”으로, 민족의 이상적인 지도자로서 켈트 족의 영웅 “쿠훌린”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미완의 현실에 대한 결핍의 여운을 남기는 ‘작은 대상 에이’(objet petita)로 지시되는 욕망의 잉여를 나타난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퇴행적 사고이며, 혹은 라캉의 개념으로는 ‘이상적 자아’(ideal ego)를 탐색하는 ‘상상계’(imaginary order)에 사로잡힌 것으로 풀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인간의 현실은 세상사의 피상적인 안목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저변에 깔린 심층의 흐름에 좌우된다는 융(Carl Jung)적 관점에서(Ellwood 37) 보면, 예이츠가 신화적 실재를 과도하게 향수하는 것은 현실세계가 아닌 이상세계에서 실재를 추구하려는 의도로 풀이해 볼 수 있다. 이렇듯 예이츠는 불만스러운 세상의 피안을 떠나 아일랜드의 전설과 신화를 통해 퇴행적으로 사물의 실재에 접근하려한다.

 

예이츠가 보여주는 이상향 희구의 증상은 당대의 현실이 진리 추구에 적합지 않다는 불만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이 불만은 인력에서 기계와 이미지로 확산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아 합당하다.

그것은 인간능력을 기계와 이미지로 대리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욕망과 본능을 기호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은유적 운명을 타고났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기호적, 예술적 접근이 배제된 사물 그대로의 상태인 ‘물자체’(Thing itself)에서 예술적 사실성(reality), 가상현실을 의미하는 ‘과잉현실’(hyper-reality)로 나아간다는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부연하면, 실상에서 리얼리티를 통하여 시뮬라크르(simulacre), 아바타(avatar), 인공지능(AI)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인간은 실상에서 벗어나 허위의 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상실하고 자아를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 가식의 현상은 세상의 모든 것이 실재로부터 여러 단계 굴절된 것이라고 주장했던 플라톤의 주장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6)


실상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미술과도 연결된다. 미술에서 실상은 사물의 흔적이 다소 남아있는 모네의 [인상주의], 사물이 왜곡된 샤갈의 [초현실화], 사물이 은유화된 피카소의 [추상화], 사물이 사라지고 행위만이 존재하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추상표현주의의 퍼포먼스로서의 [액션 페인팅]과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기하문양의 [그래픽]7)의 추세를 통하여 화폭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것은 기원, 원천, 원형에서 유리됨이 가속화 되는 우리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제시해 주는 것이다.

예이츠는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Sailing to Byzantium”)에서 반성적으로 왜곡된 현재를 탄식하며 인식의 확충으로서의 상력을 사용하여 현실적 재현 혹은 실재의 기호적 실현을 함축하는 과거로의 회귀를 시도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임상원리에서 점차 멀어지는 정신분석학의 흐름을 복원하려는 라캉의 구호[프로이트에게로!]와 고전주의에서 멀어진 결과 발생한 격조 없는 문란한 삶의 풍조를 비판하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를 상기시킨다.

 

 

오, 황금 모자이크 벽에서와 같이
신의 성화 속에 계신 성현들이시여,
그 성화에서 나와 빙빙 선회하며 내려오사,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어 주소서.
내 심장을 소멸시켜 주소서, 욕망에 병들고
죽어가는 동물에 얽매여서
내 심장은 제 처지도 모르오니. 그리하여
나를 영원한 세공품으로 만들어 주소서. (예이츠 시 전집 367)


O sages standing in God’s holy fire
As in the gold mosaic of a wall,
Come from the holy fire, perne in a gyre,
And be the singing-masters of my soul.
Consume my heart away; sick with desire
And fastened to a dying animal
It knows not what it is; and gather me
Into the artifice of eternity. (CP 193)

 

여기서 소멸되는 것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이분법으로 나누어진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심장”, “욕망”, “동물”이고, 후자에 속하는 것이 전자보다 지속성이 보장되는 “황금”, “성화”, “성현”, “영혼”, “세공품”이다.

시적화자가 소망하는 후자의 상태는 어디까지나 전자를 담보로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후자는 감각소여(sense datum)와 상관없는 무감각의 실재계를 의미하고, 전자는 에너지와 탐욕과 본능이 활개 치는 감각의 상징계 혹은 색(色)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단속적인 전자는 모순적으로 영원한 후자로 나아가는 내재성을 간직한 시발점이며 후자는 전자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상징계와 실재계는 하나로 통하는 소위 ‘보르매오 매듭’(The Borromean Knot)을 형성하다. 다시말해, 실재계가 드러나는 것은 상징계를 통하여 가능하고, 상징계는 실재계와의 차이를 통하여 현상으로서의 존재적 의의를 가진다.

한편 예이츠의 삶의 목표인 ‘존재의 통합’을 인간의 개성화에 기여하는 실재, 상상, 상징계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그의 혜안이 춤이며 춤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아우른다는 점에서 생각과 감정을 통합하는 매체로서 요긴하다(고준석300-1). 이때 생각은 상상과 상징계의 원천이며, 감정은 실재계의 원천으로 기능한다고 본다.

 

 

III. 예이츠와 지젝의 실재

 

지젝과 예이츠의 공통분모는 소수세력에 속하는 서발턴(subaltern)의 후예라는 것이다. 양자는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현재 문학과 문화의 주류에 서있다. 이것은 변두리에 위치하는 탈식민주의자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가 자주 불평하는 백인으로부터 야기된 흑인의 콤플렉스를 전복시킬 가능성을 제공한다. 양자는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사물의 실재를 치열하게 추구한다는 점이 같다. 그러나 예이츠는 과거로의 회귀,즉 신화와 전설을 통해서 사물의 실재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지젝은 소쉬르와 라캉의 이론이 혼재하는 뒤얽힌 언어학과 정신분석학, 즉 삶의 기호학을 통하여 사물의 실재에 접근하려는 점에서 다르다. 지젝은『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에서 현실을 구축하는 무의식적 환상으로서의 마르크시즘과 정신분석학을 그린다.8)

그는 정치적으로 좌파이며 약육강식의 자본주의의 제도적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기막힌 제도가 공산주의(communism)라고 믿는다. 그는 라캉사상의 존재론적 기원에 위치하는 라캉의 사위 자크-알랭 밀레르(Jacques-Alain Miller)와 같이 정신분석학을 공부했기에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보다 유리하게 접근한다.

 

지젝의 실재는 종교적 신비적 초월적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 어디까지나 인본주의자인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이론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가 실재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당면하는 기호적 현실을 디딤돌로 삼는다. 그런데 기호적 현실은 실재를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한다.

이에 대한 불교적 처방이 이심전심이다. 그것은 인간의 기호적 관념론이 사물을 직시하지 못하고 우회하거나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성의 궁극적 지향점인 ‘절대정신’을 주장하는 헤겔의 관념론은 사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관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려한다. 그것은 사물이 인간의 정신을 통해 존재하기에 의식은 사물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 

이 과정에서 개별적인 테제들이 지속적으로 부정과 수정의 변증법적 유희를 거쳐 진화된 절충, 즉 총체성(totality)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한 사물의 진실추구, 즉 실재의 탐색을 무한히 지속할 수가 없기에 부득이 잠정적인 판단을 내리고 현실에 복귀해야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총체성은 궁극적인 결론이 유보된 채 사물의 일부에 대한 총체성일 수밖에 없으며, 사물에 대한 전반적인 탐구는 연대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러한 입장을 사물의 제1원인자로서 범람의 일자(One)를 주장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제자인 제논(Zeno)의 패러독스에 나오는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우화’에서 밝힌다. 아킬레스는 거북이 혹은 헥토르보다 빠르지만 결코 이것을 따라 잡을 수는 없다.

또 꿈속에서 추적자는 도망자를 결코 따라잡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의미의 주체는 실재로서의 대상을 결코 따라 잡을 수 없다(Žižek 3-6).

 

지젝이 탐구하는 마르크시즘은 다수를 배제한 소수의 부의 편중을 지적한다. 이 주제는 민주화, 산업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세계의 각국들이 모두 직면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해법은 에너지의 공급 없이 절로 굴러가는 자동차를 발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름과 달러 없이 자동차가 굴러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과 노동자의 불만은 고조되고 국제결제 유동성이 부족한 국가는 파산을 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쉽사리 등장하는 것이 증세와 화폐발행이다. 그런데 선택의 여지없이 양자 모두 국민들을 안락사로 유도하는 묘약이다. 그런데 지젝은 이를 타파할 수 있는 것이 마르크시즘이라고 믿는다. 마르크시즘은 서구의 냉전이 종료됨으로써 약효가 다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가 유사 이래로 당면한 [빈/ 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거대담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시즘의 복음인 [만인의 공정한 분배]의 미명 하에 실상은 일부의 지배층만이 사회의 특혜를 독식해온 중국, 구 러시아, 동구와 남미의 공산국가, 북한의 비리와 병폐를 반성하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공평한 분배를 기조로 하는 마르크시즘은 인간의 분출하려는 욕망을 제어한다는 점에서 실패의 소지를 잉태하고 있다. 그러므로 탐욕, 식욕, 성욕과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보장하기 위하여 욕망이 분열하고 탈주하는 자본주의가 상호충돌의 유혈사태가 우려되지만 오히려 인간적이다.

경쟁을 유발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승자 독식의 사회이며 패자는 승자의 자비에 해당하는 기부나 납세로 조성되는 복지의 그늘에 안주해야 하며 국가의 중재 하에 승자와 패자가 공존하기 위한 윤리학을 제정한다.

 

균질한 욕망의 분배가 견지되는 곳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정지된 항상성(homeostasis)의 차원으로서 생의 에너지가 사라진 사망의 상태인 욕망의 불이 꺼진 법열(nirvana)의 상태를 의미한다.

마르크시즘은 인간의 분출하는 욕망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 단지 마르크시즘은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균질한 밥그릇을 제시하기에 개인의 능력을 무력화 시킨다.

지젝은 마르크시즘이 낡은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의 안티테제가 아니라 이론의 실천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호감을 가진다. 그는 학자들의 관행으로서 경험의 이론화가 아니라 경험의 변혁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사회의 저변에 배태된 이데올로기이며 현실을 인식하는 수단이자 사물을 해석하는 수단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기능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경쟁주의, 탐욕주의,소비주의와 같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우리는 적자생존의 경제적 진화론에 대해 상부구조/ 하부구조의 모순과 병폐를 지적하고 분배의 정의를 권고하는 메시아적인 마르크시즘에 결단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지젝에게 마르크시즘은 지상의 모순을 해결해줄 실재로서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그런데 마르크시즘은 사회의 비정상적인 부당한 구조를 제어하려는 거대담론이기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의 개성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에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상황을 탐구하는 실천이론의 토대로 삼는다. 

이 점을 『바퀴』 (“The Wheel”)를 통해서 살펴보자.

 

겨우내 우리는 봄을 노래했지,
그리고 봄 내내 여름을 기다렸고,
그러다 두툼한 울타리가 울면
누가 뭐래도 겨울이 최고라고 말들을 한다.
그 뒤로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직 봄이 오지 않았기에 -
우리의 피를 끊게 하는 것은
무덤을 향한 우리의 갈망뿐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에. (예이츠 시 전집 399)


Through winter-time we call on spring,
And through the spring on summer call,
And when abounding hedges ring
Declare that winter’s best of all;
And after that there’s nothing good
Because the spring-time has not come —
Nor know that what disturbs our blood
Is but its longing for the tomb. (CP 211)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수레바퀴9)가 반복적으로 굴러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봄. 살아있는 것은 죽어가고 또 무언가가 살아난다. 이처럼 자연의 운행은 기계적이며 동어 반복적이다. 화자가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물의 관성으로서의 모진 성장의 인연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에너지가 소멸된 공간인 항상성의 실재계이다. 화자가 보기에 봄이 오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봄이 오면 사물이 약동하여 생명의 파국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탄생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화자는 알고 있다.

따라서 화자는 꿈의 잠재태에서 머무르고 성장통이 예견되는 현실태로 나아가지 않으려 한다.

환언하면, 실재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을 거부한 모습이다.

 

[그림1]10)

 

라캉은 모성적 순수에서 부성적 경험의 상태로의 이행과정으로서 개성화의 과정을 삼단계의 질서로 구분하며 지젝은 주변의 텍스트분석에 적극 활용한다.

그것은 상상계(imaginary order), 상징계(symbolic order), 실재계(real order)이다.
상상계는 모태로부터의 소외이후 자아가 자신을 마음속에서 그리거나, 거울 속에서 타자를 바라보고 제멋대로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질서를 ‘거울단계’(mirror stage)로 부르며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신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이상적 자아’(ideal ego)를 추구한다. 이때 유아는 거울 속에 나타나는 영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기-동일화의 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이 단계는 유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물 위에 군림하는 듯 자가당착에 빠진 사상가, 명상가, 철학자, 과학자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

그들은 사물로서의 [물]이 [물]인데 [물]이 아니라고 물의 기원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을 평생 지속한다. 그러나 각자에게 주어진 단속적인 역사성으로 인해 인간은 상상계의 정점에 도달할 수 없고 이를 기호적으로 수렴할 수단을 모색하게 된다.11) 이때 상상계는 현실에서 은폐되어 무의식을 떠도는 욕망의 잉여가 된다.

한편 상상계는 노에마(noema)와 노에시스(noesis)를 의미하는 자율적인 내면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기에 현상학과 교접이 된다.

 

이때 상상계를 수렴하는 가시적 기호적 장치가 상징계이다. 이것은 타자의 시선이자 타자의 욕망이며 사회의 비인격적인 틀로서 인간에게 억압기제로 작용하여 신경증(neurosis)을 유발한다. 유아는 아버지가 구축한 상징의 그물에 걸려 평생 발버둥 치다 교살 당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태어나 상징계에 등록되어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 젠더, 성명, 가족, 사회, 국가, 인종 속에 소속되어야 사회적으로 호명(interpellation)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계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자아 이상’(ideal ego)에 해당하는 타자로서 우리의 자아와 상징적인 관계를 맺는다(김현강 51). 우리가 생전에 상징계의 감옥을 벗어날 궁리는 해 볼 수 있지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그것은 인간이 구속된 상징계가 인간존재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상상적으로 실재의 도를 수행하면서 상징적으로 유랑하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걸식(乞食)승이다. 한편 지젝은 라캉이 주장하는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를 순서대로 현실, 이데올로기, 실재로 대체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실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완하는, 다시 말해 실재와 현실의 간극을 메워주는 일종의 보충대리로서 존재한다고 본다(김현강 160).

 

라캉은 상징계의 도구로서 기호를 차용하고 소쉬르의 관점을 차용한다.

호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로 구성된다.

전자는 소리에 대한 물질적 이미지이고, 후자는 소리가 연상하는 의미와 개념이다. 사물과 기호는 임의적 변별적으로 결합된다. 개(dog)가 개인 것은 개가 토끼와 거북이가 아니기 때문이며, 개를 말(horse)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밤은 낮이 아니기에 밤이므로 밤은 밤의 현존이자 낮의 부재이다.

기호는 수평적(통사적/ 결합적/ 의식적/ 환유적) / 수직적(화용론적/ 대체적/ 무의식적/ 은유적)인 [x/ y]의
양축을 통한 의미화 연쇄(chain of signification)를 통하여 분열된다(PD 36-7).
‘보로메오 매듭’에서 근본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실재계에 대해서 라캉은 상상계와 상징계에서 보여주었던 명백함이 사라지고 다소 불가지론적으로 접근하며,이것이 미지의 영역이며 유추, 개연성, 잠재성을 함축하는 공간이라고 본다(Evans 159).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사물의 존재/ 부재를 겸비한 ‘공’(空)같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존재와 경험이전의 선험적인(a priori) 차원이거나 언어로 포장되기 이전의 사물의 모습이다.

 

실재는 사물의 기원, 배후이자 기호로 인식되기 전의 사물 자체이다. 그러므로 실재는 그 접근 단서로서 사물자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실재로 향하는 사다리로서 사물이 눈앞에 주어져 있음에도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실재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한 사례가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사례이고,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의 사례이며, 비가시적인 것의 믿음이 가시적인 것의 믿음보다 더 중요함을 강조한(Hebrews 11:1-7) 예수의 사례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의식 속에 잔존하는 ‘타자의 담론’으로서의 무의식의 구조를 영구히 말소할 수는 없을 것이며,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언명에 따라 우리는 꿈, 실수, 농담, 웃음 속에서 우리의 실재를 재현한다.

 

 

IV. 실재의 비전

 

우리는 현실적으로 실재를 어떻게 접속할 수 있을까? 즉, 우리가 현실에서 실재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지젝은 라캉보다 더 과감한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서로 다르게 분절하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기를 통한 이른바 완성을 위한 변증법적 생성이다.

지구의 기원과 종말은? 에이즈의 발생이유는? UFO의 정체는?

실재의 단서는 실재에 대한 의문이 존재하기에 그것을 지시하기 위해 부득불 상징계와 연루된다. 마치 범인을 확정하기(상징계)전에 살인현장에 남겨진 범인의 잔재 같은 것이다.

따라서 상징계가 없다면 실재계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상징계가 없다면 인간으로 존재할 수도 없으며 동시에 실재계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기호적으로 자연에서 인간으로 분절(articulation)되어야 존재 가능하므로 상징계가 없는 실재계를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상징은 실재를 전적으로 포섭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재의 허수아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젝은 실재계는 변증법의 활동무대이며, 상상계는 두 항의 조화로운 종합이 가능한 것이며, 상징계는 두 항이 변별적으로 규정되는 곳이라고 본다(토니 61).

한편 실재에 대한 상상적 상징적 분열은 신경증과 정신병의 고통을 초래하고, 피분석자에 접근하는 분석가의 분석처럼, 그것은 열정의 훈육을 통해 가속화되고 우리사회의 열정은 냉각된다(CC 75-6).

만약 우리가 상징계를 떠나서 실재계에만 접근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위장과 위선이 벗겨지는 세상답지 않는 세상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의 살아생전 재미나는 오락으로서 은폐, 위장, 위선, 사기, 조작이 없는 그야말로 투명하고 무미건조한 재미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추구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진리와 진실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으니 굳이 이를 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차이와 불만이 없는 완전하고 충만한 실재 속에서 규정된 자기 충족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개성을 상실하고 비인간화 될 것이다.

모든 사물을 무화(nullification)시킴으로써 사물의 최종적인 상태를 달성하는 죽음은 하나의 실재로서 우리의 의미를, 의미연쇄의 일환으로서 각각의 [나]를 소멸시킨다.

의미 주체로서의 인간은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상징의 그물 속에서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중간자이며, 상징과 실재사이에 서있다. 다시 말해 실재는 상징화된 인간의 지연된 미래완료의 양상이 될 것이다.

이 점을 『학자들』(“The Scholars”)에 적용해보자.

 

 

자기들의 죄는 잊어버린 대머리들,
나이 드시고, 학문 좋고, 명망 높은 대머리들,
시집을 편집하고, 주석을 붙이시는데,
그 시는 젊은이들이 침대에 뒹굴면서
미인의 무식한 귀에 아양 떠느라고
실의에 빠진 연심에서 써낸 것.
모두 발을 질질 끌고, 잉크 냄새 속에서 기침하고,
모두 그들의 신발로 카펫이 해어지고,
모두 다른 생각한 것을 생각하고,
모두 그들의 이웃이 아는 사람을 알고 있지.
도대체 그들은 무어라고 지껄이시려는지,
지금 주석붙이고 있는 카툴루스가 저기 걸어 나오신다면. (이창배 169)

 

BALD heads forgetful of their sins,
Old, learned, respectable bald heads
Edit and annotate the lines
That young men, tossing on their beds,
Rhymed out in love’s despair
To flatter beauty’s ignorant ear.
All shuffle there; all cough in ink;
All wear the carpet with their shoes;
All think what other people think;
All know the man their neighbour knows.
Lord, what would they say
Did their Catullus walk that way? (CP 140-41)

 

 

여기서 학자들은 ‘상상계’에서 거울 속 자기인식의 오류인 자기 확신에 충실한 나르시시스트이며 자기만족에 유폐되어 타자의 시선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화자는 학자들의 글쓰기의 일상을 부정적으로 비효용적으로 바라본다.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것을 생각하고”에서 보이듯이 비범할 것이 없는 학자들이 비범한 척하는 것이 화자를 자극한다. 이것은 스스로 대견한 비범한 학자들을 평범한 학자들로 평가절하하려는 변증법적 사건이다.

학자들의 기호화된 일상을 비판한다는 점은 상징화된 관습을 파괴하는 것으로 학자들의 상징화는 해체되어 미분화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꿈과 현실과의 대립, 기대와 결과의 차이로 나타나는 실재의 틈이고 실재는 논의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상징화 된다.
실재의 “카툴루스”에 “지금 주석붙이고 있는”것은 실재의 “카툴루스”를 거세한 의미의 상징화이며, 이때 실재와 상징이, 지젝의 관점에서 실재와 현실이 충돌한다.

그러나 실재는 상징에 구속되고 거세되어 욕망의 잉여를 남기고 지속적으로 실재로서의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의 사명을 추동하는 동기가 된다.

 

지젝은 라캉이 상상계와 상징계의 규명에 진력하는 사이를 틈타 현실로서의 상징계와 실재계의 관계를 탐색한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무의식(Es)을 형용할 수 없는 미지수가 아니라 타자의 담론, 즉 의식이 무의식의 단서라고 용감하게 규정하였듯이. 지젝에게 실재계는 누구나 난해하게 생각하는 그런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 합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그는 불가지의 실재를 포착하기 위하여 칸트(I. Kant)의 선험의식(a priori)을 원용한 ‘환상’을 동원한다. 경험과 선험은 이질적인 것이기에 양자의 영역을 넘나드는 ‘환상’은 아울러 현실과 실재의 간격을 메워주는 매체로 존재한다(김현강 155).12)

지젝처럼 정신분석학의 정규과정을 통하여 개성화의 일환으로서의 실재계와 같은 과학적 개념을 학습한 사실이 없는 예이츠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언어를 통하여 실재를 초대하고, 영매(psychic medium)를 통하여 실재를 포착하려는 묵시적 정신분석학의 실현을 통해 상징과 실재의 묘한 대립을 관통하고 초월하여 현실 혹은 상징을 통한 실재의 추구 가능성을 탐문한다. 그러나 실재가 지상에서 영구히 은폐되고 은닉된 것은 아니었다. 이천년 전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John 14:6)라고 언명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 제1원인자임을 표명했지만,13) 실재를 확정하려는 의미연쇄의 일환으로 기능하는 사도 베드로는 이를 거부하고 부정했다. 또 선불교에서는 살불살조(殺佛殺祖)14)를 주장함으로써 모든 사물에 변치않는 존재성으로서의 자성(自性)이 부재한데 석가나 조사를 법(Dharma)의 실재로 삼는 것이 부당하다고 본다.15)

그러니 인간이 실재에 도달하는 것이 여의치 않다.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 기호이외에 실재와 소통할 다른 수단이 전무하며,만인 공통의 언어는 실재의 단서가 된다. 따라서 바이블은 실재로서의 진리에 이르는 단서이며, 노끈이라는 의미의 수트라(Sutra)는 욕망의 소멸을 의미하는 실재로서의 니르바나에 이르는 단서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역설적으로 진리의 컴컴한 동굴 속으로 향하는 아리아드네(ariadne)의 실타래이다.

 

 

Notes

 

1) 청원유신(靑原惟信) 선사가 말했다. “노승이 30년 전 참선을 하지 않을 때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었는데, 후에 선지식을 친견하며 참선에 들어섰더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소. 그런데 이제 쉴 곳을 얻으니 이전처럼 산은 그저 산이요 물은 그저 물이라오.” 남종선의 정수를 드러내는 말이다.[ohmynews.com]
2) 이 화두의 주제인 간시궐(乾屎厥)은 선의 전통으로 전래되는 공안이다. “무엇이 부처입니까(僧問, 如何是佛)”라는 비구의 질문에 운문[雲門]은 “부처란 간시궐(師曰, 乾屎厥)이야”라고 답했다.(http://www.ggbn.co.kr)
3) 예이츠가 신비주의자 채터지를 존경하며 쓴 시작품이 있다.

“Mohini Chatterjee”(“I asked if I should pray./ But the Brahmin said,/ ‘pray for nothing, say/ Every night in bed,/ “I have been a king,/ I have been a slave,/ Nor is there anything./ Fool, rascal, knave,/ That I have not been,/ And yet upon my breast/ A myriad heads have lain.”’/ That he might Set at rest/ A boy’s turbulent days/ Mohini Chatterjee/ Spoke these, or words like these,/ I add in commentary,/ ‘Old lovers yet may have/ All that time denied —/ Grave is heaped on grave/ That they be satisfied —/ Over the blackened earth/ The old troops parade,/ Birth is heaped on Birth/ That such cannonade/ May thunder time away,/ Birth-hour and death-hour meet,/ Or, as great sages say,/Men dance on deathless feet.”) (CP 247)

4) 예이츠의 실재추구는 영매 라는 시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The Spirit Medium”(“Poetry, music, I have loved, and yet/Because of those new dead/That come into my soul and escape/Confusion of the bed,/Or those begotten or unbegotten/ Perning in a band,//I bend my body to the spade/Or grope with a dirty hand.//Or those begotten or unbegotten,/For I would not recall/Some that being unbegotten/Are not individual,/But copy some one action,/ Moulding it of dust or sand,//I bend my body to the spade/Or grope with a dirty hand.//An old ghost’s thoughts are lightning,/To follow is to die;/Poetry and music I have banished,/But the stupidity/Of root, shoot, blossom or clay/Makes no demand.]//I bend my body to the spade/Or grope with a dirty hand.”) (CP 318)
5) ‘항해’(navigation)라는 개념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에서 독자가 하이퍼링크를 통하여 이리저리 정보공간을 이동하며 데이터를 검색(retrieval)하는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6) 예이츠의 시작품 속에 함축되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입장은 우호적이기도 비판적이기도 한 이중적인 것이다(조정명 192).
7) 이 새로운 표현양식을 몬드리안은 [신조형주의]라고 지칭했는데, 신조형주의의 의도는 미술작품을 순간적인 시각과 화가의 개인적인 기질에서 해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법을 통해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객관적 실재가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때부터 그는 그림 속에 [리얼리티의 참된 모습]을 묘사할 수 있었다.(www. britannica.com)

8) 이 저술의 1장에서 지젝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대비하고 전자가 주장하는 상품의 형식과 후자가 주장하는 꿈의 형식이 상호 연관됨을 독해한다. 상품의 내용이 노동이며, 그 잠재적 의미가 꿈이라는 것이다. 그가 탐문하는 것은 [왜 잠재적인 내용이 특별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따라서 지젝은 꿈의 작용과 상품의 형태 사이에 분석이 요구된다고 본다. 다시 말해, 노동이 상품으로 대체되고 그 상품의 원천이 꿈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풀이하면 인간은 꿈의 대리인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상품의 이면에 실재하는 꿈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범속한 가운데 에피퍼니를 발견한 셈이다.

9) 불교에서 바퀴의 개념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의미하며, 진리[다르마]의 바퀴, 즉 법륜을 돌리는 사람이 석가모니이다. (The wheel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Buddhist symbols, as it represents the teachings of the Buddha. The Buddha was the one who “turned the wheel of the dharma” and thus the wheel symbol is the Dharmachakra, or “wheel of law.” The Tibetan term for this symbol, chos kyi’khor lo, means “the wheel of transformation.”[http://www.religionfacts.com/buddhism]

10) 라캉은 상상, 상징, 실재계의 상호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위상학(topology)적 매듭을 사용했다(Evans 18).

11) 단속적인 운명에 처한 인간은 사물, 대상, 사건, 기표에 대한 무한의 의미연쇄에 할당할 시간이 부족하여 부득이 그 의미연쇄의 과정에서 의미의 심원에 다다르지 못하고 도중에 잠정적으로 기표와 의미적 합의에 이른다. 이 지점을 라캉은 ‘소파의 고정점’(point de caption 혹은 anchoring point)이라 명명한다(Evans 149).

12) 최근 국내외적으로 현실과 환상이 혼재된 영화가 자주 상연되고 있는데, 장자의 ‘호접몽’처럼 선험과 경험이 혼재된 현실을 반영하며, 나아가 환상은 현실을 구성하는 핵심요소가 된다. 그 대표적인 외국영화가『매트릭스』이며, 국내영화로는『은행나무침대』를 꼽을 수 있다.

13) 성경에서 인간의 완전성을 지향하는 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하는데,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 제물이 되심으로써 단박에 인간의 죄를 해결한 ‘결정적 성화론’과 일종의 영적훈련과정으로서 새사람의 삶의 모습을 회복하는 ‘점진적 성화론’이 있다(정연욱 223).

14)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이다. 혜연(慧然)이 엮은『임제록』(臨濟錄)에 나온다.(http://terms.naver.com)

15)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에 변치 않는 자성은 부재하고 그 자성은 오직 연기(緣起) 혹은 인연에 의해 조성된다고 보는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론이나 라캉의 무의식과 연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