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히스테리: 욕망에서 쥬이쌍스로
양 석 원
I. 히스테리 주체와 여성성: 도라의 사례연구
라캉(Jacques Lacan)은 1977년 2월 브뤼셀에서 발표한 「히스테리에 관하여」(“On Hysteria”)라는 강연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여성 히스테리 환자들의 사례연구에서 출발한 것처럼 자신의 연구에서도 히스테리 환자들이 길잡이가 되었다고 말했다(9-11). 라캉의 말대로 히스테리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과 탐구는 그의 후기 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이 강연에서 제기된 히스테리에 대한 라캉의 언급을 출발점으로 삼아 히스테리 주체의 욕망에 관한 라캉의 탐구를 살펴보고 이 탐구가 여성적 쥬이쌍스와 실재에 대한 후기 라캉의 연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의 윤곽을 짚어보고자 한다.
라캉은 이 강연에서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를 염두에 두면서 언어와 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의 본질은 말을 사용하는 종(species)의 말의 사용과 이 종에게서 지배적인 성(sexuality) 사이에 가장 큰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은 전적으로 말에 포획된다. 이것이 그가 이룬 핵심적인 성과이다”(“On Hysteria” 12).
성이 말에 포획된다는 라캉의 발언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연구 (Studies on Hysteria)에서 히스테리 환자가 말을 통해 증상을 해소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치료”(talking cure)라고 알려진 이 방법에서 히스테리 환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표현하게 되는데 이는 무의식속에 억압되어있던 성적 욕망이 분석상황에서 표출되는 것이다(Studies on Hysteria 30).
분석가는 히스테리 환자의 말에 포획된 성적 욕망을 포착해서 그것을 환자에게 알려줌으로써 정신분석 치료를 수행한다.
히스테리에 대한 라캉의 초기 글은 도라(Dora)의 사례연구를 다룬 「전이에 대한 발표문」(“Presentation on Transference”)이다. 이 글은 무의식의 언어를 통해 히스테리 환자의 성적 욕망을 밝히려는 프로이트의 작업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도라 연구의 말미에서 논의되는 전이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바로 이 무의식의 언어를 읽어내는 분석 장면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정신분석이 주체(환자)와 분석가의 대화로 이루어진 “변증법적 경험”이라는 점을 도라의 사례연구에 대한 논의를 통해 입증해보이려는 시도이다(177). 주지하다시피 라캉은 이글에서 프로이트가 도라의 전이를 분석하면서 도라에 대한 자신의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런 지적의 심층에는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주체의 성정체성에 대한 욕망을 파악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여성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도라의 사례연구는 “주체를 위해 진실이 변형되는 구조, 사물에 대한 그녀의 이해뿐 아니라 주체로서의 그녀의 입장 자체. . . 에도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포함한다(178). 라캉은 환자와 분석가의 변증법적 관계를 구조로 파악할 뿐 아니라 히스테리 환자의 주체로서의 입장 즉 도라의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에번스(Dylan Evans)는 프로이트가 히스테리를 증상으로 파악했다면 라캉은 구조로 파악했다고 주장한다(78). 그러나 라캉의 구조적 관점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를 자기성애(auto-eroticism)에서 대상성애(allo-eroticism)로 성이 발달하는 단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면서 “히스테리(그리고 그 변종인 강박신경증)는 대상성애적이며 그 주요 경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일시”라고 말한 것에 빚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Letter 125).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병인이 외상에 있다는 외상이론에서, 아버지의 유혹에 있다는 유혹이론으로 그리고 이 유혹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환상이론으로 수정했다.1)
그러나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히스테리의 병인이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테리사 브레넌(Teresa Brennan)이 지적하듯이, 프로이트는 성적 유혹이라는 외상적 사건의 부재를 강조하기보다 정신적 현실(psychic reality)이 외적 현실만큼 중요하다는 것, 즉 “유혹의 환상이 실제 사건과 유사한 효과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29).
프로이트에 의하면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환상은 변함없이 부모의 주제를 취한다”(Letter 69, 260). 이런 관점은 여성 히스테리 환자와 남성 타자(아버지)—그리고 히스테리 환자가 그 타자에 대한 감정을 전이하는 분석가—의 사랑 관계에 대한 라캉의 분석에서 중요하다. 구조적 차원에서 볼 때 남성 타자와의 사랑과 동일시에서 여성 히스테리 환자가 당면하는 주체성의 문제가 핵심인 것이다.
도라에 대한 라캉의 관심의 초점은 바로 여성의 주체성 혹은 성정체성이다.
라캉은 도라 사례를 세 가지 진실과 변증법적 역전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 진실은 아버지가 K부인(Frau K)과의 사랑을 위해서 자신을 K씨(Herr K)에게 교환의 대상으로 내주었다는 사실에 도라가 분개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아버지가 K부인과의 밀애를 나누기 위해 K씨가 도라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 것처럼, 도라 역시 K씨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K부인과의 관계를 묵인했다고 지적한다(Fragment 36).
라캉은 이런 사실에 분노하는 도라에게 프로이트가 “당신이 불평하는 그 난잡한 상태에 당신도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보라” 고 말하는 것이 첫 번째 변증법적 역전이라고 말한다(“Presentation” 179).
따라서 두 번째 진실은 도라가 아버지와 K부인의 관계에 대해 침묵했을 뿐 아니라 이 관계에 공모했고 심지어는 이 관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K부인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공모관계의 배후에는 도라와 아버지의 동일시가 존재한다. 프로이트의 분석대로 도라가 아버지를 비난하는 것이 사실상 자기비난이라면, 라캉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아버지에 대한 도라의 오이디푸스적 사랑은 아버지와의 동일시에 기초한다.
라캉은 여기에서 왜 도라가 갑자기 아버지의 밀애에 대해 질투심을 느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은 두 번째 변증법적 역전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질투의 대상이 그녀의 진실된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주체에 대한 관심을 은폐하고 있다”고 프로이트가 설명하기 때문이다(“Presentation” 179).
아버지의 밀애에 대한 도라의 질투심에서 경쟁주체는 바로 K부인이다. 왜냐하면 도라 역시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번째 진실은 도라가 K부인에게 성적으로 매료되었다는 것이며—라캉은 프로이트에게서 도라를 매료시킨 K부인의 “감탄할만한 하얀 몸”을 인용한다 —, 이는 K부인이 남편과의 성적 관계에 대해 도라에게 이야기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세 번째 변증법적 역전은 “K부인이 도라에게 대상으로서의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다”(180). K부인의 참된 가치는 그저 한 개인이 아닌 “도라 자신의 여성성의 신비”를 나타내는 데 있다.
라캉은 이 여성성이 “신체적 여성성”(bodily femininity)이라고 덧붙이는데 이는 앞서 인용한 K부인의 “감탄할만한 하얀 몸”과 관련된다(180).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도라가 이 여성성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녀의 여성성에 대한 이런 인식에 접근하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신체를 취해야하는데” 도라는 이 점에서 실패한다(180-81). 따라서 도라가 이 여성적 “대상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성 파트너”를 경유하는 것 즉 남성과의 동일시를 통한 것인데 이는 도라가 유년시절 오빠와 상상적으로 동일시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2) 도라는 K씨와 그리고 후에 프로이트와 동일시하며, 그녀가 이들에게 보이는 공격성은 “나르시스적 소외의 특징”을 지닌 “공격성” 즉 거울이미지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에 동반되는 공격성이다(181).
그런데 남성과의 동일시는 여성의 주체성에 딜레마를 유발한다. 라캉은 도라가 왼손 엄지손가락을 입으로 빨면서 오른 손으로 오빠의 귓불을 잡아당기는 일화를 언급한다. 세르쥬 안드레(Serge André)가 지적하듯이 이 장면에서 도라가 자신의 엄지를 빠는 구강적 쾌락을 즐기며 옆에 있는 오빠의 욕망을 자극하는 소녀인가, 아니면 그녀가 오빠와 동일시해서 구강적 대상으로서의 소녀가 어떠한지를 궁금해 하는 소년의 입장에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이 장면에는 도라의 성정체성의 문제가 존재한다. 도라가 오빠와 동일시할 때 당면하는 질문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남자와 엄마의 젖의 관계로 환원될 경우 여성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의 문제이다(André 159-60).
라캉은 “여성이 원시적인 구강적 욕망과 분리될 수 없는 대상”임을 강조한다(180). 즉 오빠와 동일시한 도라는 자신의 엄지를 빠는 또 다른 자신을 엄마의 젖과 같은 대상으로 바라본다. 이는 곧 여성이 남성욕망의 대상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성과의 동일시를 통해 K부인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가늠하여 여성성에 접근하려는 도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에 직면한다.
“도라는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갖고 있는 욕망을 측정하고 여성이 이 욕망에서 받는 가치를 알기 위해 먼저 남성(오빠 혹은 아빠)의 입장을 취하는데, 그렇게 해야하기 때문에 그녀는 K부인의 수수께끼와 대면하게 된다”(André 162). “‘여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히스테리 주체는 제 3자인 또 다른 여성에게서 해답을 찾으려한다. 제 3자인 이유는 그들 사이에 남자가 중개인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Verhague, Does 61).
도라의 경우 남자는 물론 아버지와 K씨이다. 도라가 이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그들에게 K부인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즉 그들이 여성성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때 여성성은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1) 이에 대해서는 Letter 61, 247쪽, Draft L, 248쪽 참조
2) 프로이트는 도라가 유년시절에 한 살 반 위인 오빠를 모델로 삼았다고 말한다. Fragment 21쪽 참조.
"그러나 이런 [K부인에 대한] 경외심은 그녀가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만 즉 오로지 그녀가 K부인에게서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의 의미를 소진한 다음에만 욕망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모든 여성에게 사실인 것처럼,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교환(도라가 자신의 반항의 근거로 제시하는 교환)의 정점에 존재하는 이유 때문에, 그녀가 처한 상황의 문제는 자신을 남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받아들여야하는 문제이며 이것이 도라가 K부인을 우상화하는 동기가 되는 불가사의다.
그녀가 성모 앞에서 오랫동안 사색하는 과정에서 . . . 이 불가사의는 기독교가 여성을 신성한 욕망의 대상 혹은 이와 궁극적으로 동일한 초월적 욕망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이 주체적 곤경(subjective impasse)에 제공했던 해결책으로 그녀를 몰고 갔다. (“Presentation” 181)"
안드레는 이 글에서 라캉이 “여성의 운명이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서 자신을 받아 들여야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선언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에게서 거의 진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160).3)
라캉은 물론 도라가 성모 그림을 보며 오랫동안 사색했던 사건4)에서 거룩한 성모라는 초월적 대상, 즉 신성한 어머니의 역할로 환원된 여성의 모습에 도취된 것에 주목한다.
그러나 라캉은 여기에서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성을 강조했다기보다 이런 상황에서 도라가 겪는 정체성의 위기에 주목했다. 라바테(Jean-Michel Rabaté)가 지적하듯이 라캉은 “도라의 (K부인을 간신히 은폐하는) 마돈나에 대한 황홀경을 ‘기독교가 부여한’. . . 전통적인 해결책으로 치부했고 . . . 이 해결책은 사실 도라에게 “수녀원으로 가라”는 함의를 지닌다“(91).
도라가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K부인에게서 그녀가 찾고 있던 것의 의미를 소진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도라에게 이 의미가 소진되는지는 의문이다.
호수가 장면은 도라가 남성욕망의 대상으로 환원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 대한 라캉의 관심도 이런 거부에 집중된다. 도라는 호수가에서 “내 아내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nothing)”라는 K씨의 말에 화를 내고 그의 뺨을 때린다.
라캉은 이 행위가 “그녀가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내게 뭐지요?”라는 함의를 지닌다고 말한다.
K씨는 “그녀가 오랫동안 영향을 받으며 살아온 [K부인에 대한] 매력을 깬” 장본인이다(“Presentation” 183).
베르헤이그(Paul Verhague)에 의하면 K씨의 발언에서 도라는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그의 뺨을 때리며, 여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던 도라는 여성이 무엇이 아닌가에 대한 확신에 도달할 뿐이다. 도라의 결론은 “여성은 남성 욕망의 단순한 대상으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Verhague, Does 64).
라캉은 세미나 IV 대상관계 (Object Relations)에서 도라 사례를 동일시의 구조적 관점으로 파악하며 여성의 성정체성에 대한 도라의 위기를 더 탐구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L 도식으로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도식에서 도라는 자아의 위치에서 거울 이미지와 같은 소타자인 K씨와 상상적 동일시의 관계를 갖는다.5) 앞서 언급했듯이 라캉은 이미 「전이에 대한 발표문」에서 “도라에게 상상적 동일시의 외적인 지점은 K씨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175).
그러나 이 도식에서 주목할 점은 무의식적 주체의 위치에 K부인이 있고 대타자의 위치에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도라에게 여성성에 관한 의문을 체현하는 K부인은 따라서 도라의 여성 주체성을 의미한다.
이 여성 주체에 대한 도라의 무의식은 대타자 아버지와의 상징적 관계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K씨가 K부인이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라고 말할 때 도라가 보이는 공격성은 그녀의 주체성의 위기와 관련된다.
즉 “도라는 아버지와 K씨의 욕망의 대상인 K부인과 동일시함으로써만 자신을 주체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여인이 평가 절하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Voruz).
K씨의 발언은 도라의 여성 주체성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3) 페미니즘 관점에서 라캉이 도라를 해석할 때 여성성을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 환원했다고 비판한 국내연구로는 신명아와 정문영의 글을 참조할 것.
4) 프로이트가 도라의 두 번째 꿈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도라가 과거에 드레스덴(Dresden)의 미술박물관에서 (라파엘의) 성모 그림을 두 시간 동안 감탄에 젖어 보고 있었다는 기억을 찾아낸다. Fragment 96쪽.
5) 라바테(Rabaté)는 라캉이 세미나 IV에서 「전이에 대한 발표문」과 달리 “교환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관점”에서 구조주의적으로 도라를 분석했음을 보여준다(91). 위의 L 도식은 라바테의 글 89쪽에 있다. 국내에서는 홍준기가 라캉이 세미나 IV에서 논한 도라 사례를 설명한 바 있다. 홍준기의 책 173-80쪽 참조.
도라에게 K부인이 신비로운 여성성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도라 자신을 넘어서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K부인은 도라를 넘어서 사랑받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도라는 그녀에게 매료된다”(Rabaté 89).
도라가 아버지/K부인, K씨/도라 자신의 4자 관계를 용인할 수 있는 것은 역으로 K씨에게는 도라가 K부인을 넘어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안드레는 여성이 남성 욕망의 환상적 대상을 넘어서는 보충적 차원 (즉 남근적 쥬이쌍스를 넘어서는 여성의 보충적 쥬이쌍스)에 대한 후기 라캉의 이론에 비추어 도라사례를 분석하면서, 도라에게 K부인은 아버지가 자신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것, 즉 자신이 결여하고 있다고 느끼는 보충적 여성성을 지니는 존재이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도라가 K씨와 사랑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K씨가 자기 아내를 넘어서 사랑하는 여성성을 자신이 갖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162-63).
이 4자 구조에서 K씨는 “도라가 아닌 그의 아내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Rabaté 89). 그러나 K씨의 발언은 “자신이 그가 사랑하기로 되어있는 아내를 넘어서 목표로 삼는 대상이었다고 생각한” 도라의 욕망의 구조를 와해시킨다(Rabaté 90). 왜냐하면 이제 그는 도라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싶어 하고 따라서 도라는 욕망의 대상을 넘어선 차원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구조가 와해된 결과는 요구로의 회귀이다.
라캉은 세미나 V 무의식의 형성 (The Formation of the Unconscious)에서 도라가 K씨의 뺨을 때리는 사건에서 소타자인 K씨와 의 상상적 동일시가 깨지고 그에 대한 공격성이 나타나며, 동일시의 와해로 인해 도라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순수하고 단순한 요구” 즉 “그녀의 아버지가 오직 그녀에게만 관심을 가져야한다,
달리 말하면 그가 그녀를 사랑해야한다”는 요구를 하게 된다고 설명한다(1958년 4월 9일).6)
아버지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도라는 아버지가 자신을 “순수한 대상” 즉 “교환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Rabaté 90).
도라에 대한 라캉의 탐구는 세미나 X 불안 (Anxiety)에서도 이어진다. 라캉은 이 세미나에서 행동화(acting out)와 행위로의 이동(passage to act)을 구별하면서 이 장면이 도라의 행위로의 이동이 발생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한다. 행동화는 주체가 대타자에게 연출하는 공연이다.
도라가 K 부부와의 관계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 즉 “K 집안에서의 그녀의 역설적 행동”은 행동화다(Anxiety 123). 반대로 행위로의 이동은 주체가 자신이 상연하는 무대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행위로의 이동의 순간은 주체가 . . . 가장 크게 당황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이 있던 곳에서 돌진해 무대 밖으로 떨어져 장면에서 사라진다”(115).
이는 “주체가 모든 곳에서 거절되고 거부된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출발하는 순수한 세계로의 유랑, 무대 탈출(stage exit)”이다(116). 이런 점에서 이 장면은 도라가 K씨의 말에 의해 주체가 아닌 대상소타자로 환원되어 상징계에서 퇴출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K씨의 뺨을 때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래글랜드(Ellie Ragland)가 말하듯이, K씨는 도라가 동일시하는 K부인을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만듦으로써 “그녀의 이상자아를 건드렸고 그녀를 주체의 위치에서 대상 쪽으로 밀어냈다”(74) 도라는 이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갖고 반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폭력적 행위로의 이동을 하여 그의 뺨을 때리는 것이다”(Ragland 74).
도라가 K씨의 뺨을 때리는 행위는 히스테리 주체의 욕망을 보여준다. 라캉은『불안』에서 “두려운 확실성”(dreadful certainty)이 유발하는 불안과 싸우기 위해 의심(doubt)이 사용된다고 말한다(77). 이는 욕망과 쥬이쌍스의 차이와 관련된다.
사마귀에 대한 라캉의 우화는 이 차이를 보여준다.
만일 커다란 암컷 사마귀 앞에서 자신이 어떤 성별의 사마귀 가면을 쓰고 있는지 모를 경우 타자인 사마귀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이 유발한다. 그러나 자신이 수컷 사마귀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은 더 커진다. 왜냐하면 자신이 암컷 사마귀의 쥬이쌍스의 대상이라는 확실성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쥬이쌍스의 대상이 되는 것이 불안을 가중시킨다.7)
호수가 장면에서 도라는 K씨의 발언을 듣고 자신이 “대타자의 만족의 대상이 되는 확실성”이 유발하는 불안을 피하기 위해 K씨를 때리는 “행위의 확실성을 통해서 주체로서의 자신을 재구성한다”(Voruz).8)
도라의 행위는 히스테리 주체가 욕망의 주체로서 자신을 유지하려는 것을 입증한다. 대상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고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도라의 행위는 그녀의 성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연관된다.
라캉은 K씨의 뺨을 때리는 행위가 “다음과 같은 완전한 모호성—그녀가 K씨를 사랑하는가 K부인을 사랑하는가—을 표현할 뿐”이라고 말한다(Anxiety 115). 이는 곧 도라가 “내가 남성인가 여성인가”라는 히스테리 환자의 성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봉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라는 주체와 대상,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분열된다.
6) 라캉의 세미나 IV에 기초해서 4자 관계를 설명하는 라바테의 논의는 도라가 왜 이런 요구로 회귀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라바테에 의하면 K씨—K부인—도라의 관계에서 자신의 아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발언은 역으로 아버지—도라—K부인의 관계에서 도라가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며 이 때문에 도라는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Rabaté 90쪽 참조.
7) 이 우화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Soler, “Hysteria and Obsession” 268-69쪽 참조.
8) 따라서, 앞으로 논의하겠지만, 히스테리 주체는 쥬이쌍스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욕망의 주체로 남으려 한다.
II. 히스테리성 질문: 여성 기표의 부재
도라의 사례연구에 대한 라캉의 논의는 히스테리 환자가 “여성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남성(대타자)에게서 찾는다는 점으로 향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는 이런 구조를 세미나 XVII 정신분석의 이면 (The Other Side of Psychoanalysis)에서 상술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라캉은 세미나 III 정신병(The Psychoses)에서 이 문제를 L 도식을 통해 심층 분석하며 그 과정에서 왜 히스테리 주체의 근본적 질문이 성정체성에 관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는 L 도식에서 주체(환자)와 분석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이는 바로 도라와 남성의 관계와 같다. 이 도식에서 주체가 자신의 거울이미지인 소타자(a)와의 상상적 관계에 놓이면 분석가에게 스스로에게 말하는 상상적 담론 속에 갇히고, 대타자(O)의 위치에 있는 분석가와의 대화를 통해서만 자신의 무의식적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
정신병자는 바로 “전적으로 상상적인 세계”속에 갇혀 사는데 그 이유는 “정신병에서, 존재가 말의 표명을 통해 실현되는, 대타자가 배제”되기 때문이다(Psychoses 162).
프로이트의 용어로 말하면 정신병에서는 신경증과 달리 외적세계와의 단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9) 라캉은 프로이트가 정신병의 구조와 신경증의 구조를 엄밀히 구분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신경증은 정신병과 반대로 주체와 대타자의 관계라는 구조에 기초한다.
도라가 “여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상대는 물론 대타자이다. 분석가는 주체의 상상적 소타자가 아닌 대타자의 위치를 점해야하기 때문에 도라와 프로이트의 관계는 히스테리 환자가 대타자에게서 여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구조이다.
대타자는 라캉의 표현대로 “존재가 말의 표명을 통해 실현되는” 장소이다. 라캉은 언어 이전의 현상은 정신분석과 무관하며 프로이트가 정신분석과 언어의 상관관계를 명백하게 밝혔다고 말한다. 그는 전의식적 정신과정을 강조한 크리스(Ernst Kris)가 상상계에서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하며, 무의식은 상상계가 아니라 기표의 차이로 이루어진 상징계에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167). 라캉은 신경증의 원인이 구강적, 항문적 혹은 생식기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상징계, 즉 “주체가 자신을 인식하고 또 인식되는 존재로서의 말의 대타자(The Other of speech)”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168).
그런데 여기에서 주체가 대타자에서 인정받는 자신의 존재는 성별적인 존재이다. 즉 주체는 대타자에게서 남성 혹은 여성으로 인식된다. 라캉이 소개하는 외상 히스테리 환자의 사례는 이 문제를 잘 예시해준다.
라캉은 심리학자 요제프 아이슬러(Joseph Eisler)가 분석한 30세의 헝가리 남성 환자의 예를 소개한다.
이 남성은 전차에서 내리다가 넘어져 끌려갔는데, 병원에서 머리 부분에 몇 바늘 꿰맨 것 이외에 심각한 부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이 남성은 갈비뼈부위부터의 방사통을 호소했고 검사 결과 이상이 없어 아이슬러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아이슬러는 이 신경증 환자에게서 동성애적 성향과 항문기적 성격을 발견하지만 신경증의 원인을 밝히지 못한다.
라캉은 이 환자가 겪은 위기가 “임신 환상”과 명백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 환자는 과거에 이웃집 여인이 분만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임신과 생식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가 전차에서 떨어진 것도 이 임신 환상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분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이슬러는 이 남성을 진찰한 의사가 “나는 그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가 여자였다면 아마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라고 털어놓은 것을 인용한다.
즉 이 남성은 “내가 누구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내가 출산 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한다(170).
그의 언행은 모두 “이 근본적으로 상징적인 관계 즉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의 형식을 취한다(171).10)
라캉은 이 질문이 “여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What is to be a woman?)라는 도라의 질문과 비교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남성 주체가 여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듯이 여성도 여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172). “신경증의 구조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질문”이다(174). 그런데 라캉이 강조하는 것은 이 질문이 상징계의 차원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아이슬러의 남성 환자와 도라는 상징계에서 동일한 성적 입장에 위치해서 동일한 질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히스테리 환자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자신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 남성 히스테리 환자 역시 여성적 입장에 관여한다”(178).
그런데 이 질문이 남성이 아닌 여성의 존재에 관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가 이 질문이 상징계의 차원에 있다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라캉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에서 남녀가 대칭적이지 않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강조한다. 여성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글에서 “이 비대칭의 이유는 본질적으로 상징적 차원에 놓여있고 그것은 기표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여성의 성 그 자체에 대한 상징화가 없기” 때문이다(176).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에서 여성으로 하여금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우회하여 잠시 동안 남아와 같은 경로를 밟게 만드는 것은 남근적형태(phallic Gestalt)의 지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여성이 접근하는 것, 여성의 상상적 동일시는 남근의 상상적 형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남아의 경우와 똑같이 아버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는 이 형식 자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핵심적인 상징적 요소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렇다. (176)"
라캉은 여기에서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이 그리고 이 두 차원 사이의 불가피한 혼합을 명확히 설명한다. 상징계는 사물에 대한 지식과 말, 이름과 관계된다. 이름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 반대로 “상상적 관계는 . . . 동물행동학, 동물적 심리와 연관된다. 성적 관계는 타자의 이미지에 의한 포획을 함축한다.”
상징계가 지식의 영역이라면 상상계는 “대상의 성애화의 영역”이다(177).
인간이 타자 즉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은 바로 상상계의 차원에서 시작하며 여기에서 대상은 “성애화된다.”
그런데 “인간에게 성적 입장이 발생하는 것은 . . . 근본적으로 상징화된 관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관계를 가로지르는 시련과 관계된다. . . . 남녀의 기능이 상징화되어야, 즉 그 기능이 상상계의 영역에서 문자 그대로 뿌리 채 뽑혀 상징계의 영역에 놓여야 정상적이고 완성된 성적 입장이 실현된다”(177).
남녀의 성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상징계의 영역인데 이 성별화는 상상적 동일시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이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것은 상상적 동일시이다. 여아가 남성(아버지)과 동일시하는 것은 남근이라는 형태 즉 상상적 남근의 지배력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상상적 남근이 “상징적 요소”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여성은 아버지와 상상적 동일시를 하면서 실은 상징적 동일시를 한다고 여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남성이 남근과 동일시하는 것과 반대로 여성에게는 여성을 나타내주는 기표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기표에서의 비대칭의 문제이다”(176). 비대칭은 상징계에서만 발생한다. 라캉은 상상계에서는 남녀가 각자의 성적 입장을 취할 수 있는 대칭적인 관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상징계적 경험인 “오이디푸스의 경험은 주체적 실현에 열려 있는 방법들에서 기표의 지배를 증명한다. 왜냐하면 여아가 자신의 상황을 취하는 것은 상상계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76).
남녀가 각각 남자와 여자의 입장을 취하는 성별화는 기표로 이루어진 상징계의 영역에서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성은 다른 성의 이미지를 동일시의 근거로 삼도록 요구된다”(176).
"상징적 질료가 없으면 주체의 성(sexuality)이 실현되는 데 필수적인 동일시의 과정에서 장애, 결함이 존재한다. 이 결함은 어느 시점에서 상징계가 질료를 결여한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상징계는 질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176)"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 질료”는 (라캉이 형식이나 형태라고 부른) 이미지를 의미한다. 남근 기표는 음경이라는 이미지를 질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여성에게는 이런 질료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적 기표를 갖지 못하고, 남성과 같이 “남근적 형태”를 상징적 요소로 삼아, 남근과의 상상적 동일시를 매개로 해서 자신의 성적 입장을 취하는 상징적 동일시를 이루게 된다.
9) 이 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Neurosis and Psychosis”를 볼 것.
10)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이는 도라가 남성과 동일시하며 여성성을 탐구하는 역설과 관계한다. 프로이트는 정육점 주인의 부인의 꿈을 분석하면서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는 친구의 동일시한다고 말하며 이를 히스테리성 동일시라 부른다. 뒤에 논의하겠지만 라캉은 그 부인이 친구가 남편의 욕망의 대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탐구하기 위해 남편과도 동일시한다는 것을 밝혀낸다. 핑크는 따라서 남성과 여성 모두와 동일시하는 이 여인이 “내가 남자인가 혹은 여자인가?라는 히스테리 환자의 질문”을 잘 예시한다고 지적한다 (Fink, Clinical 126).
III. 히스테리성 동일시: 욕망에 대한 욕망
그렇다면 히스테리 환자가 남근과 동일시하는 것이 히스테리성 동일시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히스테리성 동일시에 관해서 도라의 사례연구만큼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 에서 분석한 정육점 주인 부인의 사례이다. 소위 훈제 연어 꿈이라고 알려진 이 꿈은 히스테리성 동일시를 예시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에 대한 라캉의 논의는 「치료의 방향과 치유력의 원리」(“The Direction of the Treatment and the Principles of Its Power”)의 다섯 번째 단원 “욕망은 문자 그대로 여겨져야 한다”에 집약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꿈이 소원성취라는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 환자가 제시한 소원(욕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소개한다.11) 꿈에서 환자는 만찬을 열려고 했는데 훈제연어가 조금밖에 없어 시장을 보려했지만 상점이 닫혔고 물건을 배달시키려 전화하려했지만 전화기도 고장이 나서 결국 만찬을 포기한다.
프로이트는 이 꿈에서 두 가지 욕망을 분석한다.
첫 번째 욕망은 남편이 자신의 친구를 칭찬하는 것을 시샘하는 것과 관계된다. 만일 그녀가 훈제연어를 좋아하는 친구를 초대해 그 친구가 살찐다면, 풍만한 여성을 좋아하는 남편이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이를 바라지 않는 환자의 욕망 때문에 만찬을 열지 못하는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꿈에서 또 다른 차원을 분석한다. 그는 꿈속에서 환자가 만찬을 열지 못함으로써 훈제연어를 먹고 싶어 하는 친구의 욕망이 포기되는 것뿐 아니라 환자 자신이 만찬을 열고자 하는 욕망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친구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는 환자가 상어알 샌드위치를 포기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환자는 상어알 샌드위치를 먹고 싶지만 오히려 남편에게 상어알을 사주지 말 것을 부탁한다. 그녀는 성취되지 못한 소원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좋아하는 연어에 선뜻 지출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친구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면 이는 곧 그녀가 (욕망을 성취하지 못한) 그녀의 친구와 동일시했기 때문이고, 이 동일시 때문에 그녀는 현실에서 상어알 샌드위치에 대한 욕망의 포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히스테리성 동일시의 과정을 보여준다.12)
라캉은 이 꿈을 “히스테리 환자의 꿈”으로 정의하며 환자의 “만족되지 않은 욕망을 가지려는 욕망”에 주목한다(“Direction” 518). 환자가 상어알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지 않으려는 이 “욕망에 대한 욕망”은 상어알에 대한 욕망이라는 기표로 나타나고, “환자 자신의 상어알에 대한 욕망은 꿈속에서 환자 친구의 훈제연어에 대한 욕망에 의해 대치된다”(519). 주지하다시피 라캉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 에서 꿈작업(dream-work)의 핵심 요소로 설명하는 압축(condensation)과 전치(displacement)를 각각 은유(metaphor)와 환유(metonymy)에 해당한다는 언어학적 해석을 한 바 있다.13)
그는 이 꿈을 이 두 가지 요소로 해석한다. 훈제연어가 상어알을 대신하는 것은 “은유효과를 낳기 위해 하나의 용어가 다른 용어를 대치하는 것”이라는 은유공식을 따르므로 이 꿈은 “욕망의 은유”를 보여준다(519).
반면에 상어알에 대한 욕망이 상어알에 대한 만족되지 않은 욕망을 의미하는(signify) 것은 상어알에 대한 욕망이 기표이고 만족되지 않은 욕망이 기의(signified)라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상어알에 대한 욕망과 만족되지 않은 욕망은 은유관계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욕망이 . . . 상어알로 미끄러지자마자, 상어알에 대한 욕망은 이 욕망의 환유가 되고, 이 욕망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존재하려는 욕망/결여(want-to-be)에 의해 필연적이 된다”(520).14)
여기에서 기표가 다른 기표를 지시하는 것에 의해 발생하는 환유의 효과를 라캉은 “빈약한 의미”(scant meaning)라고 부르고, 만족되지 않은 욕망의 근저에는 바로 이 빈약한 의미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욕망이 존재의 결여-욕망의 환유라는 것”을 보여준다(520).
왜 이 두 욕망의 관계가 환유적인가? 솔레르(Colette Soler)는 꿈에서 상어알(에 대한 환자의 욕망)을 훈제연어(에 대한 친구의 욕망)가 대치한 것과 달리, (상어알에 대한) 만족되지 않은 욕망이 사라지고 상어알에 대한 욕망이 이를 대치한 것이 아니라 의미사슬에서 둘이 공존하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시하는 관계임을 지적한다. 이 때 주목할 것은 만족되지 않은 욕망이 상어알에 대한 욕망으로 미끄러지는 환유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은 “존재하려는 욕망/결여”라는 라캉의 발언이다.
라캉이론에서 의미효과(signification)는 오로지 은유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훈제연어가 상어알을 대신하는 은유의 관계에서 훈제연어의 실제 의미는 상어알이라는 의미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어알에 대한 욕망이 상어알에 대한 만족되지 않은 욕망을 지시하는 것에서는 어떤 의미효과도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관계에서 “전이되는 것은 결여에 대한 지시에 불과하며 이는 모든 욕망에 내재한 것이고 지속하는 것이다”(Soler, What 53).15) 즉 이 두 욕망에서 공통적으로 지속되는(insist) 것은 결여/욕망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때 발생하는 것은 “빈약한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욕망의 환유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효과가 아니라 욕망/결여의 지속이다.
이 욕망의 지속과 히스테리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욕망의 지속은 만족되지 않은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프로이트는 일찍이 “히스테리가 제기하는 수수께끼같은 모순은 히스테리를 특징짓는 반대항의 쌍 즉 과장된 성적 갈망과 성에 대한 과도한 혐오감”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Three 165).
나지오(Juan-David Nasio)가 지적하듯이 히스테리 환자는 성행위를 하면서도 성행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않고 성행위에 대한 불만족의 상태에 놓이게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불만족 자체를 욕망하는 상태를 추구한다(36-37). 솔레르는 정육점 주인 부인과 그 친구가 만족되지 않는 욕망을 추구한다는 사실에서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에는 박탈에 대한 욕망—욕망의 조건으로서의 박탈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욕망하는 것 그 자체가 즐거운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Hysteria” 258).
히스테리 환자는 욕망이 만족되지 않는 것을 즐긴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이 꿈을 해석하면서 만족되지 않은 욕망이 “히스테리성 동일시의 . . . 요체(linchpin)”임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Direction” 522). “만일 우리 환자가 그녀의 친구와 동일시한다면 이는 연어에 대한 만족되지 않은 욕망에서 그 친구가 비견할 수 없기(inimitable) 때문이다”(522).
그러나 프로이트가 말하는 히스테리성 동일시는 단순히 환자가 친구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친구와 동일시하려는 배경에는 남편의 사랑을 얻고자하는 욕망이 존재한다.
히스테리성 동일시는 제 3자와의 관계가 전제되는 것이다. 히스테리 환자가 다른 히스테리 환자의 증상을 모방하는 것의 무의식적 기저에는 다른 환자와의 “공통적인 성적 요소”가 존재한다.
정육점주인 부인과 친구의 공통요소는 바로 남편의 사랑이다. 이 환자가 “꿈속에서 친구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 . 그녀가 남편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친구의 위치를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Interpretation I: 150-51). 히스테리 여성은 자신과 성관계를 가졌던 사람이나 자신과 동일한 사람과 성관계를 가진 여자들과 동일시한다. 이 꿈의 주인공이 꿈속에서 친구를 대신하고 만족되지 않은 욕망을 만들어내어 친구와 동일시한다면, 이는 히스테리 사고과정의 규칙을 따른 것으로 남편에게 사랑받는 친구와 같은 평가를 남편에게 받기 위해 친구와 동일시하고 친구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라캉의 해석이 프로이트의 꿈 해석을 넘어서는 차원은 바로 부인이 남편과도 동일시한다는 것을 밝혀낸 데 있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성 동일시에서 제 3자인 남편의 사랑을 설명한 데 그친 반면, 라캉은 환자가 남편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넘어서 남편과 동일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환자는 남편에 대해 “그의 모든 것이 만족된 때에도 그가 여전히 뒤틀려 있는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다(“Direction” 523). 환자는 자신이 남편의 성적 욕망을 만족시킨 후에도 남편이 잉여의 욕망을 갖지는 않을까 의문시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자신이 혹시 남편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녀와 만족할 수 없는 남자에 의해 . . . 다른 여인이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해서 히스테리성 동일시에 관련된 질문의 정확한 공식이다.
이런 점에서 그 여성은 남자와 동일시하고 훈제연어 조각은 대타자의 욕망의 장소를 차지하게 된다. . . . 비록 약간 날씬한(skinny) 남근일지라도, 남근이 되는 것—이것이 욕망의 기표와의 최종적인 동일시가 아닌가? (523)"
환자는 남편과 동일시하는데 그 목적은 친구에 대한 남편의 욕망을 가늠하기 위해서이다. 즉 환자는 남편의 관점에서 친구의 어떤 점이 남편을 매료시키는가의 질문을 던진다.
라캉이 말하듯 여기에서 히스테리 주체는 바로 대타자(남편)의 욕망에 대한 질문 자체가 된다.
“그녀는 아갈마(agalma), 친구의 매력, 그녀의 유혹적인 날씬함의 미스터리를 남자의 관점에서 묻는다. 주체는 . . . 따라서 대타자—여기서 는 남자—의 질문이 되고, 그녀는 주체로서 그와 동일시한다”(Soler, What 57).
환자와 친구와의 동일시가 상상적 동일시라면 남편인 대타자와의 동일시는 상징적 동일시이다. 그런데 남편과의 동일시가 그녀를 남성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16)
오히려 환자가 상어알을 쉽게 사줄 남편이 상어알을 사주지 못하게 하는 것, 즉 “환자가 상어알과 게임하는 것은 여성적 가장(feminine masquerade)의 일부이다”(Soler, What 58).
그런데 환자의 최종적인 동일시는 남편과의 동일시가 아닌 남근과의 동일시이다. 이때 남근은 대타자(남편)의 욕망의 기표이다. 그리고 남편의 욕망이 날씬한 친구를 향해있기 때문에 “약간 날씬한 남근”이다.
환자는 대타자의 욕망의 기표인 남근(Φ)이 되려고 하며, “대타자의 결여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Soler, “Hysteria” 260). 히스테리 환자의 궁극적 목적은 자신을 “욕망하는 주체”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녀가 상어알을 스스로 금지하는 것은 결여 즉 욕망의 주체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망의 변증법은 반드시 대타자의 욕망을 매개로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찾게 혹은 유지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여인은 “어떻게 히스테리 환자가 ‘거의 전적으로 타자의 욕망에서 자신을 구성하는가’”를 보여준다(Nolan 27).
“라캉에게 신경증적 입장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을 대타자의 욕망의 존재에서, 대타자의 욕망과 대면해서, 자신을 욕망하도록 구성하기 위해 주체가 도움을 요청하는 울부짖음이다’”(Nolan 28).
대타자의 결여/욕망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으려는 히스테리 환자는 대타자의 욕망을 유지하려한다. 대타자가 결여/욕망해야만 자신의 존재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13) “The Instance of the Letter” 참조
14) 솔레르(Soler)가 지적하듯 to be 부정사는 욕망이 문법적으로 표현되는 형식이다. “Hysteria and Obsession” 260쪽.
15) 솔레르는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사용하는 “전이”(transference)라는 용어에 주목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프로이트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전이는 분석상황에서의 전이, 즉 환자가 과거의 대상에게 카섹트했던 리비도를 분석가에게 카섹트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꿈의 해석 에서 꿈작업의 요소 중 하나인 전치(displacement)를 설명하면서 의식의 검열을 피하기 어려운 무의식적 꿈사고(dream thought)에서 검열을 피하기 쉬운 다른 꿈 사고로 정신적 강도(psychical intensities)가 옮겨가는 것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정신적 강도의 전이와 전치”라고 표현한다. 즉 이 때 전이는 전치와 동일한 의미이며, 따라서 라캉의 환유공식에 해당한다.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I) 307쪽 참조. 프로이트 이론에서 심리적 강도가 전이/전치되는 것은 라캉 이론에서 욕망이 지속되는 것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16) 이 점에 대해서는 솔레르 What Lacan Said about Woman 58쪽을 볼 것. 솔레르는 이를 L 도식으로 설명한다. “Hysteria and Obsession” 260쪽 참조.
IV.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과 여성적 쥬이쌍스
라캉의 초기 히스테리 연구의 종점은 남근이다. 그러나 앙코르 (Encore)는 남근을 넘어선 여성적 쥬이쌍스를 도입한다. 이 쥬이쌍스와 히스테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듯이 히스테리에 대한 라캉의 강연은 단편적이고 불분명하게나마 히스테리 문제를 여성적 쥬이쌍스와 실재에 대한 자신의 후기이론과 연결시킨다.
히스테리와 쥬이쌍스 그리고 실재의 연관성에 대한 단서는 구조에 대한 라캉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강연의 중간에는 구조와 실재의 관계에 대한 짧은 언급이 등장한다. 그는 “나는 실재에 도달하려는 희망으로 수학에서 변함없이 가장 명백한 부분을 차지하는 구조(structure)의 개념을 꺼낸다”고 말한다(“On Hysteria” 12). 그는 구조와 형식(form)은 다른 것이며 형식 혹은 형태(Gestalt)가 물거품(bubble)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거울단계에 대한 라캉의 글에 비추어볼 때 라캉은 여기에서 상상계적인 형태/형식과 실재계에 속한 구조를 구분한다고 볼 수 있다.
구조 개념은 히스테리와 실재 및 여성적 쥬이쌍스를 매개하는 필수불가결한 개념이다. 앞서 논의했듯이 라캉은 히스테리를 주체와 대타자의 변증법적 관계의 구조로 파악했다.
라캉이 세미나 XVII 정신분석의 이면 에서 히스테리를 네 개의 위치와 항목을 지닌 담론 중 하나로 파악한 것은 히스테리를 구조의 관점에서 더 상세히 해석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정육점 주인 부인은 자신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대타자)의 욕망을 유지하려는 즉 그의 욕망이 만족되지 않게 하려한다. 이를 위해 그녀는 대타자의 욕망의 기표인 남근과 동일시하려한다.
정신분석의 이면 에서 주체, 대타자, 남근의 관계는 네 항목을 지닌 히스테리 환자 담론의 구조로 재해석된다. 라캉은 그의 담론구조에서 네 항목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라캉은 “진리 없이” “생경한 실재”를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와 실재 사이에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Other Side 174). 실재에 접근하는 것은 진리이다. 히스테리 환자 담론의 구조에서 “실재의 진리는 대상 소타자에 존재한다”(Ragland 75).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에서 행위자(agent)의 위치에는 분열된 주체(S/ )가 있고 진리(truth)의 위치에는 대상 소타자(a)가 있다. 타자(Other)의 위치에는 주인기표(S1)가 있고, 생산물(production)의 위치에는 기표의 사슬로 이루어진 지식(S2)이 있다. 라캉은 행위자와 타자의 관계는 “불가능”의 관계라고 말한다.
“첫째 줄은 여기에서 화살표로 표시된, 항상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된, 하나의 관계를 구성한다”(174).
즉 행위자가 타자로 향하는 관계는 불가능한 관계이다. 라캉은 주인담론의 예를 들면서 주인이 타자의 위치에 있는 노예 혹은 세계가 기능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주인담론에서 모든 세계가 기능하게 하는 주인은 실제로 불가능하다”(174). “그러나 둘째 줄의 차원에는 화살표의 제시가 없다. 의사소통이 없을 뿐 아니라 장애(block)의 역할을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174) 즉 생산물과 진리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된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생산물은 진리와 무관하다”(174). 라캉은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것 즉 진리를 보호하는 것을 “무능”(impotence)이라 부른다.17)
따라서 행위자와 타자의 관계는 불가능의 관계이고 생산물과 진리의 관계는 무능과 단절의 관계이다.
히스테리 환자는 말하는 순간, 즉 자신의 욕망을 기표로 표현하는 순간 “원초적 대상을 상실했고 기표들 사이에서 분열되기” 때문에 “결코 만족되거나 파괴될 수 없는 항상 지속적인 욕망”을 갖는다(Verhague, Beyond 28). 이렇게 주체가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것은 a → S/ 로 표기될 수 있다.
그녀는 따라서 자신의 욕망에 대한 해답을 대타자인 주인에게서 찾으려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내 욕망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주인에게 요구한다(Verhague, Beyond 29).이는 S/ → S1 으로 표기된다. 주인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에게 지식을 만들어내어 제시한다. 이는 S1 → S2 으로 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산물과 진리 사이에는 무능과 단절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이런 지식은 그녀의 진리인 대상 소타자에 대한 아무런 해답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 혹은 그녀의 특수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녀)는 과학이론, 종교 등을 받는다. . . 생산물로서의 지식은 진리의 위치에 있는 대상 소타자에 관해 아무런 중요한 말도 할 수 없다”(Verhague, Beyond 29).
히스테리 환자가 대타자인 주인에게 자신의 욕망을 설명하려해도 기표의 개입으로 그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주인이 제시하는 지식은 그녀의 진리인 대상소타자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는 “무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무능 때문에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이 성립한다.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의 특징은 히스테리 환자가 주인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히스테리 환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일종의 파업을 한다. 그녀는 그녀의 지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주인의 기능의 가면을 벗긴다”고 말한다(Other Side 94).
히스테리 환자는 끊임없이 대타자에게 자신의 욕망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지만 “이 지식은 피분석가에게 잠시만 만족스러울 뿐이다. 그 지식은 분석가의 지식에서 결여를 추구하는 히스테리 환자에 의해 거의 즉각적으로 의문시, 검토, 조사,평가된다”(Fink, Clinical 132).
즉 히스테리 환자는 대타자에게 끊임없이 해답을 요구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해답을 부정함으로써 그의 권위에 도전하며 따라서 대타자를 무능의 존재로 만든다.
라캉은 히스테리 환자가 대타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의 예를 도라의 사례에서 찾는다. 도라의 아버지는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는” 아버지, 즉 여성과의 성적인 능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 “이상화된 아버지”로 여겨진다.
이 이상화된 아버지는 “원초적인 상실에 종속되지 않은 상상적 아버지, 거세를 넘어선 완벽한 아버지”이며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 (Totem and Taboo)에서 등장하는 원초적 아버지이자, 라캉의 성차공식에서 남근기표에 종속되지 않는 예외적 존재이다(Verhague, Does 112).18)
“히스테리 환자는 전적인 주인으로서의 남자-아버지, 욕망과 향락에 대해 아는 자를 상상하고 따라서 구성하려한다. 그녀는 이렇게 원초적인 아버지를 만들어서 실재의 아버지와 상징적인 아버지 사이의 균열을 메우려한다. 일단 주인이 만들어지면 그는 여성(The Woman)에 대한 기표를 주어 적절한 여성적 정체성을 가능하게 해야한다”(Verhague, Does171).
이는 히스테리 주체가 대타자의 결여를 메움으로써 완전한 대타자를 만들어 그 대타자가 “특수한 여성적 성 정체성에 대한 특수한 기표를 제공할 수 있게 하려는” “히스테리적 환상(hysterical fantasy)”을 뜻한다(Verhague, Does 176). 이 환상에서 히스테리적 주체는 “주체로서 사라지고 . . . 단순한 대상으로 환원된다”(Verhague, Does 176). “히스테리 환자는 대타자의 욕망을 가늠해서, 대타자가,결여하기 때문에, 욕망하게 만드는 특별한 대상이 되고자 한다”(Fink, Clinical120).
이때 히스테리 환자는 대타자(남성)의 대상소타자가 된다. 라캉은 히스테리 환자의 “진리는 그녀가 욕망되기 위해서 대상 소타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176). 핑크(Bruce Fink)는 따라서 히스테리 주체의 근본적 환상의 공식을 a⃟ A/ 로 표현한다(Clinical 121).
그러나 이 이상적 아버지의 실제 모습 즉 그의 진리는 거세이다. 라캉은 도라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의 성적 능력과 관련해서 거세된 남자”일 뿐이라고 말한다(Other Side 95).
그는 또한 이와 관련해서 K씨가 호수가에서 도라에게 자신의 아내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을 분석한다. 이 순간 “대타자의 쥬이쌍스가 그녀에게 제시되며,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쥬이쌍스의 수단으로서의 지식이기 때문에 그것[쥬이쌍스]과 무관하려 하지만, 이 지식을 진리, 그녀가 도라로서 체현하는 주인의 진리에 봉사하게 만들려한다. 그리고 이 지식은 . . . 주인이 거세되었다는 것이다”(Other Side 97).
도라의 문제는 “자신이 여성으로서 누구인가”라는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K씨는 도라가 동일시하는 K부인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그의 쥬이쌍스의 대상으로 만들려한다.
그리고 “그가 이 지식을 쥬이쌍스로 제시하는 이 순간 그녀는 그가 거세되었다는 것을 그에게 지적하는 행위로의 이동을 하게 된다”(Ragland 83).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에서 “주인기표의 효과를 따를 때 히스테리 환자는 노예가 아니다”(Other Side 94). 그녀는 주인기표의 노예가 아니고 “자신의 신체를 성적 신체로 주기를 거부한다”(Ragland 82).
라캉은 히스테리 환자 담론의 토대는 “어떻게 히스테리 환자가 최초의 불만족(non-satisfaction)을 상징하는가”라고 말한다(Other Side 74). 히스테리 환자는 대타자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환원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라캉은 정육점 주인 부인의 경우 자신의 친구가 남편의 성적 욕망을 만족시켜주기를 자신이 원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도라는 이를 알고 있다.
“정육점 부인은 도라처럼 자신이 궁극적으로 기쁘게 이 대상을 다른 여자에게 맡기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Other Side 74). 즉 도라와 정육점 부인 모두 대타자의 성적 욕망의 대상, 쥬이쌍스의 대상이 되려하지 않는다.
“히스테리 환자는 그녀의 남성 파트너의 성적 만족의 원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않은 채로 유지하기를 선호하며 자신 이외의 다른 여자가 침대에 있다는 것을 상상한다”(Fink, Clinical 127).
그렇다면 히스테리 환자는 다른 여성이 대타자(남성)를 성적으로 만족시키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는가?
라캉은 정육점 부인의 꿈에 대해 말하면서 “그녀의 남편에게 필수적인 것을 다른 여성에게 맡김으로써 그녀는 잉여 쥬이쌍스(surplus jouissance)를 얻으려한다”고 말한다(Other Side 74).
이 잉여 쥬이쌍스는 다름 아닌 대상 소타자이다. 라캉은 히스테리 환자에 대해 “대상 소타자로서 그녀는 추락(fall), 담론의 효과로서 추락한 대상”이며 히스테리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남성이라고 불리는 타자가 이 담론의 문맥에서 그녀가 어떤 소중한 대상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34).
즉 “그녀는 그의 쥬이쌍스의 원인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이 되기를 원한다”(Fink, Clinical 127). 히스테리 환자는 “주인이 자신의 신체를 즐기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근본적인 ‘아니오’이지만 자신을 욕망의 기표인 남근으로 설정함으로써 그녀는 ‘그가 욕망하게 만들려고’ 애쓴다”(Laurent 32).
성적 만족, 즉 쥬이쌍스의 대상이 아닌 욕망의 원인의 대상이 되어 대타자를 욕망하는 주체로 유지함으로써 히스테리 환자는 잉여 쥬이쌍스를 취한다. 히스테리환자는 자신의 신체를 남성에게 주지 않음으로써 남근적 쥬이쌍스를 상실한다. 그러나 이런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 잉여 쥬이쌍스를 얻는다.
“남근적 쥬이쌍스의 금지에 대한 대체물로서 무엇인가가 도입되는데 그 기원을 우리는 . . . 잉여 쥬이쌍스의 기능으로 정의했다”(Other Side 74).
히스테리 환자 담론의 구조는 따라서 주체가 대타자(남성)의 남근적 쥬이쌍스의 대상이 되는 것을 좌절시킴으로써 대타자의 욕망을 유지한다. 위에서 언급한 히스테리 환자의 환상의 공식(a ⃟ A/ )에서 대타자가 완전한 대타자(A)가 아니라 사선 그어진 결여된 대타자(A/ )인 것은 대타자가 욕망하고 있다는 것 즉 거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세된 대타자는 히스테리 환자가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에 대해 던지는 질문에 답을 제시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다.
세미나 XVII에서 라캉이 제시하는 도라 사례의 구조적 분석은 도라가 대타자(프로이트, 아버지)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인기표 즉 상징계의 대타자는 여성의 정체성에 답할 능력이 없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히스테리 주체는 여성의 성 정체성의 딜레마에 봉착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는 아버지/대타자의 무능도 대면해야한다.
“그녀는—내가 아버지의 기침, 그의 궐련과 동일시한 아버지의 딸인가 혹은 K부인과 같은 아름다운 성적 여성인가 혹은 마돈나와 같은 동정녀엄마인가—라는 정체성의 분열로 고통받을 뿐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의 거세와도 대면해야한다”(Ragland 83).
이는 근본적으로 대문자 여성(The Woman)을 나타낼 기표가 없고 여성의 성 정체성이 남근기표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라에게 해답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와 K씨뿐만이 아니다. 라캉은 프로이트 역시 그녀에게 대답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도라에 대한 프로이트의 최종적 판단은 도라가 K씨와 임신한 것을 상상함으로써 K씨의 아이를 갖고 싶어했다는 것이다.19)
프로이트는 도라가 남근을 대변하는 아기를 욕망했다고 해석하면서 결국 그녀의 음경선망(penis envy)을 주장하는 것이다. 라캉은 바로 이점에서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환자의 근본적인 욕망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프로이트는 . . . 히스테리 환자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그가 음경선망으로 못박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난다고 말했다.” 라캉은 “왜 그가 안나,에마, 도라 . . . 에게서 얻은 지식을 이 신화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치했는가”라고 묻는다(99).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은 프로이트/대타자가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거세된 무능의 존재이며, 히스테리 환자는 대타자에게 욕망의 원인이 되는 대상소타자가 됨으로써 대타자를 거세된 욕망의 주체로 유지하려하고, 따라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세된 대타자는 여성 정체성의 기표를 제공하지 못하기에 여성이 실재의 심연과 대면하게 한다. 도라가 K씨의 뺨을 때리는 행위로의 이동은 바로 이런 실재와의 외상적 만남이자 동시에 이 만남이 유발하는 불안에 대한 방어가 아닐까?20) 라캉이 정신분석의 이면 에서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이라는 구조의 관점에서 히스테리의 문제를 탐구한 결과는 남근과의 동일시가 아닌 주인/대타자의 근원적 결여와 무능이다.
이런 점에서 대타자의 무능과 여성기표의 근원적 결여를 제시하는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은 상징계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실재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라캉이 세미나 20 앙코르 에서 여성주체가 상징적 남근(Φ)과의 관계가 아닌 대타자의 결여의 기표 S(A/ )와 맺는 관계 즉 여성적 쥬이쌍스로 향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이런 실재와의 조우를 시사한다.21)
핑크는 라캉의 성차공식에서 남성 쪽의 요소들이 상징계와 관련된 반면 여성 쪽의 요소들은 모두 실재와 관련된다는 점을 지적한다(Fink, Lacanian 114).
대타자의 결여의 기표 S(A/ )는 “어떤 실재(실재의 상실 혹은 배제)가 기표를 찾는 것”이며, 여성이 이 기표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라캉이 “프로이트적 사물”(Freudian Thing)이라고 부른 이 실재의 사물과의 우연적 만남을 지칭한다. 이 불가능한 기표를 “찾는 것은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우연적인 만남(τυϰή)으로 이해되어야한다”(Lacanian 115).22)
여성적 쥬이쌍스는 경험할 수 있지만 알 수 없는 쥬이쌍스이며 상징계 안의 존재가 아닌 “외존”(ex-sistence)의 경험이다. “존재하는 모든 쥬이쌍스는 남근적이다. . . 대타자의 쥬이쌍스는 외존할 뿐이고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기 위해서는 말해져야하기 때문이다”(Fink, “Knowledge” 39).
지젝은 여성적 쥬이쌍스가 외존하는 지점은 바로 상징계의 균열, 즉 실재라고 말한다.
“[여성적] 쥬이쌍스는 따라서 상징적 네트워크에 포획된 실증적 실체가 아니라 상징질서의 균열과 구멍을 통해서만 빛나는 어떤 것이다”(Žižek, Less 783).
라캉이 여성을 대타자라고 말할 때 이는 상징적 대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억압되는 대타자, 즉 상징적 대타자와 구별되는 “실재로서의 대타자, 불가능한 사물, ‘비인간적’ 상대, 상징 질서에 의해 매개된 대칭적 대화가 불가능한 대타자”를 의미한다(Žižek, “Real” 70).
이제 라캉의 히스테리 이론이 어떻게 여성적 쥬이쌍스로 발전하는지를 간단히 지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주체와 대타자의) 욕망에 기초한 히스테리 이론은 여성적 쥬이쌍스에 기초한 여성성의 이론으로 탈바꿈한다. 이는 라캉이론의 중심이 욕망에서 쥬이쌍스로 바뀐 것과 전체적으로 맥락을 같이한다.23)
라캉은 히스테리 환자가 제기하는 여성성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여성적 쥬이쌍스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은 라캉을 세미나 XX으로 안내하며, 이 세미나에서 그는 성차 도표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논리를 제공한다”(Ragland85).
“히스테리적 입장을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쥬이쌍스를 만족시키지 않는 것이다”(Soler, What 61).
그러나 이렇게 쥬이쌍스를 만족시키지 않는 것, 즉 결여 자체에서 쥬이쌍스가 발생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라캉은 히스테리 환자가 남근적 쥬이쌍스(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잉여 쥬이쌍스를 얻는다고 말한다.
히스테리 환자는 대상소타자가 됨으로써 잉여쥬이쌍스를 획득한다. 그러나 솔레르가 지적하듯이 “결여에서 만족을 얻는 것”과 “살에서 만족을 얻는 것”은 다르다(Soler,What 61).
히스테리 환자가 결여에서 얻는 잉여 쥬이쌍스는 신체적 향락이 결핍된 창백한 쥬이쌍스이다. 히스테리적 주체가 욕망의 주체로 남기를 원한다면 여성은 이와 달리 쥬이쌍스를 경험하며 살기를 원한다.
솔레르는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프로이트에 대한 라캉의 답변이 쥬이쌍스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Soler, What61). 더 정확히 말하면 여성은 남근기표에서 해방된 여성적 쥬이쌍스를 얻기를 원한다. 라캉이 대타자의 여성적 쥬이쌍스를 “‘남근을 넘어선’ 신체의 쥬이쌍스”로 명명하며 신체의 향락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Encore 74).
그렇다면 라캉이 앙코르 에서 남근적 쥬이쌍스와 여성적 쥬이쌍스를 명확히 구분한 것은 히스테리 주체가 남성의 쥬이쌍스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쥬이쌍스를 찾는 가능성을 탐색한 결과가 아닐까?
피에르 나보(Pierrer Naveau)는 라캉이 세미나XVI, XVII, XVIII에서 히스테리 환자를 논하면서 히스테리 환자가 남성에게 자신의 신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유한한 쥬이쌍스가 아닌 무한한 “절대적 쥬이쌍스”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고 주장한다.
즉 히스테리 환자는 “유한한 쥬이쌍스에서 벗어나 무한한 쥬이쌍스인 이 신비로운 쥬이쌍스로 향하는 경향을 지닌다”(Naveau 48).24) 히스테리에 대한 라캉의 탐구는 히스테리성 질문, 히스테리성 동일시, 남근과 대상소타자와의 동일시, 그리고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을 거쳐 궁극적으로 여성적 쥬이쌍스와 실재를 향하는 것이다.
17) 히스테리 환자의 담론에서 대상소타자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주인/아버지의 무능은 거세와 성불능의 의미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18) 이 이상화된 아버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외존(ex-sist)하는 아버지로서 “모든 욕망에서 해방되어 더 이상 근원적 결여에 종속되지 않은 자, 즉 죽은 아버지”이다(Verhague, Does 112).
19) 도라의 임신과 출산 환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Fragment 103-04쪽 참조.
20) 라캉은 행동화의 무대가 상징계이고 행위로의 이동은 실재계로의 탈출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즉 “이 두 등록간의 본질적 구분—한편으로는 실재가 엄습하는 장소인 세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구성되는, 말하는 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는 대타자의 무대”가 존재한다(Anxiety 116). 로베르토 하라리(Roberto Harari)에 의하면 행동화와 행위로의 이동은 모두 “불안에 대한 방어이며 불안을 피하려는 시도”이다(78). “행동화는 대상이 나타날 무대를 창조함으로써 대상이 존재하게 만들고 대상을 효과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 혹은 그녀의 행동으로 주체는 동시에 대상 소타자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한다”(79). 행위로의 이동은 “대상 소타자와의 거의 전적인 동일시”를 통해서 불안을 방어한다. 즉 “도라가 K씨의 뺨을 때리는 것은 . . . a 와의 준-직접적인(quasi-direct)관계의 차원에서 적어도 일시적으로 불안을 피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상황”이다(84).
21) 라캉이론에서 남근의 의미도 변한다. 핑크는 앙코르 의 성차공식에 나타나는 S(A/ )가 세미나 VI에서는 “기표로서의 남근” 즉 대타자의 욕망/결여의 기표를 의미했다가 앙코르에서는 원초적 상실의 기표로 바뀌었으며 이런 변화는 상징계에서 실재계로의 변화에 상응한다고 지적한다. Fink, The Lacanian Subject 114쪽 참조.
22) 라캉은 투케(tuché, τυϰή)를 “실재와의 우연적 만남”으로 번역한다.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53쪽. 욕동이 기표에 의해 잘려나가 부분적으로만 만족되는 남근적 쥬이쌍스와 달리, 여성적 “대타자의 쥬이쌍스는 욕동의 완전한 만족을 제공하는 사랑을 통한 승화의 형태를 포함한다”(Fink, Lacanian 120). 지젝은 남근적 쥬이쌍스를 욕동의 쥬이쌍스로 여성적 쥬이쌍스를 대타자의 쥬이쌍스로 구분한다. “The Real of Sexual Difference” 59.
23) 이런 변화에 대해서는 Fink, A Clinical Introduction to Lacanian Psychoanalysis 10장 “From Desire to Jouissance”를 참조할 것.
24) 라캉은 앙코르 에서 대상소타자와의 관계를 영혼사랑(soulove)으로 명명한다. 남성은 여성/대타자와 관계할 때 여성을 자신의 영혼으로 착각하는, 혹은 대상소타자로 여기는 환상구조에 사로잡힌다.
라캉은 여성 역시 대상소타자와의 관계를 가질 때 영혼사랑을 하며 이는 히스테리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성들 역시 영혼사랑에 빠진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영혼을 영혼사랑한다.”
영혼사랑은 성을 넘어선 혹은 성 바깥의 사랑이므로, 그들이 영혼사랑하는 대상은 “완전히 남성(동성)”이고, 이 영혼사랑은 “히스테리, 즉 남성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스스로 남자같이 성적(hommosexual)이 되거나 성을 넘어선다”(Encore 85).
라캉은 동성을 의미하는 homo 대신 불어로 남성을 의미하는 hommo를 사용하여 hommosexual이란 신조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여성이 남성의 역할을 수행하며 남성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남녀 관계없이 자신의 상대방을 대상 a 로 환원시키는 방식으로 즐기는 것은 남성처럼 즐기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남자같이 성적이다.Fink, “Knowledge” 37 참조. 이런 점에서는 히스테리와 여성적 쥬이쌍스의 관계가 연속성이 아니라 단절 혹은 전환의 성격을 지닌다.
인용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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