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와 정신분석
박 찬 부
I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에서 프로이트가 제시한 트라우마(Trauma)의 정의는 간단명료하다:
“우리는 보호 방패를 뚫을 만큼 강력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외상적’이라고 말한다”(SE 18: 29).
그는 욕동(Trieb)의 설명에서와 같이 충동의 증가와 에너지의 범람으로 자아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위기적 상황에 대해서 ‘보호방패’(protective shield)라는 강력한 메타포를 써 왔으나 이 경우 그것이 갖는 의미는 단연 압권적이다. 국경수비대요 외부적 공격으로부터의 마지막 저지선인 자아의 방어 방패가 뚫려 그것에 균열이 생기면 그 균열의 틈 사이로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양의 외부적 자극이 내부로 투입되어 정신계에 대규모의 교란 사태가 벌어지고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이 잠정적으로 중단되는 비상 상황이 연출된다. 이것이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이다.
이런 트라우마적 상황 하에서 “우리는 정신계가 이러한 침입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30)라고 프로이트는 자문한다. 그것은 당장 과도한 양의 외부적 자극의 범람으로부터 정신계를 지킬 수는 없지만 “이미 들어온 자극물을 그것이 정신적인 의미에서 처분 가능하도록 다스리고(mastering) 묶는(binding) 문제이다”(30). 과도하게 다량으로 유입되어 정신계의 질서를 크게 교란시킨 외부의 자극을 묶고 다스려 내부의 질서와 통제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정신계의 자기 조절 능력의 중요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고도로 리비도 집중이 일어난 조직은 새로이 유입되는 에너지를 받아들여 그것을 정지된 리비도 집중 상태로 바꿔 놓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정신적으로 묶어 놓을 수 있다.
그 조직의 정지된 리비도 집중상태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의 묶는 힘(binding force)도 커진다. 그러므로 그것의 리비도 집중 상태가 낮으면 낮을수록 유입되는 에너지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그만큼 떨어진다. (SE 18: 30)"
트라우마 사건의 경우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자극이 정신계의 방어적 방패를 뚫을만큼 강력할 때는 내부 조직의 낮은 리비도 집중 현상 때문에 그것이 흘러들어오는 많은 양의 흥분 상태를 묶기에 적절한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위 표현대로 그것을 정지된 리비도 집중상태(quiescent cathexis)로 바꿔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문제는 외부로부터 보호 방패를 뚫고 유입된 강력한 자극, 에너지를 어떻게 묶고 다스려 트라우마 이전의 평정을 회복하느냐이다.
그러기위해서는 정신계의 고도로 집중된 리비도, 즉 초리비도 집중현상(hypercathexis)을 필요로 한다:
“[보호 방패]의 균열 주변에 충분한 고도의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서 리비도 집중 에너지가 각 처로부터 소환된다. 이 때 대규모의 ‘반 리비도 집중’(anticathexis) 현상이 벌어지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다른 정신 조직체는 빈곤하게 됨으로써 나머지 정신 기능이 극도로 마비되고 저하된다”(30).
야만의 흔적인 트라우마의 상처 부위에 초리비도 집중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방어적 대항성 리비도 집중(Gegenbesetzung) 전략을 펼치고 있으니 여기에 동원된 에너지 병력의 원 소유주격인 다른 정신 기능들은 극도로 저하되고 황폐화된다.
트라우마의 이러한 정신적 공황 상태가 외상성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보이는 ‘정신 기능의 일반적 유약화와 교란 상태’(12)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방어적 방패가 파열된 야만의 현장에는 리비도 집중을 통한 방어막 복원에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고 이것은 흐트러진 에너지의 묶기 작업(binding), 통제력(mastery) 성취 의지와 맞물려 있다.
이것을 좀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불안’(anxiety)과 ‘경악’(fright)에 대한 프로이트의 구분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불안은 위험을 예측하고 그것에 대비되어 있을 때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경악은 준비가 안된 상태로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느끼는 공포의 감정으로 외상성 경험은 이것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므로 불안은 경험 주체가 취하는 적극적, 능동적 태도를 반영하는 반면 경악은 어떤 수동성, 혹은 준비성의 부재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른바 ‘fort/da’ 게임의 경우 처음에는 아이가 어머니의 떠남과 사라짐이라는 위험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대한 아무런 예측이나 대비도 못한 채 그 트라우마적 사건이 자신에게 ‘발생하는’(It happened to him) 것을 무방비 상태로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특유의 상징적 놀이를 통해 그 불유쾌한 외상적 사건을 능동적으로 ‘발생하도록’(making it happen) 만듦으로써 그의 위험 대처 능력을 보여 주었고 이 능력이 그 외상적 경험을 경악의 상태에서 불안의 차원으로 경감시키는 ‘위대한 문화적 업적’(15)을 가능케 한 것이다.
메타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므로 수동성/능동성, 경악/불안, 비준비성/준비성, 리비도 집중(cathexis) 저하/리비도 집중 강화, 풀기(unbinding)/묶기, 통제력 저하/통제력 강화 등의 대극적 구조들은 긴밀한 연관 속에 상호작용 하면서 트라우마와 트라우마의 극복의 논리를 구성해 간다.
이러한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외상성 환자의 꿈에서이다:
“이러한 [외상성] 꿈들은 불안을 발진시킴으로써 사후적으로 자극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이다. 바로 그 불안의 부재가 외상성 신경증의 원인이었던 것이다”(32).
여기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60을 넘긴 나이에 독자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릴 가능성까지를 각오하고『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제시한 투기적 사고의 산물인 ‘죽음 욕동’(Todestrieb), 그리고 그것의 운행 원리를 설명해 주는 ‘반복 강박’(compulsion to repeat)의 개념과 만나게 된다.
본 논문은 바로 이 개념의 라캉적 함의를 살펴보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한 라캉 이론가의 말을 들어보자.
"반복 강박은 트라우마 상황을 관념들(Vorstellungen)과 묶으려는 정신계의 끈질긴 시도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묶기 과정(binding)이 [흥분의] 방출과 잇따른 감정의 소산(catharsis)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Verhaeghe 59-60)"
이 말은 라캉의 입장에서 본 트라우마의 발생과 그것의 치료의 문제를 집약적으로 전달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반복 강박은 정신적 묶기 과정의 일환이고 이것은 ‘관념들,’ 즉 언어적 문제와의 묶임으로 연결된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관념적 대변체’(Vorstellungsrepräsentanz)라는 개념을 언어적 기표(signifiant)라고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보호 방패의 균열로 과도하게 유입된 흥분의 방출과 잇따른 감정의 소산이라는 트라우마 치료 과정의 필수적 전제 조건이 언어적 접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에 의해서만이, 언어를 통해서만이 존재의 핵인 라캉적 실재(the real)에 닿을 수 있다는 분석 강령에 충실한 진술이다.
앞으로 전개될 이론적 천착을 위한 전초 기지로서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 제기한 트라우마의 문제를 라캉의 틀로 재구성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인간 존재의 주체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상징화 과정을 요구한다. 그것이 필연적인 것은 라캉이 ‘목숨이냐/돈이냐?’의 에피소드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듯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됨의 최소한의 지위를 담보 받기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 아닌 선택, 즉 ‘강요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선택을 강요받아 단행된 주체화, 상징화 과정은 그 결과/효과로서 또한 필연적으로 어떤 잔재물, 부산물을 생성하게 된다. 그것은 중세 연금술사들이 발견한 바, 연금술 처리 과정 후에 밑바닥에 남는 잔재물(caputmortiuum)과 비슷한 것이고 지식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탈낙원의 시련을 감수한 인류의 조상들에게 부적과 같이 따라붙는 원죄 의식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라캉적 실재(the real)이다.
라캉의 실재는 상징화 과정의 결과/효과로서 드러나지만 그것은 또한 상징 질서에 환원될 수 없는 ‘외-존재적’(ex-istent) 존재이다.이것이 라캉의 상징과 실재의 변증법이다.
‘정상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아버지-이름-의-기표’를 입력받은 사람은 ‘정상적’인 상징/실재의 관계를 유지하며 ‘재현과 그 불만’의 세계를 살아간다. 여기서 ‘정상적’(normal)인 관계란 ‘규범’(norm)을 지키는 관계, 다시 말해서 상징 질서에 복종하고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의 개념에 충실한 관계를 뜻한다. 예컨대, 근친상간의 금기(incest taboo)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자연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면서 또한 동시에 자연이고 문화이면서, 법 아닌 법(the Law)이고 인간이 숨 쉬는 공간인 구조와 질서를 형성한다.
상징적 재현 과정을 정상적으로 통과한 보통 사람은 이 금기 사항을 별로 저항감 없이 그대로 살아간다. 재현 과정에 하나의 ‘규범’으로서 ‘금기의 기표’가 정신계에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 사건은 이러한 상징적 재현 체계를 뿌리로부터 흔들어 놓는다는 데에 그 반인간적 야만성이 드러난다.
프로이트가 방어적 방패의 균열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트라우마 사건은 라캉의 용어로 주체의 상징적 재현 체계의 붕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트라우마 이론가들이 외상성 경험이라는 말 앞에 ‘비상징화된’(unsymbolized), ‘비재현화된’(unrepresented), ‘인정되고 소유되지 않은’(unclaimed) 등의 관형적 표현을 자주 붙이는 이유는 그 외상성 경험이 주체의 경험으로서 제대로 상징적으로 처리된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한다.
그것은 주체의 기존 질서에 통합될 수 없는(unintegrated) 이질적, 불법적 경험이다. 이로인해 주체의 상징적 재현 체계가 교란되고 무질서한 혼돈 상태가 야기된다. 이 혼돈의 와중에서 출현하는 것이 외상적 실재(traumatic real)이다.
라캉의 분석 치료에서 치료의 적(的)으로 삼고 있는 것이 이 외상적 실재이다. 그러므로 규범을 따르는 정상적인 상징화 과정이 보통의 실재를 낳는다면 규범을 따르지 않는 ‘비정상적인’ 외상적 상징화 과정은 특별한 외상적 실재를 생성한다. 라캉의 실재 개념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전자의 경우는 별 문제가 안 된다. 임상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다:
“분석의 목표는 실재의 마지막 한방울까지를 끝까지 상징화하는 데 있지 않고 . . . 외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실재의 파편들을 집중 공략하는 것이다”(LS 26).
외상적 사건으로 형성된 외상적 실재는 ‘정신계에 가해지는 작업에의 요구’라는 정신계의 자기 조절 장치에 따라 일정한 처리 과정에 부쳐진다. 앞에서 말한 묶기 작업, 통제력 회복에의 의지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전반적으로는 상상질서, 특수하게는 판타지의 몫으로 부하된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질서는 상징질서, 즉 언어의 문제와 불가분리하게 관련되어 있는 제2의 상상개념으로서 라캉이 1930-40년대에 ‘거울 단계’를 말하던 ‘순수한 상상질서’하고는 구별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이미지란 상징과 연결되어 있고 상징 기능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Reading S I & II, 122)라는 1950년대 초 이후의 라캉의 생각에 근거하고 있는데 50년대 말에 작성된 ‘욕망의 그래프’에도 상징이 상상을 포월 하는 식으로 도해되어 있다.
상상계를 이런 관점에서 읽어볼 때 라캉의 범주론/질서론과 관련하여 “상상이란 상징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을 무화시키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상징계 속에 있는 결핍을 보상한다. . . . 그것은 인간이 언어에의 진입을 통해 필연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삶의 충만성을 되찾아 오려는 시도이다”(van Haute 90)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트라우마 사건의 경우 상징적 재현 체계의 균열로 빚어진 외상적 실재에 대해서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해보라는 정신계의 ‘작업 명령’에 따라 상상계가 발동하고 야만의 폐허 위에 진무의 상상적 작업이 펼쳐진다.
이 작업은 앞에서 보았듯이 밤마다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꿈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상의 공간에서 욕망이 비상하는 낮의 꿈, 판타지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밤의 꿈과 낮의 꿈 사이에는 완벽한 아날로지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 둘이 다 같이 욕망 성취(wish-fulfillment)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재현하기 어려운 것을 재현하려는 애틋한 노력을 보이기 때문이다”(Verhaeghe 56).
상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재현성 복원에의 노력은 그러나 그 행보가 느리다.
라캉의 분석 치료는 재현의 대표 주자, 언어를 내세워 문제의 환부를 직접 공략함으로써 정신계의 느린 행보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피분석가로 하여금 외상적 ‘사건’에 대해서—그것이 아무리 일관성이 없다 하더라도—밤 꿈꾸고 낮 꿈꾸고 말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가 그 사건을 말들과 연결시키고 더 많은 기표들과 관련시키도록 유도한다”(LS 26).
외상적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표를 통하는 것이며 언어만이 존재의 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라캉의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이었다.
*이 논문은 2008년도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연구과제개발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II
라캉이 1964년에 정신분석의 네가지 기본개념에서 “내가 무의식에 대해서 가르쳐온 것에 대해서 나는 지금 문제성 있는 입장에 처해 있다”(FFCP 149)라고 선언했다.
이 고백적 선언은 무엇보다도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라고 외치던 1950년대의 상징적 무의식론에 대한 반성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무의식에 관한 그의 논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라캉의 기존의 상징적 무의식론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음을 알게 된다.
억압의 산물인 무의식은 그대로 대타자의 담론이고 언어적 기표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것은 라캉의 말년의 분석 지침에도 그대로 견지되어 온 원칙이다. 다만 라캉이 ‘문제성’이라고 지적한 문제에는 무의식에는 이와 같이 말하여질 수 있는 언어적 측면 이외에/너머에 ‘말할 수 없는 것’(the unspeakable)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고 이러한 인식은 실재계 시대를 맞아 상징과 실재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통해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강조가 상징에 대한 폄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실재가 상징화의 결과/효과라고 하지 않았는가. 상징화는 인간화, 사회화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 없이는 ‘실낙원’을 통한 인간 주체의 탄생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라캉의 정신분석은 상징을 통해 실재에 접근하는 것, 다시 말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공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64년 라캉이 시도했던 기표의 무의식론에 대한 비판은 그것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더 포괄적인 무의식론을 위한 발전적 자기 해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각적으로 검토해보기 위해서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하나 분석해 본다.
「쥐인간」이라는 이 분석 텍스트는 이미 다른 데서도 검토된 바 있으나 여기서는 그 텍스트의 라캉적 콘텍스트를 중요시 한다.
"여름휴가차 멀리 나가 있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너무 비대하다는(독일어로 ‘dick’) 생각과 따라서 ‘살을 좀 빼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푸딩이 나오기 전에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8월의 태양이 작열하는 열기 속에서 모자도 쓰지 않은 채로 도로를 따라 질주하기시작했다.
그는 단숨에 산으로 뛰어오르다 마침내 땀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멈춰서야만 했다.
. . . 우리들의 이 환자는 이러한 지각없고 강박적인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여자가 그때 바로 그 휴양지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한 영국인 사촌과 같이 있었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대단히 많은 관심을 보였고 따라서 이 환자는 그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촌의 이름이 리처드였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통상 관례대로 ‘디크’(Dick)로 알려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이 환자는 이 디크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SE 10: 188~89)"
이 일화를 억압과 억압된 것의 되돌아옴이라는 정신계의 논리로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야기의 주인공 ‘쥐인간’은 사랑의 침입자 리처드에게 강한 살해의지를 느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의지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의 행복조건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의식계의 현실 원칙적 판단에 따라 곧 억압의 대상이 되고 억압된 내용은 무의식계로 편입된다.
이렇게 억압되어 무의식계의 일부를 형성하게 된 ‘쥐인간’의 살해의지는 죽음 충동적 에너지의 강한 추동력을 얻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언제든지 의식계로의 복귀를 노린다.
그것은 억압된 모든 것은 되돌아오려는 시도를 한다는 정신계의 보편적 법칙 때문이다. 그러나 억압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돌아올 때는 반드시 검열이라는 통과 의례를 거쳐야 한다.
이 통과 의례를 거치고 난 ‘쥐인간’의 살해 의지와 그것의 실현 과정이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강박적으로 살 빼기 운동을 하는 증상적 행태로 나타났다. 이 증상적 표현이 ‘두개의 상반되는 힘들’의 충돌과 절충과정에서 빚어진 타협의 산물이고 이것은 정신계를 상극하는 세력들이 싸우는 전쟁터로 표시한 프로이트의 날카로운 메타포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여기서 무의식적 욕망의 기호적 현현, 혹은 그것의 상징적 번역 과정이 얼마나 치밀한 구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는가를 볼 수 있다. 리처드의 아명이 ‘Dick’이고 이 단어는 독일어로 비만, 지방을 나타내므로 ‘지방을 제거한다’는 것은 곧 ‘리처드를 처치한다’는 연상 고리를 형성한다. 이 연상은 지방을 제거하는 행위와 리처드를 처치하는 행위의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다.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쾌락원칙에 따르면 리처드를 살해해야 욕망 성취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직접적인 욕망 성취는 현실원칙에 위배되므로 의식적인 행위로 나타날 수 없다.
그것이 의식적인 행위로 나타나려면 그 욕망의 모습을 바꾸고 그 성취 방법을 달리해서 검열자를 따돌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욕망의 자리바꿈, 변신 과정이다.
그래서 리처드에 대한 살해 욕망은 다이어트에 대한 열망으로 바뀌었고 이 침입자를 죽이는 살해 행위는 살을 빼고 지방을 제거하는 증상적인 행위로 나타났다. 이 증상을 통해서 ‘쥐인간’은 그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을 통한 간접적 욕망 성취는 프로이트의 표현대로 ‘반의 성공과 반의 실패’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성공적인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 행위가 욕망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실패인 것은 그 욕망의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분석의 핵심적인 대목은 ‘지방제거’(getting rid of fat)와 ‘디크 살해’(getting rid of Dick)라는 기표 군이 갖는 놀라운 연상 고리이다. 전자가 자아담론이고 후자가 대타자 담론으로서 이 둘 사이에 형성되는 치밀한 연상 고리는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선언하기에 충분하다.
분석가인 프로이트가 이 언어적 기표들의 움직임을 분석적 해석으로서 피분석가인 쥐인간에게 해주었을 때, 다시 말해서 “당신이 그처럼 살을 빼겠다고 강박적으로 조깅하는 것은 당신의 연적 리차드를 죽이겠다는 살해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오”라는 말을 해주었을 때 쥐인간이 받는 충격과 감동은 무한했으리라.
갑자기 뒤통수를 맞는 충격이었을 것이고 영화 「긴 배」에서 쇠종(iron bell) 뒤에 숨겨진 금종(golden bell)을 발견하는 감동이었으리라.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무의식의 의식화’이고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내가 들어서게 하라’(Wo es war, soll Ich werden)는 분석지침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석은 실재에 충격을 가한다’라는 라캉의 언명으로 볼 때 프로이트의 해석을 듣고 쥐인간이 받은 충격의 ‘대상-원인’—이름붙일수 없는 그 무엇(das Es/objet petit a)—이 다름 아닌 라캉적 실재이다.
실재는 상징의 결과/효과로서 그것에 내재하지만 동시에 상징에 환원 불가능한 외-존재적 존재이므로 그 실재는 언어적 무의식의 한계 지점에 위치한다. 라캉이 세미나 XI에서 시도한 언어적 무의식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III
라캉은 재현과 정동(情動; affect)이라는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이분법을 언어와 리비도, 혹은 욕망의 그래프에 전형적으로 제시되어 있듯이, 기표와 주이상스의 구분으로 표현하였다.
정신분석에서 주체란 누구이며 무엇인가와 같은 주체에 관한 그의 많은 질문들이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구분법에 근거하고 있다.
"정신분석은 그것이 추구하는 효과를 성취하기 위하여 언어—언어가 유일한 매개체이므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정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 다시 말해서 정동, 리비도, 주이상스로서의 주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LL 143)."
우리는 이 글에서 이러한 논의를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에서 시작하였다.
그가 트라우마적 ‘사건’의 발발과 관련하여 사용한 강력한 메타포, ‘보호적 방패’라는 표현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적절하였다. 외상적 사건은 방어적 방패에 균열을 가져오고 이 균열의 틈으로 외부적 자극이 과잉으로 유입되어 ‘흥분 상태의 증가’를 초래하는 것이 트라우마라는 것이다.
이 방어적 방패의 균열은 다름 아닌 상징적 재현 체계의 와해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이것을 도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트라우마는 유지되어 오던 방패막으로서의 재현 체계가 푹 꺼져 밑으로 가라앉은 상태이다. 트라우마 환자의 경우, 꿈과 증상 등을 통해 ‘반복강박’을 보이는 것은 바로 붕괴된 방어막/재현 체계의 복원에의 비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트라우마 치료는 이와 같이 와해된 상징적 재현 체계를 도표의 점선부분까지 끌어올려 ‘정상적인’ 상징 구조, 재현 체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재현 체계란 ‘근친상간의 금기’(incest taboo)와 같이 보통 사람들이 오이디푸스 삼각관계나 아버지 이름의 메타포와 같은 상징화/사회화를 겪으면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자연스럽게 입력되는 정신적 구조나 법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사회적 ‘정상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정신적 지주이고 원칙이며 질서이다. 이 원칙과 질서가 트라우마라는 파괴적 사건을 통해 붕괴되는 것이다.
이 재현 체계의 와해가 위치한 곳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지점인 ‘식역’(識閾, limen), 혹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점인 ‘림보’(limbo)이다. 이러한 재현 체계 괴멸의 경계성과 주변성을 프로이트는 ‘반의식적 재현’(anti-thetical representation, SE 1: 122)이라고 표현하였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엠마(Emma) 케이스’(SE 1: 352-59)나 우리나라의 ‘김부남여인 사건’(이대학보 1991, 8, 26)과 같은 여아 성폭력 사건의 경우, 그녀들이 당한 성폭력의 절대적 폭력성은 그들의 성장 과정을 통해서 체득한 질서와 의미 체계, 예컨대 남자와 여자는 무엇인가, 남녀의 성관계는 무엇인가, 어른과 아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명령과 복종은 또한 무엇인가 등등에 관해서 형성되어온 재현 체계를 일거에 무너뜨리고 그런 과정에서 형성된 ‘방어적 방패’의 상징막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야만의 흔적’(벤야민)을 남긴다.
이때 희생자의 정신 상태는 꿈꾸는 것 같은 몽롱한 반의식적 재현 상태로 이러한 경계 지점적 상태를 일컬어‘식역’ 이니 ‘림보’니 하는 말들이 쓰인다.
이것과 관련하여 프로이트는 “이해되지 않은 것은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 매장되지 않은 유령과 같이 그것은 안식을 찾지 못한다. 미스터리가 풀리고 마법이 깨질 때까지”(SE 10: 122)라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남겨 놓았다. 그 사건과의 조우가 외상적 경험으로 기록되는 것은 그것이 ‘이해되지’(understood) 않았기 때문이며 사후적으로라도(belatedly) 그것을 이해해보기 위해서 한 맺힌 유령이 출몰한다.
‘미스터리’와 ‘마법’이라는 말들이 그 야만의 흔적이 내포한 경계 의식을 잘 전달해 준다. 이런 경계 지점에서 발생한 트라우마 사건에 대한 경험은 커룻(Caruth)의 말로 ‘경험되지 않은 경험’(missed experience), 혹은 ‘소유되지 않은 경험’unclaimed experience)으로 주체적으로 완전하게 겪은 경험이 아니라 부분 부정적 반경험의 상태로 남는 경험이다.
트라우마 치료는 이러한 비정상적이고 불완전한 외상적 경험을 역사화하고 서사화하여 궁극적으로 자신의 경험으로 소유하는 일이며 야만의 폭력으로 찢겨진 상징막을 기워 온전한 재현 체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외상 경험을 역사화, 외연화 한다는 것은 타자와 연관된 관계 속에 주체의 경험을 위치시키고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인정, 소유하는 것이다. 외상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주관적 환상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고립되었던 주체는 이와 같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금 사회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고 거듭나게 된다. 이와 병행하여 서사적 구조화를 통한 외상적 경험으로부터의 비판적 거리두기 작업도 일어난다”(미발표 논문). 트라우마 이론의 전문가 황보경 교수의 이 말은 그 속에 외상성 환자의 감정의 핵, 혹은 실재의 문제가 함축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서 정확하다. 외상적 경험의 역사화와 외연화를 통한 주체로서의 재탄생이라는 이러한 주제는 외상적 기억을 서사적 기억(narrative memory)으로 바꾸어 놓는 것에 다름 아니다.
프로이트가 「도라 케이스」에서 말하는 환자들의 외상적 기억은 “강물의 흐름이 바위 덩어리에 의해서 막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얕은 곳과 사구 사이에서 갈라지거나 없어져 버려 항해하기 힘든 강”(SE 7: 16)에 비유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은 “틈새가 채워지지 않는 상태로 남겨져 있고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으며 “연결 고리는 대부분 일관성이 없고 상이한 사건들의 연속성은 불확실한”(같은곳) 상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라캉의 표현대로 “공백으로 표시되어 있거나 거짓말로써 채워진 검열된 장”(É 50)이다.
이와는 크게 대조적으로 서사적 기억은 “잘 이해할 수 있고, 일관성 있고, 토막 나지 않은”(SE 7: 18)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는 능력으로서 D. 스펜스가 말하는 ‘서사적 진리’를 발생시킨다.
스펜스 교수는 그의 유명한 책『서사적 진리와 역사적 진리』라는 책에서 서사적 논리와 요구에 따라 간극이 메워지고 의문이 풀려 일관성과 정합성을 획득한 서사적 담론은 어떤 진리를 발생시키고 이 진리가 치료적 효과를 담보한다는 것이다(Spence 180).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시학』에서 ‘있었던 것’의 기록인 역사보다 ‘있음직한 것’의 서사인 문학이 더 철학적이라고 한 말과 연결되는 대목이다. 아무튼 임상적 기억을 서사적 기억으로, 역사적 진리를 서사적 진리로 바꾸어 놓는 작업은 트라우마의 치료적 효과로 연결된다.
우리는 트라우마와 욕동(Trieb)의 상동적 구조, 혹은 구조적 아날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구조적 상동성은 재현 체계의 와해로 빚어진 트라우마의 반재현성(anti-thetical representation; SE 1: 122)과 육체와 정신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욕동의 부분 재현성(partial representation; É 315)과의 아날로지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이 구조적 상동성이 전자에 의한 후자에의 영향 관계로 연결된다는 데 있다. 트라우마와 욕동의 작동이 다 같이 ‘흥분상태의 고조’(Erregungszwachs)에 있다는 인식을 넘어 트라우마 사건이나 외상적 경험이 욕동의 활성화로 연결된다는 말이다:
“트라우마는 사물(The Thing)과의 통제 불가능한 조우에서 오는 것인데 그것은 그 조우가 주체 내에 있는 인지 불능의 요소 즉 프로이트가 그것(das Es), 이드(Id)라고 부르는 내적 사물(the internal Thing)을 자극할 때만이 그렇다”(FP 208).
부스바이의 이 말 중 앞에 나오는 ‘사물’은 라캉이 말하는 ‘동료 인간’(Nebenmensch)으로서의 대타자, 그리고 그 ‘대타자의 원초적 외친밀성’(uncanniness)을 나타내고 뒤에 나오는 ‘내적 사물’은 여기 나온 대로 프로이트의 이드나 그것(das Es)을 지칭한다. 트라우마 사건을 통해 겪은 외부적 대타자와의 ‘사물(das Ding) 같은’ 조우가 내적 대타자인 라캉적 실재, 즉 욕동의 질서에 충격을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트라우마 피해자가 겪는 가해적 대타자와의 원초적 ‘외친밀한’ 접촉이나 ‘사물 같은 조우’는 라캉의 유명한 케보이(Che vuoi?) 공식으로 설명된다. 사건의 불가해성, 불투과성에 노출된 희생자는 ‘당신은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대답 없는 질문을 연발한다.이 돌아오지 않는 답변, 불투과성의 장막이 대타자의 사물성을 형성한다.
페어헤게 교수는 트라우마를 ‘구조적 트라우마’와 ‘사건적 트라우마’로 구분하고 있는데 전자가 욕동에 해당하고 후자는 지금까지 거론해 온 통상적 의미의 트라우마를 지칭한다. 이러한 2분법적 구분은 “욕동은 외부적으로 결정된 트라우마와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 내에 <잠재적 트라우마 효과 a potentially traumatizing effect>를 간직하고 있다”(Verhaeghe 56)는 것과 “욕동은 <외상적 실재 traumatic-Real>이다”(57)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역동을 또 하나의 트라우마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 두 트라우마, 즉 내적트라우마와 외적 트라우마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이다.
그에 의하면 “사건적 트라우마는 주체의 욕동에 의해서 야기된 구조적 트라우마와 불가피하게 상호작용 한다”(58). 구체적으로 어떤 상호작용인가? 김부남여인 사건의 경우, 9살 때 그녀가 당한 성폭행 사건은 정확하게 외적 트라우마, 즉 사건적 트라우마의 요건을 구성한다.
상징적 재현 체계인 ‘보호 방패’가 뚫리고 그 뚫린 틈 사이로 외부적 자극이 과도하게 유입되어 흥분과 긴장 상태의 고조를 가져와 정신계의 일대 혼란과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고전적 정통 트라우마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반면에 이 때 그녀의 내적 트라우마, 즉 욕동은 어떻게 반응할까? 원래 욕동이라는 말 자체가 (독일어 Trieb, 불어 pulsion, 영어 drive) 어원적으로 어떤 ‘몰아붙이는 힘’과 관련 있고 특히 프로이트가 말한 욕동의 4요소 중 ‘압박’(Drang)이 강조되어 있듯이 욕동은 언제든지 정신적 에너지의 증가와 긴장의 고조로 정신계의 균형과 ‘항상성’(homeostasis)의 원리를 위반하고 자아의 통제 능력을 위협할 수 있는 전복적 파괴력을 가능성으로 보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욕동의 운행 원리가 정통 트라우마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잠재적 트라우마 효과’ ‘외상적 실재’라고 칭하지 않았겠나.
이렇게 구조적으로 상동형을 이루는 이 두 세력이 조우할 때 그 파괴력이 크게 가중되어 단순한 ‘상호 작용’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파괴력은 프로이트가『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공들여 제시하고 있는 ‘죽음 욕동’(Todestrieb)에 봉사할 것이고 ‘모든 정신 체계를 빈곤하게 하고 다른 정신 기능을 극도로 마비시키고 저하시킬’ 것이며 ‘정신 기능의 일반적 유약화와 교란 상태’를 설명해 줄 것이다.
야만의 흔적으로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정신분석학적 오점을 남긴 거대 사건인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학살) 뿐만 아니라 요사이 우리 사회에 날로 증가하고 있는 학교폭력이나 성폭력 사건들도 그것이 몰고 오는 엄청난 파괴적 후유증을 고려한다면 이것들도 정신분석학적으로 중요한 트라우마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김부남여인 사건의 경우 그는 성인이 되어 결혼했어도 성적 수치심과 혐오증,상징적 재현 체계의 정상성으로부터의 일탈과 퇴행으로부터 빚어진 온갖 부정적 감정들로 인해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해 심신의 파국을 맞았고 급기야는 34세의 중년의 나이에 그가 9세의 어린 나이에 당했던 야만의 현장을 찾아 아직도 살아있는 70대의 폭행범(혹은 그녀가 생각하는 폭행범)을 백주에 부엌칼로 난자하는 처절한 보복을 감행했다.
외상후스트레스징후군(PTSD)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트라우마 환자들이 겪는 대표적인 증상이 성적인 것과 공격적 반응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이 일관되게 주장해 온, 인간의 양대 욕동, 즉 성적인 욕동(sexual drive)과 공격적 욕동(aggressive drive), 그리고 이것들의 ‘비정상적’ 일탈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두 부류의 욕동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어떤 때는 욕동의 혼합(Triebmischung) 원칙에 따라 둘 사이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가학적 성 사디즘과 피학적 성 마조히즘은 욕동의 공격성과 성적 성격이 합해서 빚은 욕동의 타락한 단면이다.
욕동의 이원론적 구조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쾌락원칙을 넘어서』역자 후기,『기호, 주체, 욕망』의 10장 ‘정신시학의 이원론적 구조’) 꽤 상세하게 말했으므로 여기서는 그것의 ‘외상적 실재’와 관련된 죽음 욕동(Todestrieb)에 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위에서 말한 두 부류의 욕동 중 공격적 욕동이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Thanatos)에 속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간다.
죽음욕동의 죽음은 ‘죽는다’라는 자동사와 ‘죽인다’라는 타동사를 다 포함할 수 있는 단어이다. 원래 그것은 주체의 내부를 향하는 자기 파괴적 에너지로 정의되었으나 주체의 자기보전 원칙에 영향 받아 그 자기 파괴적 충동이 외부로 방향을 바꿔 타자 파괴적 에너지로 변형될 수 있다.
프로이트가『문명과 그 불만』등 그의 말년의 저서에서 인간의 파괴적, 공격적 성향을 고발한 것은 주로 후자의 입장에서였다. 야만의 흔적으로서의 트라우마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파괴 욕동과는 달리 그러나 성적 욕동을 생명 욕동(Lebenstrieb)과 죽음욕동 중 어디에 귀속시킬까를 결정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잘 알려진 대로 프로이트는 원래 ‘자아 욕동’과 ‘성 욕동’이라는 이분법을 말했고 이것이 나르시시즘 연구를 통해 무너지자『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죽음 욕동’이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을 들고 나와 이것을 이전의 욕동 이론과 대치시킴으로써 또 다른 이분법의 건설에 성공한다.
그 이전의 욕동 이론들, 즉 자아 욕동, 자기 보존 욕동, 성 욕동 등은 모두 생명 욕동 혹은 에로스(Eros)라는 이름하에 포함된다. 이 논리를 따르면 그러므로 성적 욕동은 당연히 생명 욕동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의 별칭 ‘에로스’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전통적으로 성욕(sexuality) 문제를 다루어오면서 그것의 전복적, 파괴적 위력을 감안하여 그것을 정신의 제1과정(primary process)에 배정하고 이드(id)의 속성으로 간주해왔다. 성의 이러한 속성은 에로스보다는 죽음에 가깝다.
이것은 성적 오르가즘을 ‘작은 죽음’(la petite mort)이라고 표현한 프랑스어에도 나타나 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죽는다’(to die)라는 동사가 성적 극치를 뜻했다는 영어식 표현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부스바이는 한 성 담론에서 “에로스와 죽음의 대치는 자아와 성이라는 프로이트의 종전 이론을 자리를 바꿔 극단화 시킨 것이다”(SC 118)라고 선언함으로써 에로스=자아, 죽음=성이라는 등식으로 묶어버렸다. 여기에는 일정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이것이 갖는 중요성은 성 충동의 상당 부분을 타나토스 쪽에 위치시켜 놓는데 무게를 실어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당 부분’이라고 말한 것은 성 충동이 에로스에 속할 여지가 여전히 있고(82), 또한 프로이트가 궁극적으로 에로스를 ‘묶기’(Bindung) 과정으로 보았을 때 여기서는 성의 전복적, 파괴적 함의가 많이 희석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트라우마적 실재’ 의 한 축을 형성하는 성 충동이 죽음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상황 하에서 성적 주이상스의 추구가 라캉이 말하는 ‘오브제 a’의 영향 하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IV
우리는 앞에서 두 개의 트라우마, 내적 트라우마와 외적 트라우마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는데 따지고 보면 전자는 후자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2원론이 일원론의 다른 두 표현이듯이(이 진술은 그것의 역도 사실이다) 앞에서 말한 구조적 트라우마라는 것이 외부의 사건적 트라우마와 동연적(同延的) 관계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근거는 다시 <욕동은 잠재적 트라우마적 효과를 간직하고 있다> <욕동은 외상적 실재이다>라는 앞의 진술이다. 등식 관계로 되어있는 이 두 진술을 더욱 단순화해 보면 욕동이 트라우마이고 트라우마가 곧 욕동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앞에서 트라우마와 욕동의 구조적 상동성을 재현 가능성을 중심으로 말해왔는데 여기서는 그 상동성이 인과론적 관점과 맞물려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트라우마가 욕동을 원인 지웠다는 것이다. 트라우마 없는 욕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발언은 비외상적 욕동(non-traumatic drive)과 외상적 욕동(traumatic drive)을 구분하고서야 가능한 말이다. 이 구분은 전 상징적 실재(pre-symbolic real) R1과 후 상징적 실재(post-symbolic real) R2의 구분(라캉, 317-24 참조)과 조응한다.
라캉에서 욕동이 실재계의 한 복판에 자리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이 두 말은 자주 상호 교환적으로 쓰인다. 그래서 <욕동은 외상적 실재이다>라는 등가적 발언이 가능해진다. 라캉의 사상 체계에서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서의 전 상징적 실재와 비외상적 욕동은 별로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외상적 욕동과 후 상징적 실재이다. 이것들이 정신계를 온통 들쑤셔 놓고 온갖 병리적 현상을 연출한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것들이다:
“우리가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실재의 얼굴의 한 단면이 트라우마이다. 만약 우리가 상징화되어야 할 모든 것을 실재라고 할 때 언어가 실재를 완전히 변형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며 모든 실재를 상징 질서로 수렴하지도 못한다. 항상 나머지가 남게 마련이다.
분석에서 우리가 관심하는 것은 모든 잔재물이 아니라 환자에게 걸림돌이 되는 나머지의 경험이다. 분석의 목표는 실재의 마지막 한 모금까지를 모두 상징화하는 것이 아니라 ... 외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실재의 부스러기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LS 26).
외상적 사건이 재현 체계의 붕괴를 가져오고 그것이 에너지의 증가와 긴장의 고조로 연결되어 정신계의 질서와 균형이 무너질 때 그것은 불가피하게 트라우마와 상동구조를 갖고 있는 욕동—그때까지는 ‘정상적으로’ 운행되던—에 일대 충격을 주어 그것을 ‘병리적’ 외상적 욕동(traumatic drive)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러한 설명을 근거로 해서 <욕동이 잠재적 트라우마이고 외상적 실재>라는 진술이 그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상징적 방어막이 뚫리고 재현 체제가 와해되어 트라우마 체제로 돌입하면 정신계는 자체적으로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고조된 긴장을 완화시키고 범람하는 흥분을 방출하여 상실한 쾌락원칙의 지배권을 다시 찾아오기 위한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앞에서 말한 반복강박(Wiederholungszwang)을 통해 나타나고 구체적으로는 묶기 작업(binding)을 통해 실현된다:
“반복강박은 트라우마를 재현체(Vorstellungen)에 묶으려는 정신계의 끈질긴 시도이다. 이 묶기과정이 방출과 카타르시스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강박성은 상징화될 수 없는 것을 상징화하려는 끈질긴 시도, 즉 프로이트의 용어로 욕동 충동을 제2차 과정으로 묶으려는 시도를 보여 준다”(Verhaeghe 60).
이러한 추동력은 프로이트가 “이전의 상태를 복원하려는 유기적 생명체 내의 충동”(SE18: 36)이라고 정의한 욕동의 보수적 성격과도 맞물려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프로이트의 반복강박이 무엇보다도 트라우마 사건으로 붕괴된(not-all) 재현 체계를 복원하여 쾌락원칙이 지배하는 이전의 온전한(all) 재현 체계를 회복하려는 정신계의 끈질긴 시도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복적 묶기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재현 체계의 복원 작업이, 위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 반드시 ‘재현체’ 혹은 ‘상징’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언어화’(verbalization)이다. 그러므로 반복강박은 비재현적 외상적실재를 재현화시키려는 시도이고 상징화될 수 없는 욕동의 실재를 상징화하려는 언어적 시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의 원리라는 데에 놀라움이 있다.
분석 행위란 ‘상징을 통해 실재에 개입하기’ ‘기표를 매개로 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라고 정의되지 않던가. 프로이트가 분석 현장을 반복강박의 일예로 편입시킨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치를 너무 강조할 필요는 없다. 반복적 꿈의 언어를 통해 트라우마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고 그것의 ‘의미’를 차츰 알아감으로써 재현체를 회복하려는 정신계의 자기조절 능력은, 그러나 매우 제한적이어서 아무리 반복해도 ‘치료’의 수준에 닿지 않는다.
정신분석의 말하기 치료는 이러한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분석적 장치를 통해 말이 갖는 치유의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극대화한 것이다. 여기서 이미 거론된 욕동의 문제를 그것과 동족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욕망(desire)의 문제와 결부시켜 고려해 보자.
도대체 욕망과 욕동은 어떻게 다르며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름도 비슷하고 뜻도 비슷하여 글 쓰는 사람마다 이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이 둘을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으로 보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이 둘 사이에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차이의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다룬다. 입담 좋은 지젝도 이 문제에 시달리다가 ‘욕망: 욕동=진리: 지식’이라는 수학 공식을 통해 이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으나(UMBR(a) 1(1977): 147-53) 내가 보기에 그것이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독자를 오히려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 같다.
지젝과 같이 슬로베니아 학파에 속해 있는 A. 추판치치도『실재의 윤리학』에서 이 문제와 씨름하다가『위험한 관계』의 발몽(Valmont)을 욕망의 인물로『돈 후안』의 동명의 주인공을 욕동의 화신으로 분석해냄으로써 (Zupančič 106-136) 허구를 통해 이론의 차이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라캉이 이 두 개념에 대해서 견지해 온 논지는 의외로 명료하고 투명하다. 범주론적으로 욕망이 상징계에 속하고 욕동은 실재계에 속한다.
이것은 상징화 시대라는 1950년대에 욕망의 문제가 가장 많이 거론되었고 실재계 시대의 서막이라는 세미나 XI에서 정신분석의 네 기본 개념 중에 욕망이 아닌 욕동이 채택된 연유에서도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욕망은 대타자에서 나오고 주이상스는 사물의 편에 있다”(É 853)는 말 속에는 그러한 차이가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욕망이 기표들의 총화인 대타자에게서 온다는 말은 그것이 상징 질서의 산물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또 다른 라캉의 말은 욕망의 문제가 언어, 상징, 재현, 법, 질서의 문제와 동일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다른 한 편 “주이상스는 사물의 편에 있다”는 것은 욕동이 실재계의 범주에 속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이상스,욕동, 사물(das Ding)이 모두 실재계에 속한 개념들이다.
그러면 욕망과 욕동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라캉은 ‘분열된 주체가 오브제 a에 대해 맺는 관계’라고 정의되는 판타지 공식(S/ ◇a)과 오브제 a=욕망의 대상-원인(object-cause of desire)이라는 등식 관계 속에 전달하고 있다. 라캉의 설명으로 욕동은 오브제 a 주위를 선회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둘이 모두 실재계에 속한 개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위 등식에서 욕동=욕망의 원인이라는 또 다른 등식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어 욕망과 욕동의 관계를 말해준다.
욕동과 욕망이 오브제 a를 합집합으로 해서 구성된 다음 도표는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CILP 211).
앞에서 비친 지젝의 욕망: 욕동=진리: 지식이라는 등식 관계도 바로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작성된 것이다.
핑크 교수는 욕망과 욕동을 프로이트의 자아(ego)와 이드(id) 개념에 대입하여 설명한다:
“욕망하는 주체는 어떤 의미로는 자아(부분적으로 의식이고 부분적으로 무의식인)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자아는 이드가 추구하는 종류의 만족에 대해서 방어적 입장에 있다. 자아는 이드의 만족 추구를 못마땅하고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드가 그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 사회적 규범과 이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241).
이렇게 욕동의 동물적 만족 추구에 방어적 입장에 있는 욕망에 대해서 “욕망은 주이상스에 대한 방어로서 만족 대신에 존재한다. 이것은 욕망이 그 성격상 왜 만족—실제적, 성적 만족을 타매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욕망은 욕동의 만족보다는 판타지의 쾌락을 선호한다. 욕망은 그러한 만족을 제지하고 욕동에 재갈을 물린다. 왜냐하면 욕동이 추구하는 만족은 위압적이고 정도가 지나치며 가공스럽기 때문이다(만족은 욕망을 죽이고 질식시킨다). 여기서 욕망은 방어에 다름 아니다”(241).
한마디로 말해서 법과 질서, 규범의 틀 속에서 생성되는 욕망은 ‘인간적’인 것이고 그러한 법(the Law)이 부여하는 구속력과 억제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욕동은, 그 추동력의 무조건성, 야만성으로 인해 ‘동물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이 둘의 인과론적 관계는 전자에 의한 후자에 대한 ‘방어적’ 관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라캉의 분석 지침과 관련된 발언에 대해 지젝이 ‘약간의 수정’을 요구하는 대목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욕동과 욕망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라캉의 격문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야될 것 같다: 욕망이 그 자체로 하나의 양보이고 일종의 타협하기이며 환유적 치환이고 물러섬이며 어찌할 수 없는 욕동에 대한 방어가 아니겠는가? 욕망한다는 것은 욕동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 한다>. 우리가 안티고네를 따라 욕망을 포기하지 않기를 고집한다면 정확하게 우리는 욕망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며 욕망의 모드에서 욕동의 모드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Žižek 172; 강조 원문).
여기서 특히 지젝이 강조하고 있는 <욕망이 욕동의 포기를 의미 한다>는 대목을 주목해 보자. 왜냐하면 그것이 정신분석이 목표로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욕동, 특히 전술한 외상적 실재로서의 욕동은 정상적인(즉 규범 ‘norm’을 지키는)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는 ‘병리적’이다.
앞에서 본대로 비전체적(not-all) 부분 재현상태의 욕동은 상당한 정도로 본능적, 동물적 성격을 띠어 상징적 통제력을 쉽게 벗어나고 일탈적 위반(transgression)의 개념에도 무감각하다.
정신적 병리는 이러한 외상적 실재로서의 욕동의 영향 하에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분석 치료는 이런 병리적 상태를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인간적인’ 욕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라캉은 이것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말을『에크리』에 남겨 놓았다.
"주이상스가 욕망의 법의 거꾸로 된 사다리에 도달될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주이상스를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거세가 의미하는 것이다. (Ě 324)"
여기서 ‘주이상스’라는 단어를 욕동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욕망은 욕동의 포기를 의미 한다>는 앞의 진술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주이상스라는 라캉의 개념이 프로이트의 정동(affect)과 같이 유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강렬한 실재계적 감정이라는 점에서 욕동과 그것과의 상호 교환적 사용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욕동이 욕망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 거세(castration)의 의미라는 대목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아버지 이름의 기표’를 통해 상징적 재현 체계에 안착한 인간 주체는 거세의 임무를 완수한 주체이다. 그러나 이 통과의례에서 실격했거나 재현 체계에 균열을 가져오는 외상적 경험을 한 주체는 정상인의 조건인 거세 임무에 문제점을 남기고 병리적 신경증의 상태로 추락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세가 모든 다른 정신 현상과 마찬가지로 전체(all)와 비전체(not-all)의 2분법적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전체를 획득한 사람만이 정상인이다. 비전체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은 신경증 환자이다. 분석 치료는 바로 이 비전체를 전체로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이다. 그 작업은 비전체를 구성하는 욕동의 차원에서 전체를 구성하는 욕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분석적 노력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라캉이 전달하는 메시지이다.
V
정신분석 치료는 ‘말하기 치료’이면서 동시에 ‘듣기 치료’이다. 분석 현장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잘 듣느냐 하는 것이 분석 행위의 전부이다. 지젝이 셰익스피어의『리처드 II세』에 나오는 ‘삐딱하게 보기’(looking awry)라는 문구를 따와 라캉적 텍스트 읽기의 전범으로 삼으려 했던 것과 같이 라캉의 분석적 듣기는 ‘삐딱하게 듣기’(listening awry)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삐딱한’ 것은 정신분석이 원래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에 속하고 그것으로 무의식적 왜상(歪像; anamorphosis)을 읽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 왜상은 정면으로 보면 보이지 않고 삐딱하게 보아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말은 듣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예화로 최근 세간에 떠도는 재담 하나를 소개한다.
흥부가 왜 그의 형 놀부 부인으로부터 주걱으로 뺨을 얻어맞았느냐에 관한 이야기이다. 흥부가 어느 날 놀부집을 방문했는데 마침 그의 형수가 주걱으로 밥을 푸고 있었고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흥부가 인기척을 하면서 “형수, 저 흥분데(돼)요”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뺨 맞은 이유라는 것이다.
재담이 재담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그것이 청자로부터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것의 표층구조와 심층구조가 역설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 역설이란 전진적 논리와 후진적 논리가 서로 충돌하면서도 하나로 만나는 어느 중간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 재담의 의식적 표층구조는 물론 “흥분데요”이고 무의식적 심층구조는 “흥분돼요”이다. 이 두 구조가 하나의 표현 속에(여기서 ‘데’와 ‘돼’는 유사음으로 취급한다) 공존하면서 충돌하는 전형적인 ‘투인원’(Two in one)의 구조이다.
프로이트가 이러한 텍스트의 이원론적 구조를 고려하여 재담을 그가 말하는 4개의 무의식의 형성체(나머지 3개는 꿈, 증상, 언어의 실착)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여하튼, 흥부는 “형수,저 흥분데요”라고 방문 신고를 했고 놀부 부인은 ‘형수, 저 흥분돼요’라고 ‘삐딱하게’ 알아들어 괘씸죄로 주걱을 한 대 올렸던 것이고 이 논리의 꼬임과 상황의 뒤틀림을 통해 독자/청자들은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여기서 대타자로서의 분석가의 역할을 떠맡은 주체는 놀부 부인으로서 그는 피분석가의 역할을 담당한 흥부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의심’해보고 ‘삐딱하게’ 바라보는 ‘의심의 해석자’이다.
이와 같이 텍스트의 2원론적 구조에서 심층구조를 이루는 것이 분석가 담론으로서 이것은 표층구조의 자아담론(ego discourse)과 구별되는 대타자 담론(discourse of the Other)이고 이것이 곧 ‘언어와 같이 구조화된’ 무의식이다. 정신분석이 밝혀내려고 하는 것이 억압된 것, 곧 무의식이고 이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대타자 담론을 형성하고 있으니 분석가가 경청해야 할 대상이 이 담론이다.
그러나 이 대타자 담론은 위 일화에서 보듯이 형태상으로 자아담론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 입을 통해서 표현되는 둘, 즉 ‘투인원’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같음’ 속에서 ‘다름’을 읽어내는 분석가의 전략이 ‘삐딱하게 듣기’ 전략이다.
정신분석은 <기표들(signifiers)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것(the unsayable), 혹은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기 위한 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가 <기표들>인데 대타자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기표들이고 삐딱하게 듣기 전략이 목표로 하는 것이 이 기표들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위의 예에서 ‘흥분데(돼)요’라는 하나의 피분석가 담론으로부터 ‘흥분데요’라는 자아담론과 구별되는 대타자 담론 ‘흥분돼요’를 읽어내는 능력과 관계되고 그 대타자 담론은 ‘사후적으로’(nachträglich) 기표 군으로 승격된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기표(signifiant)의 의미이다. 라캉의 구조적 정신분석학은 기표의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캉은 ‘기표의 우위성’(primary of the signifier) ‘기표의 가름대 밑으로 기의(signified)의 미끄러짐’ 등의 말을 연발하면서 기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라캉의 기표는 단순한 ‘음성 이미지’(sound image)만을 지칭하는 소쉬르의 기표 개념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꿈의 이미지나 증상과 같이 의미를 배타한 기호표지로서 무엇인가를 의미하지만 그 무엇이 그 무엇인가는 계속 유보되는 상황과 관련된다. 세계문학 사상 멜빌의『모비-딕』에 나오는 흰 고래(백경)는 전형적인 ‘무의식적 기표’(the unconscious signifier)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고래는 피쿼어드 선원들, 특히 이 배의 선장 에이허브(Ahab)에게 엄청나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만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끝까지 유보된 채 이 대서사시는 끝나고 만다. 이것은 라캉의 정신분석 재해석이 구조주의 언어학을 통해서 프로이트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를 통해서 소쉬르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구분해서 의식적 담론이 기의와 기표가 행복한 결합을 이루는 소쉬르의 기호 S(기의)/S(기표)로 표시될 수 있다면 라캉의 무의식적 담론은 기표가 절대 우위를 점하고 기의는 크게 약화된 S(기표)/s(기의)로 표현된다. 위의 일화에서 삐딱하게 듣기의 전략을 통해서 드러난 대타자 담론은 라캉이 말하는 ‘수수께끼 같은 기표군’(enigmatic signifiers; Ě 166)을 형성하고 기표가 지배적인 S/s의 구조를 갖는다.
다시 말하건대 텍스트의 대타자 담론은 독자/분석가의 개입을 통해서 사후적으로(belatedly) 드러난다. 앞에서 보았던 쥐인간의 경우 텍스트의 표층구조에는 비만 극복을 위한 ‘지방 제거’라는 자아담론밖에 없었다.
동일한 이 언술 속에서 ‘리처드 제거’라는 제2의 텍스트/상호텍스트를 읽어낸 것은 분석가 프로이트의 개입을 통해서였다. 이것은 텍스트의 2원론적 구조에 대한 논의에서 제2의 텍스트의 존재성 여부를 묻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좋은 거점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텍스트 속에 이미/항상 잠재적으로 제시되어 있고 여기에 독자/비평가가 ‘유추적으로 반응하기’(analogizing; N. 홀란드교수의 용어) 전략을 통해 사후적으로 개입할 때 그 잠재성은 현실성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차적 텍스트(subtext), 혹은 상호텍스트(intertext)는 ‘발견’되는 것이냐 혹은 ‘발명’되는 것이냐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기표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라는 트라우마에 관한 분석 지침은 조심스럽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the unsayable)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것은 쥐인간의 경우 ‘지방 제거’ 라는 표층구조 밑에 있는 심층구조의 ‘리처드 살해’를 직접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심층 구조적 대타자 담론을 <통해서> 말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것>, 상징적 재현이 불가능한 것, 혹은 상징계에 내재하면서도 그것에 환원될 수 없는 ‘외-존재적’ 존재, 그런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은 라캉의 범주론에서 실재에 다름 아니다. 실재의 화신은 오브제 a이고 그 주위를 욕동과 주이상스의 흐름이 선회한다. 그러므로 실재의 핵은 무엇보다도 강렬한 정동(affect)이다.
프로이트가 재현과 정동을 2분법적으로 구분하고 라캉이 욕망의 그래프에서 기표와 주이상스를 대극적으로 처리했을 때 그것들은 정확하게 상징과 실재의 변증법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에 대한 분석 치료는 바로 <상징을 매개로 실재에 작업하기>이고 <기표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로 정의된다. 그리고 그 ‘말할 수 없는’ 비재현적 실재는 외상 사건의 희생자가 겪는 ‘경악’의 감정과 관련된다. 따라서 트라우마 치료는 결국 언어적 기표를 통한 상처받은 감정(affect; jouissance)의 치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분석지침 중 ‘정동을 말로 표현하라’는 언명은 말을 통해 정동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소산시키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 바라본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하기 때문에 페르세우스는 그의 청동방패에 비친 그 괴물의 모습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그의 목을 치는데 성공한다.
바그너의 가극 「파르시팔」에도 “너를 찌른 창만이 너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명구가 나온다. 사물에 타살을 가한 언어—그 언어만이 그것이 만든 외상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서사적 진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주제어: 프로이트, 라캉, 욕동, 트라우마, 기억, 서사, 정신분석, 무의식, 기표.
<경북대>
인용 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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