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역(周易) 咸卦第三十一
: 택산함
하경(下經)의 맨처음에 나오는 함괘(咸卦)는 곧 남녀의 도를 발명(發明)한 것입니다. 건곤이 일찍이 남녀의 도가 아님이 없고 이것이 곧 천도(天道)이므로, 특별히 함괘에서 인도로써 발명하여 천도에 부합시켰으니, 이는 천인(天人)이 서로 함께하는 즈음에 어디 가나 人道가 곧 天道 아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人道를 놔두고 天道만 말하는 것은 또한 주역의 의의가 아닙니다 따라서 주역에는 聖人의 道가 네가지 있으니 그것으로 말을 하고 그것으로 움직이고 그것으로 기구를 만들고 그것으로 복서(卜筮)를 하는 것인데 이는 모두 음식남녀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이요 처음부터 심오하고 현묘하여 위로 선천(先天)을 연구하고 하도(河圖),낙서(洛書)를 천명해서 더 이상 미루어 캐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程子의 易은 곧 언역(言易)이고 한유(漢儒)의 易은 곧 동역(動易)이며 제기(制器).복서(卜筮)의 역에 대해서는 후세에 마침내 끊어진 학문이 되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한(漢)이후로 복서를 가지고 말한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복서의 법이 과연 어떤 것입니까? 간보(干寶)같은 무리의 형(刑),덕(德),육친(六親)등의 설(說)은 견강부회하고 천착하여 마침 그 망녕됨을 이루었는데, 마침내 화주림(火珠林/시초(著)대신 돈(錢)으로 점치는법으로 漢나라때 경방(京房)에게서 비롯되었다)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망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이른바 복서라는 것은 바로 화주림이 끼친 법이니 이것이 어찌 주역의 도이겠습니까? 복서의 법은 밝히기가 어려워서 정북해(鄭北海)같은 대유(大儒)는 대전(大典)을 망라(網羅)하였는데도, 효(爻)의 변동(變動)하지 않는 것을 단사(彖辭)에 소속시켜 통할 수 없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단(彖)과 상(象) 두 글은 애당초 일필(一筆)로 연결된 말이 아닙니다 彖이 있던 때에 일찍이 象은 없었고, 다만 이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초효, 이효, 삼효, 사효, 오효, 상효가 서로 나누어지지 않고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었는데, 변동의 뜻은 이미 개권 제일의(開券第一義)인 元亨利貞에서 드러내 밝혔으니, 만일 변동하는 것이 아니면 원형이정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방통(旁通)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단전(彖傳)에 이르기를 "건도가 변화하여 성명을 각각 바로잡는다(乾道變化 各正性命)하였으니, 이것이 곧 원형이정의 방통되는 대의(大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변통하지 않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정북해의 이말 또한 그의 잔문(殘文)에서 나온 것이니, 이 잔문 한 대문을 가지고 정북해의 정론(定論)으로 단정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복서의 법이 이미 정북해 때부터 밝히기 어려움이 이와같았으니 정북해의 이전이나 이후로 다시 이 도리를 밝혀 역력히 말해 놓은 것이 지금 정사수(程沙隨/宋나라때 도학자로 주역에 정통했음)등 제인(諸人)의 서의(筮儀)만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서가 이미 끊어진 학문이 되어버린 까닭입니다 주역의 글은 광대하게 모든 것이 없는 것 없이 다 갖추어져서, 신선(神仙). 노화(爐火), 방술(方術), 기예(技藝)등 그윽하고 황홀한 것들이 의탁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런 것은 다 군자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서가 비록 성인의 도 네가지 중의 하나이기는 하나, 君子의 周易은, 말을 하려는 자는 그 언사를 숭상하고 움직이려는 자는 그 변동하는 것을 숭상할 뿐이요, 굳이 복서를 해서 스스로 주역의 도에 부합시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백성들은 그것으로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알지 못하므로 도를 가지고는 그들을 깨우칠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하늘의 도를 밝히고 백성의 일을 잘 살펴서 이에 신물(神物)을 일으키어 백성의 일상생활을 전도해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서는 백성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네 가지 도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니, 그 실상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군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는 복서를 빌려서 주역의 도를 행한 것이지, 주역이 복서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사를 숭상하고 변동을 숭상하는 군자는 일찍이 복서를 빌려서 점을 치지 않았으니, 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말한 점서(占筮)는 바로 좌씨가 기만을 저지른 일인데, 이것이 바로 구서(九筮)의 옛 법을 춘추 시대로부터 들을 수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신료(辛廖), 복초구(卜楚邱), 복도보(卜徒父), 사소(史蘇)의 무리들은 사사로이 주사(繇詞/占辭의 말)를 만들어 단(彖), 상(象)의 성지(聖旨)에 대단히 어긋나게 해서 후세 방술(方術)의 기초를 열어 놓았는데, 지금 이것을 춘추 시대의 점서라 하여 억지로 주역의 의의에 부합시키는 것은 더욱 불가한 일이니, 이것이 용사(龍蛇)가 혼잡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 중에 오직 자복 혜백(子服惠伯)만은 말하기를 "충신(忠信)한 일을 하려면 되겠다"하고, 또 말하기를 "주역으로는 위험한 일을 점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옛 점법(占法)의 일맥(一脈)이 아직 남아 있던 것으로서 모든 술사(術士)들의 망녕된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주역이 끊이지 않고 이만큼이라도 근근히 전해오는 것은 정자(程子)의 언역(言易)이 있음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자의 주역은 네 가지 도(道)가운데 하나가 되므로, 천지일월 사이에 우뚝하여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유(漢儒)의 주역은 근근히 전하여 잔결(殘缺)된 것을 굳게 지켜왔으므로 순상(荀爽), 우번(虞翻)두 사람이 나와서 조금이나마 그 대의(大義)를 찾아 올라갈 수가 있었는데, 순상은 소식(消息)을 방통(旁通)시켜 상하(上下)로 오르내리는 것으로부터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리며(運行雨施) 음양이 잘 조화되는데에 이르러서 천지의 위치가 정해지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번은 순상의 "소식을 방통시킨 것"과 대체로 동일하여 "건원이 구를 쓰는 것은 천하가 다스려진 것이다(乾元用九 天下治)"라는 데에 귀착되었으니, 이는 모두 동역(動易)으로서 바로 "움직이려는 자는 그 변동하는 것을 숭상한다"는 뜻입니다 이러므로 정자(程子)의 언역과 병행되어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희,문왕의 남긴 뜻을바로 이 언역과 동역 두가지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외하고 주역을 말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언(言)입니까,동(動)입니까? 언도 아니고 동도 아닌 것으로 망녕되이 현묘에 의탁하여 아득히 두서(頭緖)가 없을 뿐입니다. 지금 혹자는 한유(漢儒)를 단지 상수(象數)로만 돌리는데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동역은 한유로부터 자못 천양 발명되었고 언역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정자에게서 발명되었으니 이는 바로 천고에 탁월한 고견이요 묘해(妙解)인 것입니다 그리고 장구(章句)사이에 사소한 출입(出入)이 있는 것에 이르러서는 고금의 여러 대유(大儒)들도 면하지 못한 바입니다 그러므로 순산,우번의 소식을 방통시킨 것 또한 혹 말할 만한 것이 있기는 하나, 이 소소한 절목(節目)을 가지고 완벽의 흠결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이생(李生) 사제(師第)가 일컫는 역설(易說)은 과연 무슨 역이란 말입니까? 이런 도리는 꿈에도 헤아리지 못하고서, 심지어는 정자의 역에다 망녕되이 훼방을 가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대체로 소식을 방통시켜 상하로 오르내리게 하는 묘리는 바로 많은 것을 덜어다가 적은 데에 더하여 물건의 타당함에 맞추어 균평하게 베풀어서, 일체 음양이 바르고 기제(旣濟)가 정해지는 데로 귀착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기제의 정해짐이 다만 일정(一定)해 버리고 말 경우에는 또 하나의 판에 박히게 되므로 불씨(佛氏)무리들은 이 경계(境界)를 엿보아 불생(不生).불멸(不滅).부증(不增),불감(不減)이란 것으로써 더 이상도 없고 더 남은 것도 없는 것(無上無餘)으로 삼고 있으나, 그들은 실상 정해진 다음에 또 끝없이 생생하는 묘가 있어 사생(死生)과 종시(終始)가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역이란 것은 허물을 고치는 글입니다 그래서 비록 비괘(否卦).박괘(剝卦).곤괘(困卦),건괘(蹇卦)같은 경우도 원래부터 변통할 수 없는 되는 없기 때문에 궁하며 통할 수가 있고 죽으면 살아날 수가 있으며 어지러우면 다스려질 수가 있고 끊어지면 이어질 수가 있어서, 일찍이 시운(時運)을 어찌할 수 없다거나 기질(氣質)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데에 맡겨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길이 비색(否)한 때만 있지 않고,또 길이 형통(泰)한 때만 있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색한 운수를 형통한 운수로 돌리고 아낌없이 허물을 고치며, 환난을 생각하여 미리 방지하고, 편안한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아서, 모든 것을 평균하게 조제(調劑)시키는 것이니, 대학의 치평(治平/治國 平天下)과 중용의 중화(中和)가 모두 이것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경에 이르기를 "저 길에 괸 장마물 퍼서 큰 그릇에 앉혔다가,다시 떠서 작은 그릇에 붓네 (洞酌彼行遼 挹彼注玆)"하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주역의 道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떠서 작은 그릇에 옮겨 부은 다음에는 어느 물건인들 평균해지지 않겠습니까. 평균이라는 것은 물(物)마다 각각 제자리를 얻는 것이니,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 平均해지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 오직 평균을 힘씀으로써 물마다 각각 제자리를 얻는 것이니, 주역의 큰 뜻이 바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阮堂集) 함괘(咸卦)는 남녀(男女)의 뜻을 갖고 있다 주역의 하경(下經)은 인도(人道)를 위주로 하는데 남녀야말로 인도(人道)의 시초인 것이다 건괘와 곤괘는 기화(氣化)를 말하고 함괘(咸卦)와 항괘(恒卦)는 형화(形化)를 말하고 있는데,모두 물(物)을 위주로 한 것이다(象村集) 함괘(咸卦)의 함(咸)자는 감(感)자에 심(心)자가 없는 것이니 감동하되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태괘(兌卦)의 태(兌)자는 열(說)자에 언(言)자가 없는 것이니 기뻐하되 성실한 것이다(林下筆記) 정전(程傳)에 "천지는 만물의 근본이고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다. 그 때문에 상경(上經)에는 건괘와 곤괘를 첫머리에 놓았고 하경(下經)에는 맨 앞에 함괘를 놓고 이어서 항괘를 놓았다"하고 하였다 周易의 상경(上經)에서 건괘와 곤괘를 머리로 하고 하경(下經)에서 함괘(咸卦)와 항괘(恒卦)를 앞에다 두었으니, 친영의 예는 본래 사람의 큰 인륜(人倫)이다 함괘(咸卦)와 항괘(恒卦) 함괘의 하괘인 간(艮)은 소남(少男)을 상징하고 상괘(上卦)인 태(兌)는 소녀(少女)를 상징하는 것으로 곧 咸卦는 서로 감응하는 부부의 도(道)를 뜻하며,恒卦의 상괘인 진(震)은 장남(長男)을 상징하고 하괘인 손(巽)은 장녀(長女)를 상징하는 것으로 역시 부부의 상도(常道)를 뜻한다 함괘(咸卦)와 간괘(艮卦)에서는 모두 사람의 몸으로써 상을 삼았다 다만 간괘는 함괘에 비해 한 자리의 差等을 두었다 즉 함괘에서는 구오에서 등살(脢/매), 상육에서 광대뼈(輔)를 말하였는데, 간괘에서는 구삼에서 등뼈(夤/인:등골살)를 말하고 육사에서 몸(身)을 말하고, 육오에서 광대뼈(輔)를 말하였으니 한 자리의 差等이 있다 단전(彖傳)에서 "함(咸)은 감응(感應)의 뜻이다"라고 하였고 정자(程子)는 감(感)은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단전에서는 또 天地萬物과 聖人이 감통(感通)하는 이치를 지극히 말하였으니, 함괘는 오로지 감응과 움직임을 위주로 한 것같다. 그러나 여섯 효의 爻辭를 보면 모두 정(靜)을 마땅하게 여기고 동(動)은 마땅치 않게 여기니 어째서 인가? 본의(本義)에서 "구사(九四)는 중간에 있으면서 위에 있고 심장(心臟)의 위치에 있으면서 마음의 상(象)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태(兌)의 하효(下爻)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상사(象辭)에서 "산위에 못이 있음을 함(咸)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마음을 비우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인다"고 한 데 대하여 정자는"마음을 비우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였고 주자는 "간(懇)의 밑에 있는 두 음효(陰爻)가 중간이 비어서 물이 스며드는 상이 있다"고 하였고, 장청자(張淸子)는 "쌍뉴(雙紐)"라는 말을 만들어 "땅속이 비어 있으면 스며 드는 물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는데, 마음속을 비우면 남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 간(艮)의 밑에 두 획으로 마음의 상을 삼은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는가? (김희조(金熙朝)가 대답하였다) 함은 감응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감응은 스스로 감응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움직임을 기다린 뒤에 감응이 되므로,하늘과 땅의 기운이 움직여서 한 이치가 서로 감응하고 만물이 움직여서 두 기운이 교감하며 성인이 움직여서 백성들이 믿음으로 감응하는 것이니, 그 감응하는 것이 어디엔들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 여섯 효의 효사에서 마치 정(靜)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고 동(動)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는 것같이 말한 것은 대개 태(兌)는 열성(悅性)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을 착(錯)으로 보아 동성(動性)을 지닌 진(震)이 되면 그 진출함이 더욱 빠르니 그렇게 되면 움직이는 것이 중도를 넘기가 쉽고 감응하는 것이 정도(正道)를 얻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그러한 염려를 하여 특히 "가만히 있으면 길하고 움직이면 수치스러움을 당한다"는 따위의 말로 가볍게 움직임을 경계한 것입니다 괘효의 본뜻이야 어찌 靜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고 動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구사(九四)의 한 효로 말하면 넓적다리 위와 등심 밑에 있는 격이니 위치로 말하면 심장의 위치이고 상(象)으로 말하면 마음의 상입니다 정전과 본의의 해석은 다 그러한 것인데,다만 대상(大象)에서 "마음을 비우고 남의 의견을 받아 들인다"고 한 풀이를 보면 문득 같지가 않습니다. 장씨의 쌍뉴설(雙紐說)에 대해서는 우선 어떠하다고 논하지 않겠습니다.주자가 말한 "빈것은 물이 스며드는 상이 있다"고 한 것은 대개 간(艮)의 아래의 두 획을 마음으로 여긴 것인데, 이것이 후세의 유학자가 의심을 일으킨 곳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臣)의 견해를 말씀드리면, 간의 아래의 두 음효(陰爻)는 감(坎)에서 온것으로서, 설괘(說卦)에서 "감은 마음이 급한 것이 되고, 단단하고 심이 많은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주자가 간의 아래의 두 획을 마음의 상으로 삼은 것도 여기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구사(九四)에서 "끊임없이 오가면 붕당끼리만 네 생각을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취위가 가면 더위가 와서 한 번 가고 한번 오는 것은 모두 감응(感應)의 정상적이 이치이니,사람의 마음도 분명히 가고 오는 것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주자가 "점(占)으로 인하여 경계를 베푼 것이다"라고 한것은 어째서인가?자연스러운 왕래도 있고 좋지 않은 뜻의 왕래도 있으니 감응도 그러하여 사사로운 감응이 있고 합당한 감응이 있으며 안으로 감응하는 것도 있고 밖으로 감응하는 것도 있으며 대응으로 말한 것도 있고 전일한 감응을 가지고 말한 것도 있는데 하나하나 분석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가고 오는 것은 곧 감응의 이치인데,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은 자연스럽게 가고 오는 것이지만 "끊임없다"라는 한마디를 덧붙인 것은 바로 좋지 않은 뜻으로 가고 오는 것이므로 본의에서 "점을 ㅗ인하여 경계를 베푼 것이다"라고 풀이한 것입니다 초육이 구사에 응하는 것은 이른바 전일한 감응이고 육이가 구오에 응하는 것은 이른바 대응의 감응이지만, 구오가 육이와 응하는 것과 구사의 끊임없이 오간다는 것은 이른바 사사로운 감응입니다 괘의 하체에서 감응하는 것은 이른바 안의 감응이고 괘의 상체에서 감응하는것은 이른바 밖의 감응입니다.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하는 것과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감응하는 것은 이른바 합당한 감응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만물을 변화 육성시키는 것과 임금과 신하가 천직(天職)을 함께 다스리는 것과 남편과 아내가 화합하는 것과 해와 달이 번갈아 가며 비추어 주는 것들은 하나의 감(感)자에 지나지 않으니, 함(咸)의 의의가 하도 커서 다른 의논이 더 필요 없겠습니다 (弘齋全書 經史講義 咸卦) 상경(上經)은 건괘와 곤괘로 시작하였고 하경(下經)은 咸卦와 恒卦로 시작하였는데, 그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건괘와 곤괘는 천지(天地)기화(氣化)의 시작이므로 상경의 첫머리에 있고 함괘와 항괘는 음양(陰陽)형화(形化)의 시작이므로 하경의 첫머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건곤(乾坤)두 괘의 경우는 음양이 존재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인가? 만약에 건,곤을 기화(氣化)의 시작으로 보고 함,항을 형화(形化)의 시작으로 본다면 불가함이 없겠으나, 만약에 천지와 음양으로 나누어 말한다면 결국 말의 병폐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건,곤은 천지의 도이고 음양의 근본이기 때문에 상경(上經)의 첫머리가 되고, 함,항은 부부의 도이고 생육(生育)의 근본이기 때문에 하경(下經)의 첫머리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소자(邵子)는 말하기를 "건,곤에서 감(坎),리(離)까지는 천도(天道)이고 함,항에서 기제(旣濟),미제(未濟)까지는 인도(人道)이다"라고 하였는데 반드시 이렇게 논리를 세워야 비로소 말이 정밀하지 못하다는 비평을 받지 않게 될것이다. 그리고 坎.離가 상경의 마지막이 되고 기제,미제가 하경의 마지막이 되는 것에도 반드시 정밀한 뜻이 존재할 것이니, 말하여 주기 바란다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감.이는 음양의 질(質)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상경의 마지막에 있는것이고, 기제,미제는 음양의 공(功)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경의 마지막에 있는 것입니다. 대개 미제는 감.이가 합한 것이고, 기제는 감,이가 어울리는 것이니, 이를 통하여 상경과 하경이 반대되는 오묘한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홍재전서 제105권,경사강의 총론) 咸, 亨, 利貞, 取女吉. 함은 형통하고 정(貞)하니 이롭고 女를 取하니 吉하다 彖曰, 咸, 感也, 단에 "함은 감(感)이니 柔上而剛下, 二氣感應以相與. 柔가 위에 있고 剛이 아래에 있어서 두 기운이 감응하여 서로 친해서 (이는 小男小女의 괘이기 때문이다) 止而說, 男下女, 그치고 기뻐하며, 남자가 여자에게 몸을 낮춘다 是以亨, 利貞, 取女吉也. 이 때문에 형통하는바, 정함이 이로우니 여자를 취하면 길한 것이다 天地感而萬物化生, 천지가 感動하여 만물이 화생하고 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 성인이 인심을 감동시키면 천하가 화평하니 觀其所感, 그 감응하는 바를 보면 而天地萬物之情可見矣! 천지만물의 정을 가히 볼수 있을진저! 象曰, 山上有澤, 咸, 상에 "산위에 못이 있는것"이 咸이다 君子以虛受人. 군자는 이를 보고 텅빈 마음으로 사람을 받아들인다 <제 마음을 허하게 하여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라> <咸卦의 괘상은 음양이 서로 잘 交感하는 상이고 恒卦의 괘상은 剛柔가 질서 정연하여 항구 불변하는 상입니다>(牧隱集) <程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산과 못의 기운이 통하는 형상을 보고서 그 마음을 비워 남을 받아들인다. 마음을 비운다(虛中)는 것은 나의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사사로운 주장이 없다면 무엇에서나 느껴서 통하지 않음이 없다"하였다> 初六, 咸其拇. 초육은 감동함이 그 엄지발가락이다 拇/무 : 엄지 손가락,엄지발가락 象曰, “咸其拇”, 志在外也. 상에 "감동함이 그 엄지발가락"이라함은 뜻이 밖에 있는 것이다 六二, 咸其腓, 凶, 居吉. 육이는 함(咸)이 장딴지이면 흉(凶)하니 움직이지 않고 안정하면 길하다 <程子가 傳에서 "이효가 만약 도를 지키면서 임금이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장딴지처럼 먼저 움직이면 실수를 하게 되므로 흉하며,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임금이 찾기를 기다린다면 진퇴하는 도리를 얻어서 吉하게 된다"로 풀었다> 腓/비 : 장딴지,종아리 象曰, 雖凶居吉, 順不害也. 상에 "비록 흉하나 움직이지 않고 안정하면 길하니 순응하면 해가 없는것이다" 九三, 咸其股, 執其隨, 往吝. 구삼은 감동함이 그 다리이다.잡아서 지킴을 상대방을 따라서 하니 그대로 나아가면 부끄러울것이다 股/고 : 넓적다리,정강이,가지,끝 象曰, “咸其股”, 亦不處也, 상에 "감동시키는 것이 그 다리이다"는 것은 또한 가만히 있지 않는것이다 “志在隨人”, 所執下也. 그런데 "뜻이 남을 따라하는데 있음"이니 고집해 지키는 것이 매우 하찮다 九四, 貞吉, 悔亡, 구사는 바르면(貞) 길(吉)하여 뉘우침이 없으리니 憧憧往來, 朋從爾思. 조바심을 가지고 왕래하면 벗들만이 네 생각을 따르리라 憧憧/동동 : 왕래가 끊어지지 아니함,마음이 정해지지 않은 모양,사심을 가하여 좋지 않은 뜻을 가지고 왕래하는 것이다 往來/왕래 : 느껴서 응하는 것은 본디 저절로 되는 것이다. 사사로운 뜻이 있으면 동동(憧憧)이다 <오고 가지만 벗들만이 네 생각을 따르리라에서 벗은 의리(義理)가 아닌 이해(利害)로 규합하여 조정하는 것이다/朱子> <사사로운 감정을 어느 한쪽 한가지 일에만 치우치게 되면 넓고 큰 데에 다 통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阮堂集) <憧憧往來/동동왕래/ : 마음을 질정하지 못하고 왕래한다>(林下筆記) 象曰, “貞吉悔亡”, 未感害也, 상에 "정하면 길하여 후회가 없을 것이다"함은 사사로이 감동하여 害를 당하는 것이 아닌 것이요 “憧憧往來”, 未光大也. 조바심을 가지고 왕래하는 것은 감동시키는 道가 광대(光大)하지 못한 것이다 九五, 咸其脢, 无悔. 구오는 감동시키는 곳이 그 등살이니 후회가 없을 것이다 象曰, “咸其脢”, 志末也. 상에 "감동함이 그 등살인 것"은 뜻이 낮기 때문이다 上六, 咸其輔頰舌. 상육은 감동시키는 곳이 광대뼈와 뺨과 혀이다 輔/보 : 돕다,광대뼈 頰/협 : 뺨,기분이 좋다 象曰, “咸其輔頰舌”, 滕口說也. 상에 "감동시키는 곳이 광대뼈와 뺨과 혀"라 함은 입으로만 말을 하는 것이다 滕/등 : 물솟다,물이 끓어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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