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기타

제 2 장 - 사떼야(거짓부리, 위선), 마나(자만)

rainbow3 2020. 4. 13. 13:32



사떼야(Sāṭheyya) - 거짓부리, 위선  

 

마야와 함께 사떼야(Sāṭheyya)도 이해해야 한다. 특정한 덕성이 있는 척하면서 남들로 하여금 자신을 존경하도록 할 때 그러한 탐욕(Lobha)을 사떼야(Sāṭheyya)라고 한다. 마야가 자신의 허물을 숨기고 허물없는 척 하는 것인데 반해 사떼야는 있지도 않은 덕성을 있는 척 하는 것이다. 이 둘은 속임수나 위선이다. 

 

비구의 사떼야 

 

선하지 않으면서 선한 척 하는 것, 수행을 잘하지 않으면서 수행을 잘하는 척 하는 것, 학식이 없으면서 학식 있는 척하는 것, 이러한 거짓부리를 사떼야 라고 한다. 총명한 재가자가 비구의 거짓부리를 눈치 채기 전까지는 위선적인 거짓부리 비구는 안전하다고 여길 것이다. 설사 재가자가 비구의 거짓부리를 간파하더라도“그 스님이 위선자이든 아니든 그건 알 바가 아니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비구는 계속해서 자신의 거짓부리(sāṭheyya)의 결과를 누릴 것이다. 

 

재가자의 사떼야 

 

사떼야는 선량하지 않으면서 선량한 척하는 것을, 마음집중(삼매)을 이루지 않았으면서 마음집중(삼매)을 이룬 척 하는 것을, 능력이 없으면서 능력이 있는 척하는 것을, 학사나 석사 등의 학위가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것을, 돈이 없으면서 돈이 많은 척 하는 것 따위를 뜻한다. 이러한 거짓부리는 재가자에게 있는 사떼야다. 

 

사떼야의 사악함 

 

마야와 사떼야는 일반적인 욕심인 로바보다 훨씬 더 삿되다. 다음은 이 사실을 명확히 할 것이다. 계 ∙ 정 ∙ 혜를 구족하고 있지 않으면서 구족하고 있는 척하고는 실제로 계 ∙ 정 ∙혜를 정말로 구족하고 있는 선한 사람인 것처럼 뽐낼 것이다. 그러한 위선의 과보로 그들은 윤회를 하면서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그러한 비구에게 어쩌다 귀의 한 재가자는 지식을 얻지 못할 것이고, 그러한 비구에게 올린 공양은 보시자에게 별다른 공덕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또한 계와 정을 구족한 척하는 위선자들이 있다. 많은 아가씨들이 그러한 위선자를 위해 감동의 눈물을 글썽인다. 소위 말하는 그러한 신사(紳士)의 그릇된 생계수단과 그릇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도시와 마을의 많은 사람들도 역시 그릇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영도력이 없음에도 있는 척하는 소위 말하는 지도자는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의 목숨과 재산을 헛되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권을 상실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나라마저도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아가씨들은 돈이 많고 명망 있는 척하는 남자를 철썩 같이 믿는다. 막상 그런 남자와 어쩌다 결혼을 하게 되면 둘의 결혼은 전혀 축복과 행운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참담한 비극이 되고 만다. 

 

더욱이, 배우자의 어느 한쪽이나 양쪽이 마야로 자신의 허물을 숨기고 사떼야로 부유한 것처럼 속여 왔다면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럼 그때도 속임수를 피운 배우자(또는 배우자의 친척)를 사랑할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 없이 함께 산다면 과연 행복하겠는가?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욕망만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 필수적이다. 

 

불자간의 결혼은 현생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부부가 금실이 좋다면 함께 절과 승원으로 가서 보시를 하면서 많은 선업을 지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부는 윤회를 거치면서 선한 과보를 누리게 될 것이다. 결혼이 마야와 사떼나로 더러워져 있다면 부부는 마지못해 선업을 지을 것이며 현생은 물론이고 윤회를 거치면서도 선한 과보를 누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결혼생활을 함께 해나가고자 한다면 마야와 사떼나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이렇게 마야와 사떼나는 한 사람이나 많은 사람, 심지어는 - 자신이 부처님이라고 주장하는 편협한 지도자들의 경우처럼 - 온 국가나 온 세계를 기만하기 때문에 매우 삿된 법으로 분류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이 선하고 바라밀을 구족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비롯하여 자신과 관계를 두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부정직과 삿된 마음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하고, 청정하고 지혜롭고 역동적이고 선하고 고귀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6. 딧띠(Diṭṭhi) - 사견 

 

사견이나 그릇된 이해를 딧띠(Diṭṭhi)라고 한다. 딧띠는 또한 삿된 믿음을 뜻하기도 한다. 딧띠는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바른 것을 그릇된 것으로, 그릇된 것을 바른 것으로 잘못 보거나 이해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딧띠는 또한 교조적으로 어떤 이의 사견을 올바른 것으로, 어떤 이의 바른 견해를 그릇된 견해로 여기는 마음의 작용이다.   

 

있지도 않은 세계의 전능한 창조자를 믿고, 있지도 않은 중생의 몸 안에 영혼(atta)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 이러한 사견들이 바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는 딧띠이다. 실제로 중생들이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받음에도 어떠한 선행이나 악행도 나중에 과보를 맺지 않는다고 그릇되게 믿을 때, 실제로 중생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업의 과보를 누리거나 받음에도 업에는 어떠한 과보도 없다고 그릇되게 믿을 때. 정신-물질과 괴로움의 종식인 열반이 있음에도 열반은 없다고 그릇되게 믿을 때, 열반을 얻기 전까지는 끝없는 윤회가 있음에도 내생은 없다고 그릇되게 믿을 때, 그러한 사견이 바로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믿는 딧띠이다. 

 

다음과 같은 믿음이 잘못된 것을 진실된 것으로 보는 딧띠이다. 

 

희생제에 쓰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이 공덕 있는 행동이며, 날씨가 아주 추울 때 물속에 들어가고, 날씨가 아주 더울 때인 대낮에 네 개의 불 한가운데서 자신의 몸을 데우고, 소와 개처럼 사는 것이 번뇌를 정화하는데 좋은 수행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한 적당한 때에 갠지스 강에 들어가 불선업을 씻어내는 것도 좋은 수행이라고 믿는 것이다. 

 

보시(dāna), 지계(sīla), 수행(bhāvanā)으로 열반을 실현할 수 없다고 믿는 것도 진실한 것을 거짓으로 여기는 딧띠이다. 

 

이렇게 사견(diṭṭhi)은 종류가 많다. 사견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사견의 마음(diṭṭhi-citta)이라고 하고 사견에 집착하는 사람을 외도(外道)라고 한다.(남은 마음의 작용과 관련하여 마음과 사람이 어떻게 함께하는 마음의 작용에 따라 불리는 지를 유념하기 바란다.) 

   

7. 마나(māna) - 자만 

 

자만을 마나라고 한다. 마나를 지닌 사람은 오만하고 인색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기 쉽다. 지위, 재산, 지식, 건강 등에서 남보다 뛰어날 때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고 남들을 얕잡아 본다. 또 지위, 재산 등에서 남들과 동등할 때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르지 않다. 나도 또한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까.”그리고는 여전히 자만으로 우쭐거린다. 그들의 지위, 재산, 지식, 건강 등이 다른 사람들보다 낮을 때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의 높은 지위, 재산 등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내가 가진 것만을 먹을 뿐이고, 내가 일한 만큼만 얻을 뿐이다. 왜 다른 사람에게 굽실거려야 한단 말인가?” 비록 남들보다 열등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만심에 차있다. 

 

일반적 형태의 자만과 그 극복방법 

 

태생이나 계급에 자만하는 것을 자띠마나(jati-māna)라고 한다. 오늘날 고귀한 태생의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만을 부리고, 떠벌리고, 남들을 열등하거나, 천하거나, 낮은 계급으로 여길 만큼의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만약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상냥하다면 더욱더 사랑과 존경을 받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막역함은 업신여김을 낳는다.”라고 반박 할 수도 있다. 이는 사실이다. 일부 무례한 사람은 당신을 경멸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군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들의 허물이며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당신의 태생에 자만하지 않도록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다나마나(Dhana-māna): 부자의 자만을 다나마나(dhana-māna)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가난한 사람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고 지내는 약간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마도 미얀마의 다음과 같은 속담대로 자신들이 엄청나게 돈이 많고 부유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강을 보지 못한 사람은 시냇물을 큰 강으로 생각한다.”하지만 그들이 넓은 마음을 가졌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하다면 그들은 더욱더 존경을 받지 않겠는가? 위험에 처했을 때 심지어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겠는가? 부자의 미소와 상냥한 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특효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생에 행한 보시로 인해 현생에서 얻게 된 재산이 내생에 하류층으로 전락하게 할 수도 있는 자만(māna)의 토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유한 사람은 기품 있는 매너로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생의 엄청난 재산은 많은 위험을 만난다. 설령 그러한 위험이 없다 해도 오직 현생에서만 쓸 수 있을 뿐이다. 

 

“황금궁전에 살고, 왕의 치장을 갖추고, 문무백관들에게 둘러싸인 왕의 재산은 바다 표면에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방울과도 같다.”(아난따수리야 대신) 

 

빤냐마나(paññā-māna): 교육받은 사람들의 자만을 빤냐마나 라고 한다. 지식은 무엇이 적절하고 무엇이 적절하지 않은지, 문화와 사회관계에서 어떻게 교양있게 행동하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뜻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자신의 교육과 학력으로 자만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교육은 남에게서 배운 어떤 것으로 특별한 성취가 아니다. 어느 누구라도 훌륭한 스승에게서 배울 기회를 얻으면 공식적인 학력을 딸 수 있다. 

 

못 배우고 아주 우둔한 사람을 만나면 우쭐거리고 잘난척하고 깔봐서는 안 되고 친절하게 대하고 힘닿는 대로 가르쳐줘야 한다. 세속적 지식과 불교교리 양쪽에서 학식이 높은 아주 유명한 주지스님이 있었는데 이는 과거 생에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남들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배운 지식을 잘 활용하여 윤회에서 이익을 얻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