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욕망이론을 통해서 재해석된 작가주체의 변천사
최은녕(이화여대)
I. 들어가는 말: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문화시대를 맞이하며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는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물인 객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주체의 관점에서 객체를 이해하는, 주체중심적 인식론을 정립했다. 이러한 주체우월적인 관점은 서구 근대의 전형적인 고찰방법이었고, 수많은 학문 영역에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주체중심적인 사고의 틀을 깨뜨리고, 수천 년 동안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사유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타자의 음성을 변호한다(신승환 2008, 25 참조).
이를 통해서 주체는 더 이상 유일한 객관적 진리의 생산자로 간주되지 못하고, 중심부의 주체는 주변부로, 주변부의 타자는 중심부로 이동하는 ‘주체의 탈중심화’가 이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형이상학적 주체는 세계의 중심도, 그것의 근원도 아니며, 오히려 사회적 관계와 언어적 구조를 통해서 생겨나는 산물에 불과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형이상학적 인간의 해체를 의미하는 ‘주체의 죽음’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한 모토가 된다.
근대의 주체중심주의는 문학에서 저자의 탄생으로 이어져서, 중세까지 전혀 확립되지 않았던 저자에 대한 관념은 근대의 초반기에 발생하였고, 그 절정기인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개념적으로 매우 체계화되고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Vgl. Anz 2007, 131). 저자는 근대가 문학에서 탄생시킨 형이상학적 인간의 전형으로서 서구의 전통적인 문학해석에 있어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누려왔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는 텍스트를 저자의 절대적인 권력으로부터 독립시켜서, 오직 언어자체의 자율성에 의해 생성되는 자율적 구조로 정의한다. 그는 이를 통해서 20세기 중후반 전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한 문학 슬로건 ‘저자의 죽음’을 만들어낸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근대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본성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매우 대립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근대는 인간에게 절대적 주체로서의 생명력을 선사한다면, 탈근대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주체를 죽음으로 내몬다. 근대는 인간이 이성을 가진 절대적 주체로서 신을 대신하여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고 역사와 문명을 창조하는 존재로 이해한다(이정우 2012, 689-700 참조). 반면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을 창조자의 위치로부터 끌어내려서, 역사와 사회에 의해서 존재가치가 규정되고 정체성을 부여받는 존재로 간주한다.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내면 안에서 개별적 자아로 존재하는 ‘내 안의 나’를 포착하여, 자신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자각한다. 근대 사상의 창시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Ich denke, also bin ich.”는 코기토 명제를 통해서 철저하게 자아의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판단하는, 주체의 절대적인 사유능력을 강조한다. 내 안의 자아는 스스로 생각하는 정신적 실체로서 나 이외의 모든 타자를 내 판단 아래 복종시켜,나의 존재뿐 아니라 타자의 존재방식까지 규정짓는다. 내가 사유를 통해서 나의 자아와 타자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이 나의 사유 속에서 관념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내가 생각하지 못한다면 비록 자아와 타자가 실제적인 물리적 공간에 실재할지라도 이들을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근대적 관점에서 볼 때, 자아와 타자는 주체가 생각하는 그의 사유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주체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는 그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아와 타자는 오직 생각하는 나에 의해서 인식될 때만 그들의 존재가 합리화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포스트모더니즘적 인간은 스스로를 더 이상 자신의 눈에 비치는 자아로 보지 않고, 타자의 시선 속에 비치는 나, 즉 내 안에 존재하는 ‘타자로서의 또 다른 나’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감을 발견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적 사상가로 활약한 자크 라캉 Jacques Lacan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를 뒤집어서, 재치있게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존재한다. Ich denke, wo ich nicht bin, also bin ich, wo ich nicht denke.”는 안티테제를 설정한다(Lacan 1975, 43).
타자는 자아가 생각할 바를 미리 알려주어 자아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자아가 말할 바를 미리 알려주어 자아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존재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인 지크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는 인간이란 스스로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의식의 욕망의 지배를 받아 무의식의 생각을 그대로 수행하는 자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와 그의 이론적 계승자 라캉에게 있어서 타자는 무의식을 뜻한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이 직접 생각하는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그 안에 타자로 작용하는 무의식이 생각하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며, 자신이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의식이 행동하게 하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욕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의식이 충동하는 욕망을 그대로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 안의 또 다른 나, 즉 타자인 무의식과 자기를 동일체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욕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곳, 즉 무의식세계 속에서 생각하고, 자신의 의식이 생각하지 않는 곳, 즉 의식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근대의 극단적으로 주체중심적인 자아관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으로 타자중심적인 자아관은 양쪽 모두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건강하게 그리지 못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병든 자아관을 가지도록 유도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전자는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절대시하여 과대망상적 증세에 빠져있는 인간관을 보여준다.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자아가 타자라는 새로운 질서에 병합되지만, 그는 양자의 내적인 일치감에 도달하지 못하고 둘 사이에서 방황하며,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끊임없이 왜곡하는, 정신분열적인 공상증세를 보여준다. 세상을 오직 자아의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판단하려는 근대의 인간관도, 자신을 오직 타자의 시선으로만 분석하고 존재의미를 규정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관도 인간을 그의 진실된 현실로부터 유리시켜서 그의 본래성을 잃어버리게 하고,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존재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 항상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상실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도록 자극한다.
학계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의 뒤를 이어 전개되는 21세기의 신문화를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Post-Postmoderne이라고 부른다.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은 학자들에 따라 메타모더니즘 Metamoderne, 가상모더니즘 Pseudomoderne, 하이퍼모더니즘 Hypermoderne 등과 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며(Vgl. Akker/Vermeulen 2014, 12ff.), 본질적으로 두 개의 독립된 문화 현상들, 더 자세히 말한다면, 서로 극단적으로 대치되는 성격을 가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설적으로 동시에 공존하는, 기이한 문화적 현상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Vgl. Ebd., 18-27).
20세기의 문화는 ‘이후에’라는 순차적 진행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 접두사 ‘포스트 post’를 기준으로 하여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구분된다.1) 이와는 달리 21세기의 문화는 더 이상 시대를 ‘이전’과 ‘이후’ 라는 논리로 구분하지 않고, ‘트랜스 trans’라는 접두사의 기준 하에 규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여러 문화적 사조들이 서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 융합하거나, 서로 대립하거나, 또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동시에 복수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Vgl. Ebd., 24ff.). 따라서 21세기의 문화인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특성들의 ‘병렬적 공존’ 또는 ‘혼성적 뒤섞임’뿐 아니라 두 문화현상들의 ‘개념적 넘어섬’까지 경험하게 된다.2)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문화는 모더니즘의 자아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타자가 함께 병존하면서, 둘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 공간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하이브리드 세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켜서, 자신이 우선적으로 정신적 관념의 세계에 속한 존재인지 혹은 자신이 물질적 타자세계에 의해 존재의 근원을 부여받는 존재인지 혼돈스러워하는 자아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21세기 문화의 공간은 다양한 문화적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등장하는, 끝없는 혼돈의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면, 상이한 문화들과 가치관들이 한데 서로 어우러져 소통하고 융합하는 가운데, 잡종문화로서의 유익한 하이브리드 문화들이 많이 탄생할 수 있는, 무진장한 창조적 가능성의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21세기 문화의 영역은 무한대의 미정성 공간을 상징한다.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무의미의 파편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무질서의 세계로 보일수도 있고, 인간학적 연구들의 주장에 따라 인간의 창의적인 잠재력이 작용하는 세계로 비춰질 수도 있다.
복합적인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는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관을 더 선호할 수도 있고, 또는 - 주체를 강조하는 모더니즘의 전통과 유사하게 - 창조주체로서의 인간을 연구의 핵심에 놓는 인간학적 문화관에 더 동조할 수도 있다.
필자는 우리 시대의 건강한 예술문화론의 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기 위하여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를 무엇보다도 인간학적 측면으로 해석하고, 이에 상응하는 문화주체론과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적 문학현상을 연구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다.
언급된 학문적 시도의 구체화를 위한 첫 번째 기초작업으로서, 필자는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바르트 등과 같은 여러 문학이론가들의 테제들을 함께 논의에 끌어들이는 가운데,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초반부에 이르는 문화사의 과정 속에서 보여지는 작가의 주체 문제에 관한 담론의 변천과정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모더니즘 시대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 요즘 활발히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넘어가는 동안 발생하는, 인간주체에 관한 사유의 변화과정에 대해서도 함께 논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본 논문은 현대의 문화주체가 모더니즘적 인간형으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적 인간형으로 변모해가는 변천과정과 그 이후의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는 - 앞에서 언급된 - 두 가지 상이한 인간형들이 동시적으로 공존하며 초문화 Transkultur 시대를 구성하는 양상을 살펴본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언어학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유명한 라캉은 인간이 타자의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내면화시켜가는 과정을 ‘주체형성’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상상계 das Imaginäre’, ‘상징계 das Symbolische’, ‘실재계 dasReale’라는 세 단계의 발전경로를 통해서 구체화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세계인 상상계, 즉 유아기의 거울단계를 지나서, 언어를 익힌 후 사
회적 질서의 권위에 복종하는 세계인 상징계, 즉 일명 아버지의 법이라고도 불리는 사회규칙이 다스리는 오이디푸스 단계로 성장해간다. 그러나 그가 무의식적으로 갈구하는 원초적 욕망은 상징계의 단계에서는 결코 충족되지 못하고 욕구불만으로 남는다. 이 때 인간은 비록 그의 육체가 속한 현실적 세계인 상징계를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그의 정신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상징계 너머의 영역이면서 욕망의 최종적 목적지가 되는 실재계의 단계로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캉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단순히 주체의 형성과정을 순차적으로 표시하는 개념들로 정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보로메오의 고리이론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세계가 본질적으로는 이 세 영역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세 개의 고리들이 서로 맞물려서 엉켜있는 모양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구조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는 인간주체의 발전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서로 동시적으로 공존하면서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순차적 발전단계의 모습과 동시적 공존의 관계를 한꺼번에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라캉의 욕망모델은 한편으로는 모더니즘적 인간형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인간형으로 변해가는 20세기 문화주체의 순차적 변천과정에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상이한 인간모델들이 서로 동시에 병존하면서 함께 상호작용하는 21세기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의 혼종적 문화주체상에도 비교되는 것이 가능해진다.
본 논문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라캉의 욕망이론을 소개하고 ‘저자의 죽음’의 테제를 통하여 문학의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작가상을 구상한 바르트의 이론을 라캉의 이론에 접목하여 분석해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이론들이 인간주체 및 작가주체의 변천사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되어 사례화될 수 있는지 구상해보는 일이다. 필자는 창작자 역할을 강조하는 전통적 저자의 개념에서 벗어나 – 저자에 대해서 비인격화된 타자로 작용하고 있는 – 언어체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바르트적 맥락의 작가주체의 형성과정과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모더니즘적 자아상과 포스트모더니즘적 자아상 사이에서 고뇌하며 혼돈을 겪는, 21세기 문학주체들의 정체성 혼란의 양상을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3단계 욕망모델에 비유하여 분석해보고자 한다.
1) 근대주의로도 번역될 수 있는 모더니즘은 그 개념설정에 있어서 많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으며, 매우 광범위하게 해석될 수 있는 개념이다. 모더니즘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중세시대의 교회의 권위와 사회적 봉건제도로부터 벗어나, 합리적 사고와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시대적 사상으로서 르네상스 이후부터 17-18세기를 거쳐 현대 초까지 이르는 광대한 시기를 가리킨다. 좁은 의미에서의 모더니즘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기존의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고 그 대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는 예술운동을 가리킨다. 필자는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문화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모더니즘을 방금 소개된 두 가지 정의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의 맥락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운동을 근대를 탈피하여 펼쳐지는 사상의 종합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그것의 주요 키워드로서 탈근대, 탈이성, 탈주체 등과 같은 모토들을 주제화한다.
2)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은 -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 따라 사회, 역사, 언어 등과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담론객체들의 영향에 의해 확정되는 인간관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 과학 같은 기술담론에 의해 탄생하게 될 새로운 인류의 출현, 즉 과학적인 첨단기술에 의해 인공생명을 보장받는 기계인간의 출현을 예고하는 트랜스휴머니즘 Transhumanismus을 현실화할 수 있다.
또는 - 모더니즘이 정의하는 맥락에 따라 순수하게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관념적 주체의 개념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존재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여,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영역에서부터 무생명체의 영역에까지 광범위하게 미치는 인간의식의 영향력을 연구하는 네오휴머니즘 Neohumanismus의 경향도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의 혼합적 문화조류에 포함될 수 있다(참조: 하이브리드미래문화연구소 2015,16-42, 187-213).
II. 상상계의 작가론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거울단계 das Spiegelstadium라고도 불리는 상상계는 인간이 아직 주체로 성장하기 이전의 유아기적 자아의 모습을 소개한다(Vgl. Lacan 1986 b,61–70).
18개월 이전의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보며 자기 자신으로 오인하고 환호성을 지르고 반가워한다. 그러나 그가 유아기에 만나는 거울 속의 세계는 그의 실제 세계가 아니라 가상적인 이미지의 세계이다. 라캉에 의하면, 그가 거울속으로 바라보는 이미지도 그의 실제적인 참자아와 일치되는 대상이 아니며, 그가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그려내는 가상적인 자아상이다.
거울단계의 아이는 실제세계와 이미지 세계를 아직 구분하지 못하며, 또한 타자와 참자아에 대한 인식능력도 아직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는 아직 타자에 의해서 객관화되지 못하고 편협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상태를 완벽한 것으로 착각하는 나르시시즘적 도취에 빠져 있다.
거울 속에 비친 이미지는 외관상 아이의 모습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아이가 거울이라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혼자만의 시선으로 그려낸, 이상화되고 주관화된 유아기적 자아상이며, 실제세계에서 아이 본인과 일치될 수 없는 타자일 뿐이다.
거울단계의 상상계에서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의 중심은 아이 자신이다. 그는 보는 주체로서 자기의 눈에 보이는 이미지의 세계를 참세계로 오인하며, 스스로 만들어낸 유아기적 판단의 법을 세계를 이해하는 척도로 삼는다.
라캉의 거울단계에 등장하는 아이의 모습에 상응할 수 있는, 문학에서의 작가상은 사회로부터 이탈하여 자기만의 세계에 탐닉하다가 자폐아적인 유토피아의 망상 속에 사로잡혀 고독하게 반사회적인 삶을 살곤 했던, 질풍노도 시대 또는 낭만주의 시대의 천재 예술가들과 같은 인물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3)
당시에 천재 예술가의 전형으로 고착화된 특성들로는 내적인 세계로부터 폭발적으로 솟아나는 창조력, 반사회적인 주변인으로서의 불만족 그리고 가난, 고독, 정신적 방황으로 인해 고통받는 불행한 존재로서의 운명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낭만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천재 예술가들을 평범한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하고 이상적인 영웅으로 인식하여, 이들의 폐쇄적인 창작세계에 무한한 자율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때부터 예술가는 그 어떤 외적인 규범과 관습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스스로가 규칙이 되고, 스스로가 예술적 영감이 되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창조력에만 의지하여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Vgl. Krieger 2007, 35-56). 이러한 시대의 문화적 흐름에 따라 작가는 서구에서 점차적으로 고독한 천재 예술가로서 숭배되었고, 작품은 작가의 인생행로, 개성, 재능 또는 의도의 흔적을 지닌 것으로 정의되었으며(Vgl. Vladimir 2006, 84ff.), 작가의 생애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작가가 의도한 텍스트의 의미를 해명하는 역사 전기적 비평은 텍스트해석의 절대적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바르트는 이런 주체중심적인 전통적 작가관의 논리를 공격한다. 그에게 있어서 낭만주의적 천재미학의 전통을 계승한, 전기적 비평의 의도론자들이란 - 거울단계의 아이가 자아도취적 세계관을 통해서 자신과 타자 그리고 세계를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오인하듯이 -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여서, 작가의 실제 상태를 터무니없이 과장하거나 잘못 해석하고, 이것이 마치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믿어버리는, 과대망상적 작가론자들에 불과하다.
의도론자들이 주장하는 작가상은 작품이라는 허구의 거울을 통해서 나르시시즘적 자아상에 빠져든 작가의 이미지로서 완벽한 예술을 생산할 뿐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독자에게 가장 모범적이고 올바른 해석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이상화된 창조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작가상은 실제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의도론자들이 그들의 상상속에서 지어낸, 허구화된 거짓 작가상일 뿐이다(Vgl. Nünning 2001, 281).
3) 필자가 라캉의 상상계와 연결될 수 있는 작가의 유형으로서 낭만주의자들을 사례로 제시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보다도 낭만주의가 독일의 관념철학, 그 중에서도 절대적 자아론에 기초를 둔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은 ‘존재하는 것은 일체가 자아다’라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자들은 자아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자아는 절대적 존재이며, 독자적으로 사유를 통해 모든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생산적 자아를 의미한다. 낭만주의에서 즐겨 사용하는 낭만적 이로니, 절대적 자아의 무한한 활동의 자유, 자아의 근원적 무제약적인 원리 등은 모두 이러한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개념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김성곤 2011, 121) 그러나 사실 낭만주의자들의 창작활동을 단순히 라캉의 상상계의 영역내로만 제한하여 묘사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낭만주의자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주관적인 상상의 무한한 자유를 꿈꾸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지향한 것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무너진 채 끝없이 펼쳐지는 혼돈의 세계 또는 무질서의 세계였으므로, 넓은 의미에서 이들의 환상이 본질적으로는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까지 넘나드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가설도 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낭만주의 계열의 작가들과 상상계의 관련성에 관하여 다른 관점들의 제기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놓고 싶다.
III. 상징계의 작가론
상징계로 들어선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계와 자아상을 좇지 않고, 이제는 타자의 눈에 비치는 세계의 모습과 자신의 자아상을 추구하는 법을 배운다.
보는 주체는 더 이상 그가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이다. 그러나 이때의 타자는 인격화된 타자의 맥락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규정해 줄 수 있는, 모든 사물적 대상들의 영역을 가리킨다(Vgl. Bryson 2013, 185-198).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억제된 성적 욕망 또는 폭력적인 본능과 같은 주제들과 관련시키는 반면에, 라캉은 그의 무의식 이론을 언어의 차원에서 재해석한다. 그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언어학의 원리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응용하여, 무의식이 언어라는 구조에 의해서 구성되고 작동하는 것이라는 기본테제를 확립한다(Vgl. Lacan 1987, 26).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세계가 사실상 10%의 의식구조와 90%의 무의식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직접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무의식이 그의 심적 상태를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며, 그의 의식적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 이것을 라캉의 관점으로 표현해 본다면, 무의식을 움직이는 언어체계는 인간의 실제적인 의식적 사고영역보다 더 광범위한 것으로서 인간존재를 선지배하는 힘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고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언어에 의해서 사고하고 말을 하도록 이끌림을 받는 존재이다(장영안 1997, 62-63 참조).
라캉의 상징계는 언어의 단계로서 언어화된 법과 질서의 세계를 나타낸다. 라캉의 이론에서 ‘소타자 der kleine Andere’는 상상계에서 거울 속에 비친 허구화된 대상으로서의 타자를 칭한다.
반면에 ‘대타자 der große Andere’는 일차적으로는 프로이트의 경우와 같이 아이와 어머니의 근친상간적 관계를 금지시키는, 실제적인 아버지의 법을 의미하고, 이차적으로는 상징적인 아버지의 법의 의미로서 아이를 사회구조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각종 사회질서와 법제도를 뜻한다(Vgl. Lacan 1986 a,77).
거울단계에서 혼자만의 방대한 자유를 누리던 유아기의 자아는 상징계에 들어서면서 ‘대타자’의 법과 질서에 복종하는 태도를 배우고 사회적 자아로 성장해간다.
라캉의 상징계에 속한 인간형의 모습과 비교될 수 있는, 문학에서의 작가상은 바르트가 후기구조주의 미학자로서 구상한 작가의 역할에서 그 구체적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비평가 윌리엄 윔사트 William K. Wimsatt와 모로 비어즐리Monroe C. Beardsley는 그들의 공동 텍스트 「의도의 오류 Der intentionale Fehlschluss」(1946)에서 작가의 창작의도가 꼭 작품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작가의 본래의도와 작품에서 성취되는 의미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도가 항상 올바른 작품해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신념은 잘못된 가설이라고 주장한다(Vgl. Wimsatt/Beardsley 2000, 84).
이들은 예술작품이란 작가의 인생이나 그의 세계관으로부터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대상이며, 의도론자들이 작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실제적 기록물이나 그에 관한 배경지식이 되는 환경을 통해서 작품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Vgl. Ebd., 89).4)
신비평가들이 적어도 작가를 실제적 창작주체로 받아들이면서 반작가적인 논리를 펼친다면, 바르트는 인격화된 작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면서 무한한 텍스트 세계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상상계의 아이가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는 이미지란 이미 사라져버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듯이, 텍스트 안에서 의도론자들이 발견하려는 창작자로서의 작가상도 이미 텍스트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그 형체조차 발견할 수 없는 가짜 작가의 이미지일 뿐이다.
작가와 세계 사이에는 담론으로서의 언어체계가 존재하며, 담론의 체계는 개인적 작가주체보다 더 거대하다. 이것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있었고, 그가 사라진 다음에도 여전히 존속하는 거대한 담론의 체계 속에 들어가 있다(Vgl. Bryson 2013,185-198). 이 언어체계는 작가가 볼 수 있는 시야보다 더 넓게 세상을 관찰할 수 있으며, 창작주체로서의 작가의 한계를 벗어난 영역들도 볼 수 있는, 끝없는 시야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상징계에서 작가를 중심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은 바로 이 언어의 체계이다. 작가는 자신이 항상 작품 시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작품을 생산하는 동안 작품을 구성하는 언어의 그물망에 의해서 역으로 탈중심화되고 문학의 주변부로 재구성된다.
바르트는 문학적 예술작품이 언어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작품의 기본구조는 언어모델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쉬르는 언어를 랑그 Langue와 파롤 Parole로 구성되는 기호체계로 정의하면서, 언어의 보편적 차원을 상징하는 랑그를 언어의 개인적 차원을 뜻하는 파롤보다 더 상위적이고 중요한 개념으로 설명한다.
바르트는 소쉬르의 이론을 문학작품에도 충실하게 적용해서, 작품의 랑그적 측면을 작품의 파롤적 측면보다 더 상위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는 문학작품의 기원이 파롤적 측면으로 간주될 수 있는, 작가의 개인적인 창작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랑그적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초개인적인 언어체계로부터 출발한다는 테제를 주장한다. 이 때 두 학자간의 차이점은 소쉬르가 결코 파롤의 범주에 속하는 개인 주체를 무용지물로 설명한 적이 없는데 비해서, 바르트는 작가의 개인적인 창의력을 완전히 무효화하고 오히려 사물세계의 객체적 대상으로 전락한 작가상을 수립한다.
바르트는 작품의 기원으로서의 작가존재를 부인하고, 작품이 어떻게 작가가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탄생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바르트는 텍스트를 창조하는 작가의 개념 대신에 ‘필사자 Skriptor’의 모델을 새로운 현대적 작가형의 콘셉트로 제시한다.
실제작가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는 자신의 인격적 주체로서의 근원을 상실하고, 언어구조의 한 단위가 되어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언어적 요소들을 새롭게 배열하는 ‘필사자’로 변모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는 글쓰기가 시작되면 작가는 죽고 문자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필사자’는 결코 창의적 몸짓을 취하지 못하고, 문자들을 서로 뒤섞거나 서로 대립시키는 방식을 사용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탄생시킨다. 이때의 텍스트는 작가가 완전히 새롭게 생산하는 창작적 표현물이 아니라 단지 기존의 단어들이 합성되어 만들어진 조합체에 불과할 뿐이다(Vgl. Barthes 2000, 190f.).
거울단계에 머무는 작가는 작품을 창조하는 주체로서 작품이해를 위한 판단의 중심에 스스로를 앉히고, 자신이 의도하는 작품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바른 해석의 기준으로 삼는 자아도취적 자세를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상징계의 단계에 들어선 작가는 더 이상 자신만의 관점으로 작품세계와 자신의 자아상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비인격화된 타자로서 작용하고 있는 언어체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작품세계와 작가로서의 자아상을 추구한다.
4) 작가 의도주의의 옹호론자들은 신비평의 작가비판론에 대한 반론적 또는 보완적 논거로서 ‘가설적 의도주의 Hypothetischer Intentionalismus’의 테제를 고안해낸다. 이들에 따르면, 작가의 의도는, 역사적 비평주의가 주장하듯이, 원래 작가의 전기적 요소와 관련되는, 작가의 창작정신 또는 영감의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각 작품마다 심어놓은, 작품 자체의 고유한 의미를 독자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는데 있다고 한다(Vgl. Spoerhase 2007, 123-144). 이런 논리에 따르면, 작가의 의도는 실제 작가의 개인적 삶에 관련되지 않고, 작품의 순수한 내재적 의미를 가리키게 된다.
IV. 실재계의 작가론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은 단지 욕망들 자체의 무의미한 형태로 머물러 있지 않고 욕망들을 상징적 언어로 변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의식을 향하여 계속 잠재의식속에서 억눌려 있는 무의식적 욕구들의 신호를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송신하는 활동을 한다(Vgl. Wulftange 2016, 128-242).
이때 인간의 의식은 그 무의식의 메시지들에 반응하여, 어떤 것들은 의식의 표면위로 끌어올려서 언어로 의미화하여 상징계에 안착시키고, 어떤 것들은 다시금 무의식의 공간으로 가라앉혀 언어영역의 밖에서 의미도 없고 형태도 없이 수수께끼 같은 형상으로 무의식 세계에 남아있게 한다.
라캉은 이렇게 인간의 정신영역에서 아직 언어로 분명하게 밝혀지거나 규정되지 못한 채 무언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불가사의하게 존재하는 부분들을 실재계라고 부른다.
실재계는 상상계나 상징계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그 둘의 영역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의식으로는 깨닫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도달하기도 어려운 미정성의 영역이다(Vgl. Lacan 1987, 86-60; Choi 2013, 84; Kant 1990, 25).
라캉에 따르면, 실재계는 인간의 상상적 이미지로도, 언어적 상징으로도 표출되지 못하고 그냥 욕구의 형태로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다가, 자주 외상이나 공포의 형태로 나타나 인간을 괴롭히곤 한다.
실재계는 칸트의 철학에서 인용되는 ‘사물의 물자체’와 동질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Vgl. Däuker 2002, 206-216).5) 칸트식으로 표현해 본다면, 이것은 상상계와 상징계가 ‘현상’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전에도 두 영역 너머에서 그것들의 ‘물자체’로 존재하고 있었고, ‘현상’으로 출현한 이후에도 그것들의 ‘물자체’로 여전히 동일한 자리에 머물면서 인간정신의 가장 깊숙한 곳을 지배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규정하는 중요한 테제들 중의 하나는 인간이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 인해 끝없이 ‘욕망하는 주체’라는 것이다(Lipowatz 1999, 181).
인간은 자신의 불완전한 존재를 타자와의 관계성을 통해 보완하기 위하여 타자와의 동일시를 갈망한다. 아이가 거울속의 이미지로 만나는 거울단계의 소타자는 더 원초적인 의미에서는 그가 태어나기 이전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어머니의 신체와 동일체를 이루어 완전한 안락감의 상태를 누리던 이상적 자아상을 상징한다.
인간이 ‘욕망하는 주체’로서 일차적으로 상상계의 소타자와의 동일시를 꿈꾸며 잃어버린 어머니의 세계를 다시금 되찾아서 독점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이차적으로는 상징계의 대타자와의 동일시를 꾀하며 아버지의 법세계에 편입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인간주체가 타자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는 사실은 타자와의 동일시가 결핍된 그의 현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첫 번째 결핍은 그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누리던 맨 처음의 완벽함의 상태로부터 분리되어 모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발생한다. 그 이후로 그는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며 자신이 태아시절 소유했던 원초적 세계의 완전함을 갈망하고, 소타자로 불리는, 거울속의 상상적 대상물과의 동일시를 통해서 그의 결핍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적 사실이라고 믿었던 생각은 단지 환상에 불과한 허상일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그는 현실세계에 그리고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소타자는 이미지의 세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둘은 결코 서로 일치될 수 없는 존재들이며, 그는 계속 결핍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Vgl. Lacan 1986 b, 61-70; Ders. 1986 d, 165-204).
인간이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면, 상상계에서 아직 언어화되지 못한 채 이미지의 형태로 작용하던 어머니의 세계에 대한 욕망은 새로운 아버지의 법에 의하여 억압을 받아 무의식세계로 잠기고, 대타자로서의 아버지의 법이 소타자가 차지하였던 공간을 대신 차지하여 전격적으로 의식의 수면위로 부상한다.
그러나 인간은 상징계의 주체로 성장한 이후에도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아버지의 법에 의해 강압적으로 쫓겨나 무의식 세계로 추방당한 어머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계속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 이렇게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는 꿈들은 트라우마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의식적으로 상징계의 질서 안에 머무르려는 주체를 다시금 상상계의 혼돈스러운 환영 속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인간의 두 번째 결핍은 그가 상징계 진입 이후에도 여전히 거울단계의 소타자를 갈망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상상계의 소타자와 상징계의 대타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방황하는 ‘사이의 존재’로 머무르면서 발생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영원히 상실한, 원초적 완벽함의 상징인 ‘이상적 자아 ein ideales Selbst’를 동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사회구조 안에 모범적으로 편입할 수 있는 잣대가 되는 ‘자아이상 Ichideal’을 갈구한다.
그러나 이 두 자아상의 괴리는 현실세계에서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것이며, 이상을 좇으려는 욕구와 현실에 정착하려는 강박감 사이에서 고뇌하는, 주체의 모순된 분열을 비추어준다(Vgl.Lacan 1986 d, 219).
이 때 상상계와 상징계의 대립적 갈등관계를 상쇄시키고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바로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실재계이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사이에서 심하게 방황하는 인간은 두 영역을 벗어나서, 그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비언어의 세계, 비이미지의 세계인 제3의 영역, 즉 실재계의 공간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곳에서 그는 이미지 세계에서 그리고 언어세계에서 자신이 결코 차지하지도 못했고 포기하지도 못했던 상상계의 꿈을 - 환상을 통해서 끝없이 만들어지는 - 다른 대체물들을 통해서 보상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찾는 소타자는 영원히 상실한 대상으로서 결코 현실세계에서 도달할 수도 없고 다른 대상물들을 통해서 충족될 수도 없는 꿈이다.
바르트는 소쉬르의 순수언어학적인 테제들을 신화학이라는 전혀 별개의 학문적 영역에 응용하여, 신화기호학이라는 새로운 현대적 문화비평의 한 장르를 개시한다. 일반적인 신화는 객관적인 사실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인 신들의 관점에서 인간 세계를 이해하고 정형화한다.
반면에 바르트의 신화개념은 소수 지배계급에 의해 선택된 특정 이데올로기가 마치 지극히 자연스럽고 영원한 진리인양 위장하여 한 시대의 사회전체 구성원을 속이는 모든 행위들 또는 관념형태들을 일컫는다(Vgl. Barthes 1957, 17).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가 생각하는 신화란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이미 당연하게 통용되어 인간의 판단력에 족쇄를 채우고 인간의 정신세계를 억압하는 모든 논리들, 이념들, 사회문화적 현상들 전체를 뜻한다.
더 나아가 바르트는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고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맥락들이 바로 신화이며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고, 인간은 원초적인 무의미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Vgl. Barthes 1957, 145).
바르트의 문화연구의 목표는 바로 이런 모든 신화적 이데올로기의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바르트는 소쉬르의 기호학적 관점을 심화 확장시켜, 구조주의적 관점의 언어의 의미화 작용을 넘어서서 그 이면에서 진행되는 언어의 무의미화 작용을 해명하는, 후기 구조주의적 언어관을 확립한다.
소쉬르의 이론이 한 개의 기표와 한 개의 기의가 일대일로 대응하여 하나의 언어기호와 그에 딸린 의미를 생산하는 의미의 결정화 과정을 설명한다면, 바르트의 이론은 한 개의 기표가 무수히 많은 의미들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의미의 고정이 불가능해져 결국에는 의미 자체를 상실하는 과정을 해명한다.
전자가 의미화의 과정을 겪은 기호들이 의미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또 다른 기표들과 서로 연결되어 치환되는 은유의 관계를 통해서 확장될 수 있다면, 후자는 하나의 기표에 수많은 의미들이 결합되어 기의의 고정을 무한대로 유보시키는 환유의 관계를 작동시킨다(Vgl. Lummerding 2005, 116f.).6)
바르트는 「작품에서 텍스트로」라는 논문에서 은유의 원리에 입각하여 생산되는 문학의 유형을 ‘작품 das Werk’으로 그리고 환유의 원리에 입각하여 출현하는 문학의 유형을 ‘텍스트 der Text’로 명명한다.
‘작품’은 근대 이후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애호되었던 문학형태, 즉 저자의 이름에 의해서 분류되고 계보화되기 때문에 폐쇄적이고 완결된 구조 안에서 단일한 의미의 발견을 추구하는 문학유형을 가리킨다.
반면에 ‘텍스트’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에 의해 도입된 ‘상호텍스트성 Intertextualität’의 원칙에 입각하여 문학을 이해하기 때문에 다른 텍스트들과의 종합적 연관관계 속에서 무한한 의미들의 생산이 가능해지는, 열린 구조의 문학유형을 일컫는다(Vgl. Barthes2006, 65f.).
바르트는 모든 의미들을 이미 고착화된 것으로 해석하는 결정주의적 사고관에서 출현하는 신화들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현대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언어결정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후기구조주의적 차원으로 재해석하여, 인간의 사고를 고정된 틀에서부터 벗어나게 하고, 진정한 언어의 즐거움을 알게 하는, 새로운 문학의 이해공간을 마련하려고 한다. 이를 위하여 바르트는 언어의 의미작용을 확대시키는 은유의 원리 및 그것에 기초하여 작가중심적 문학관을 강화시키는 ‘작품’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인간의 사유를 억압하는 모든 의미화의 고리를 끊어서 사고의 끝없는 자유를 보장하는 환유의 원리 및 그것에 원칙을 두는 ‘텍스트’라는 개념을 미래를 위한 새로운 문학의 토대로 도입한다.
라캉의 욕망하는 인간주체의 이미지는 문학적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로 인해 늘 존재결핍의 불안감에 흔들리며 문학주체의 분열을 경험하는 20세기의 작가상의 변천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의 문학이 작가의 무한한 주관적인 내적 세계를 강조한 모더니즘과 함께 시작된다면, 그 중후반기는 반대로 작가의 죽음을 선포하며 창조적 주체로서의 작가존재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성기와 내리막길을 순차적으로 경험하며 막을 내린다.
전자는 상상계에 속한 소타자로서의 이상적 작가상과 천재로 불리는 실제작가의 동일시를 추구하지만, 오히려 둘 사이의 괴리감을 더욱 각인시키고 마는 현실적 한계성을 드러낸다.
반면에 후자는 상징계의 언어질서 안에서 새로이 재구성되는 주체의 변형과정을 통해서 작가존재의 해체과정을 이론적으로 변론하지만, 작가의 역할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문학실제 Literaturpraxis에서의 뚜렷한 증거들을 마주대하며, 결국에는 다시금 ‘작가의 귀환’을 바랄 수밖에 없는 문학적 주체들의 내적 분열상을 보여준다(Vgl. Anz 2007, 131ff.).
바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완전한 작가의 허상적 이미지를 좇아서 실재하지도 않는 이상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상상계는 신화의 공간이다. 이 세계에서 작가라는 인간주체는 은유의 원리를 사용하여 - 상상속의 욕망의 대상을 뜻하는 - 이상적 작가상(=소타자)과 자신을 동일한 존재로 생각하고, ‘자신’이라는 ‘기표’를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다른 기표’로 치환한다. 따라서 그가 속한 상상계는 은유의 공간이기도 하다(Vgl.Lummerding 2005, 116f.).
바르트는 상상계의 유형에 속하는 의도주의적 관점의 작가에 의해 쓰여진 텍스트의 유형을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 lesbare Texte’(Barthes 1987,8ff.) 또는 ‘작품’으로 명명한다(Barthes 2006, 65f.).
이 상상의 공간에서 작가는 자신만이 ‘작품’을 쓰는 권한을 지닌 유일한 창조자로 여기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자신에 의해 숨겨진 작품의 의미를 해독하는, 피동적 수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강요한다.
작품은 ‘한 개의 일반적인 기호 자체’로 작용하며 ‘한 개의 기의’로 닫히는 것으로서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 일치하는, 단 하나의 기의만을 해석해야 한다(Ebd, 67f.).
이때의 작가는 작품의 유일한 아버지이며 소유자로서 상상계의 독단적이고 자기우월적인 작가주체의 전형적 예를 상징한다(Vgl. Ebd, 68ff.). 그러나 바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작가중심적으로 정의하는 상상계의 작가론은 이미 언어 속으로 소멸되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작가의 거짓 이미지를 좇는 상상적인 것에 불과하며, 타자의 논리를 철저하게 억압하고, 지나칠 정도로 주체의 관점에 절대 권력을 부여한 근대 형이상학의 전통이 날조한 신화일 뿐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유럽인들은 예술가 또는 작가를 ‘창조적 천재’로 떠받들면서, 이런 천재들이란 평범한 이들과는 달리 오로지 아름다움과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더 차원이 높고 숭고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믿곤 하였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로부터 모더니즘 시대에 이르기까지 소위 천재라고 불린 예술가들 또는 작가들은 지나치게 폐쇄적인 내면세계에만 몰두함으로써 병적이고 비현실적인 삶에 빠져들었고, 이로 인해 이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천재로서의 이상적 예술가상 또는 이상적 작가상과는 거리가 먼, 모순투성이의 실제 모습을 자명하게 보여주었다.7)
5) 칸트에 의하면, 사물은 외적인 현상과 그것의 본질을 이루는 물자체의 이중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사물의 물자체를 자신의 지성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의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
라캉의 실재계는 이러한 칸트의 물자체를 정신분석학적 차원에서 재해석한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칸트의 물자체가 현상 너머에 숨어 있으면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본질로 머무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의 근원이 되는 소타자와 그것이 속해 있는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너머에 잠재하고 있으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다다를 수도 없고 인식될 수도 없는, 불가지론의 영역이다.
6) 라캉은 바르트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환유의 현상을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기표들은 기의들과 하나로 연결되지 못하고 미끄러지듯이 그냥 스쳐 지나가며, 이로 인해 계속적으로 언어의 의미생산이 불발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가 말하는 기의들의 미끄러짐 Gleiten der Signifikate은 이렇게 기표들과 기의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저 비껴가는 관계로 진행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경우 기의들은 무한히 지연되어 발생하지 못하고 그냥 기표들만 연속적으로 나열되는 현상이 지속된다.
라캉은 이렇게 의미의 내용물이 빠진 체 끝없이 비슷한 기표들의 연쇄작용을 야기시키는 현상을 환유라고 부른다. 바르트는 한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기호의 의미가 고정적이라고 믿는 소쉬르의 구조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며, 하나의 기표는 단 하나만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상이한 관점에 따라 수많은 기의들과 조합될 수 있는,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긴다.
7) 독일 문학사에서 특별히 질풍노도, 낭만주의 그리고 모더니즘 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천재미학Genieästhetik은 고전주의의 규칙미학 Regelästhetik의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르면, 작가들이란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시대문화적 전통들을 뛰어넘어서 자연의 본성적인 것 das Eigentliche der Natur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넘치는 상상력을 통해서 영원불멸한 신적 세계를 통찰하고, 그것을 인간의 지상적인 표현방법으로 그려내며, 인류를 앞서갈 수 있는 예언자적 능력을 가진 천재 예술가들이다. 문화사적으로 소위 천재 예술가라고 불렸던 사람들 중에는 총으로 삶을 마감한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이 정신 병력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오늘날에는 천재와 정신질환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며 하나의 과학적 가설로 확립시키려는 시도들이 저명한 과학자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여 뛰어난 지능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평범한 지능을 가진 사람들보다 정신병에 걸릴 확률이 더 많으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 일반인들보다 억압되지 않은 순수한 생각들을 활성화하기 때문에 엄청난 창조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기도 하였다.
http://www.sciencetimes.co.kr/?news=%EC%A0%95%EC%8B%A0%EC%A7%88%ED%99%98%EC%9
C%BC%EB%A1%9C-%EA%B3%A0%ED%86%B5-%EB%B0%9B%EC%9D%80-%EC%B2%9C%EC
%9E%AC%EB%93%A4, 2015년 12월 조사.
이렇게 상상계에 속한 소타자로서의 이상적 작가상과 불완전한 실제작가 사이의 단절은, 유럽을 오랫동안 지배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신의 완벽한 파라다이스로부터 분리되면서 발생한, 첫 번째 상실의 사건과도 연관된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첫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신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로서 신에 의해 완전한 인간상의 원형으로 창조되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해 더 이상 인간의 원초적 완벽성을 지키지 못하고 영원히 원죄를 지닌 체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천재 예술가들을 향한 유럽인의 동경은 아담 이후 영원히 잃어버린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이상적 자아상을 이들을 통해서 재발견하고 싶은 그들의 갈망을 투영시킨 것이라고도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꿈꾸던 신적인 예술가, 즉 천재 예술가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거짓 환상에 불과하며, 실제 예술가들이 보여준 자아상은 사실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절망적인 우울과 갈등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병든 천재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끊임없이 이상적 작가상과의 동일시를 꿈꾸지만 실패하고 마는 작가주체의 결핍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낭만주의 및 모더니즘 시대에 그 절정기를 맞이한 상상계의 작가들은 20세기 중후반기를 지나면서 점차 타자의 시선을 통해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주체의 정체감을 찾아가려는 시대적 문화의 요구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상징계의 단계로 진입해가는 발전과정을 보여준다.
20세기 초반 신비평가들에 의해서 작가는 문학작품을 생산하고 그 의미를 결정하는, 실제적인 창작자로서의 권한을 상실당하고, 그가 의도하는 견해들은 철저히 오류로 규정된다(Vgl. Wimsatt/ Beardsley 2000, 84-101). 이제 실제적 인격체로서의 작가는 창조자의 위치에서 쫓겨나서, 자율적, 독립적 존재방식을 획득한 텍스트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된다.
20세기 중반 볼프강 카이저 Wolfgang Kayser같은 작품내재적 이론가들은 작가로부터 그의 실제적 인격성과 전기적 삶의 요소들을 분리하고, 순수하게 작품 내에서만 목소리를 내는 ‘서술자 der Erzähler’의 역할을 통해서 작품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작가상을 발전시킨다(Vgl. Kayser 2000,127-137).
작가는 허구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격적 주체로서의 ‘서술자’가 되어 자신의 견해를 작품내재적으로 들려준다. 웨인 부스 Wayne C. Booth는 작품 안에서 적어도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머물 수 있는, ‘서술자’로서의 작가상으로부터 작가의 인격성을 완전히 폐기시키고, 순수하게 텍스트의 한 단위로만 그려지는, ‘작가의 두 번째 이미지’를 구상한다(Vgl. Booth 2000, 142-152).
그에 의해 정의되는 ‘내포작가 der implizite Autor’는 오로지 텍스트 안에서만 존재하는 작가역할로서 작품 속에서 실제작가의 견해들을 대변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더 이상 인격적 주체로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제 실제적 작가의 모습으로부터 분리되어 텍스트의 한 단위로 변형된 체, 목소리도 없고 실체도 없는 추상적 역할로서만 작품 안에서 활동한다.
위에서 언급된 신비평가들이나 작품내재론자들이 비록 전통적인 작가의 개념을 비판하고 그 권리를 제한할지라도, 실제적 작가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르트는 작가를 텍스트의 창조적 근원으로 이해하는, 기존의 모든 작가중심적 문학해석의 전통을 거부하고, 텍스트밖에 존재하는, 작가의 육체적 정체성 뿐 아니라 텍스트내적으로 존재하는, 작가의 정신적 정체성까지도 텍스트의 언어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 그에게 있어서 텍스트는 작가가 탄생하는 공간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가 된다(Vgl. Barthes, Roland 2000, 188f.). 언어는 작가에 의해 생산되는 창조의 대상이 아니라 텍스트와 작가의 존재방식의 근원을 초래하는 시초가 된다.
상상계에서 찾았던 이상적 자아상이 허상임을 깨닫고 그 곳을 벗어나 상징계로 들어선 작가는 이번에는 상징계에 소속된 작가로서의 새로운 자아상, 즉 언어의 질서에 소속된 구성원으로서의 자아상에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극복하려는 욕망을 가진다.
이때 ‘욕망의 대상’이라는 동일한 ‘기의’를 토대로 하여 ‘상상계의 이상적 작가’라는 ‘기표’가 ‘상징계의 필사자’라는 ‘기표’로 치환되는 작용이 일어난다.
이것은 상징계의 첫 단계가 상상계에서 사용되던 은유의 법칙을 여전히 적용시키는 은유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필사자’로서의 새로운 작가의 역할과 이전 단계의 작가의 역할은 결코 서로 일치할 수 없는 상이한 것들이며, 이들이 속해 있는 문학의 공간도, 이들이 집필하는 문학의 대상도 완전히 서로 이질적인 관계를 이룬다.
‘상상계의 작가’는 인격성을 지닌 창작주체로 정의되지만, ‘상징계의 작가’는 인격적 주체를 죽임당하고 텍스트의 한 종속적 단위로 간주되는 대상이다. 전자가 쓰는 원고는 바르트적 의미에서 ‘작품’이라 불리는 것이지만, 후자가 쓰는 원고는 바르트가 그의 문학이론에서 새로이 도입한 ‘텍스트’라는 새로운 성격의 문학형태이다(Vgl. Barthes 2006, 65f.). ‘작품’은 의미가 확정적인 은유의 공간으로 활용되지만, ‘텍스트’는 의미가 끝없이 지연되는 환유의 공간으로 이해된다.
상징계의 ‘필사자’는 창조하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언어에 의해서 언어로 된 ‘작품’을 쓰도록 이끌림을 당하는 대상이다. 그가 쓰는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의도라는 것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독자들은 마음껏 수많은 의미들을 생산하여 자신만의 ‘작품들’을 완성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르트는 이런 작품의 유형을 - 독자의 입장에서 정의하여 - ‘쓰여질 수 있는 텍스트 schreibbare Texte’로 부른다(Barthes 1987, 9). 기의가 무한히 지연되고 끝없는 기표의 나열들로 연속되는 공간으로서의 ‘텍스트’는 단 하나 또는 몇개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해석의 대상으로서 환유의 방법을 통해서 문맥적으로 상이한 의미들을 무한대로 생산할 수 있다(Vgl. Barthes 2006, 66-72).
바르트의 ‘텍스트’는 상호텍스트성의 원칙에 의해서 정의되는 개념이어서, 자신의 기원도, 자신의 마침도 설명할 수 없는 무한대의 공간이다(Vgl. Ebd., 66-72). ‘텍스트’라는 무궁무진한 영역에 들어서서 새로운 ‘텍스트’가 생겨날 때마다 매번 함께 새로이 탄생하는 ‘필사자’로서의 작가는 그 시작도 알 수 없고, 그 끝도 알 수 없는 환유의 맥락에 놓여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징계는 은유가 끝나고 환유가 시작되는 공간, 즉 은유와 환유가 서로 교차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상징계는 ‘작품’이 끝나고 ‘텍스트’가 시작되는 공간, 즉 ‘작품’과 ‘텍스트’가 교차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이때 은유와 환유의 어긋남 또는 ‘작품’과 ‘텍스트’의 어긋남으로 인해 발생하기 시작하는 틈새의 공간은 결코 메꾸어질 수 없는 미정성의 공간이며, 또한 이것은 작가가 자신의 일관된 정체성을 고정시키는 것이 불가능해져 끝없는 실재계로 떨어지는 시작점이 된다.
상징계는 작가의 이미지가 은유에서 환유로 바뀌는 공간이며, 이로 인해 작가주체의 자아상의 분열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바르트가 구분하는 ‘작품’과 ‘텍스트’는 서로 다른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물질적 재료로서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존재하는 문학대상이지만, 후자는 방법론적인 맥락으로서 언어의 영역에 속하여 오로지 담론의 움직임 안에서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문학적 대상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텍스트’는 한 권의 문학작품에 제한되지 않고, 여러 다른 문학작품들과 상호관련성을 맺으며, 무한히 그 범위가 확장되는 문학의 공간이다. ‘텍스트’의 세계에 들어선 인간은 그 시작의 경계도, 그 끝의 경계도 깨달을 수 없고, 단지 자신의 사유의 한계 너머로 끝없이 확장되는, 수많은 의미들의 진행을 마주 대한다. 바르트가 새로운 문학의 공간으로서의 ‘텍스트’를 통해서 목표하는 바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의미들의 갯수가 무한대로 증가하여 언어적 표현으로의 환원이 불가능해지고, 마침내 언어적 의미들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자신이 정의한 ‘작품’을 인간의 현실세계 die Realitätswelt에 속한 것으로 규정하는 반면에, 자신의 ‘텍스트’를 라캉의 실재계에 비유할 수 있는 영역으로 설명한다(Vgl. Ebd., 66).8)
바르트에게 있어서 ‘텍스트’의 공간으로 전개되는 실재계는 새로운 작품들이 생겨날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필사자’로서의 작가의 이미지들이 끝없이 만들어지는 환유의 공간이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욕망하는 주체이다. 인간이 어떤 욕구를 갈망하게 되는 첫 번째 요인은 그가 어떤 것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여 결핍의 상태에 빠질 때이다.
바르트의 이론에 따라 환유의 공간인 실재계에서 자신의 온전한 자아상의 의미를 영원히 상실한 작가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고자 끝없이 갈망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의미로 완성되지 못한 욕구는 언어적 형태의 옷을 입지 못하고 인간의 무의식 속에 침잠하여, 지속적으로 그의 의식세계를 괴롭히고 부정적인 불만족의 상황으로 이끌고 간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20세기의 문화를 지배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그 종말을 선고받는 일이 잦아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특히 문학 분야에서 감지된 중요한 변화들 중 하나는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거부되었던 작가역할의 복권이 시도되는 일이었다.
작가의 부활은 먼저 미국과 프랑스의 문학권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론적으로 보다 체계화되어 ‘작가의 귀환 die Rückkehr des Autors’이라는 학문적 모토로 통일되어 논의되기 시작한 계기는 여러 독일 학자들이 모여 공동의 연구의 성과물로서 1999년에 Rückkehr des Autors(Vgl. Jannidis 1999)라는 저서를 출간한 일이었다(Vgl. Anz 2007, 132f.). 그 뒤를 이어서 동일한 저자들에 의해서 다음해 출간된 저서 Texte zur Theorie der Autorschaft(Vgl. Jannidis 2000) 그리고 2001년에 하인리히 데터링 Heinrich Detering에 의해서 발행된 데에프게-심포지엄 DFG-Symposion팀의 저서 Autorschaft. Positionen und Revisionen(Vgl. Detering 2002)은 작가에 대한 논쟁을 이론적으로 매우 풍성하고 심도있게 다룸으로써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옹호되었던,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의 테제에 항거하고,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위한 새로운 문학적 논리로서의 한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은 실제적 창작자로서의 작가역할을 포함하여 지나간 역사 속에서 문학적으로 이미 시행된 적이 있는 작가컨셉트들을 재구성하거나, 또는 부스의 ‘내포작가’, 바르트의 ‘필사자’, 푸코 Michel
Foucault의 ‘저자기능 Autorfunktion’과 같이 20세기에 개발된 최근의 작가모델들을 더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론들로 변형시킴으로써 21세기에도 여전히 재적용될 수있고 유효할 수 있는, 대안적인 작가의 역할들을 많이 구상한다(Vgl. Anz 2007, 132f.).
위에서 제시된 다양한 작가의 이미지들은 실재계의 공간에서 작가가 자신의 자아상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으로 비춰질 수 있다. 이때 주목할 만한 사실은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작가의 이미지들이 단순히 언어의 질서에 종속되어 그것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는 후기구조주의적 작가상만을 그리고 있지 않고, 오히려 인격성이 부여된, 실제적 창작주체로서의 작가의 역할을 더욱 더 뚜렷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도주의의 상상계로부터 출발하여 후기구조주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계 및 실재계의 영역을 지나쳐온 20세기의 문학주체는 비록 문학이론적으로는 상징계의 언어의 법칙에 온전히 부합하는 작가상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들은 문학실재에서 결코 부인하지 못하는, 필수불가결한 작가의 역할을 인식하게 되면서 상상계의 이상적 작가상을 다시금 내면적으로 그리워하게 된다.
즉 20세기의 문학인들은 상상계의 작가상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온전히 상징계의 영역에 부합한 작가의 자아상만을 좇으려고 노력하지만, 이들의 내면에는 늘 상상계의 이상적 작가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어서, 어느 한쪽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존재분열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들은 상징계의 자아상에 온전히 만족하지도 못하고 상상계의 꿈을 온전히 이루지도 못한 채, 상징계와 상상계의 사이의 공간, 즉 실재계의 공간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 그들 자신에게 작가로서의 진정한 존재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작가의 이미지를 찾아 헤매는 존재고민의 방랑을 계속한다.
8) 바르트는 그의 논문 「작품에서 텍스트로」에서 작품과 텍스트의 구분을 라캉의 실제적 현실과 실재계의 구분에 연계하여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작품이란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들의 한 공간을 차지하는, 가시적인 현실세계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텍스트라는 것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표상되는 개념으로서, 무한한 언어담론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의 한계를 정할 수 없고, 그것의 궁극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도 없다.
따라서 바르트는 텍스트를 라캉의 실재계와 같이 불가지론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V. 나가는 말:
문학 및 예술의 문화공간에서의 창조주체의 귀환을 꿈꾸며
세계 안에 존재하는 미정성의 현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의 여러 학문분야들에서 다양한 형태의 연구대상으로 존재해왔다. 미정성의 ‘의미론적 이해Semantisches Verstehen’는 미정성을 ‘전망하기 어렵다’, ‘혼란스럽다’, ‘애매모호하다’, ‘분명하지 않다’ 같은 부정적인 의미들을 가진 현상으로 해석하여, 미정성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와는 반대로 미정성의 ‘기능주의적 이해 Funktionalistisches Verstehen’는 미정성의 부정적인 의미가 가지고 있는 기능주의적 측면을 중요시하여, 부정적 의미의 미정성 현상이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들에 연구의 초점을 맞춘다. 현대의 인류학적 연구들은 미정성의 개념을 기능주의적인 측면에서 연구하여, 미정성을 인간의 창조적 행위의 필수조건으로 규정하고, 현대의 학문이 미정성의 작용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라는 테제를 세운다. 따라서 인류학적 관점에서는 미정성의 원리가 현대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로 간주되고 있다(Vgl. Choi 2013, 88f; 최은녕 2014, 229f.).
라캉의 실재계와 바르트의 텍스트 개념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미정성의 원리는 ‘부정적인 미정성 미학’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 원칙이 작용하는 공간은 그 시작도, 그 끝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장소이며, 환유의 법칙으로 인해 인간이 어떤 고정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다.
바르트는 그의 논문 「작품에서 텍스트로」에서 새 시대의 문학은 결정성의 공간인 ‘작품’에서 미정성의 공간인 ‘텍스트’로 이동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새 문학에 어울리는 작가상은, 라캉의 욕망이론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본다면,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의 세 영역 사이를 헤매며, 무의미의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 불안정하고 전망하기 어려운 무질서의 세계를 영구히 벗어나지 못하는, 분열된 주체이다(최은녕 2014, 230).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고능력이 없는, 기계적인 필사자이기 때문에 언어가 터져 나오는 대로 의미없는 기표들을 끊임없이 나열하거나 반복하는 인물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세계는 서로 연관성을 갖지 못하여 단절적이고 혼돈스러우며, 빛보다는 어둠을, 희망보다는 좌절을, 안정보다는 불안을 더 연상시킨다.
인간학적 맥락에서 정의되는 미정성의 원리는 미정성과 결정성의 관계를 ‘긍정적인 미정성 미학’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이때 결정성의 세계는 칸트 철학의 ‘현상’에 대응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 언어의미들을 인간의 현실에서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화하는 공간을 의미하고, 미정성의 세계는 ‘현상’의 배후를 이루는 ‘물자체’의 맥락으로서 ‘현상’의 본질적 측면이자 ‘현상’의 존속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작용하는 곳을 뜻한다.
미정성의 영역은 결정성의 영역과 파괴적인 관계를 이루지 않고, 결정성의 세계가 탄생할 수 있도록 존재적으로 긴밀한 인과관계를 형성해주며, 작가가 새로운 의미들을 무한대로 생산할 수 있는, 창조적 배후를 제공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예술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천재들은 정신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자주 불안정한 상태에 빠져서 광인과 유사한 특성들을 보인다(Vgl. Krieger 2007, 107ff.).
다시 말한다면, 소위 사람들로부터 예술적 영웅으로 칭송받는 천재예술가나 미치광이로 취급받는 광인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극단적인 감수성, 긴장, 열광적인 흥분상태에 빠져, 일반인들이 생각해낼 수 없는 환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양측 사이의 차이점은 천재는 일반인의 논리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환상을 건강하고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로 재배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반면에, 광인은 자기만의 환상을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화법으로 두서없이 중얼거린다는 것이다(Vgl. Ebd.,195ff.).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예술적 창조성은 환상과 이성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며, 이성이 빠진 환상은 광적인 것이 된다.
미정성의 원리는 같은 현상을 놓고서도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상반된 해석이 가능한 추상적 개념이다. 후기구조주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는 타자의 논리가 미정성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라면, 위에서 소개된 인간학의 맥락에서는 자아가 미정성의 공간을 창의적으로 채워가는 주도적 능력을 행사한다. 전자의 경우 독자적인 창조의 능력을 상실당하고 타자인 언어가 이끄는 대로 작품을 만드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맥락의 예술가도 미정성의 공간에서 환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가 만드는 환상들은 의미의 맥락이 빠진 기표의 나열들이므로 이성적이지도 못하고 서로 논리적 관계성도 없는 환상들의 끝없는 이어짐이다. 후자의 경우 예술가는 어지럽고 무질서하고 무의미하고 혼돈스럽던 미정성의 요소들에 의미의 논리성을 부여하여, 창조적 예술작품이라는 결정성의 형식으로 승화시킨다.
20세기 문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모더니즘적 인간형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인간형으로 변모해가는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아상의 순차적인 변천과정을 보여준다.
반면에 21세기의 문화는 문예 장르들이 순수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음악과 미술, 문학텍스트와 영상, 과학기술과 문화가 함께 뒤섞여진 잡종적 경향을 보여주며, 시간공적으로도 뒤섞여져서 과거와 현재가 그리고 현실과 가상이 함께 동일한 문화공간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현상들이 공존하기 때문에 서로 대치되는 인간관을 보여주는 두 문화론의 사이에서 21세기의 예술가들은 여전히 예술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때 이들의 생각이 모더니즘의 경향에 더 기울어지게 되면, 다시금 상상계의 이상적 자아상의 과대망상이 되살아날 수 있다. 반면에 이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에 더 동조하게 되면, 언어의미적으로 혼돈스럽고 무질서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실재계의 광기가 되살아날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엄청난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바둑경기에서 인간 천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Künstliche Ingelligenz 알파고가 벌이는 바둑을 통한 상상력의 싸움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결과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지능이 지금까지는 순수하게 인간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었던 창의력과 상상력의 공간에서 인간을 이기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었다. 또 근래의 한 뉴스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일본의 한 문학상 공모전에서 1차 심사를 통과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을 전함으로써 과학기술의 발전정도에 따라 기계가 인간의 순수한 창작의 영역에까지 침투하여 인간의 예술적 창조력까지도 대신할 수 있다는, 미래시대의 끔찍한 가능성을 알게 해주었다.
그러나 로봇관련 기술 전문가들은 겉으로는 마치 기계지능이 인간보다 더 우월한 것이 입증된것처럼 보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인공지능이 여전히 인간의 지능을 앞서지 못하며, 특히 예술창조의 분야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가장 큰 차이점이 ‘영감’과 ‘모방’에 있다고 말한다.9)
21세기의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문화들 간의 경계를 허물어 이것들의 동시적인 공존을 가능하게 할뿐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경계까지도 허물어 트랜스휴머니즘의 사상을 가능하게 하는 초문화의 단계로 진입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인간이 기계와 동일시되거나 또는 기계적 존재로 정의되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필자는 그 어떤 대상도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창조적 능력이 재조명되고 창조적 문화주체로서의 인간관이 다시금 부활하는,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의 전환의 필요성이 그 어느 문화시대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느껴진다.
9) http://m.media.daum.net/m/media/issue/1480/newsview/20160325172005793, 2016년 3월 조사.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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